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마침내 수양은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면서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다.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법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드디어 수양께서 중문으로 나오자 부인(나중의 자성왕비)께서 갑옷을 가져와
손수 입혀드렸다.
갑옷을 입은 수양대군은 단기(單騎)로 가동(家童) 임어을운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수양이 김종서 대감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렀을 때였다. 무사 세 사람이 무기를 든 채 서로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이날
김종서는 역사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먹이고 무기를 정비하다가 수양대군이 도착하자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면서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고 지시했다. 엿보는 자가 “적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칼 두어 자루를 뽑아 벽 사이에 걸어놓고 나왔다. 그 때부터
미복(微服, 남루한 옷)을 입은 양정·유서가 칼과 활을 숨기고 수양대군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승의 사모 뿔 좀 빌립시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대감의 집에 이르니 수양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온 김
대감의 아들 김승규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수양을 보고 인사를 했다. 수양대군이 좀 보기를 청한다고 하자 김승규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
대감은 한참 만에 수양대군더러 들어오라고 말했다. 수양이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청할 게 있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대감이 두세 번 더 들어오기를 청했으나, 수양은 끝내 거절했다.
이에 김 대감이 부득이 앞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수양은 자신의
사모(紗帽) 뿔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급히 오느라 채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수양은 웃으면서 “정승의 사모 뿔 좀 빌립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감이 창황히 사모 뿔을 빼서 주었다. 아마도 청할 것이 사모 뿔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잠시 긴장이 누그러진 상태에서 수양이 말했다.
“종부시(宗簿寺, 왕실의 보첩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영응대군의 부인을
탄핵하려고 하는데 정승께서 그 일을 지휘하십니까?”
이때 가동 임어을운이 앞으로 나오려 하자 수양이 짐짓 그를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 대감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김승규와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양이 그들에게 “은밀한 부탁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지못한 듯 멀찍이 물러섰다.
수양은 “부탁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종자(從者)에게 편지를
받아 김종서에게 전했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빛에 비춰보는데, 수양의 독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그를 내리쳤다. 옆에 있던
김승규가 깜짝 놀라 아버지 위에 엎드리자 뒤따라오던 양정이 칼을 뽑아 내리쳤다. 이날 밤 김종서는 다시 깨어나서 김승규의 처가에 숨었다가 다음날
양정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단종실록 1/10/10).
죽고 사는 건 순간의 선택
그날 밤 벌어진 참혹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불과 14개월 전 선택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김종서 대감과의 인연으로 ‘그 편’이 되었더라면 나는 ‘네 겹으로 둘러싸인 문’들을 지나다가 ‘제3문’쯤에서
철퇴를 맞아죽었을 것이다. 아니 집현전 뒤편의 경회루 어디쯤에서 베임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도 나는 그때 수양대군 집 앞을 지나갔고,
술잔을 받았으며, ‘사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의기에 투합했다.
우리들은 “황보인은 나약하고 김종서는 전횡(專橫)한다”(단종실록
1/6/28)면서 김종서의 권력남용을 비판했다. 심지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미화하려는 그를 보면서 그 옛날 사헌부
관리로서 불의에 항거하던 그 사람인가 회의(懷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정치세계가 비정하고 권력은 냉혹한 것이라
해도 함께 ‘수성의 치세’를 일궈온 동료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집현전의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 활발하던
집현전도 냉랭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책 창고로 변하고 말았다.
“이내 몸은 맡겨진 것 같으니 / 명을 따르며 스스로 편안해하리 / 내
마음 이와 같으니 / 죽고 사는 것을 뉘라서 어렵다 하랴 / 인생에 누군들 근심 없으랴만 / 걱정 생기면 술 마시고 풀어버린다….”(성삼문)
“세상 만사 정신을 뒤흔들어 늘상 고단하기만 하니 / 그저 수향(睡鄕)이
돌아가 쉴 만한 곳 / 또 쉰다 해도 돌아갈 곳 알지 못한다면 / 뉘라 능히 다시 도원 골짜기 들어갈 수 있나.”(신숙주)
죽고 사는 것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고, 우리의 몸은 이미 누군가에게
맡겨져 있다. 이제 다시 ‘도원 골짜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함께 슬퍼하며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집현전에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어진 임금께 정책을 제안하던 일들이
문득 꿈만 같이 느껴진다. 좋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경쟁적으로 자극하면서 논쟁하며 겨루었다. 친구로서 어우러지던 시절이 엊그제 아니던가.
