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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

이강기 2015. 8. 29. 11:41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    2012/03/02 18:33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
"한국의 경제발전은 총독부 출신 관료들의 功" "총독부의 죽음을 지켜보겠다"
趙甲濟   
 친일파의 사교장?
 
  1977년 5월1일치 「友邦」에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란 기사가 실려 있다. 「소생은 황해도 곡산, 안악 경찰서의 고등과에 근무했던 자입니다…」로 시작되는 이 편지(봉석연이란 사람이 쓴 걸로 돼 있다)는 日帝시대 같이 근무했던 일본 경찰관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82년 10월7일 후쿠오카에서 열린 평안남도 경우회(警友會)에는 옛 警友 유기숙씨 부처가 서울로부터 날아와 참석했다. 1977년 10월에 마츠시마에서 열린 평안북도 경우회에는 이하영(평북지사·전 위원 경찰서장), 변호사 황동준(전 강계 경찰서 사법주임), 이익흥(전 박천 경찰서장), 김원일씨(전 북진 경찰서 사법주임)가 祝電을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80년 5월 나가노 현 국제친선 구락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땐 쿠라지마(倉鳥) 단장(전 하북 경찰부장)을 위해 총독부 시절의 고문조(高文組) - 전례용·김성환·부완혁·한종건·손석도·김태동·노영빈-가 자리를 같이했다고 「友邦」은 보도하고 있다. 쿠라지마란 사람은 총독부 관리 출신들에 대한 애정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의 한 가지 원동력은 조선 총독부 관료群이었다. 당시의 총독부 관리들은 內地에서와 같은 파벌의식은 일체 없었고 총독 밑에서 一絲不亂하게 단결했었다. 또 청렴결백했다. 이런 좋은 점을 이어받은 총독부 출신 한국 관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들도 이제는 나이 50세를 넘었다. 이들은 일본어를 말할 수 있고 일본식 가치 기준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친구처럼 대화가 통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李承晩 시대의 맹렬한 排日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엘리트들은 미국 유학생들로서 일본어는 전혀 통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한국을 지도할 때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나라이지만 완전한 외국이 돼버릴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야겠다>
 
  나는 총독부 관리 출신 일본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참뜻을 살리기 위해 한국인을 위해 일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친일파가 생겼다. 당신들이 키웠다는 우수한 한국인 관료들이나 당신들의 시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해방 뒤에는 친일 부역자로 몰려 더러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 물음에의 대답은 간단했다.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高文派는 敗戰 뒤에도 出世
 
  총독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日韓협회 안에는 고등 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모임인「십일회」(十日會)가 따로 조직되어 있다. 매달 10일에 만나 점심을 같이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39명. 패전 때는 대부분 총독부 과장이나 도청 부장이었던 70대, 80대 노인들이다. 39명 가운데 약 60%인 24명은 도쿄제국대학 출신, 약 20%인 8명은 경성제대 출신이다. 이 비율은 당시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학맥 분포와 비슷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일본의 上流사회가 도쿄대학 출신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역대 수상은 거의가 도쿄帝大 출신이었고 大藏省(대장성)의 과장급 이상 간부 중 도쿄 대학 출신이 62%. 통산성에선 63%, 운수성에선 53%, 건설성에선 58%, 문부성에선 66%나 됐다. 대기업체 사장의 약 26%가 도쿄 대학 출신이란 통계도 있었다.
 
  조선 총독부도 총독(전부 군인출신)밑에서 실무를 장악했던 고급 관료들은 거의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십일회」의 한 사람인 요코야마 고세이(橫山莘生)씨는 경북 경찰부장 출신인데 귀환 후 동북관구 행정감찰국장(한국의 감사원에 해당)을 지냈고 당시는 회사 사장이었다. 이 사람의 세 딸은 모두 도쿄대학 출신에게 시집갔다. 도쿄대학 출신이 같은 대학출신을 사위로 맞는 풍습은 일반화되어 새로운 귀족 사회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十日會」의 주요 회원들을 보면 야스다 무네쓰구(총독부 철강과장·前 대장성 동경 재무국 차장·변호사), 야마모토 야노스케(황해도 경찰부장·모리오카 시장·변호사), 미야사카 간코(총독부 사무관·전 참의원 사무총장), 아마기 이사오(전북 경무과장·전문부성 사무차관·방송 교육개발센터 소장), 와카바야시 마사다케(감포항 경비대장·전 임야청 장관), 무라카미 마사니(총독부 지방과 사무관·전 시즈오카縣 경찰본부장·회사 사장) 등등. 이들 十日會 회원의 경력을 살펴 보면 공통점이 있다. 패전 때 총독부 중간 간부, 귀환 후 복직, 관료사회의 頂上部까지 승진, 퇴임 후 유관단체나 기업체로의 轉職이란 공식적인 코스를 밟았던 것이다. 고급 관리들이 퇴임 후 관련기업체나 협회 임원으로 나가는 것은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 東大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
 
