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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위기와 그 역사적 배경 - 反지성 反엘리트주의 심각하다

이강기 2015. 8. 29. 11:48
지성의 위기와 그 역사적 배경 - 反지성 反엘리트주의 심각하다    2012/03/04 17:20
 
[지상중계] 지성의 위기와 그 역사적 배경
反지성 反엘리트주의 심각하다
이인호 _ 서울대 명예교수/명지대 석좌교수  

지성, 왜 위기인가?


우리가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해 내며 ‘대한민국’을 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외쳐대던 것이 불과 2년 전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사면초가이다. 국제적 환경은 악화되는 가운데 경제의 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정치에 대한 기대가 냉소와 실망으로 바뀌면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개인도 기업도,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세계경제포럼은 최근 조사에서 우리의 국가경쟁력이 작년의 18위에서 올해 29위로 하락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우리의 불안이 사실무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불과 2년 사이에 전쟁이나 그 밖의 어떤 외적 충격을 받은 바도 없이 나라 사정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수십 년 간의 피땀 나는 노력을 통해 길러온 우리 사회 전체의 역량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도 문제이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과거에도 지금도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의 낙관적 평가나 우리의 자만심이 과장된 것이었듯이 오늘의 비관론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아직은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오늘의 현실이 가장 우려되고 개탄스러운 것은 국민 전체가 힘을 합쳐 노력해도 극복하기 쉽지 않은 대내외적 난제들 앞에서 그것들을 타개해 나가는 데 절대 필요한 이성적 대화의 장이 없다는 점이다. 국회도 언론도 정치적 편가르기에 말려들어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나오도록 공론을 수렴해 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불신의 골이 깊어져 가는 가운데 대법원·헌법재판소 등의 헌법기관도, 종교계나 지성계의 지도자들도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사회의 분열과 가치관의 혼란은 이미 이 나라의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제 몸집은 제법 크고 화려한 배는 방향감각을 잃은 채 세계화·정보화 시대의 거친 물결 속을 표류하고 있는 꼴이다. 오죽하면 우방국가 독일의 대사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충고를 했을까.

오늘의 심각한 상황과 관련하여 현재의 집권층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정치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이 문제 해결의 진정한 열쇠는 되지 못한다. 지난봄의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보았듯이 오늘의 상황은 이미 역사 속에 배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오늘의 집권층도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혼란과 어려움의 상당 부분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따른 성장의 진통이라 볼 수 있다.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이나 전통적 권위들에 대한 도전도 시민사회 활성화와 국민이 가진 창조적 역량의 극대화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당연한 대가이며 자연스런 역사적 현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체조절이 가능한 일이다. 또 국제 테러, 환경 파괴, 자원 고갈, 세대간 갈등, 인구 고령화 등의 문제들은 우리만의 걱정이 아니고 세계화 시대, 디지털 혁명 시대에 인류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주어진 외적 여건에 비해서도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특히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심화되어 가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 밖에 다른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도와줄 수가 없다. 

이 글의 목적은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과 어려움을 경제위기를 훨씬 넘어선 지성의 위기, 다시 말해 사회 전반에 걸친 비판적 사유능력의 결여와 도덕적 용기의 부족으로 규정하고 그 역사적 연원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도덕적 냉소주의와 반지성적 풍토를 극복하고 보다 견고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사회통합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지적 수련과 도덕적 권위 사이의 이완


