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안중근 '가문의 비극' 아시나요

이강기 2015. 8. 29. 20:19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안중근 '가문의 비극' 아시나요    2012/03/08 21:48
 
 

[안중근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연합뉴스
  • 입력 : 2009.10.21 16:18 / 수정 : 2009.11.01 11:54, 조선일보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아들 안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오른쪽 첫번째 앞줄)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에 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다쓰오(중앙)와 아이바 기요시(오른쪽) 및 통역 촉탁이다. / 연합뉴스

백범이 단죄하고 싶어한 아들 안준생
1939년 이토 아들과의 ’화해극’에 동원

1945년 8월15일 “왜적이 항복한 뒤에 우리도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임시정부 수뇌진 중 백범 김구 일행은 그해 “11월5일 선발로 중경을 출발하여 5시간의 비행 끝에 (그날 오후) 6시에 상해에 착륙했다.”

이때의 감회를 백범은 “13년 전에 떠났던 상해의 공기를 비로소 다시 호흡하게 되었다”고 읊었다.

13년 전 상해를 떠날 때에 비해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는 몇십 배가 늘어난 사실을 지적하면서 백범은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생활난이 더욱 심해진 까닭에 각종 공장이나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업자들이 속출했다. 그런 가운데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ㆍ장덕로ㆍ서병호ㆍ한진교ㆍ조봉길ㆍ이용환ㆍ하상린ㆍ한백원ㆍ원우관 등 불과 10여 명뿐이었다. 그들의 굳건한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의 집에서 만찬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는 그만큼 일본 수중에 떨어진 상해에서 ’민족지조’를 지키며 살아간 조선 동포는 드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백범은 유독 한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에 보이는 구절이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배경식 역주, 백범일지 619쪽, 너머북스, 2008)

안준생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백범은 이토록 분노했을까?

1939년 10월7일, 상해 거주 조선인 14명으로 구성된 ’만선시찰단’이 경성에 도착한다. 친일단체 상해 주재 조선인회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 일행은 경성 도착과 함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면담하기도 한다.

이들의 고국 방문 소식은 동아일보조선일보,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보도됐다.

이들 신문보도를 비교하면 기사 비중에 확연한 차이가 난다.

동아일보 39년 10월10일자는 ’상해조선인 실업가 작일(昨日.어제) 환영회 성황’이라는 1단짜리 기사에서 간단히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이 고국을 찾아 환영회가 개최된 사실만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10월2일자에서 ’상해 재류(在留) 동포 향토 방문시찰단 내(來) 7일 오후에 입경’이라는 2단짜리 예고기사를 수록한 데 이어 10월7일자 석간에서는 ’30년만에 보는 고토(古土), 물심간(物心間)에 신개벽’이라는 3단 기사를 통해 이들의 방문 사실과 활동, 그리고 방문자 명단을 첨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방문자 명단에서 ’안준생’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안준생은 10월15일, 박문사(博文寺)에 나타난다. 서울 장충단공원,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을 찾은 것이다. 정식 명칭이 보리사인 이 사찰이 박문사라고도 한 까닭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찰에 다름 아닌 안중근의 둘째아들 준생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준생은 박문사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친일신문 경성일보 10월16일자에는 ’망부(亡父)의 속죄는 보국(報國)의 정성으로’라는 제목 아래 ’이등공(伊藤公)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준생(중근의 유자 遺子 )군’이라는 부제 아래 준생이 전날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추선(追善) 법요를 거행했다는 행적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준생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다음날인 10월16일, 준생은 조선호텔에서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난다. 당시 일본광업공사 사장인 분키치는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이다.

이 둘의 만남을 담은 ’역사적인 사진’은 매일신보 10월18일자에 ’극적인 대면ㆍ여형약제(如兄若弟.형 같고 동생 같고),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영원히 풀다)’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수록된 기사에 첨부돼 있다.

이들의 만남을 담은 사진을 일본인 근현대사가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이토 후손인 이토 히로아키(伊藤博昭)에게서 찾아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간된 근간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한국에서는 도서출판 선인 출판)에 소개했다.(398쪽)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에 대해 “자세한 경력은 알 수 없다”면서 중일전쟁 이전에는 독립운동에도 관계하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이 1950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그다음 해에 죽었다는 다른 사람의 연구성과를 인용했다.