  「十日會」회원들의 순탄한 人生 역정과 퍽 대조적인 그룹이 있다. 任文桓씨가 쓴「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졸업자 10명의 운명」(80년 9월1일치 「友邦」)에 따르면 1932~1935년 사이 任씨와 함께 법학부에서 공부했던 한국인은 모두 10명이었고 전부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관리가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진염종씨. 신익희는 상해에서 귀국 직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들을 끌어모아 신생 국가의 기본 정책을 입안토록 했다. 진씨는 추운 사무실에서 과로하다가 40세에 병들어 죽었다.
 
  任文桓씨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보사부 차관으로 있을 때 동창생 김희덕의 부인(총독부 학무국장의 딸)을 만났다. 남편이 신장병으로 死境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찾아가 보니 낡은 상점 건물 2층에 20명의 환자들이 의사도 없이 눕혀져 있었고 그 가운데 과거의 도쿄제국대학 엘리트가 누워 있었다. 『일본에 가서 좋은 약을 써 봤으면…』하고 김희덕은 말했다. 이틀 뒤 그는 숨졌다. 장수철은 고문(高文)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뒤 일본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를 했다. 거기서 망명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협박을 많이 당했다. 성격이 비뚤어져 친구도 의심하게 되더니 대구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병을 얻었다. 입원중 세례를 받았다. 간호원만 혼자서 臨終하는 가운데 죽었다. 未婚이었다.
 
  박성대는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검사장을 지낸 뒤 변호사를 개업, 활동하다가 곧 숨졌다. 강명옥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장, 박, 강씨는 모두 전쟁 중에 얻은 병으로 不惑의 나이를 넘기지도 못했다. 이충영은 정치가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 촉망받던 터였다. 해방 전에 이미 사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다. 한국 전쟁때 서울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生死를 모른다. 장수길은 한국 전쟁 중 식산은행장이 되었다가 자진 越北했다.
 
  그는 총독부 재무국의 사무관이었는데 총독부 고등경찰도 그의 사상을 알지 못했다. 60세를 넘어 他界한 사람은 장경근과 고병국 둘 뿐이다. 장경근은 일본 망명 생활에서 돌아와 곧 죽었다. 지금 살아 남아 있는 것은 任文桓씨 뿐이다. 任씨는 『나의 중·고·대학 동창생은 전부 일본인이지만 8할 이상이 지금도 원기왕성하게 유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十日會」와 도쿄대학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총독부 출신들이 패전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하지만 同시대의 한국인이 겪은 고난에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인 10명, 그것도 가장 우수한 知能을 가진 엘리트들이 겪은 질병, 갈등, 전쟁, 망명은 日帝 식민통치가 남긴 분단과 분열의 유산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십일회」회원들은 가해자이고 한국인 10명은 피해자이다. 문제는 일본에서 내가 만난 총독부 후예들 중 어느 누구도 총독부의 이 제도적, 역사적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 책임만 있을 뿐, 총독부의 책임이나 국가의 책임 같은 건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였다.
 
 * 한국에의 향수를 못 잊어해
 
  <京城을 서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욕을 먹는 모양이지만 나의 기억에는 항상 不滅의 京城, 오오 京城, 그리운 山河 京城이다. 늘 몸 가까이에 있는 북한산, 유유히 흐르는 한강, 벽람(碧藍)색의 그 하늘…. 경성처럼 하루하루의 삶을 즐길 만한 도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눈을 감으면 궁궐 정원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원림(園林)속에 흩어져 있는 학교 건물들, 눈부신 색채의 조선옷을 입은 처녀들이 희희낙락하던 梨花여학원 등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지상낙원의 풍경이었다>
 
 이 글은 경성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사람이「友邦」에 쓴「不滅의 경성」이란 제목의 수필이다.
 