근대화의 비극적 시발=개항 전 한국의 전통사회는 유교적 인문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 공동체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적 가치관은 관존민비와 더불어 사회 질서 유지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구호를 내세운 국수주의 세력의 구국의 노력은 참패로 끝났으며 망국은 정치적 기득권과 지적 전통의 관리를 함께 독점해 왔던 구 엘리트의 정치적, 사회적 종말을 의미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시절, 민족을 계도하는 지적 주도권은 이제 망국의 원인을 근대화의 실패에서 찾는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들은 일찍부터 서구와의 교류를 통한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던 일본이 우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외국으로 망명도 하지 못하고 망국의 통한에 젖어 야인으로 여생을 지내야 했던 애국적 구 엘리트나 서민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로운 지식계급과 근대화는 생성 시점에서부터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근대화의 추구는 일본 식민주의 체제와의 일정한 타협을 조건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 신지식층은 지적 계보를 일본인 스승들에게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우리의 지성사적 비극의 뿌리는 이미 이때 심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 명분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내적, 외적 망명의 길을 선택했던 민족주의적 구 엘리트나 의병활동 등을 통해 구 왕조 체제와 일본의 침략세력 양쪽에 다 같이 항거하려 했던 서민 편에 있었으나 세계를 향해 열린 지적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일상적 삶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교육을 제공한 것은 일제 치하 교육과 고용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개인별 사례로 볼 때 신지식인들 가운데 덕망을 갖춘 애국자가 없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만 구조적으로 보아 애국이라는 도덕적 대의의 기초 위에서 유럽에 뿌리를 둔 신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엄격한 지적 기율을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사유(moral reasoning)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여건이 허용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다. 창씨개명까지 요구하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 아래서 새로 형성되는 우리 신지식인층은 이성의 연마와 민족적 양심 간의 선택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강요받고 죄 없이 죄인이 되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지적 전통의 토대를 구축하면서 우리 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어려운 일을 해내야 했다. 지식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이솝 우화 식의 다층적 의미구조를 가진 모호한 언어를 개발하거나 정체를 위장하는 방법도 때로는 채택했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학문적 수련이 인격의 연마와 도덕적 권위의 토대로 인식되었던 구체제 때와는 달리, 어떤 사람이 애국자로 일제의 박해대상이 되기만 하면 박해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도덕적 권위를 보장해 주는 증표가 되었고 지적 결함이나 인격적 미숙까지 덮어주는 면피도 되었다.

일단 애국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사람의 말이라면 객관적 타당성을 검증할 필요도 방법도 없이 무조건 우러러 받드는 시회 심리가 생성되었다. 성인 세대가 지속되는 탄압으로 무기력해지면서 아직 인격적 수련이나 지적 안목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던 청소년 학생들이 민족의 구원자라는 멍에를 지고 애국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불행한 전통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일제 하에서였다.

민족주의적 명분과 엄격한 이성적 판단력이 서로 이완되는 가운데 항일 투쟁은 대체로 국제적 역학관계나 국내적 여건 등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냉철한 판단에 기초한 전략적 움직임이기보다는 애국적 울분과 용기, 희생정신 등이 분출하는 산발적 행위였으며 식민 당국의 양보나 국제적 호응을 통해 실질적 결실을 거두는 효과는 별로 없었다. 이처럼 지사(志士)와 지식인이 따로 돌게 강요당하던 일제 하의 각박한 현실에서 문맹을 퇴치하고 세계적 안목과 민족의식을 함께 기를 수 있도록 우리 말 신문이나 문예 동인지 등을 간행하고 야학을 비롯한 각종의 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민족 지성의 토대 구축을 위해 뜻있는 지식인들이 할 수 있던 최선의 노력이요 공헌이었다.


복음으로 받아들인 맑스-레닌주의와 기독교


한·일 합방 후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전통적 지식 계급은 소멸하고 일본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지적 전통은 겨우 소개 단계에 머물러 있던 지적 공백기에 우리에게 복음처럼 날아온 것이 러시아 혁명의 소식과 우리 같은 피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함께 약속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였다.

우리의 해외 독립투사 제1세대는 이미 1919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기구 청년대표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의 많은 이상주의자들도 소련을 희망의 메카로 바라보게 되었다.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제의 심한 탄압으로 조직으로 살아남지는 못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탄압의 표적이 된 사람들의 도덕적 권위와 반식민지 투쟁과 계급투쟁을 함께 설파하는 코민테른 메시지의 매혹은 더해만 갔다. 1930년대에 이미 소련에서는 피의 숙청으로 레닌과 스탈린의 혁명 동지들이 모두 반역자로 몰리며 처형당하고 스탈린 독재체제가 그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박헌영 가족을 위시한 재 소련 우리 동포들도 끔찍한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소련의 체계적인 정보조작과 통제 때문에 외국에 바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국내 지식인들의 시야는 일본의 정보통제까지 겹쳐 더욱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에 비견할 만한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과 계몽을 통한 선교활동에 치중했을 뿐 항일투쟁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역사에 관심을 갖는 많은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과 동시에 억압과 차별 없는 평등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구원의 복음이었다.