새로운 정책과 아이디어의 보고(寶庫)
집현전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해석하고 범례(凡例)를 짓는 일과 운회(韻會)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도 함께 했다(세종실록 26/2/16; 28/9/19).
집현전 안의 노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이 “대국을 섬기고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럽다”고 했다(26/02/20).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대개 지세(地勢)가 다르면 풍습과 기질이 다르며, 풍습과 기질이 다르면
호흡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안팎 강산이 저절로 하나의 구역을 이루어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어찌 호흡하는 것이
중국과 동일하겠는가.”(세종실록 29/9/29)
중국과 풍습이 다르고 호흡을 달리하는 우리나라가 따로 문자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언문창제 사실이 중국에 전해지면 자칫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최만리 등의 주장은 옳았다. 세종께서 공들여 쌓은
조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내가 성삼문과 함께 당시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열세 차례나 내왕하면서 알게 된 것은 주변 국가들이 모두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이적이라고 얕보는
거란(920∼924년)과 서하(1036년), 여진(大字는 1119년, 小字는 1138년)과 일본조차 자국의 언어로 대화하며 자국의 정사(政事)를
기록하고 있었다.
중원의 역대 제왕들이 그랬듯, 정치의 통일 이후 우선 해야 할 일이 언어의
통일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생각을 공유할 수 없고, 생각을 함께할 수 없으면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과 일본이 자국의
언어를 가지면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제 새 왕조를 개창한 지 50여 년이 되었고, 새 왕조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국가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글은 필요했다. 세종께서 용비어천가를 만드시고, 백성을 널리 가르치시며(訓民), 공문에 우리
글(正音)을 사용하게 조치하신 것도 모두 이런 까닭이었다.
집현전은 이런 모든 일을 의논하고 협의하는 터전이자,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전을 연구하는 도서관이었다. 우리는 조선을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정책방안들도 제시했다. 사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그러저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이 일단 한 곳에 모여 토론하자,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까다롭고도 예민한 문제를 살펴 답변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었다.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 즉 사창(社倉)제도 시행 여부(30/5/15), 사형수의 처벌시기(12/3/2), 관원들의 고과방법(12/12/27),
외직(外職)을 피하려는 관원을 처벌하는 방법(13/8/6), 명나라 황제가 사로잡힌 가운데 새 황제가 등극했을 때 취해야 하는
예법(31/10/1)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국가의 일을 기록하고(5/6/24) 치국(治國)에 도움이 되는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물론이고,
경연(經筵)을 주관해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해야만 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종께서는 집현전을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國家儲才之地)”이라
부르셨다. 재위 16년부터는 우리들이 강독한 분량을 기록했다가 월말에 보고하게 하는가 하면, 매월 열흘에 한 차례씩 당상관이 시문의 글제를 내어
시험 치르게 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당신께서 공부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
일등으로 입격한 시(詩)와 문(文)을 가려서 월말에 모두 등사해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격려와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셨다(16/3/17). 상께서는 우리들이 다른 관청으로 옮기는 것을 억제하셨다. 연구는 온축(蘊蓄)의 시간을
필요로 하며, 숙성되고 정제된 자료만이 ‘나라를 위해 소용’된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근래 들으니 집현전 관원 중에 대간(臺諫, 사헌부·사간원)과 정조(政曹,
이조·병조)로 진출을 희망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기도 하셨다. 그리고 타이르셨다.
“그대들은 마음을 태만하게 갖지 말고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16/3/20)
아! ‘종신토록 학술에 전업하라’는 그 말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피 튀기는 살벌한 정치세계의 현장에 비하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
“네가 이미 신(臣)이라 일컬었고, 또 내게서 녹(祿)을 먹었으니, 지금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시 주상(세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집스레 주상에게
상감(上監)대신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세칭)’라 부르는 박팽년에 대한 진노 섞인 꾸짖음이었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나으리에게 올린 장계에는 한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소.”
