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 = 1897년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 모습이다. 조숙하고 대담한 중앙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율리
마르토프가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 레닌은 법률가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경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895년 파업 물결에 연루될
때까지 실제적인 봉기가 아니라 경제이론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방치했다. 본명이 체데르바움인 마르토프는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
지식인이었다. 시베리아 유형이 끝난 뒤 그들은 서유럽으로 갔다. 그들은 이상한 동료들이었다. 마르토프는 자신이 사랑한 파리의 혼잡한 ‘라
로통드’ 카페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레닌은 파리를 혐오했고―“제길, 어떤 놈이 우릴 여기에 데려다 놓았는가!”―사도들을 도를레앙
대로에 있는 형편없는 카페로 데리고 가서 그레나딘과 소다를 병적으로 마셔댔다. 그들은 곧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분열했다.
1918년과 1919년에 마르토프는 대담하게 레닌의 테러를 비난했으며 망명지로 쫓겨나 1923년 사망할 때까지 볼셰비키 물결을 중단시키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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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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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 1916년, 그들은 이따금 가장 가까운 기차 종착역에서 1,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쿠츠크 주변의 거대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에서 생활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모자를 뒤로 눌러쓴 사람이 요시프 스탈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원수는 어릴 때 왼팔이
약해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의무 복무를 면했다. 나중에 스탈린에게 처형당하는 동료 볼셰비크 레프 카메네프가 뒷줄에서 그의 왼쪽에 서 있다. 황실
가족 살해를 명령한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앞줄의 납작 모자를 쓴 사람 바로 뒤에 서 있다. 그는 대부분의 구볼셰비키가 겪은 운명을 모면했다.
스탈린보다 앞서 독감이 그를 데려간 것이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정치 망명객들은 다가올 볼셰비키 체제보다 차르 체제하에서 훨씬 형편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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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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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이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1917년 7월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기도한, 실패한 쿠데타에 가담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도주했다. 레프 트로츠키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니콜라이 크릴렌코가
앞줄 중앙에 앉아 있다. 4개월 뒤에 “가장 혐오스러운 타입의 타락자”인 이 전직 소위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어려운 정치 사건을 전문으로 담당한 서른여섯 살의 법률가. 혁명은 케렌스키를 러시아의 지도자로 밀어 올렸으니,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육군 장관, 그 뒤에는 수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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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장한 레닌(왼쪽)과 레닌의 말년.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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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한
레닌 = 1917년 7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레닌은 잘 알려진 턱수염을 없애고 대머리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썼다. 그는 유능한
음모가가 아니었다. 가발이 벗겨져 동료 정치인들은 쉽게 그를 알아보았다.
레닌의 말년 = 레닌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3년 여름 이
사진을 찍을 즈음에는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원 40명으로 이루어진 의료팀이 그를 돌보았다. 레닌이 제일 좋아한 여동생 마리야
울리야노바의 간호도 받았다. 사진에서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뒤에 서 있는 동안 마리야가 레닌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레닌의 다차에 근무하던 한
정원사가 사진을 찍었다.