특히 식민화와 근대화의 이중의 도전 앞에서 도덕적 죄책감과 현실적 좌절감, 그리고 일제에 대한 분노를 함께 경험하고 있던 유복한 가정 출신의 이상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나 아나키즘 쪽으로 경도되었던 것은 레닌을 비롯한 혁명 전 러시아의 청년 지식인들이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된 것과 유사한 현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하는 정도가 유럽에서보다 경제적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그리고 한국 등 피식민지 약소민족들 사이에서 더 강했던 것은, 마르크시즘의 본고장이었던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고전 철학에서부터 시작되어 칸트·헤겔을 거쳐 자유주의·사회주의로 이어지는 철학과 정치사상의 계보 속의 한 흐름일 뿐이었고 성공적 산업화의 진척으로 꾸준히 개선 되어간 경제 사회적 현실이 혁명 운동의 설 자리를 위축시켰던 데 반하여, 제정러시아나 한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가 철학적으로 거두절미된 채 민족해방론과 계급투쟁론으로 단순화되어 불법적 통로를 통해 지적 검증이 필요 없는 절대 진리인 양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해방과 그에 뒤따른 분단의 정치상황은 이데올로기의 종교화 현상을 더욱 고착시키게 돌아갔다.

 

분단의 비극과 양심의 자유 상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점을 가진 고지에서 볼 때 소련과 자유진영 국가들 간의 냉전이 유럽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던 1945년 여름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분단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1941년부터 일본과 전쟁을 치렀던 미국이 종전 6일 전에야 겨우 일본에게 선전포고하고 한반도에 진격해 온 소련에게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맡길 리는 없었다. 그뿐더러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은 미국의 전략적 구도와 상관 없이도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우리가 선택했어야 할 도덕적, 정치적 명제였다. 우리의 힘이 없었기 때문에 냉전의 전초기지가 되는 비극을 맞은 것이지만 남한만이라도 공산주의권으로 흡수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함은 공산주의 체제들의 몰락과 오늘날 남북한이 보여주는 대조적 모습으로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상황에서 건국을 서둘러야 했던 우리의 민족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분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전개였고 강요된 선택이었다. 공산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민족의 자주와 독립이나  분열의 방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서울과 평양에 따로 수립되는 정부에서는 누가 지도자로 부상한다 해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의 절반을 팔아먹었다는 도덕적 비난과 저항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부르주아를 내세워 거국정부를 수립하는 척하다가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고 친소적인 독재자를 세우는 것이 소련이 세력 확장을 도모할 때 써온 전형적 수법이며 국내 지지기반이 없었던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지만 우국지사들이 사전에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의 고착은 양심의 자유 유린과 지적 자유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승만같이 국제정세에 밝았거나 아니면 소련군의 북한 주둔 과정에서 공산주의 현실을 직접 체험한 후 남하한 자생적 반공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계급 타파와 인간 해방의 메시지는 보다 막연하게 들리는 자유민주주의 구호들보다 더 큰 호소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제주, 여수·순천 등지에서 공산당이 획책하는 반란이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피가 흐르게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민족의 분단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국민감정과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는 국가전복 기도 세력이 상존하는 가운데서 애국적 비판세력과 본질적 반체제 세력을 구분할 길이 없었던 대한민국은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동원해야 하는 자체방어 수단  사이에 심한 괴리가 빚어지는 태생적 불구상태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식인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당면한 국제정치적 현실을 정치인들보다는 훨씬 더 초연한 입장에서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상의 자유가 제한되었다는 구실 아래 정치적 도피주의나 아니면 체제 거부 운동의 극단적 선택으로 치달았다는 데 있었다. 체제 비판적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현실은 외면한 채 그 이상과 이론만으로 매혹을 느끼면서 대한민국을 정치적 현실의 잣대로만 평가하고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이상이 무엇인가는 무시하는 지적 불공정의 오류에 빠졌다.

그와 반대로 반공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은 내세우면서도 현실비판은 게을리 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이상과 이론으로는 호소력을 가질 만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조차 인정할 만한 지적 도량이나 도덕적 용기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미군정은 초기에 공산당 활동을 합법으로 용인했지만 우리의 우익은 해방 전에는 많은 애국자들이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도덕적·이념적 명분이 양심과  냉정한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우리 지식인 사회의 고질적 독선과  배타성이 강도 높게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4·19 이전까지는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지식 사회의 지지가 공개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탈린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 남침으로 촉발된 6·25 전쟁에서 북한뿐 아니라 중공군과 소련 공군기에 대항하며 나라와 목숨을 지켜내고 전후 경제복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의 지지와 원조가 절대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쟁 동안 북한을 탈출한 난민의 증가와 더불어 남한 내에서도 자생적  반공주의의 기반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반공은 드디어 국민통합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족상잔의 전쟁과 그 후 오래 계속된 게릴라 토벌전은 물리적 상처들이 완전 치유된 후까지도 세대를 넘어가며 집단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우리를 괴롭힐 깊은 심리적·정신적 상처들을 남겼다. 몇 차례에 걸쳐 밀리고 밀어내던 남북간 무력 대결과 그에 수반되는 정치적 살육의 피해는 당사자들의 이념적 성향이나 역할과 크게 상관없이 닥쳐온 운명의 장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공산당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함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심리적 보상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거나 반공법의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산가족의 소식을 알아볼 용기도 못 내고 살아온 사람들의 경우 삶은 흔히 죽음만도 못하게 가혹한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적으로 의심받으며 피해에 죄책감까지 짊어지고 사는 상황에서는 침묵, 망각, 거짓말, 그리고 진실을 적당히 덮어둘 줄 아는 지혜가 생존의 조건이었다. 