장계를 조사해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로 ‘신(臣)’이라는 글자는 한 자도
없었다. 모두 ‘거(巨)’자로 적혀 있었다.
“녹봉도 전혀 먹지 않았다”는 그의 말대로 녹봉은 그의 집 창고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느 달 어느 날 받았다는 것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독한 놈이로고! 그의 입을 짓찧으라”고 명하면서, 주상이 다시
성삼문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왜 모반을 하였는가?”
한 차례 물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겨우 의식을 차린 성삼문에게 던진 말씀이다.
“모반이라니 당치 않소.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
주상이야말로 모반자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처음 선위(禪位)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
주상의 이 말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답했다. 오히려 주상을 꾸짖는 형국이 되었다. 왕망(王莽)의 예를 거론하기도 했다. 후한
말기에 주공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황제에 올랐지만, 끝내 나라를 망친 ‘왕망의 길’을 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너도 신(臣)이라 일컫지 않고 나으리라 하는구나. 하지만 네가 이미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앞뒤가 전도된 것이 아니더냐?”
주상께서 옹색한 지경에 몰리신 것이 확실했다. 박팽년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취조를 받는 성삼문이 오히려 당당했다.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겠소. 무릇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이오. 내가 또 나으리의 녹봉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집을 적몰해
따져보시오.”(‘연려실기술’ 396).
그들은 똑같은 일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안도 역모 사실을 아느냐?”
주상께서 다시 캐묻자 성삼문이 대답했다.
“이미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누구를 숨기겠소. 그러나
그는 실지로 알지 못하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남겨두어
쓰시오.”(‘연려실기술’ 398).
“나으리, 어서 목을 치시오!”
“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김종서 등을 처단할 때 너는 이미 나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더냐. 불궤를 부인하고 내게 돌아오면 모든 것을 덮어주리라.”
그의 재주를 아낀 주상의 권유는 사뭇 애원에 가까웠다. 급기야 일찍이
태종께서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까지 읊었다. 그러자 성삼문은 ‘단심가’로 회답했다(‘연려실기술’ 444).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성삼문의 대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어떤 미움도 원망도 없는 말투였다.
“나으리, 어서 내 목을 치시오. 나으리는 나으리의 일을 할 따름이고,
나는 내 길을 갈 뿐이오.”
아! 어디에서부터 우리의 길은 갈라졌던가. 우리는 시종 같은 길을
걸어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서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 같이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성삼문은 세종
20년(1438년)에, 그리고 나는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관직생활을 계속했다.
비록 내가 그보다 5년 먼저 집현전에 들어갔지만(세종23) 우리는
집현전에서 그야말로 잔뼈가 굵고 우정을 키워온 동지였다. 내가 중국에 가면 그도 따라갔고, 그가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엔 나도 따라갔다.
우리는 함께 사가독서를 하며 “밭갈이하는 자는 밭두둑을 양보하고,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며, 늙은이는 짐을 들지 않는” 그런 세상을 얘기했다(‘치평요람’ 22). 비록 천승(千乘)의 나라이지만 어진 정치를 펴서
안으로 민심을 얻고 밖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작지만 강한 나라(强小國)’를 꿈꿨다. 일찍이 관중이 말했고 맹자가 확인했던 것처럼, 국가의 강하고
약함은 영토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잘하면 영토가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영토가 큰 나라보다도) 국력은 더 클 수
있기(國小而政大者 國益大)” 때문이다(‘관자’ 패언, 228).
다만 1443년(세종25) 내가 26세의 나이로 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갈 때만은 예외였다. 부인과 가족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성삼문과 내가 유일하게 떨어져 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앓다가 일어난지라
세종께서 염려하셨다. 하지만 나는 “신의 병이 완쾌되었으니 어찌 사양하오리까”라며 일본으로 갔다. 떠나는 날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등
‘오랜 벗들(舊友)’이 마련해준 송별회는 친형제의 그것보다 애틋했다.
