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대만 2.28 대학살 진상

이강기 2015. 8. 29. 20:13
대만 2.28 대학살 진상    2012/03/08 16:41
 
 

'대만 2·28사건 해법'

(1) 대만 '2·28' 대학살 진상
    -- 제주도 '4·3'의 거울(리영희 교수)
(2) 50년만에 조명된 대학살극
    -- 대만 '2·28' 50돌 현지취재기(김종민 기자)

최근 '대만 2·28사건'과 관련, 대만정부가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그리고 배상금을 지급키로 결정했다는 외신보도는 이 사건이 '제주 4·3'과 그 내용과 성격이 흡사하다고 해서 도민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아울러 "이처럼 남의 나라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있는데, 도대체 '제주 4·3'의 현주소는 무엇이냐."고 자성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또한 구체적으로 '대만 2·28사건'은 어떤 사건이냐는 점에 관심이 높게 일었다. 이에 본지는 우리시대 대표적 지성이자 중국현대사 전문학자인 李泳禧 교수(한양대)에게 급히 원고를 청탁, '대만 2·28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까지의 역사를 싣는다.


臺灣 '2·28' 대학살 진상
        --- 濟州島 '4·3'의 거울(鏡)


      李 泳 禧

지도를 펴놓고 아시아 지역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한반도와 제주도의 모습과 중국대륙과 대만도(臺灣島)의 모습의 유사성에 매혹되고 그 절묘함에 감탄할 것이다. 각기 본토의 남쪽바다 위에 비스듬히 떠 있는 대만과 제주는 그 지리적 유사성 못지 않게 그 섬의 역사와 주민의 운명에도 슬픈 유사성이 있다.
본토와의 역사 관계에서 이 두 섬의 선조들은 다같이 몇 백년의 한 맺힌 슬픈 삶을 살아왔다. 이름은 각기 한 나라의 백성인데 실제로는 본토(뭍)의 왕조와 그 백성들에게서 '국내식민지'의 대접을 받아 왔다. 제주도민의 역사는 이 측면에서 바로 대만 주민의 역사이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섬의 선량한 주민들은 1947년과 1948년 봄에 각기 겪은 처절한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지정학적 조건이 그들의 운명적 조건임을 거의 같은 시각으로 깨닫게 된다.
1947년 2월 28일,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국민당(國民黨) 정권에 의해서 감행된 대만주민 대학살사건(2·28사건)과 그 바로 1년 뒤인 1948년 4월 3일, 미군정통치하의 제주도에서 자행된 대학살(4·3사건)이 그것이다. 이 두 사건의 간략한 설명과 의미의 비교는 제민일보 4월 24일자 양조훈 편집부국장의 글에 맡기고, 필자는 대만의 '2·28사건'에 관해서만 그 시말경위를 적기로 한다.
'2·28사건'의 진상 파악을 위해서는 먼저 1947년의 중국과 대만의 정세를 알아야 한다.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권은 철저하게 부패·타락한 반민중적 소수 재벌·군부지배의 극우·반공주의 정권이었던 까닭에 20년간에 걸친 모택동(毛澤東)의 중국공산당의 혁명전쟁에 패배하여 중국대륙의 양자강 이북의 땅과 인민을 상실한 때였다. 미국이 1945년 8월 이후 55억달러(당시 가치)의 경제원조와 수십만명의 미군의 직접지원, 수 십개 사단의 국민당군 조직과 현대적 미국식 무장, 게다가 미국의 총력을 기울인 정치·외교적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소수 재벌과 군벌의 사설집단격인 국민당정부군은 무장도 제대로 없는 농민의 군대인 중국공산당의 혁명군에 의해서 중국 전역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었다.
인류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치욕적인 정권붕괴는 없다. 10대1 이상의 우월한 군사력이 그렇게도 비참하게 패배한 예는 세계의 군사(軍史)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인민을 착취하는 정권과 군대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과 군대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되는가 하는 모범적 답안을 인류 앞에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국민당 정권은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태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참패와 참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과의 20년 반혁명전쟁에서 패배한 국민당정부가 갈 곳은 남지나해를 건넌 대만밖에 없었다. 1947년 초, 장개석 정권은 5억의 인민에 쫓겨서 대만으로 도주하기 위한 예비작전으로 장개석의 심복인 대만행정장관 진의 장군(陳儀, 1893∼1949)을 대만경비사령관에 겸임 발령했다. 대만에 대한 사실상의 군사정권이며 대만 주민에 대한 포악한 군인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직접적 군사통치에 앞서서 이미 대만주민들 사이에는 폭동의 분위기가 높아 가고 있었다. 대만인은 조선(韓)민족보다 일본통치 하의 경험이 길다. 일·만(日·灣)전쟁 패전(1895)으로 일본식민지가 된 대만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해방되었을 때에, 장개석 지배하의 중국 본토의 동포들보다 높은 경제·사회·문화적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대만 주민들은 일본 지배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중국인'이 된 것을 기뻐했고 장개석 정부에 충성을 맹서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대만인 앞에 나타난 장개석 정권의 본토인 지배자들은 1년도 못 가서 섬 주민의 원수로 화했다. 본토에서 온 권력자들은 일본인이 놓고 간 공장·가옥·회사 등 재산(敵産)을 원주민들에게서 빼앗아 사유화하고 착복했다. 일본이 남기고 간, '국유화'된 원자재·가공품·농산물은 파렴치한 국민당 정부·군 요인과 그들의 앞잡이 상인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탕진되거나 밀수행위로 본토에 반출되었다. 어민의 어선은 대만 주민 소유자에게서 강제로 거두어다가 권력자들과 끈이 닿아있는 자들의 밀수행위에 이용되었다.
원주민은 거의 일체의 활동적 위치에서 배제되었다. 모든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총재·청장·국장·위원 등 노른자위 자리는 대만성(臺灣省) 행정장관 진의 장군의 측근세력이 독차지해 버렸다. 그들은 마치 일본을 대신해서 대만에 들어온 '점령군'처럼 원주민 동포를 억압·차별·멸시·착취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국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대만 주민은 차라리 일본식민지 하의 생활과 처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미국정부의 한 공식 조사보고에 따르면, 일본 치하에서 5만명이었던 원주민의 각종 생산산업 취업인 수가 '2·28사건' 직전인 1947년 1월에는 5천명 이하로 줄었다. 활동인구 10명중 9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그 가족이 길거리에 내쳐진 것이다. 본토에서 쳐들어온 자들이 장악하고 운영하는 기업들에는 20억원(대만元)의 정부지원이 융자됐는데 대만인의 그것에는 모두 8백만원 밖에 제공되지 않았다. 대만주민의 경제생활은 졸지에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식민지 하에서도 없었던 콜레라가 30여년만에 처음 발생했다. 미약한 의료·위생시설은 본토인 환자에게만 문을 열었다. 각급 학교의 교육수준은 현저하게 떨어졌고, 본토에서 들어온 교사들이 장악한 학교에서는 섬주민 학생들과의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었다.