레프
트로츠키 = 영국의 비밀첩보원 로버트 브루스 로커트가 묘사했듯이, 레프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정신적 지도자인 레닌과 더불어 “기질
전체가…… 부르주아 혁명가를 서투르게 모방한 모습 그 자체였다.” (왼쪽)
군복을 입은 레프 트로츠키 = 군복을 입은 레프 ?光跆같?트레이드마크인 코안경을 걸치고 10월
쿠데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레닌이 서 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를 고무했다. 그의 열정과 웅변은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달필은 나중에 쿠데타를 붉은 10월의 영웅적인 신화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하게 생긴 장갑차량만이 무관심한
대중에게 정부가 전복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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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변호. 레프 트로츠키.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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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변호 = 레프 트로츠키가 붉은광장의 공원 벤치를 이용해 만든 임시 연단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로 인해 발발한 내전에서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특별 열차를 타고 전선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볼셰비키 군대를 규합하고 다그쳤다. 적군은 부르주아 장교와 전문가에게 많이 의존했다. “일부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 쪽으로 왔고, 일부는 새로운 것을 찾아왔으며, 일부는 대안이 없어서 왔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라고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썼다. “그리고 일부는 배신을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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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 사진(왼쪽)/G. 페트루소프.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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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인간
스탈린 = 강철 인간을 뜻하는 스탈린에게는 코바, 니샤라제, 멜리캰츠, 치지코프 등 많은 가명이 있었다. 그루지야의 한 오두막에서 요시프
주가시빌리로 태어난 소년은 1927년경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곧 수많은 테러를 가하고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편집증으로
인해 사진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산책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왼쪽)
가정적인 스탈린 = 스탈린이 아들 바실리와 딸 스베틀라나와 함께 있다. 독재자의 사생활은 가혹하고
비극적이었다. 1932년 한 파티에서 스탈린은 부인 나데주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봐, 한잔해.” 나데주다는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날카롭게 외치고 파티를 빠져나와 크렘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스탈린의 무례함은 나데주다를 부러뜨릴 마지막 한 올 지푸라기였고,
그리하여 그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1941년 또 다른 아들 야코프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스탈린은 러시아가 포로로 잡고 있던 독일군
장교들과 야코프를 맞바꾸자는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독일군의 대우는 이 거절을 사형선고로 만들었다. 스베틀라나는 젊었을
때, 스탈린이 “병적으로 박해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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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당들 사이에서.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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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
사이에서 =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맨 앞줄 왼쪽 끝에 앉은 흐루시초프는 훗날 스탈린의 학살행위를
비난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흐루시초프의 왼쪽에 검열관 안드레이 주다노프, 집단화
책임자 라자르 카가노비치, 삼류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앉아 있고 엉터리 관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별 볼일 없는 미하일 칼리닌이
스탈린의 왼쪽에 앉아 있다. 또 다른 생존자들인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니콜라이 불가닌이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
지나치게 비굴했던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몰로토프의 부인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카가노비치의 형이 처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스탈린에게 아첨했다.
맨 앞줄 오른쪽 끝에는 내전의 영웅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있는데, 그는 안장에서 턱걸이를 할 수 있다고 전해졌다.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열중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는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④ 예술의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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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파블로바 = 안나 파블로바가 리허설이 끝난 뒤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발레리나 파블로바는 미하일 포킨의 작품들, 특히 「죽어가는
백조」에서 맡은 배역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낙엽」을 포함해 10여 편의 작품을 직접 안무했다. 처음으로 순종 불독을 러시아에
들여왔으며 종종 그 녀석들과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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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 화가 일랴 레핀.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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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
화가 일랴 레핀 = 1910년 아동작가 코르네이 추코프스키가 초상화 제작을 위해 앉아 있는 동안 레핀이 톨스토이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읽고 있다. 톨스토이와 그 부인을 그린 유명한 레핀의 초상화가 이젤에 놓여 있다. 혁명 이후 스탈린은 추코프스키를 보내 핀란드에 있는 영지에서
돌아오라고 레핀을 설득했으나 레핀은 거절했다. 레핀은 도저히 편지 봉투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신 레닌그라드라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어떤 것도 배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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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 사진/K. 불라.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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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 = 톨스토이는 농민
복장을 좋아했지만 철두철미하게 귀족이었다. 또한 이 위대한 소설가는 군인이자 지주이며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19세기 중반 팽창주의적인
러시아가 카프카스로 밀고 들어가던 포병 장교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에서 포대 지휘관이었고 그 후 툴라 주의 야스나야폴랴나에
있는 대가족 영지에 정착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는 악에 대한 무저항에 바탕을 둔 자신의 윤리를 설파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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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심 고리키와 위대한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밑바닥 인생의 산물인 두