안준생의 행적, 그중에서도 1939년 고국 방문 직전까지 활동 상황과 고국 방문 때의 더욱 자세한 행적은 쇼와(昭和) 14년(1939) 10월17일 조선동촉부에서 작성한 ’재(在) 상해 조선인 만선시찰단 선내(鮮內.조선 내부) 시찰 정황’이라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 자료로 남아있다.

연합뉴스가 최근 발굴한 이 자료에 의하면 고국 방문 당시 안준생은 33세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상해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안중근이 국외로 탈출할 때 어머니 태내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백범이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 많은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유독 안준생을 거론하며 그를 단죄하려 한 까닭은 바로 이런 행적에서 비롯된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백범은 동학에 참여해 황해도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는 안중근 집안에 기거하며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안중근 집안과는 그런 인연이 있고, 더구나 안중근의 의거를 누구보다 높이 산 백범이지만, 아무리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노골적인 친일행적을 보이는 안준생을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총독부나 일본으로서도 안준생은 다름 아닌 안중근의 아들이기에 내선일치에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안준생을 ’이용’하고자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어쩌면 안중근의 혈육으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 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중근이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중근 '가문의 비극' 아시나요

입력 : 2009.10.27 03:09 / 수정 : 2009.10.27 09:03

 

동생 정근·공근… 유해 찾을 길 없고
여동생 성녀의 묘도 방치… 큰아들 분도는 독살당해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현수막이 서울 시내 곳곳에 걸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회의가 국내외에서 열리고 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도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안 의사에게 쏟아진 관심에 비해 독립운동 명가인 안중근 가문의 비극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26일과 27일 안중근·하얼빈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안중근 가문의 백세유방(百歲遺芳)과 망각지대〉에서 안중근의 형제 자매와 안중근 직계 유족이 하얼빈 의거 여파로 겪은 비극에 주목한다. 독립운동 와중에 이역 땅에서 숨을 거둔 안중근의 동생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의 유해는 찾을 길 없고, 부산에 있는 여동생 안성녀의 묘도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정근은 형이 순국한 1910년 봄 동생 공근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한 정근은 해방 직후 한국적십자회 회장을 지내며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는 1949년 뇌병이 재발해서 상하이 만국묘지에 묻혔는데, 그해 5월 상하이가 인민해방군에 점령되면서 묘의 행방은 찾을 수 없게 됐다.

안공근은 임시정부 외무차장을 지냈고, 이봉창·윤봉길 의거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9년 5월 충칭(重慶)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해 시신의 행방도 찾지 못했다. 안정근의 딸 미생은 김구의 큰아들 김인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1945년 충칭에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생은 1947년 미국에 건너간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묘가 어디에 있는지, 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살아 있는지 불투명하다.

도 교수는 안 의사 큰아들 분도는 7살 때 일제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고, 차남 준생도 일제에 의해 '정신적 살인'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상하이에 살던 준생은 1939년 총독부 주선으로 경성을 방문했을 때 이토 아들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며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 '민족 반역자'로 지목당했다. 해방 후 귀국길에 오른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도진순 교수는 "안중근 의거로 산산이 흩어진 유족의 삶과 죽음을 수습해주는 것은 안중근 유해 발굴 못잖게 중요한 일이다"고 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황제〉를 통해 고종의 하얼빈 의거 개입설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이 교수는 지난 8월 고종이 밀사를 파견, 안중근 구출작전에 나섰다는 사실을 일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낸 바 있다. 이 교수는 하얼빈 의거를 1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스티븐스 총격사건과 연결시켰다. 저격, 총살 대상이 모두 보호조약을 강제한 주동자라는 점, 스티븐스 총격을 주도한 정재관이 고종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저격 모의를 주도한 점, 고종이 1902년에 만든 비밀 항일 정보기관 익문사 요원이 샌프란시스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점 등이 고종의 하얼빈 의거 개입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