물가고는 대만 원주민을 가혹하게 억눌렀다. 본토 정권이 들어온 1945년 11월부터 '2·28' 직전의 1947년 1월 사이에 식료품은 6.5배, 의류는 5배, 비료는 2백70배, 건축자재는 14.3배로 뛰었다(대만은행 발표). 대만의 재화(財貨)가 섬 밖으로 빠져나갈 뿐 그에 대한 대가가 대만 주민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알게 되었다.
더 직접적인 촉발요인이 있었다. 1946년 두 번의 쌀 수확은 풍년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1947년 1월에는 대만 역사상 유례없는 기근이 들었다. 정부는 명분상으로는 쌀의 균등분배를 위한다면서 쌀의 현물세 징수를 강행했다. 그 당시, 장개석 정권의 경제·정치적 후견자였던 미국의 국무성 공식보고에도, 대만인의 손에서 강제수납된 쌀이 본토인 권력자들이 소유하는 창고에 가득히 쌓여 있었고, 그 상당부분이 본토의 장개석 정권의 권력자들과 군대를 위해서 반출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미 국무성 1947년 발행, {中國白書}).
대만의 장개석 정권 통치기관은 이 쌀 기근을 오히려 대만주민의 장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군대를 풀어서 농촌과 도시의 원주민 논밭과 가택을 수색했고,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은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당했다. 말단직 경찰과 국민당 군대의 졸병들까지도 원주민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무제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대만 원주민이 50년간 섬긴 일본 식민경찰과 군대는 거칠었지만 규율이 엄했다. 될 일과 안될 일의 경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동포정권'인 그들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을 뿐 아니라 규율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집단이었다. 대만인들의 원한은 안으로 안으로 곪아 들어갔다. 조그마한 계기만 있으면 거대한 불을 뿜을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극우·반공주의 장개석 정권의 야만성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한, 그리고 분노케 한 '2·28사건'은 작은 일로 시작됐다. 이날 밤, 무장한 일단의 전매청 관리들과 사복경찰보조원들이 한 여자 노점 담배장수를 덮쳐, 탈세품이라는 이유로 몇 푼어치 안되는 사제담배와 담배값 몰수하였다. 그 아낙네와 두 어린 자식이 이에 항의하자 전매청원은 여자를 매질하였다. 폭행을 당한 담배장수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격분한 주민들이 항의하자 장 정권의 말단관리는 총기를 난사하여 그중 한 사람을 죽이고 경찰서로 도망쳤다. 격분한 대만 원주민들이 경찰서를 포위하여 범인의 인도를 요구하자 헌병대가 긴급출동하여 그들을 구출해 나갔다. 군중은 일체 폭력을 쓰지 않고 헤어졌다.
다음날인 2월 28일 아침, 더 많은 대만주민이 그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시작하여, 장개석 정권의 배후자인 미국영사관 앞을 지나 전매청으로 향했다. 그들은 무장한 전매청원과 깡패 청년단원들의 폭행에 항의하고, 책임자의 처벌과 전매청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시내를 행진해 가고 있는 동안, 때마침 길가에서 원주민 노점상을 패고 있는 두 사람의 전매청 직원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격분한 원주민 데모대원들에 의해서 맞아 죽었다. 더욱 분노한 원주민들은 근처에 있는 수도(省都) 대북(臺北)의 한 지청 건물로 밀고 들어가 물건을 끌어내어 길 가운데 쌓아 놓고 불질러 버렸다. 본토인 직원들은 도주했고 원주민들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성청(省廳)으로 향했다. 그들은 여기서 행정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 때, 건물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부군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군중 속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수명이 즉사하고 수 십명이 부상당했다.
이 무차별 사격의 소식은 순식간에 전 대만 각지로 전해졌다. 그 기관총 소리는 대만 원주민 전체에 대한 사격으로 비쳤다. 먼저 대북시(臺北市)에서 원주민이 들고일어났다. 많은 본토인이 폭행당하고, 승용차가 불살라지고, 본토인 관리들의 사무실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의 현장을 목격한 미국정부 기관원의 공식보고서를 보면, 원주민들은 본토인의 개인 집이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은 서로 말리고 삼가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고 쓰여 있다.
일단 소요가 잠잠해진 이날 밤중에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본토인 군부대와 깡패단원들이 트럭에 분승하여 느닷없이 대북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원주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길에 나온 사람뿐 아니라 아무 집이나 쳐들어가 총을 쏘고, 체포하고, 끌고 갔다. 미국 국무성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북시에서 이 날 대만 원주민이 무기를 휴대했거나 무기를 사용했다는 한 건의 보고도 없었다고 한다.
아직도 본토에 있는 장개석 정권은 대만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할 생각은 없고, 탄압으로 대처하려 했다. 3월 8일 오후, 중무장한 2개 사단 병력이 본토에서 고웅항(高雄港)과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여 대만섬 전역에 급송되었다. 그들은 읍(邑)이나 면(面)은 물론 농촌마을까지 샅샅이 누비면서 전면적인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다. 그들은 총을 쏘아 죽이기도 하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고 미국정부 보고서가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대만 원주민에 대한 본토정권의 무차별 살육작전이 전개되었다. 이것이 바로 본토정권이 말하는 이른바 '대만주민의 반란'이다.
그후의 전개는 더 쓸 필요가 없겠다. 장개석 정부는 일체의 책임이 대만 원주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만 반란'은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종으로 시작되고 계속되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만주민의 항쟁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에 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으나 반론이 압도적으로 유력하다. 가령 있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거의 무시할 정도밖에 안된다는 평가가 지금은 확립되어 있다. 전체 사태의 과정에서 명백하듯이 그것은 본토인들의 학대에 대한 대만주민의 자연발생적 반응이었다.
공산주의자나 그 조직은 식민지 일본치하에서 완전 소멸되었다. 소수의 재생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대만주민의 대규모 반란을 조직할 능력은 거의 없었다는 판단이다. 공산주의자의 음모설은 1975년 3월 인민일보(人民日報)에 실린 한 중국공산당 지도자 료승지(廖承志)의 '2·28' 28주년 기념사를 근거로 삼고 있다.