  한국에서 쫓겨났던 일본인들은 이런 향수를 거의가 갖고 있다. 수모를 당하고 몰려났던 일본인들도 미움의 情과 함께 이런 그리움의 情을 못이겨 한다. 2대에 걸쳐, 또는 30∼40년씩이나 한국에서 살았던 그들은 半 일본인이며, 정서의 뿌리는 아직도 한국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철수 일본인들은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다. 여유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의 향수를 즐기기 위한 갖가지 모임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고 있다.
 
  강경 남정소학교(江景南町小學校) 1회 동창회, 용중(龍中)구락부(용산 공립중학교 동창회), 숭릉회(崇陵會·경성고등상업학교 동창회), 청파 구락부(선린상고 동창회) 등 각급 학교 동창회만 200개가 넘는다. 경성帝大 동창회는 2000명의 회원을 자랑한다. 경성여자 기예(技藝)학교 동창회(芳蘭會)도 있다. 비전 구락부(비전은 담배 이름·전매청 관리 모임), 경우회, 선교회(鮮交會·철도청 근무자 모임) 등 직장별 모임도 수십 개다. 구우회(邱友會·대구 거주민 모임), 대전회 등 거주지별 모임은 이루 다 헬 수도 없을 지경이다. 대구, 진남포 등 큰 도시 거주민들은 동(町)별로 다시 쪼개어 모임을 만들 정도다.
 
  한국 철수민들이 만든 이런 모임의 수는 거의 1000개에 육박할 것 같다. 이들은 꼭 회보를 내고 향토지를 만든다. 평양 등 대도시 향우회에서는 사전처럼 두꺼운 향토지까지 내기도 했다. 진남포 향우회에서 가을에 출판할「되살아나는 진남포」란 향토지는 3부로 구성된 350쪽의 큰 책이다. 1부는 패전에서 탈출(북한 거주민이 38선을 넘어 남한에서 철수한 것을 꼭 탈출이라고 표현)까지, 2부는 진남포의 역사, 3부는 回想 手記集이다.
 
  동창회나 직장별 모임엔 한국인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서울 동창회의 일본지부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한 해 한 번씩은 꼭 대회를 갖는다. 전국에서 수백명이 몰려오는 게 보통이다. 관광단을 조직, 한국에 있는 母校나 고향(?), 친구들을 방문하고 오기도 한다.
 
 * 한국인의 민족성을 面從腹背라고 비난
 
  이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자기가 살았던 곳이 놀랍게 발전한 것을 자기 일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간혹 북한에 갔다오는 일본인들도 있다. 한국 철수민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한국에서 태어난 식민지 세대. 이들은 合倂을 전후하여 조선에 건너간 선발대의 後孫이다. 귀환하여 일본에서 적응하기가 가장 어려웠던「뿌리뽑힌 세대」다.
 
  둘째는 本土 출신의 관료나 회사원들로서 한국이 부임지였던 사람들이다. 귀환 후 적응이 쉬웠던 그룹이다.
 
  셋째는 京城제대를 나온 식민지 출신의 관리들.
 
  한국에 대한 향수나 관심, 그리고 애정이 가장 강한 것은 첫째 그룹이다. 둘째 그룹엔 우월 의식이 강하고 토착 심리가 없으므로 한국인을 경멸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다카미야 다헤이(高官太平)가 그런 사람이다. 요미우리, 아사히 신문의 軍 출입기자로 군부 지도층과 가까웠던 그는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 시절에 경성일보 사장이 되었다.
 
  패전 후 그가 쓴「昭和시대의 장수」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어느날 조선인 기자가 오더니 시중에서 연미복, 플로크, 모닝, 실크 해트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망하고 미군이 진주할 때에 대비하여 그들을 환영할 채비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조선인만큼 면종복배(面從腹背)에 능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늘 他民族에게, 그리고 지배층에 압박당해 인간성이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두 명 모이면 사이가 좋고 세 명 모이면 곧 싸움질이다. 남을 속이되 나는 속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철저하다.
 
  間島에는 백만의 한국인이 있다. 겉으로는 농민이지만 밤만 되면 匪賊이 된다. 중국인보다도 더 잔인하게 약탈한다. 중국인에겐 일본인이라고 사칭하여 위세를 부린다. 사태가 불리하면 조선인이라고 한다>.
 
