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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향 민족주의가 문화예술계 망친다”

이강기 2015. 8. 29. 17:11
“좌편향 민족주의가 문화예술계 망친다”
복거일 문화미래포럼 대표 “北 인권 침묵은 스스로를 억압, 상업 작품만 판쳐”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주간동아 563호, 2006.12.5

 

소설가 복거일(사진) 씨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이다. 스스로 우익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그동안 “이념에서는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중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는 “중도는 ‘middle of the road’다. 말 그대로 길 한복판에 있다는 뜻이다. 차에 치일 수밖에 없다. 보신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좌우 양쪽에서 수정주의자 또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라는 경멸과 공격을 받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최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문화미래포럼’이라는 새로운 문화예술단체를 만들었다. “좌편향된 ‘닫힌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국내 문화예술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각계 인사 70여 명이 모여 11월21일 발족한 이 포럼의 회원 수는 3일 만에 90여 명이 됐다.

복씨를 비롯한 일부 참여인사들의 이념적인 스펙트럼 때문에 이 포럼은, 진보 진영에 대응하기 위한 보수우익 성향의 모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부 언론은 ‘중도보수’를 내세운 단체로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19세기 개항 이후 싹튼 민족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군부독재 시대에 자유민주주의와 결합되면서 혼동을 가져왔는데, 자유민주주의는 민족주의의 한계와 갈등을 용해시키는 한 차원 높은 개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문화미래포럼은 이념을 떠난 새로운 차원의 단체라는 이야기다. 정기모임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들른다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 ‘문학과 지성사’ 사무실에서 11월23일 그를 만났다.

- 포럼을 만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심지어 북한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근간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본 원리이자 보편 가치인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 순간 시민도 그것을 잊었다.

문제는 민족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대신한다는 점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바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다. 민족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최고의 보편 가치로 삼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민족주의는 최고의 보편 가치가 될 수 없다. 더욱이 그 민족주의도 변질됐다. 그동안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해왔다. 침묵과 외면도 선택이다. 북한의 인권침해와 핵실험, 남한에 대한 사상적 위협 등을 용인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런 암묵적 지지를 거부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했다.”

“이념을 떠난 새로운 차원의 단체”

- 민족주의가 어떻게 변질됐다는 것인가.

“남북이 한편으로는 대치하고 한편으로는 협력하는 사이 친북반미가 마치 민족주의의 본질인 것처럼 왜곡됐다. 민족주의가 ‘닫힌 민족주의’로 변질된 것이다. 닫힌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이 아닌 북한 정권을 이해하고 가깝게 지내려고 하면서, 북한 주민의 참상이나 인권문제는 외면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문학작품 중에 북한 인권을 다룬 작품을 한 편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민족주의가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변질된 것이다.”

- 민족주의가 문화예술가들에게 억압적인 기제로 작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전체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다. 본질적으로 예술은 자유주의적이다. 예술은 개인의 이야기를 기초로 한다. 개인의 고민, 욕망, 불행 등 개인적인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부 시책이나 민족을 반영하는 것은 선전선동일 뿐 예술이 아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전체주의적 개념이다. 개인이 민족에 흡수됨으로써 가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 개념인 민족 중심의 사회를 기본으로 한다. 그로 인해 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억압받게 된다. 문학이나 예술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일 자체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예술적 진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면 욕을 먹는 게 우리 문화예술계의 현주소다.”

- 어느 국가에든 민족주의가 존재하는 만큼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민족주의란 자기 이익을 확대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을 단위로 외연을 넓혀서 민족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아의 외연 확대인 만큼, 나름대로 고귀한 일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강렬하다. 심리적 원동력이 되지만 조금만 잘못 다스리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한계도 있다. 다른 수많은 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현 정부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이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다. 자신만 민족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무지에서 나오는 오만이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실종됐다.”

- 이런 현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가.

“문화예술이 크게 위축됐다. 현 체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불온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상업주의 작품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이런 식이라면 장기적으로 독자, 청중, 관객 등 문화 소비자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문화예술가들이 점점 자기검열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처럼 문화예술계에 돈을 많이 쏟아부은 적이 과거엔 없었다. 문화예술가들이 정부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지원을 받으면 그만큼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문화예술가들이 이 돈을 지원받기 위해 평론가의 눈치를 보고, 정부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생각보다 위기가 깊다. 내 글이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주제가 아님에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 하나는 문화예술계의 도덕적 타락이다. 민족을 앞세운 이들이 정부 자금을 배분하는 권한을 장악하고, 그 배분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실정이다.”

- 복 대표나 회원들의 성향을 보면 포럼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곧 보수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자유민주주의는 보수나 진보처럼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힘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인식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늘 존재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다만 애써 부인하고 있을 뿐이다. 민족주의자라고 해서 북한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의 실상을 쓰지 않는 일 자체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다.”

- 앞으로 국내 문화예술계와 정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궁극적으로 문화소비자가 늘어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문화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다. 극단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나는 ‘무(無)정책이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다.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해서 돈을 풀면 예술가는 소비자를 외면하고 지금처럼 정부 입맛에 맞춰서 활동할 것이다. 1~2년씩 걸려 작품을 써내고 소비자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무난한 작품을 써서 정부로부터 창작지원금을 받는 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과도한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 예산을 지원하더라도 문화예술가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늘고 문화소비시장이 넓어질 수 있는 정책에 투자해야 한다. 포럼에서는 앞으로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집중할 계획이다.”   (끝)

(주간동아 563호, 2006.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