'2·28' 起義, 是中國共産黨領導的新民主主義革命的組成部分'
('2·28' 의거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한 신민주주의 혁명이 이룩한 한 부분이다).

 

at 2004-09-16 (thu) 10:19


그러나 이 발언은 당시 별로 역할을 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서 당의 자기선전에 이용한 흔한 '기념사적' 발언으로 보인다.
가장 신빙성 있는 평가는 미국정부의 한 특별조사보고서일 것 같다. 미국정부는 전면적으로 장개석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만큼 '2·28 반란'의 전후 상황에서 대만주민의 편을 들 까닭이 없는 당사자이다. 미국정부는 장 정권과 대만주민의 '2·28' 목격자들과 외국인 관측자들의 증언 및 정보보고 등을 면밀히 조사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결론지었었다.

 

…해외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 사람이 몇 몇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만큼 미미한 것이었다. 1946년 여름 한 때에, 본토에서 온 공산주의 팜플렛이 다소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었다.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은 이곳에서는 (본토에서처럼) 공산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거의 없었다. …1947년 3월 1일까지는 대만에서는 공산주의란 어떤 형태로든 거의 묵살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였다는 사실이 모든 증거로써 확실하다….
(미국 국무성의 CHINA WHITE PAPER, 李泳禧 譯 {中國白書}, ?
'대만사태' 결론부).

본토 중국의 학계에서도 '2·28 기의(起義)'는 공산주의자(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만주민의 자연발생적 민주운동 반란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28 起義' : 抗日戰爭勝利后, 臺灣省各族人民反對國民黨反動統治的武裝起義. 1947年2月27日, 國民黨臺灣專賣局査緝員和警察在臺北行凶毆打小販, 幷開槍打死市民一人, 28日臺北市民擧行罷市和游行請願提出徵凶, 賠償, 取消專賣局等要求, 又被槍殺三人, 傷多人, 激起全省人民的憤怒, 爆發了大規模武裝起義, 幾天之內控制了臺灣大部分地區. 國民黨政府一面組織'處理委員會'欺瞞人民,一面調集大軍隊鎭壓. 3月8日起, 在全(臺灣)省進行大逮捕, 大屠殺, 群衆被殺3万余人, 至13日起義失敗. 這次起義是一場烈烈的愛國民主運動….
(항일전쟁 승리 후 대만성의 여러 부족 인민은 국민당의 반동적 통치에 반대하여 무장궐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국민당 대만성 전매국 단속반원과 경찰이 대북에서 담배 소상인을 폭행 구타하고, 총을 쏘아 시민 1명을 죽였다. 28일에는 대북 시민이 전면 철시하여 데모를 시작, 책임자 처벌과 배상, 그리고 전매국의 폐지 등을 요구하는 청원을 했다. 이 때 국민당군에 의해서 또 3명이 총에 맞아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전 대만성 주민들이 분노 궐기하여 대규모의 무장항쟁이 폭발했다. 그들은 며칠 사이에 대만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이에 놀란) 국민당 정부는 한편으론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인민을 기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 진압했다. 3월 8일부터 대만 전지역에 걸친 대대적인 체포와 대량학살작전으로 3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3일에 이르러 민중의거는 실패했다. 이 의거는 대만주민들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민주화운동이었다(필자주=원문은 簡字표기이지만 보기쉽게 舊漢字로 고쳤다).
('辭海' 歷史分冊(中國現代史), 上海辭書出版社(1984年版), 27∼28쪽).