군사독재와 지식인 사회의 양극화


지성인들의 도덕적 임무는 그러한 상처들을 치유하는 일에 앞장서는 데 있다. 그것은 적지 않은 용기와 지혜를 요구하는 일이었으나 4·19 혁명에 뒤이은 군사독재 체제의 수립은 그러한 일을 엄두도 낼 수 없게 했다. 치료받을 시기를 넘긴 상처들은 이성의 약발도 먹혀들지 않는 상태로 곪아들어 사회공동체 전체에 독소로 번져나가고 때로는 광주 항쟁의 경우에서처럼 엄청난 힘으로 폭발하면서 또 다른 불행을 낳는 비극의 씨로 남게 될 것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했던 큰 문제들 가운데는 정치적 민주화 이외에도 절대빈곤의 퇴치, 국가안보 체제 강화, 교육 기회의 확대 등 여러 가지 크고 다급한 것들이 많았다. 무지와 가난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며 사회적 갈등이 안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임을 생각할 때 그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지 상치되는 목표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4·19 지식인 혁명에 뒤따른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민주주의 자체를 안정과 발전의 걸림돌로 보았고 반공안보와 경제발전에 국정운영의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를 연상시키는 ‘유신’과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세우며 광복 후 그때까지 추진되어 온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제동을 걸고 친체제적 민족주의자들을 양산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몽매주의적 ‘국풍’의 반공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들이 금서 목록에 오른 것은 물론 공산주의 체제에 관한 서양 학계의 연구서들조차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다. 유신 정권 말기에는 국내의 간행물들까지 대거 폐간 조치 당했다.

유신정권 초기까지는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가 지식인 사회를 결속시키는 정신적 끈이 되었고 도덕적 갱생의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4·19 혁명에서 맛보았던 승리의 도취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지식인들은 불행히도 변화된 시대적 흐름에 맞고 지식인 사회만이 택할 수 있는 특유의 저항 방식을 새로 개발하기보다는 물리적 힘을 가진 쪽에 훨씬 더 유리한 낡은 투쟁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지식인 사회 전체의 체력 약화와 심각한 지적, 도덕적 결손이었다.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투쟁은 역사적 상처 치유와 사회통합, 인권의 확립의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러나 20여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거의 날마다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다 같이 최루탄과 싸우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당하는 동안 지식과 덕성을 연마하는 작업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우렁차게 울려퍼졌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다수의 의지는 항상 최선의 선택으로 귀결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민주화의 다음 단계를 위해 대비하고 엄격한 논리적 사고의 훈련을 받은 지식인들만이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성찰을 통해 공론을 이끌어 가는 책임을 감당할 힘이 축적될 수 없었다. 