 패전 때 경성일보 부사장이었던 나카야스 요사쿠(中保興作)는 해방이 되자 과거의 친일파가 표변하여 일본인들에게 달려 드는 것을 보고는『저들은 살기 위해 저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도 고리대금하는 東拓 출신
 
  한국 철수 일본인들은 귀환 뒤 같은 일본인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식민지에서 온갖 못된 일을 하다가 쫓겨나왔다』는 손가락질을 면하려고 한국 거주 사실을 숨기는 사람도 많았다. 도쿄帝大 출신의 고급 관료들도 인사록 등 공개되는 자료에는 조선 총독부 근무 사실을 생략하기도 한다. 심지어 日韓협회의 이사가 된 모씨가 협회에 제출한 이력서에 조선 총독부 경력을 써넣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단다.
 
  경성제대를 나와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마에다 駐韓대사도, 한국인의 감정을 의식해서인지, 총독부 경력을 공식적으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신분 노출을 가장 꺼리는 사람들은 조선 수탈에 있어서 日帝의 도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출신들일 것이다. 日韓협회에 아직도 가입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모임은 있으되 비밀로 회동한다고 한다. 日韓협회의 한국어·한국사 강좌에서 강사역을 맡고 있는 재일동포 차병돈씨(75)의 말―.
 
  『동척(東拓) 출신들의 모임이 있다기에 총독부 高官 출신의 소개장을 갖고 찾아갔지요. 긴자의 어느 빌딩이었는데 사람을 굉장히 꺼리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한국行 관광단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하러 갔는데 안 가겠다더군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東拓 출신들이 모여서 고리대금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내가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사무실이라고 그래요』
 패전 때 東拓 경성지점장(당시 본사는 도쿄)으로 있었던 이노마다 마사이치(猪又正一)는 友邦협회를 통해「나의 東拓 회고록」이란 책을 8년 전에 냈는데 지금은 통 소식이 없다고 한다.
 
 * 『조선에서의 수난 잊지 말자』
 
  일본인들의 기록정신은 많이 알려진 그대로다.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KAL기가 피격 당했을 때도 메모하고 사진 찍고 한 것은 일본 승객 뿐이었다. 기록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事物을 장기적으로 보느냐, 단기적으로 보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이 당장 돈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재앙이 될 때도 있는데 그래도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미래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후예들이 友邦협회란 조선통치사 연구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발자취를 출판하고 있는 것도 과거에 대한 책임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집념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기록이란 건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질 物證이다. 우리 민족이 말로만, 감정으로만 日帝의 착취에 열을 내고 있는 동안 총독부 후예들은 착실하게, 우리의 주장을 뒤엎을 物證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타일 위에 사인펜으로 쓴 것 같은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씻어버리고 지나간 뒤 남는 것은 타일을 파고 새긴 저들의 기록일 것이며 역사는 이 기록만으로 日帝 36년을 심판할지 누가 아는가. 우리는『日帝 36년을 잊지 말자』고 하지만『패전 뒤의 고난을 잊지 말자』면서 한국 철수의 기록을 방대한 저작으로 남긴 것은 일본인이었다.
 
  내가 가와사키역 근방에서 만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패전 뒤 철수까지의 한국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이미 古典이 돼 있다.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타씨는 京城世話會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受刑者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알리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日帝의 한국인 착취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한국인·미국인·소련인·공산주의자들로부터 당한 일들과 일본인들의 의연한 대응과 깨끗하고 질서 있었던 철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 왜 한국엔 귀환의 기록이 없나?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合倂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京城帝大를 나왔으며 그의 아내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日韓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극동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韓日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駐韓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抗戰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赤化되었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타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전후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타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쿄 근방 사이마다현에서 19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패전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승전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 安在鴻의 도량 못 잊어하는 이들
 
  모리타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 互讓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총독부 인맥의 뿌리는 조슈 군벌
 
  초창기에 한국을 말아먹은 일본인 가운데는 야마구치(山口) 현 사람들이 많다. 시모노세키 항구 주변의 이 작은 서해안 지방은 당시까지 일곱명의 역대 수상을 배출했다. 이토(伊藤博文), 데라우치(寺內正), 가츠라(桂太郞), 야마모토(山本有朋), 다나카(田中義一), 그리고 戰後의 기시 및 사토 형제 수상이 그들이다(여기에 아베 신조 수상이 추가된다). 이들 수상 가운데 이토와 데라우치는 통감과 총독으로 한일合倂의 주모자였다. 기시와 사토는 韓日 국교 정상화의 主役이었다.
 