그러면 '2·28'의 피해자는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해서는 제주도 '4·3'의 희생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 이유로 여태껏 밝혀진 바 없다. 장개석 정권의 대만 통치는 그때부터 1987년에 해제되기까지 수십년 동안 줄곧 계엄령 통치였다. 민간인에 대한 재판도 군사재판에서 했다. 군이나 경찰 및 행정기관의 '2·28' 관계 문서와 기록은 거의 다 정권에 의해서 파기되었다.
당시의 군사령부의 한 통계자료에는 사망 4백8명, 부상자 2천1백31명, 실종 72명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臺北 {中央日報} 1992년 1월 25일자). 그러나 이 숫자를 믿는 대만사람은 없다. 현지의 당시 실정을 바탕으로 원주민 사회에서는 3만 또는 4만명이라는 설이 믿어지고 있다.
'2·28 사건'은 대만주민의 민주항쟁이었고 무엇보다도 생존권투쟁이었다. 이왕에 죽임을 당할 바에는 싸우면서 죽자는 강요된 저항이었다. 지난 45년 동안 그 진상은 일체 밝혀진 바 없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그 일에 관해서는 '금기(禁忌)'의 딱지가 붙여졌다. 대만주민들은 극우·반공주의 장개석(蔣介石)·장경국(蔣經國) 부자 정권 하에서 45년 동안 한과 눈물을 삼키며 살아왔다.
장경국 총통의 죽음으로 그토록 극악했던 극우·반공주의 정권의 오랜 폭정도 끝나고 대만 출신 이등휘(李登輝) 총통의 시대가 되었다. 대만 원주민의 정치세력인 민진당(民進黨)이 오랜 싸움 끝에 합법정당으로 인정받고 의회(立法院)에 진출했다. 민진당은 그 합법적 정치활동의 첫 목표를 '2·28'의 진상을 역사에 밝혀내는 것으로 삼았다.
대만주민의 45년 원한의 작은 일부가 1992년 2월 27일에 공식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날, 입법원은 '2·28' 45주년의 날 회의에 앞서 전체 의원이 기립하여 '2·28' 희생자에 대한 1분간의 묵도를 드렸다. 행정원장(총리)은 '2·28' 희생자가족 대표 20명을 초대하여 오찬을 베풀고 다음과 같이 정부의 태도를 밝혔다.

당초에 그 사건의 책임자가 누구였든 간에, 현재의 정부는 당시 정부의 연장이다. 따라서 현 정부는 그 사건에 관해서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즉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뜻을 천명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가족대표단은 ①'2·28'에 대한 정부의 공식사과 ②유가족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 ③사건의 진상과 책임자 규명(유가족대표들은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늙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④호적상 및 기타 공식문서상의 '전과자' 기록 말소 ⑤사상자에 관한 증거사료의 발굴·편집·공포 ⑥'2·28' 사료관(史料館) 건립 ⑦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의 모든 불이익 폐기와 명예회복 조치 ⑧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 ⑨'2·28' 기념일 제정 등을 요구했다.
1년간의 갈등과 협상 끝에 마침내 1993년 2월 28일, 집권당이자 45년전 대학살의 책임집단인 중국국민당은 공식적으로 이 요구를 받아들여 '2·28 화평촉진회(和平促進會)'를 창립했다. 당과 정부는 대만의 각 성(省)과 시(市)에 이 사업을 전개할 당정위원회를 창설했다. 민진당은 28일 오후 2시 28분 정부와 국민당, 그리고 입법원과 행정원의 공식결의를 '공식사과'로 받아들여 대만 전지역에서 당원과 주민 합동 위령제와 축제를 벌였다.
정부는 4월 들어 배상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오는 8월 말 완공예정인 기념비가 정부예산으로 건설 중에 있다. 이렇게 해서 45년전 전세계를 분노케 했던 장개석 반공주의정권의 희대의 백색학살에 대한 죄를 씻는 속죄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수 만명의 원혼이 이것으로 고이 눈을 감을 지는 알 수 없다. 원혼의 후대들은 그러기를 빌고 있다.


(2) 50년만에 조명된 대학살극
    -- 대만 '2·28' 50돌 현지취재기(김종민 기자)


 1997년 2월 28일 오전 9시30분, 대북시(台北市) 주최 '2·28사건 50주년 기념의식'이 열리는 순간은 우기(雨期)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다. 기념식이 거행된 '2·28화평공원'은 총통부와 마주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기념탑 앞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부총통 연전(連戰), 대북시장 진수편(陳水扁), 중앙연구원장 이원철(李遠哲) 등 내빈과 유가족이 참석했다. 기념행사는 희생자를 위령하는 1분간의 묵념에서부터 시작돼 부총통의 기념비 제막, 추도사와 헌화 순으로 1시간 가량 계속됐다.

50년만에 햇볕에 드러난 '2·28'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은은하게 울려퍼진 현악단의 연주는 결코 음울하거나 비장한 것이 아니라 다소 빠른 템포의 밝은 음악이었다. 국민당 군에 의해 벌어진 참혹한 대만주민 학살극이 50년만에 비로소 햇볕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같은 공원 안에 건립된 '2·28기념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개막테이프를 끊었다.
 2월 초부터 일기 시작한 추모행사는 이날을 전후해 미술전, 음악회, 출판기념회,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부터 기념마라톤대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행사가 대만의 11개 현시(縣市)에서 일제히 열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정부의 공개사과, 진상규명, 희생자 명예회복, 유가족 보상은 이미 마무리됐고 학생들 교육을 위한 보조교재도 마련됨으로써 2·28사건은 제대로 자리매김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기념비 비문을 둘러싼 논란은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핫이슈였다. 당초 기념비는 1995년 대북신공원(台北新公園)을 2·28화평공원으로 개명하고 기념탑을 세울 때 함께 조성됐다. 그러나 27일 오후까지만 해도 기념비에는 '2·28기념비'라고만 적혀 있었다. 신문에서는 이를 '유비무문(有碑無文)'이라고 표현했다.
 비문 논쟁의 핵심은 당시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蔣介石)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비문은 기념비를 세우고도 2년간이나 논란을 벌인 끝에 28일 비로소 완성됐다. 우선 사건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리고 진상규명의 역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비문을 살펴보자.