비이성적 사회심리까지 등장


거리의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지식인 사회에는 양분화 현상이 일었고 특히 1980년 광주의 유혈극 이후로는 두 진영 사이에 건너뛰기 어려운 골이 패었다. 제도권의 지식인들은 점차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포기하고 경제성장 제일주의 논리에 젖어들어갔던 반면 재야의 반체제 지식인 서클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넘어, 체제 비판, 그리고 더 나아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갔다. 양쪽이 다 극단적 유물론의 함정에 빠져들면서 사회과학을 도덕적 성찰의 영역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발상이나 목표의 천명이 그것의 구현인 듯 착각하는 경향, 정치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는 교류조차 거부하는 지적 불관용, 이 모두가 양분된 지식인 진영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문제점들이었다. 서로 달랐던 것은 한편은 도덕적 명분에 사로잡혀 눈을 안으로만 돌리고 지적 기율을 등한시한 데 반해 다른 쪽은 세계적 안목을 가지고 역사 변화의 추세에는 민감했으나 지적 기능주의에 의존하며 도덕적 문제제기는 회피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런 내막을 들여다볼 때 70년대와 80년대에 민주화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지적 공동체로서의 대학의 도덕적 위상은 높아지는 대신 오히려 전보다 실추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나라의 도덕적 양심임을 자임하고 지적 중추가 될 준비를 해야 할 사람들이 책 대신 최루탄에 파묻혀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며 수십 년 전의 계급론과 민족론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군사정부가 가동시킨 경제발전의 엔진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서 한국 사회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지식인 사회의 양극 분해가 일고 있던 사이 전 같으면 지식인의 길을 선택했을 많은 인재들이 기업으로 흡수되었고 오랜 동안 경제의 그늘진 지대로 남아 있던 지식인 사회는 사회 일반을 앞서가기보다는 시대감각, 세계적 안목, 최신 정보와 문화의 향유 여러 면에서 오히려 낙후되어 버리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었다.

사회의 경제적 삶의 수준이 높아갈수록 반체제 지식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더해 갔다. 특히 재야 지식인들은 한국의 주류 사회로부터도, 외국의 학계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었다. 그들의 고립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던 80년대 말에 우리 대학들에서는 주사파가 세력으로 결속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론적 초석을 마련했던 인물이 90년대 초 북한의 초청으로 그곳을 방문해 보고야 자기가 속았음을 깨달았다는 데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외국의 최신 학문적·사상적 조류가 밀물과 썰물처럼 들락날락했지만 그것들을 균형 있게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우리 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정책 대안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은 기르지 못하고 있었다. 물질의 생산이나 유통, 그리고 조직의 관리 등에 관계된 분야들에서는 산학협동이 긴밀하게 이루어졌지만 인간과 사회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는 지식인들의 비판기능이 개혁을 통한 체제 강화 쪽으로 수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후부터 마치 세계 공산권의 붕괴와 때를 맞춘 듯 가시화되기 시작한 경제발전의 눈부신 성과와 문민정부의 출범은 우리 사회의 깊은 역사적 상처들이 자연적 치유를 통해 봉합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90년대 중반에는 국민의 60%가 자기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믿으며 한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조사가 나오곤 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우리에게 닥친 경제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계층 간의 격차는 아물려던 상처에 다시 소금을 뿌린 셈이 되었다. 풍요 속에서 삶의 질이 하락하고 경제적 생활기반이 무너지면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는 과거의 망령들을 모두 되살려내며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 동정과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라는 비이성적 사회심리로 발전했다. 미국과 북한에 대한 인식의 급격한 변화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덕분이지만 경제위기 이후의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반체제 지식인이 부른 반지성주의


정치 민주화라는 하나의 잣대로만 본다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잇따른 탄생은 대중민주주의가 이 나라에서 드디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증거로서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전개였다. 사실 정치 민주화의 성공이 어디까지 민주화 투쟁의 결실이었고 어디서부터 경제발전의 부산물이었던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인터넷 세대의 휴대전화가 아니었으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민주화 투쟁에 대학생 시절을 모두 바쳤던 386 세대에게 ‘참여 정부’의 출범은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고 자기들의 지적·도덕적 역량을 발휘하여 이 나라를 이끌어갈 기회가 왔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재야 시절에는 묵과되었던 지적, 도덕적 결손이 얼마나 심각한가가 노출되지 않을 수 없는 계기가 된 것이다.

기본 인권이 무시되던 시대에 민주화 투쟁에 몰입하여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6·25의 경험은 없던 386 세대는 민주주의를 민중의 권리 수호를 위한 기득권층의 분쇄라는 소극적 차원에서만 생각했지, 민주주의라는 그릇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제도, 운영 절차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이고 의회민주주의와 대중민주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도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자유·평등·평화·번영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대중민주주의는 나치즘의 동력이기도 했다는 역사적 교훈들을 외면했다.