  이 밖에도 이노우에 공사, 하세가와(長谷川好道) 2대 총독, 아카시(明石元二郞) 초대 헌병 사령관등이 야마구치 현 사람이다. 야마구치 현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조슈번(長州藩)으로 불리었다. 도쿠가와 막부에는 반항적인 지방이었다. 이 조슈의 무사들이 지금 가고시마(규슈 남쪽)에 있던 사쓰마번의 무사들과 손잡고 일으킨 親天皇 근대화 혁명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 뒤 수십년 동안 야마구치와 가고시마 출신들은 일본의 政界와 軍을 지배했다. 수상은 두 지방 출신이 교대로 했고, 육군은 야마구치파가, 해군은 가고시마 인맥이 장악했다. 露日전쟁 때 발틱 함대를 격파한 도고 원수도 가고시마 사람이었고 당시의 육군대신은 데라우치였다.
 
  데라우치는 9년 동안 육군대신을 지내며 육군을 철저하게 지배, 한일合倂 직전엔 이토를 능가하는 政界 실력자였다. 과격한 성격의 데라우치는 심복인 동향 사람 아카시 소장을 헌병사령관겸 총독부 경무총감으로 임명, 이른바 헌병 통치, 武斷 통치를 실시했다. 데라우치는 1916년 봄 조선 총독부 청사 건축 기공식을 올렸고 그해 6월 일본총리로 임명돼 한국을 떠났다가 그 3년 뒤 죽었다.
 
  데라우치의 아들인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대장도 아버지를 닮아 과묵, 과단성 있는 사람이었다. 1936년 2월26일 皇道派 청년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직후 성립된 히로다 내각에서 육상(陸相)이 된 그는 군부내의 皇道派를 일소하는 肅軍작업을 지휘했다. 이 황도파는 그의 아버지가 이끌었던 조슈군벌에 대항하여 생긴 것이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남방군 총사령관이었다. 임파르 전쟁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이 전쟁을 위해 「콰이강의 다리」란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의 태면(泰緬) 철도 부설공사에 연합군 포로들을 마구 동원, 수많은 사망자를 내게 했다. 전인미답의 밀림을 하루 1㎞씩 뚫고 나간 「철도사상 유례가 없는 세기적 기록의 돌관공사」에서 일본군은 1000명, 포로 1만3000명, 노무자 3만3000명 등 모두 4만7000명이 죽었다. 포로는 네명에 한 명, 노무자는 두 명에 한 명 꼴로 죽었다.
 
  여기에 배속되었던 한국인 군속들은 연합군 포로들의 감독을 맡았다. 戰後 많은 한국 군속들이 「포로 학대」란 죄명으로 戰犯 재판에 걸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데라우치 父子와 한국과는 무슨 원수가 졌는지 모르겠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1946년 싱가포르 감옥에서 病死했다. 3·1운동 뒤 한국에 부임, 「문화 정치」란 유화 정책을 추진했던 해군 출신의 사이토(齊藤實)총독은 그 뒤 총리대신까지 지냈다가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2·26사건 때 반란군들은 그때 내(內)대신이던 사이토의 집을 덮쳤다. 사이토는 침실에서 총을 맞았다. 아내가 빈사상태의 사이토를 감쌌다. 반란군들은 아내의 몸 밑으로 총을 들이밀어 난사했다. 뒤늦게 뛰어든 한 사병이 「나도 쏘게 해달라」고 했다. 이 사병이 장교의 허락을 받고 또 몇 발을 더 퍼부었다.
 
 * 戰後에도 건재했던 우가키와 아들
 
  6대 총독 우가키는 5년 동안 한국을 통치, 대륙경영의 병참기지로 만들어놓고 퇴임, 곧 차기 총리지명을 받았다. 우가키는 軍 안에서는 화평파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중국침략을 추진하던 軍部는 우가키의 組閣에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으로 거부권을 행사, 결국 우가키는 총리가 되지 못했다.
 