二二八紀念碑文

一九四五年日本戰敗投降, 消息傳來, 萬民歡騰, 慶幸脫離不公不義之殖民統治. 거料台灣行政長官陳儀, 肩負接收治台重任, 각不암民情, 施政偏頗, 기視台民, 加以官紀敗壞, 産銷失調, 物價飛漲, 失業嚴重, 民衆不滿情緖瀕於沸點.
一九四七年二月二十七日, 專賣局人員於台北市延平北路査緝私어, 打傷女販, 誤殺路人, 激起民憤. 次日, 台北群衆遊行示威, 前往長官公署請求懲兇, 不意竟遭槍擊, 死傷數人, 由是點燃全面抗爭怒火. 爲解決爭端與消除積怨, 各地士紳組成事件處理委員會, 居中協調, 竝提出政治改革要求.
不料, 陳儀만한剛愎, 一面協調, 一面以士紳爲奸匪叛徒, 逕向南京請兵. 國民政府主席蔣中正聞報, 卽派兵來台. 三月八日, 二十一師在師長劉雨卿指揮下登陸基隆. 十日, 全台戒嚴. 警備總司令部參謀長柯遠芬·基隆要塞司令史宏熹·高雄要塞司令彭孟緝及憲兵團長白慕陶等人, 在鎭壓淸鄕時, 株連無辜, 數月之間, 死傷·失종者數以萬計, 其中以基隆·台北·嘉義·高雄最爲慘重, 事稱二二八事件.
斯後近半世紀, 台灣長期戒嚴, 朝野금若寒蟬, 莫敢觸及此一禁忌. 然寃屈積鬱, 終須宣洩, 省籍猜忌與統獨爭議, 尤屬隱憂. 一九八七年解嚴後, 各界深感심아不治, 安和難期, 乃有二二八事件之調査硏究, 國家元首之致감(혹은 겸), 受難者與其家屬之補償, 以及紀念碑之建立. 療癒社會巨創, 有賴全民共盡心力. 勒石鐫文, 旨在告慰亡者在天之靈, 平撫受難者及其家屬悲憤之情, 竝警示國人, 引爲殷鑑. 自今而後, 無分이我, 凝爲一體, 互助以愛, 相待以誠, 化仇恨於無形, 肇和平於永恒. 天佑寶島, 萬古長靑.
                    財團法人 二二八事件紀念基金會 謹立
                                一九九七年二月二十八日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만민은 의롭지 못한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음을 기뻐했다. 그러나 대만 통치의 중임을 어깨에 짊어진 행정장관 진의(陳儀)는 민정에 밝지 못했을 뿐아니라 시정이 편파되고 대만 민중을 깔보았다. 게다가 관료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산업이 침체돼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난이 가중됐다. 이에 민중의 불만스런 정서가 비등점에 달했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직원들이 대북시 연평북로에서 담배 파는 잡상인을 단속하던중 여자 상인을 때려 부상을 입히고, 길가던 사람들을 잘못 죽임으로써 민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튿날, 대북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며 장관의 청사를 찾아가 범인에 대한 징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총격을 받아 몇사람이 죽고 다치자 이로부터 전면 항쟁의 불길이 터져나왔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쌓인 민중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각계의 유지들이 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해 관민을 중재하면서 아울러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강경일변도의 진의는 협조하는 척 하다가 유지들을 간비(奸匪)로 몰아부쳤고 남경(南京)정부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국민정부 주석 장중정(蔣中正)은 소식을 듣자마자 즉각 대만으로 군대를 보냈다. 3월 8일 21사단이 유우경(劉雨卿)의 지휘 아래 기륭(基隆)에 상륙했다. 3월 10일에는 대만 전역에 계엄이 선포됐다. 경비총사령부 참모장 가원분(柯遠芬), 기륭요새사령관 사굉희(史宏熹), 고웅(高雄)요새사령관 팽맹집(彭孟緝) 및 헌병단장 백모도(白慕陶) 등이 사건을 진압함에 있어서 무고한 사람들을 연좌시켜 수개월간 사상·실종자가 1만명에 달했다. 그 중 기륭, 대북, 가의(嘉義), 고웅에서 가장 참혹했는데 이를 2·28사건이라 한다.
그 후 반세기 가까이 대만은 장기 계엄상태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마치 추위맞은 매미처럼 벙어리가 되어 이 한가지 금기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억눌린 원한과 쌓인 분노는 끝내 터져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 출신지역간 질시풍조와 함께 통일과 독립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감춰진 근심을 더욱 키워왔다. 1987년 계엄이 해제된 후, 각계는 오랜 병이 고쳐지지 않고는 화평을 바랄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절감했다. 이에 2·28사건 조사연구가 벌어지고 국가원수의 사과, 수난자와 그 가족에 대한 보상, 그리고 기념비 건립이 이어졌다. 사회의 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마음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된다. 돌을 세워 글을 새김은 죽은 이들의 하늘에 있는 영혼을 위령하고 수난자와 그 가족의 슬프고 분한 마음을 위로하는데 있으며 아울러 국민들에게 교훈을 주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를 나눔없이 한몸으로 모여 사랑으로써 서로 돕고 성심을 다하여 원수의 한을 풀어버림으로써 영구한 화평을 만들어 나가자. 하늘이여, 寶島 대만을 보우하사 만고에 푸르르게 하소서.
                        법인 2·28사건기념기금회 근립
                                     1997년 2월 28일)


