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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1)

이강기 2015. 8. 29. 12:09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①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하니Only
≫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사진/K. E. 한 <북폴리오> 제공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 살해되기 전만 해도 공주들은 유럽에서 신붓감으로 첫째 손가락에 꼽혔다. 1906년 9월 페테르고프의 여름 궁전에서 찍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다. 가족에 대한 니콜라이의 헌신은 포로로 사로잡은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볼셰비키를 빼고 많은 혁명가들의 찬양을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 황후 알렉산드라. <북폴리오> 제공
황후 알렉산드라 = 1910년 7월 황실 요트 스탄다르트호로 니콜라이와 함께 항해하는 동안 보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다. 혁명 지도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니콜라이가 “멋진 푸른 눈말고는 유쾌하고 조금은 어색한, 아주 평범한 근위대 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황후”임을 발견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알렉산드라는 영어 억양이 섞인 러시아어로 말했으며, 일관된 목표는 ‘아이’, 즉 황태자를 위해 전제정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황제 부처는 매우 친밀했다. 강한 성적 관심이 알렉산드라의 종교적 열정과 결합했다. <북폴리오> 제공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황태자 알렉세이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이 자전거는 알렉세이가 쉬 피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병 조수 데레벤코가 설계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았으며 체내 출혈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충성을 바치기로 되어 있던 데레벤코는 혁명 이후 젊은 혈기에 넘쳐 알렉세이를 조롱하고 새로 획득한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어떤 임무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북폴리오> 제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북폴리오> 제공
니콜라이와 드미트리 대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나중에 라스푸틴 살해에 참여하게 되는 드미트리는 차르가 좋아한 몇 안 되는 로마노프 왕가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사슴, 순록, 곰, 여우 사냥은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었다. 몰이꾼 수십 명이 포수들 쪽으로 사냥감을 몰아주었고, 하얀 옷을 입은 이들 포수는 겨울 눈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북폴리오> 제공

 




≫ 간호복을 입은 황후와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간호복을 입은 황후 = 옆에는 알렉세이다. 알렉세이의 병에 기반을 둔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니콜라이가 총사령관이 되어 모길료프에 있는 군 본부로 떠나자 더욱 커졌다. ‘독일의 압제’가 러시아인의 영혼에 깃든 반유대주의를 대체하고 다름슈타트 태생의 황후에게 따라붙었다. 카페에서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어린 황태자가 궁전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궁정을 방문한 장군이 “무슨 일이세요, 알렉세이?” 하고 묻는다. 황태자가 말한다. “러시아군이 지면 아빠가 울고, 독일군이 지면 엄마가 울 거예요. 난 언제 울어야 되요?” <북폴리오> 제공

≫ 그레고리 라스푸틴. <북폴리오> 제공
그레고리 라스푸틴 = 1916년 가을 러시아 정부를 지배한 사람은 라스푸틴이었다. 머리는 장발에 윤기가 없었고, 턱수염은 기름이 번질번질한 냅킨 같았으며, 이는 돌보지 않아 검게 변색되었다.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거리에서 라스푸틴을 지나치다가 “농민의 얼굴에, 이상한 눈빛을 지닌, 이해할 수 없는 두 눈을 가진, 바로 광인의 눈을 한”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불가사의한 치료사를 황실에 소개한 사람은 황후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스킷 반죽의 거품처럼 평범한” 여자 안나 비루보바였다. 라스푸틴은 음탕한 언행으로 예절 바른 숙녀들을 흥분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 차르의 후계자, 혁명 러시아의 초대 수상 게오르기 리보프 공.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이나 혁명에 무감각했던 둔한 인물이었다. 그는 말했다. “강물은 흘러 떨어진다. 그것뿐이다.” <북폴리오> 제공
≫ 전직 차르 니콜라이가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전직 차르 니콜라이 =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항상 육체노동을 즐겼다. 그와 가족은 유폐되어 있는 동안 자진해서 일했다. 그는 “2시에 우리 모두 정원으로 갔다.”고 일기에 적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심지어 즐거워하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고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시계가 5시를 가리키는 줄도 몰랐다.” <북폴리오> 제공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북폴리오> 제공
감금당한 공주들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2월 쿠데타 이후 그들은 차르스코예 셀로에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집안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쿠데타 후 가택연금은 거의 투옥에 가까웠다. 1918년 4월 그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고, 7월 16일 이곳으로 암호화한 ‘처형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한겨레)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② 붉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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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범들. <북폴리오> 제공
정치범들 = 2월 쿠데타가 시작되고 처음 며칠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슐루셀베르크 요새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볼셰비키는 유능하지 못한 음모가들이어서 차르의 비밀경찰이 쉽게 침투했다. 혁명 36시간 전에 레닌의 여동생을 포함한 수도의 마지막 대규모 그룹이 체포되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거의 어떠한 역할도 못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뒤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뿐이었다. 깃발에 적힌 문구는 이렇다. “감옥 문을 연 인민 만세”, “모두 다 인민을 위해 : 공장, 토지, 자유.”