  우가키는 戰後 미군 점령당국과 협조, 公職 추방이 해제된 뒤에는 85세에 참의원에 출마, 전국구 最多득표로 당선되어 가장 나이 많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무렵 日韓협회의 고문으로 이름을 빌어 주기도 했다. 1956년에 88세로 죽었는데 40세나 젊은 세 번째 아내가 임종했다. 그의 장남 우가키 가즈오는 평범한 생애를 택했다. 와세다대학을 나와 미쓰이 물산, 도요 레이욘의 간부로 있다가 1984년엔 유통문제 컨설턴트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創氏改名 등 민족 말살정책의 추진자였던 미나미(南次郞) 7대 총독은 총독 부임 전엔 조선군 사령관, 육군 대신,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강경파 참모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만주사변을 확대시킨 책임이 크다. 戰後 도쿄 재판에서는 A급 戰犯으로 단죄되었다. 법정신문에선 검사를 무시하는 듯 『모른다』『기억이 안난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종신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병으로 가출옥, 1955년 12월에 죽었다. 81세.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총리 대신으로 영전했다. 도오조 히데키의 뒤를 이은 그는 군부를 누르고 전쟁 수행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장개석 정부와의 휴전 협상을 추진했으나 역시 실패, 총사직. 戰後에는 A급 戰犯으로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1955년 11월에 죽었다. 당시 75세.
 
  9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인 대학살이 있었던 관동 대지진 때의 계엄사령부 참모장이었다. 1939년엔 잠시 총리대신도 지냈으며 도오조 히데키를 총리로 추천한 원로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패전 뒤엔 戰犯재판에도 안 걸리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1953년 9월에 죽었다. 당시 78세.
 
 * 조선군 사령관의 두 아들
 
  1984년 당시 일본 국회에는 조선군 사령관의 아들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자민당 스즈키파의 참의원 이다가키 타다시(61).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강경파였다. 이다가키 대장은 1941년에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이때는 전성기를 지났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 장본인이다. 술 잘하고 호탕하며 포용력이 큰 이다가키는 1929년 관동군 고급참모(대좌)로 임명되자 작전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와 단짝이 되었다.
 
  머리좋은 이시하라가 기획, 추진력 좋은 이다가키가 실천하는 식으로, 두 사람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주모자가 되었다. 이 名聲으로 1938년엔 陸相, 1941년엔 대장이 되었다. 도오조는 총리가 되자 이시하라와 이다가키가 붙어 있으면 골치거리가 된다고 판단, 이시하라는 퇴역시키고 이다가키는 조선군 사령관으로 멀리 보내버렸던 것이다.
 
  이다가키는 A급 전범으로서 도쿄재판에서 다른 6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주사변 주모가 가장 큰 범죄 사실이었다. 1948년 12월23일에 사형 집행. 63세였다. 일본인들은 7명의 무덤 앞에다가 「순국7사지묘」(殉國七士之墓)란 비석을 세웠다. 이다가키의 2남인 타다시는 陸士출신으로서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을 보냈다. 시베리아에서 5년간 억류돼 있다가 돌아왔다. 일본 유족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살아남은 직업군인으로서 영령들에 보답하기 위해 정치를 택했다』는 그의 주된 활동은 격전지의 유골 수습과 전몰자 진혼이라고 한다.
 
  3·1운동 때 7000명이 넘는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당시의 조선군 사령관 우스노미야(宇都宮太郞)의 장남이 유명한 親북한 중의원 의원 우스노미야 도쿠마. 교토제국대학 경제과를 다닐 때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그는 감옥생활 1년만에 전향,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패전 뒤에는 요미우리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경제관계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국회에 진출한 이후엔 중공과 북한통으로 자처하며 이단적인 노선을 걸었다. 김대중씨와 가까웠고, 1975년엔 미키 수상의 親書를 갖고 김일성을 비밀 방문한 적도 있다. 자민당을 탈당한 80세의 이 노인은 한때 아버지를 변명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한 적도 있다. 이 또한 父子 2대에 걸쳐 한국과 이상한 인연을 맺은 집안이라 하겠다.
 