인물이 1900년 얄타에서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 샬리아핀은 1920년대에 프랑스로 도피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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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 극작가이자 의사인 안톤 체호프가 멜리호보에 있는 자택 계단에서 애견 히바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체호프는 자신이 찬양해
마지않던 작가 막심 고리키가 좌파적 관점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르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 모스크바 학술원을 탈퇴했다. 『벚꽃동산』을 쓴 1904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당시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고리키와 샬리아핀이 장례식에 함께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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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이사도라 덩컨.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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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이사도라 덩컨 = 1922년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이 미국인 무용가는 고대 그리스의 꽃병에 있는 형상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개발한 물 흐르는 듯한 춤 스타일을 가르치기 위해 모스크바에 학교를 설립했다. 외국인 부인보다 열일곱 살 연하인 예세닌은
1925년에 자살했다. 이사도라 덩컨은 2년 뒤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끼는 바람에 질식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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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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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 미래파 시인이자 극작가, 그리고 풍자작가인 마야코프스키. 차르 체제 말기의 앙팡 테러블(무서운 아이-옮긴이)이었던 그는
볼셰비키의 집권을 반긴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직접 ‘카니발 오렌지’색을 칠한 모스크바의 “시인들의 바”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손님들에게 “오늘날 우리 코트의 마지막 단추에 이르기까지 삶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전 당시 그는 비어 있는 상점 창문에 붙일
선전 포스터들을 디자인했다. 그는 당 노선을 따랐고 다른 예술가와 작가에 대한 악의적이고 경솔한 공격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볼셰비즘의 관료제와
무분별을 혐오하게 되면서 볼셰비즘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으며 1930년 자살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1958년 10월 노벨상 수상을 자축하고 있다. 그해 출간된 혁명 대서사 『닥터 지바고』는 정치적
폭발을 가져왔다. 소설은 금지되었으며, 그도 “비열한 자”로 묘사되어 작가동맹에서 쫓겨나고 노벨상을 거부해야만 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1946년 제크로서, 수용소 군대의 기록자. 전시에 포병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반스탈린 발언 때문에 체포된 그는 “악의적인
중상모략” 혐의로 재판 없이 8년 동안 수용소형에 처해졌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인 이 노벨상 수상자는 1974년 수갑을 찬
채 스위스행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져 트로츠키 이후 소련에서 추방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버몬트에 정착했는데 그곳의 길고 추운 겨울은
러시아를 떠올리게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1908년 소년 시절에 나비를 예찬했던 그는 나중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소설인 『롤리타』를 썼다. 나비에 대한 그의 유명한
열정은 러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이미 싹트고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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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⑤ 노동자와 농민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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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의 노동자들.
사진/ I. 가브릴로프.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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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의
노동자들 =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팀이 훈련도 받지 않고 허술한 얼굴 가리개만 쓴 채 체르노빌에 투입되었다. 방사능 수준이 너무 높아서 버스
운전사들은 발전소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수습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고향지역으로 돌아와 아파
드러누웠지만 연락이 잘 안 되어 지역 병원들은 자신들이 방사능 오염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년
피오네르들 = 이들은 “콜호스 수확의 최우수 전사”가 되어 부상으로 배지를 받았다. 당은 예전에 교회가 그랬듯이 아주 어린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볼가 강의
짐꾼들 = 볼가 강의 짐꾼들이 차와 빵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차는 각설탕에 적셔 빨아 마셨다. 전쟁 전 차르 시대의
기준에서 볼 때 음식과 신발이 형편없던 이들은 볼셰비키 체제하에서 이와 같은 배급품을 받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일인당 곡물 생산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도록 1913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바쿠
유전지대 = 1933년에도 지금처럼 환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외국 석유회사들이 이권을 착취하던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바쿠에서 볼셰비키 선동가로 활동했다. 이 나라의 거대한 석유 및 광물 자원은 당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와
가스 생산국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 = 러시아의 지방 거리에서. 지방에서는 달 표면처럼 어떤 사건이나 변화도 없었다. 봄이나 가을에 진흙을 피하려고 깔개를 깔았다.
여름에는 모든 행인들이 뒤에 작은 흙먼지 구름을 달고 다녔다. 겨울이면 거리는 온통 얼음투성이었다.
여성
농민 = 경제가 붕괴하면서 식량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많은 여성들 중 한 명. “해방자”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했다. 70년 뒤 스탈린이 새로운 형태의 농노제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농촌 여성은 “노예의 딸, 노예의 어머니, 남편의 노예라는
삼중 노예 상태”의 전통적인 운명을 다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단농장의
점호 = 모스크바지역의 한 농장. 집단농장들이 과학적으로 경영되고 고도로 기계화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하는 여성 농민들의
원시적인 힘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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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천적인 러시아인들. 사진/F. 구바예프.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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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천적인
러시아인들 = 러시아인들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집에서 만든 보드카로 미래를 위해 건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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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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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백해 운하 프로젝트 현장에서 끔찍한 조건하에 일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을
찍은 희귀한 사진이다. 발트 함대를 위해 운하를 설계했으나 함정이 통과하기에는 수심이 너무 얕았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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