사실 참여 정부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원대하면서도 현실성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의 정치세력의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도에 달했을 때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우리 인터넷 세대의 감성적 반미주의와 우리 역사 속에 깊숙이 잠재해 있던 반엘리트주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권력 장악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생각할 때 새 정부 출범 이래 가장 두드러진 사회적 변화가 반엘리트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표출이라 함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 지식인 사회는 민주화의 제단에 스스로를 불살라 바친 것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권위주의의 타파는 분명 민주화의 핵심 과제이며 엘리트주의의 배격 또한 중요한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현실적으로 남는 문제가 있다. 권위주의만 아니라 모든 권위가 부정당할 때 지식기반 사회의 구축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기본 조건인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의 거센 경쟁의 물결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떠내려가다 가라앉지 않도록 노를 저어 나가는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적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혁·평등·동포애 등 추상적 명분을 앞에 내세운 극단적 이기주의와 독선, 지적·도덕적 혼미, 그리고 무지가 유발시키는 자가당착적인 요구와 언행 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궁극적으로는 이성적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봉쇄를 의미한다. 국정은  분열증적 증세를 보이면서 사회 분위기 전체가 피폐해지는 것이다.    

외적 힘의 작용이 불가항력적이었던 국권 상실과 분단 고착 초기의 역사적 국면에서는 구 엘리트의 소멸이나 신지식인층의 양심의 자유 상실에 대한 책임을 그들 스스로에게만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아무리 심했다 해도 그들이 정치세력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의 창궐에 대한 책임은 서울대인들을 선두로 하는 지식인 사회 스스로가 질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권 지식인들의 도덕적 냉소주의와 지적 오만 및 나태, 반체제 지식인들의 도덕적 오만과 지적 결손이 복합작용을 일으키면서 빚어진 결과이고 지성의 권위의 전반적 추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도 지식인들 스스로가 마련해야지 다른 데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 사회의 체질을 개선하고 강화하라


지성의 위기 극복을 위한 근본적 대안은 지식  사회의 체질 개선과 강화에서 찾아야지 다른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반지성주의의 암 세포가 사회적 유기체로 번지기 시작했다면 서둘러 건강한 세포의 생산을 지원하여 암 세포와 싸워 이기게 해야 하며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훨씬 더 큰 고통을 수반하는 충격 요법밖에 다른 대안이 없어진다. 이 대안은 그러나 많은 시간과 참을성 있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며 지성의 권위 추락의 기본 원인이 지식인들 스스로가 지성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용기를 내지 못한 데 있었다는 각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민족적 양심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은 도덕적 가치와 철학적 진리의 만남을 위한 집요하고 끊임없는 추구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열려 있는 마음의 자세를 요구한다. 감상적 민족주의나 맹목적 평등주의 사회 정서에 함몰되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인류 보편의 상식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태만의 죄가 되는 것이다. 철학이나 문화적 가치의 추구에서는 국경이 없다 함을 재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전한 지식 세포 생산에 주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이성적 대화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반지성주의라는 암을 유발시킨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적 한을 풀어주어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치적 방식의 ‘역사 청산’은 역효과가 날 것임을 지적하고 그 일에서 학계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고발과 응징이 아니라 화해와 화합을 향해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자세가 성공의 관건이며 그것은 엄격한 지적 기율과 도덕적 용기를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들을 참고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특히 하급학교에서부터 국사도 세계사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감각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디지털 세대 젊은이들에게 세계사적 안목과 문화적 소양을 쉽게 심어줄 수 있는 시청각적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교육기관들과 협력을 서두르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 테러는 이제 우리에게도 코앞의 문제이며 외국 문화에 대한 이해는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문제가 실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역사는 부정 일변도로 평가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세습독재 체제는 극구 변명하려 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자세에서 목도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지성의 위기의 극복 없이는 미래를 위한 비전의 제시도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 마련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성의 위기는 우리의 경제·사회적 구조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는 현상으로 교육적 차원의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부정할 수 없다.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며,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응책이었음을 우리 사회 전반에 상기시키는 데 지식인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회분열과 반지성주의의 위험은 이미 심각한 정도가 되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이제 강도는 다르더라도 중국의 지식인들이 문화혁명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유형의 수난을 겪어내야 할 마음의 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혁의 이름으로 포장된 여러 가지 얼굴의 폭력 앞에서 지적, 도덕적 중심을 잃지 않고 인격적으로 살아남으며 우리나라가 무지와 증오와 질투가 아니라 흠모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이성적 사회로 거듭나도록 돕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가 오늘과 같은 토론의 장을 만드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국회도 언론도 국민의 선의지를 수렴해 내는 힘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그래도 아직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은 대학, 그것도 국제사회와 연결을 맺고 있으며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대학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 글은 지난 10월 29일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주최 대토론회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을 교수협의회측 양해를 얻어 전재한 것임. (넥스트 200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