 * 『총독부의 죽음을 지켜보겠다』
 
  日韓협회 사무실에는 돈도 안 받고 일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타카자키 대학 강사 미야츠카 도시오(宮塚利雄)씨다. 당시 36세. 그는 10여년 전 한국을 여행, 처음으로 식민 통치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배웠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데서 쇼크를 받았다. 전공을 조선근대 경제사로 정했다. 1973년 경희대학 대학원에 유학, 日帝시대 경제사를 공부했다. 그 뒤 단국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와 母校에서 日帝시대를 가르치고 있다. 부인도 한국여자다.
 
  그는 日韓협회, 友邦협회 일을 하는 게 바로 살아 있는 공부라고 말한다. 노인들은 미야츠카씨를 아주 대견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70∼90대 노인들속에서 그는 아주 싱싱하게 보였다. 노인들은 미야츠카씨 같은 젊은이들이 이 협회를 이어받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만 2세들은 협회를 외면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을 제가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츠카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요즘 여기서 조선 근대사 스터디 그룹을 조직했는데 학생들이 10여명 온다』고 했다. 미야츠카씨 같은, 日帝 시대를 경험못한 젊은 세대가 오히려 편견없이 한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여러 번 받았다. 조선 총독부의 후예들은 그들의 생애와 보람을 걸었던 식민통치에 대해 차마 솔직한 심경을 털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식민 통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자기들의 지나간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할 수 없었다』『방법이 나빴다』는 식으로 항상 변명의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이들이 사라지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미야츠카씨 같은 세대가 일본을 이끌고, 한국에서도 「日帝 세대」가 물러날 때 비로소 대등한 관계의 교류가 이뤄질 터이다. 대등한 교류는 힘과 줏대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법이다. 弱者에 대한 사죄란 연극이며, 弱者에 대한 이해란 곧 동정이며 弱者와 强者의 친선관계는 어차피 종속관계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사망자)
 
  이름 조선총독부 경력 귀환후 경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고이소 총독때) 日韓협회 초대회장. 중의원 출마 낙선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 식산국장. 경성전기사장 참의원 의원. 우방협회회장
  시오다 마사히로(鹽田正洪) 광공국장 종전잔무처리본부장. 관동축로회사사장
  하라다 다이로쿠(原田大六) 총독부 감찰과장. 日韓협회 전무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 아베총독 비서설장. 회계 검사원 사무국 차장
  오쿠무라 시게마사(奧村重正) 사계(司計). 행정관리청 사무차관. 日韓 협회 회장
  시라이시 무네기(白石宗城) 흥남 조선질소비료 공장장, 전무 , 일본질소 사장. 日韓협회 회장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경학원 대제학. 경성대 교수. 천리대 교수
  후루이치 스스무(古市進) 경성 부윤. 무역업
  나카야스 요사쿠(中保與作) 경성일보 부사장. 저술업
  호시노 기요지(星野喜代治) 조선은행부총재. 일본부동산은행회장
  가마다 사와이치로(釜田澤一郞) 총독고문. 전후 철수민단체 합회 회장. 민족학회장
  다카미야 다헤이(高宮太平) 경성일보 사장. 저술업
  이시다 센타로(石田千太郞) 평안남도 지사. 이누야마 정장(町長)
  오오다케 주우로(大竹十郞) 내무국장. 시즈오카 현 지사
  신카이 하지메(新具계) 사정국장 현(현) 지사
  하시모토 마사유키(橋本正之) 황해도 경찰부장. 야마구치 지사. 중의원 의원
  무라야마 미치오 재무과장. 야마가다 현 지사
  이토 다이키치(伊藤泰吉) 체신국장. 가와고에 시장
  아베 센이치(阿部千一) 경남지사. 중의원 의원, 이와데 현 지사
  요코미조 미쓰데루(橫溝光暉) 경성일보사장. 법무성 사법법제 조사부 고문
  유노무라 다쓰지로(湯村辰二郞) 농림국장, 조선섬유산업회장. 미야기현 지사
 