이 비문에는 물론 장개석이 파병을 명령했다는 부분이 간략히 명기돼 있다. 이에 유가족들은 미흡하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념식 때 부총통은 비문 내용이 긍정적이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뒤이어 추도사를 한 야당인 민진당(民進黨) 출신 진수편 대북시장은 "비문은 마땅히 진상에 따라 고쳐져야 한다"고 맞받아 쳤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비문에는 누군가가 중정(中正, 장개석의 호)이라 쓰여진 부분을 흰 종이에 '개석(介石)'이라고 써서 덧붙여 놓았다. 시내 도교사원인 용산사(龍山寺)에는 '대만 인민 공개심판 판결'이라는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장개석을 비적의 두목이라 표현한 이 대자보에는 2·28대학살, 백색테러, 장기 계엄독재 등의 죄목으로 각각 1백만대씩 모두 4백만2백대의 곤장을 장개석의 시신에 쳐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쓰린 가슴 달래는 '한풀이 굿'
2월 27일 대북시에서는 2·28을 상징하는 마당극이 벌어졌다. 수천명이 2·28사건 역사의 현장을 따라 행진하다가 원환(圓還)광장에 모여 벌인 이 마당극은 장관이었다. 참가자들은 이내 눈시울을 붉혔고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열기가 지나쳐 당시 행정장관인 진의 역을 맡았던 한 노인은 참가자들이 밀어 넘긴 철제 위에서 떨어져 엠뷸런스에 실려가기도 했다. 한풀이 굿이었다.
그런데 일부 유족들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의 조치에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국시보(中國時報)」(1997년 2월 27일자)는 2·28과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게재했다.

설문조사 결과
(1) 2.28사건을 아는가?
   ① 안다(86.2%)  ② 모른다(13.7%)  ③ 무응답(0.1%)
(2) 2.28사건 처리문제에 대해 정부의 책임과 배상에 대해 더 추궁
   을 계속해야 하는가?
   ① 계속 추궁해야(22.8%) ② 더 이상 추궁말아야(57.6%)
   ③ 모르겠다(19.1%)      ④ 무응답(0.4%)
(3)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신은 정부의 2.28사건 처리방법이 만족스러운가?
   ① 매우 만족(5%) ② 대략 만족(41.5%)  ③ 별로(17.8%)
   ④ 불만족(4.4%) ⑤ 모르겠다(30.7%)   ⑥ 무응답(0.6%)


이처럼 46.5%의 사람들이 정부의 사건처리 방법에 만족을 표시했고, 불만족하다는 사람은 4.4%에 불과했다. 이 설문 결과가 전체국민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부의 노력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패인 상처를 치유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2·28사건 50주년을 맞아 가장 화제의 인물로 조명된 사람은 완미주(阮美姝.69)라는 여성이었다. 완미주씨는 문필가이자 피아니스트, 그리고 화가로서 본래 유명한데 특히 이등휘(李登輝) 총통이 2월 24일 '완미주 2·28문물실'을 방문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신문에 게재되자 더욱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7일 대북시 장춘로(長春路)에 위치한 문물실을 찾았을 때, 완미주씨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전시된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60여평 넓이의 문물실에는 2·28을 상징하는 그녀의 그림과 각종 자료들로 가득했다. 이는 사건당시 18살 소녀이던 완미주씨가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헤맨 반세기에 걸친 통한의 흔적들이었다.
1947년 3월 12일 아버지 완조일(阮朝日)이 끌려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곧 재산도 모두 몰수됐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돼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완미주는 왜 집안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완미주가 비로소 2·28에 대해 알게된 것은 70년대 일본 유학시절 서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2·28반란 수괴혐의를 쓴 것도 알게됐다.
귀국후 아버지를 찾기 위해 2·28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있고 수감중이길 간절히 바랐다. 몇 년 전부터는 아버지가 자꾸 꿈 속에 나타나 '나는 춥고 먹을 것이 없고 살 집도 없다'며 슬피 울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 줄 몰라 옷과 음식을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중 올해 2월 당시 군법처(軍法處)에 근무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완미주가 아버지를 그린 그림을 보고는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울러 "당신의 아버지는 그해 군법처(현재의 來來호텔 자리)에 피송돼 고문을 받아 손톱이 다 빠졌고 마지막엔 육장리(六張犁)에서 총살당해 시신이 버려졌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전시회가 끝나는 오는 3월 15일 처형장에 찾아가 오랫동안 구천을 헤매고 있을 아버지의 영혼을 모시려 한다고 말했다.


2·28 진상규명의 역사
2·28사건의 해결은 대만 주민들이 가만히 앉아 얻은 결실이 아니다. 말한마디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처형되던 계엄령이 해제된 것은 불과 10년전인 1987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6월 민주항쟁이 벌어진 것과 같은 해였다. 대북시는 계엄이 해제되던 1987년부터 올해까지 2·28진상규명을 위해 벌였던 국민들의 노력을 이렇게 기록했다.