≫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북폴리오> 제공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병사 분과가 국가두마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모든 색깔의 좌파 대표들을 포함한 소비에트는 사진의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아직 볼셰비키의 도구가 아니었다. 제일 위 왼쪽에 있는 플래카드에는 “레닌 타도”라고 쓰여 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민족의 자유를 위한 전쟁…… 독일 군국주의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 내전의 결정적인 해.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결정적인 해 = 1919년 서부 러시아에서 부상당한 적군들. 몇몇 전선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한 백군은 근거지를 벗어나면서 약해진 반면, 적군은 전선이 압축되어 전선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 내전의 붉은 영웅.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붉은 영웅 = 1918년 기관총 사수 안톤 블리즈냐크. 소매의 줄무늬가 보여주듯이 블리즈냐크는 13번 부상당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손에 든 시가는 보상이다. 트로츠키의 장갑열차는 내전 기간에 구하기 어려웠던, 특별히 마련한 담배와 시가들을 싣고 다녔고 트로츠키는 이것들을 우수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 당 활동가. <북폴리오> 제공
당 갠염?/b> = 검은 셔츠를 입은 당 활동가가 추바쉬 공화국에서 농촌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쿨라크, 즉 부농에 대해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를 조성한다. “그들은 마술에라도 걸린 양 꼬마들을 ‘쿨라크 짐승들’이라 부르고 ‘흡혈귀’라고 소리치면서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곤 했다.”라고 한 목격자는 썼다. “그들은 이른바 쿨라크를 혐오스럽고 역겨운 소, 돼지로 간주했다. 쿨라크는 영혼이 없었다. 쿨라크는 악취가 났다. 쿨라크는 모두 성병에 걸렸다. 쿨라크는 인민의 적이었다.”

≫ 코러스 라인. <북폴리오> 제공
코러스 라인 = 1936년 선전팀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마을들에 당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당은 끊임없이 선전을 해댔다. 그것은 피할 수 없고 계속 되풀이되었으며 바다 위에 있는 배의 엔진 소리처럼 끊임없이 지속되는, 모든 당 활동의 배경이었다. 깃발과 슬로건 없이는 어떤 추수도 어떤 파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사진/Y. 할데이. <북폴리오> 제공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를 오르는 러시아 병사. 1945년 4월 30일 이른 오후 베를린 상공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 위해 러시아 병사가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오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파괴된 도시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살했다. 주검은 러시아군 카츄샤 로켓의 일제 포격으로 쓰레기장에서 불탔다. 이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제국 의사당 지하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5월 2일 새벽까지 버텼다. 러시아군의 총성은 그날 오후 3시에 멈췄다.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③-1 소련 공산당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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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니키타 흐루시초프 =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1963년 다차 정원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정치국원들이 보인다. 감성적이고 간혹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흐루시초프는 1956년 스탈린 체제에 맹공을 가했다.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거나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신념체계에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1956년 봉기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제거하려 한 헝가리인들을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63년 흐루시초프를 대신하게 될 레오니드 브레주네프가 떨어져 걷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보인다. 흐루시초프는 불같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녔고, 예전의 당 지도자들에게는 없었던 대중에 영합하는 재간도 있었다.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브레주네프. 사진/V. 무사옐랸. <북폴리오> 제공
브레주네프 = 다차에서 손녀와 함께 있는 가정적인 인물 브레주네프. 농촌과 숲 속에 있는 이런 집들은 노멘클라투라의 큰 특권 중 하나였으며 서열이 높을수록 크기가 더 커졌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외곽에 수수한 목조 다차를 가지고 있었다. 브레주네프는 다섯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크림에 있는 차르의 리비디야 궁처럼 그루지야의 흑해 연안에 있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진/J. 토레가노. <북폴리오> 제공
미하일 고르바초프 = 붉은광장의 레닌 영묘 위에 서 있다. 야심 많고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공산주의자였고 당의 죽음을 주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관용에서 분출된 힘에 희생당한 마지막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 보리스 옐친. 사진/G. 핀하소프. <북폴리오> 제공
보리스 옐친 = 대통령인 그의 권위는 건강 악화와 급작스러운 수상 경질, 불규칙적인 공식 석상 등장 등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거의 종말에 가까운 경제 몰락, 국내 분리주의자들, 해외 영향력 붕괴 같은,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끔찍하였고 비정상적인 대응은 문제들을 더욱 악화시켰다.

<북폴리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