  <고등 문관 시험 출신 高官의 현주소(생존자)>
  이름/조선총독부 경력/ 귀환후 경력/ 현재 활동
 
  오오노료쿠 이치로(大野綠一郞) 미나미 총독때 정무 총감. 변호사 은퇴
  마에다 리이치(前田利一) 수습 사무관. 외무성 동북아시아 과장, 총영사. 駐韓대사
  구라지마 이타루(倉島至) 평양체신국장, 함북 경찰부장. 日韓협회 나가노 지부장
  미즈다 나오마사(水田直昌) 재무국장. 학습원 감사. 우방협회이사
  와카바야시 마사다케(若林正武) 감포항 경비대장. 임야청 장관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전남지사, 총독부 보안과장, 사우회(師友會) 사무국장. 日韓문화교류협회 회장
  아마기 이사오(天城勳) 전북 경무과장. 문부성사무관. 방송교육개발센터 소장
  시라기 야스노부(白木康進) 사무관. 회계검사원장. 은퇴
  아다치 아타루(安達遂) 전기과장. 호세이 대학 공학부 교수. 교수 계속
  요코야마 고오세이(橫山幸生) 경북경찰부장. 동북관구 행정감찰국장. 무역진흥서비스회사 사장
  야스다 무네츠구(安田宗次) 광공국 철강과장. 대장성 동경 재무국 차장. 변호사
  야마모토 야노스케(山本之助) 총독부 경제경찰 과장, 황해도 경찰부장. 모리오카 시장 3회 당선. 변호사
  야마지 야스유키(山地靖之) 평북 지사. 지사. 닛세이(日精) 사장
  무라카미 마사니(村上正二) 총독부지방과 사무관. 시즈오카현 경찰본부장. 하나에 모리후사 사장
  미야사카 간코(宮坂完孝) 총독부 사무관. 참의원 사무총장. 국회도서관장 은퇴
  마츠기 다카미지(松木孝道) 함남경제 경찰과장. 북해도 재무국장. 사립학교 진흥회 감사. 우방협회 상무
  마츠모토 소오이치(松本操一) 咸南 농상부장. 중부행정 감찰국장, 도이(土井)임학진흥회이사
  마사이 야스유키(正井保之) 총독부지방과 사무관. 경제기획청 감사관. 농림수산항공협회장
  리우가사 하쿠오(立笠博雄) 총독부 노무과장. 변호사. 대학강사, 호세이 대학 강사
  하시다 간이치(橋田貫一) 총독부 사무관. 외무성 자카르타 영사. 일본기계 디자인 센터 전무
  니시다 도요히코(西田豊彦) 교통국 지방해원심판소장. 해상보안청 차장. 수난구제회 이사
  다하라 미노루(田原實) 총독부 사무관. 고치현 노동기준국장. 노동복지공제회 상무
  다카하시 요오지로(高橋洋次郞) 총독부 전기과 기사. 주우고쿠(中國)지방 전기보안협회 이사장. 日韓협회 부회장
  다카하시 히데오(高橋英夫) 평북 내무부장. 고베 세관장. 은퇴
  소오다 마코토(曾田忠) 총독부 경비과 사무관. 국토청 토지 감정 위원회위원
  스즈키 하루히사(鈴木治久) 총독부 상공과 사무관. 회계검사원 총무국장. 미츠비시중공업 항공기 사업본부장
  구라다 하루미(倉田春水) 총독부 사무관. 북해도 노동기준 국장. 건설업 노동재해방지협회 전무
  에가사키 타로(江ケ崎太郞) 평북경제경찰과장. 건설성 과장. 수도권 건물관리(주) 이사
  이시지마 야스오(石島康男) 함남 근로동원과 사무관. 아이치현 노동기준국장. 일본노동복지협회 이사
  이케오 가쓰미(池尾勝己) 총독부 사무관. 도쿄 통산국 총무부장. 산요(山陽) 모노마 사장. 스미토모화학(주) 이사
  이시즈카 규우지(石塚久司) 부산지방 철도국 부두국장. 오사카 陸運국장. 긴센(주) 부사장
  아키야마 쇼헤이(秋山昌平) 강원도 학무과장. 회계검사원 제1국장. 변호사
  아베 이즈미(阿部 泉) 총독부 위생과장. 아키타현 부지사, 오사카府 경찰본부장. 도쿄 지도연구소 감사역
  아사무라 렌(淺村 廉) 총독부 도쿄 주재관. 경제기획청 종합개발국장. 일본도로 공단이사. 주택융자보증협회 이사장
  아베 다츠이치(阿部達一) 총독부 정보과장. 병원 경영
  모리 히로시(森 浩) 총독부 경비과장. 변호사
  하야시 가츠도시(林 勝壽) 총독부 농무과장. 후생성 국장. 간사이 텔레비전 회장. 日韓 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