1987년
* 02.04-2·28和平日促進會 성립, 처음으로 금기를 깸.
* 02.26-2·28강연회. 논문집 발간.
* 02.28-대만기독장로교회, 2·28화평 예배 거행.
1988년
* 02.22-李登輝총통,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눈동자는 앞을 바라봐야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 2·28사건은 마땅히 역사학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발표.
* 02.28-대만기독장로교회, 연합예배 거행. 嘉義역에서 2·28노천제를 벌이고 성명서 발표.
* 12.31-행정원장 兪國華, 언론을 통해 "만주인이 허다한 한족을 죽였지만 만주 황제가 끝내 한족에게 사과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국민당 정부가 2·28사건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강변.
1989년
* 01.28-수십개 사회단체, '2·28公義和平運動' 발기.
* 02.28-嘉義市에서 2·28기념 대행진 및 강연회 거행. 참가인원 3천명에 진압군 2천명이 경계.
* 08.19-처음으로 嘉義市에서 2·28기념비 세움. 이즈음 2·28관련 자료, 저작, 논문, 회고록 등이 속속 출간됨.
1990년
* 02.27-立法院 전체 위원이 2·28수난자에 대해 기립 묵념.
* 02.28-嘉義市에서 추모제. 참석자 중 한사람이 베옷에 “나는 2·28사건으로 수난당한 대만인 영령에게 사죄드린다”고 써서 장개석 동상에 입힘.
* 08.14-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제3책에 2·28사건의 史實을 기록.
* 11.29-이등휘 총통, 2·28사건 연구와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전담기구 구성을 지시.
1991년
* 01.01-행정원에 '2·28전담 소위원회'구성.
* 01.05-민간기구 '2·28사건연구 소위원회'구성.
* 01.13-'2·28가족모임'구성.
* 02.23-천주교, '2·28화평미사'거행.
* 02.24-불교청년회, '2·28기념법회'거행.
* 03.03-이등휘 총통, 수난자가족 접견. 수난자가족들은 이 자리에서 ①진상공포 ②공개사과 ③기념비·기념관 건립 ④배상을 위한 입법 ⑤2·28을 국가기념일로 할 것 ⑥2·28기금회 구성 등을 요구.
* 08.03-'2·28관련자연합회'정식성립.
* 11.05-'2·28사건배상위원회'구성(학자 8명, 법률가 8명, 입법위원 8명 등)
1992년
* 02.22-행정원에서 '2·28사건 연구보고'발표(사망인수 대략 1만8천명∼2만8천명). 단 책임규명은 안됨.
* 02.24-이등휘 총통, 2·28기념음악회 참석.
* 02.26-행정원, '2·28建碑위원회'구성.
1993년
* 02.28-民進黨 및 각 사회운동단체, 대북시에서 2·28기념행사와 함께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가두행진.
1994년
* 06.10-입법원에 '2·28처리 및 배상조례'상정됨. 민진당은 이와관련, ①배상 1천만원 ②공개사과 ③책임자 추궁 ④국가기념일 설정 ⑤기금회 구성 등 5대 강령을 내세움.
1995년
* 02.28-대북 신공원에서 2·28기념비 낙성 제막식(단, 비문은 합의되지 못해 싣지 못함). 이등휘 총통, “슬픈 마음을 역량으로 승화시키자”는 담화와 함께 정부를 대표해 정식으로 수난자가족에게 사과. 대북시장 陳水扁, 신공원을 화평공원으로 바꿀 것을 선언하고 사건관련 책자를 향토교재로 삼을 것이라고 밝힘. 2·28사건전담소위원회의 조사보고에 의거해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사건내용을 첨가함.
* 03.09-國民黨, 조례 명칭을 '배상'에서 '보상'으로 바꿈.
* 03.23-'2·28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통과, 시행공포. 수난자에게 최고 6백만원(한화 약 1억8천만원)까지 보상금.
* 10.07-보상업무를 맡을 '2·28기념기금회'성립
1996년
* 02.28-대북시장 진수편, '台北新公園'을 '2·28和平公園'으로 개명함을 정식으로 선포. 중국공산당 기관지 「人民日報」에 “2·28 49주년을 기념해 대만 인민들에게 희망을 부친다”는 내용이 실림.
1997년
* 02.28-'2·28기념비' 비문이 2년만에 완성 제막식. '2·28기념관'개관식. 3일간 특별휴일 실시.

계엄령이 해제된지 불과 10년만에 2·28사건을 매듭질 수 있었던 해법은 무엇일까.
2월 21일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크게 놀라게 한 것은 뒷유리에 '회념 등소평'(懷念 鄧小平-등소평을 그리워함)이라고 붙인채 달리는 승용차였다. 곧이어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릴 해외청년활동센터에 도착해 또한번 놀랐다. 그곳은 장경국(蔣經國) 전 총통이 반공교육을 위해 만든 기념관이었다.


 