지인들이 경상도 수령과 만호에게 부탁하여 기생 10여 명을 우리에게
붙여주었다. 군자가 비록 친하면서도 마음을 뺏겨서는 안될 것이 해당화의 요염(妖艶)인지라, 우리는 시와 악을 더불어 즐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헌부 이종겸은 우리를 탄했다. 나와 통신사 변호문이 2~3일간이나 따라오는 기생들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께서는 “우리나라의
인심에서는 대개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령과 만호가 왕명을 받들어 멀리 바다를 건너는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또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용서 못할 죄도 아니니 어찌 파직하랴”며 우리를 변호하셨다(25/5/28).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새로 제수되어 내려온 박호문을 처단하고 반기를 들었을 때(단종실록 1/10/25) 조정은 아연 긴장했다.
‘제승방략’으로 훈련된 정예 군사가 도성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의 위태로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북변의 안보는 어찌될 것인가. 종성 도호부사
정종의 재치와 천우신조로 차단되었지만 이징옥의 난은 이 나라의 앞날을 심히 우려스럽게 한 사건이었다.
옥새를 끌어안고 울다
성삼문과 나는 조정에서 올린 계유년 정난(靖難)의 공신 명단에서 우리의
이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단종실록 1/11/18).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6일 후에
올린 성삼문의 상서 내용이 이상했다. 그는 사간원 좌사간의 직책에서 물러나려 했다(단종실록 1/11/24).
그의 속마음을 읽은 주상(세조)이 한 달여 만에 반격을 가했다. “성삼문은
백관(百官)이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청할 때, 이름을 얻고자 꾀하여 전후에 말을 바꾸었으니, 그 고신(告身)을 거두고 국문(鞫問)하라”는 지시가
그것이었다(단종실록 2/1/23).
하지만 주상의 목적은 그를 처벌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그를
회유하려 하셨다. 나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지만, 집현전 학사를 다수 포용하여 당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으신 듯했다. 용서(25일)와
처벌(28일)을 반복하면서 당신께서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1455년(단종3년) 윤6월11일. 단종께서 “이 무거운 짐을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긴다”면서 선위했을 때(세조실록 1/6#11), 우리의 길은 완전히 갈라졌다. 그날 그는 승지로서 옥새를 보내라는
전지를 받자 옥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박팽년은 경회루 못에 빠져 죽으려 했다. 가까스로 성삼문이 “아직 상왕이 살아 계시니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다(‘연려실기술’ 390).
성삼문 등이 ‘불궤를 도모하는 일’ 또한 아슬아슬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베푸는 날(세조2년 6월1일) ‘거사’를 도모하려 했으나, 주상께서 공간이 비좁다면서 늘상 수반하는 별운검(別雲劍, 운검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의 임시벼슬)을 없애라고 하명하신 것이다.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해 별운검을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살펴본 뒤 취소시켰다.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성삼문 등은 후일 관가(觀稼, 임금이 농작물의 작황을 돌아보던 일)할 때
노상에서 거사하기로 작정했는데 정창손과 그의 사위 김질이 이를 고변하여 실패로 끝난 것이다(세조실록 2/6/2).
세종의 팔진도를 되살리기 위해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다. 하지만 죽여야 마땅하다.”
성삼문이 불궤를 꾸미면서 지시한 말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섰더라도 그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지난 계유정난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와 내가 각기 선택한 길은 처음엔 흐릿하게 개연성만을 보이다가, 다가갈수록
뚜렷해졌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상황들이 윤곽이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충신’의 이름이, 그에겐 ‘역도’의 이름이 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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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賢謀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
박사(정치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저서 : ‘정치가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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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과 박팽년이 그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운의
제비’를 뽑았고, 그 결과를 의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자네가 살아남아서 조선의 부흥을
이룬다면 세상은 나라를 위해 살아남은 신하가 있다며 칭찬할 걸세.”
살아남은 자에게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다. 제갈량이 선왕 유비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세종의 ‘팔진도’를 되살리고, 안착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신동아 2006.4
(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