대만민주화와 2·28 진상규명

2·28사건 50주년 기념일인 28일 대만의 한 신문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2·28사건을 국민당 독재통치에 항쟁한 애국민주운동으로 규정했다"며 북경 발로 보도했다. 한국의 분위기 비춰, 이 기사가 2·28행사에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기사는 1단으로 처리됐고 기념행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현재 대만에서 '반공'을 앞세운 냉전논리를 정치에 이용한다거나 이를 빌미로 인권을 탄압하는 일은 없는 듯했다.
이같은 대만의 민주화 진척이 2·28진상규명의 관건이 아니었을까. 왜냐면 2·28사건 때 무고한 주민에 대한 수많은 학살극이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장기 계엄통치를 유지하면서 2·28을 금기시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대만의 민주화는 문민정부의 출현에서 비롯됐다. 대만 출신인 이등휘 총통은 비록 국민당 소속이지만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물론 이 총통의 정책에는 정치적 고려가 깊이 담겨져 있다. 국민의식이 많이 성숙됐고 야당인 민진당의 거센 돌풍을 막기 위해서라도 2·28을 해결해야 했다. 아무튼 이 총통은 군부독재와의 고리를 끊었다. 과거정권의 과오를 자신이 애써 짊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등휘는 지난해 대만 최초로 실시된 총통 직접선거에서 당선됐다. 1949년 국민당군과 함께 건너온 사람이 대만 전체인구의 15%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큰 정치적 승리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2·28 진상규명의 역사' 속에는 대만민주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대만 주민들은 계엄이 해제된 1987년에야 비로소 2·28에 대한 금기를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등휘 총통은 주민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앞을 바라봐야지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 역사학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슬쩍 발을 빼려 했다. 마치 한국에서 '4·3을 역사에 맡기자'는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2·28관련 서적들이 속속 출판됐고 주민들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1990년에는 입법원(국회) 전체 위원이 수난자를 위한 묵념을 올렸다. 이쯤되자 이등휘 총통은 그해 11월 29일 2·28사건의 연구와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전담기구를 구성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매듭의 실마리를 풀었다. 1992년 행정원은 사건의 책임규명은 생략한채 '2·28사건 연구보고'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2·28사건으로 인한 사망·실종자 수를 1만8천∼2만8천명이라고 기록했다.
1995년 2월 28일 마침내 대북신공원에 2·28기념탑과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등휘 총통은 정부를 대표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곧이어 '2·28사건 처리 및 보상 조례'가 통과, 시행됨으로써 수난자에게 최고 6백만원(한화 1억8천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1997년 2월 28일에는 그동안 논란이 빚어오던 기념비문을 완성해 기념비에 부착했다. 그리고 2·28기념관을 만들어 각종 자료와 유물을 전시했다. 학생들 교육을 위한 보조교재도 완성됐다.
이처럼 대만은 국민의 민주화 열기와 정부의 유연한 자세가 어울려 불과 10년만에 딱딱한 껍질을 깰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와 국민이 합일점을 찾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비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모든 일을 한꺼번에 끝내려 충돌을 벌이기 보다는 실천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매듭지어온 것이다.
지난 2월 22∼23일 이틀간 한국·대만·일본의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2차대전 후 대만과 제주와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 학자들은 냉전과 분단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세 나라의 시인과 소설가들은 체험담을 들어가며 '변방성'을 강조했다. 본토와 떨어진 변방이기에 마치 이민족 취급을 받으며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한편 심포지엄 때 발표한 체험자들의 증언은 국가폭력이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했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줬다. 대만의 왕효파(王曉波. 54)씨는 2·28과 이후에 계속된 '50년대 백색테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안이 난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마저 헌병들에게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그 후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화장한 재만이 돌아왔다. 당시 어머니는 29세였다. 9살인 내 아래로 7살, 6살난 동생들이 있었다. 우린 시장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배추잎을 주워 먹으며 연명했다.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던 사람들도 우릴 멀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어머니는 훌륭한 사람이다. 부모님 욕되게 하지 말고 잘 자라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과연 내가 개보다 나은 게 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날 '간첩의 새끼'라 놀리며 때려서 피투성이가 돼도 선생님은 날 처벌했다. 난 고아원생이라서 학비가 면제됐다. 하루는 선생님이 집에 가서 학비를 가져오라 했다. 난 가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고아원생이라는게 알려질까봐 가는 척했다.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이 간첩의 새끼. 학비를 낼 처지도 못되면서 가는 척 하다니…'하며 때렸다.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이를 물고 눈물을 참았다. 하루는 어린 여동생이 심하게 열이 났다. 그러나 의사는 보증금이 없다며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늙은 할머니와 함께 의사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의사는 거부했다. 아버지가 당초 끌려간 이유는 '공비를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끌려간 어머니에게는 무슨 혐의를 씌웠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호적에는 '반란혐의로 1953년 사형에 처한다'라고만 적혀있다. 재판도 없이 죽여버린 것이다. 난 어머니가 처형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어머니는 고문을 참지못해 은침을 삼켜 자살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사형 직전에 주는 고량주를 거절하면서 '난 국가와 민족에 대해, 위로는 하늘까지 아래로는 땅에까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나는 무죄다'라고 외치며 돌아가셨다 한다. 난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을 말한 적도 없다. 기억하는 것이 괴로왔고 내게 '간첩의 새끼'라는 소릴 듣게한 어머니를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 앞에 큰소리로 밝힌다. '나의 어머니는 쟝리만이다'. 내가 오늘 증언하는 까닭은 다신 이런 비극이 생겨나지 않도록,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단결해 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테러를 막아내기 위함이다"


역사정립과 변방성
대만 2·28이 해결되는데 제주 4·3문제 해결은 왜 아직도 미궁을 헤매고 있을까. 당시엔 두 곳 모두 변방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희생을 겪었지만, 현재 대만은 중앙이고 제주는 여전히 전체 인구 1%의 변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정립하고 국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정치적 계산에 따라야 하는 것일까.
정치인 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4·3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역사학자들이 현대사를 외면하는 풍토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4·3연구'는 백지상태와 다름없다. 대만의 2·28기념관에 전시된 1백여권의 서적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냉전은 끝났다. 이번에 처음으로 열린 국제심포지엄은 내년에 4·3발발 50주년을 맞아 제주에서 열릴 예정이다. 대만을 떠나 오면서, 제주 4·3도 냉전논리와 변방성을 극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진정한 화합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