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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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과 송진우. 가운데 앉은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헌영에 대해 극도로 분노했지만 소련군정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김일성과 대화가 있은 후였습니다.
1946년 9월25일. 평양에 도착한 여운형은 김일성더러 소련군정의 스티코 상장이나 로마넨코 소장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은 북조선 주둔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으로서 연해주군관구(軍管區) 군사평의회위원인 스티코프 상장
다음가는 장성이었습니다.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쳐서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고 다음 날 김일성, 김두봉, 로마넨코를 따로 불러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스탈린이 여운형과의 만남을 승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6일에 김일성이 한 말은 스티코프가 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몽양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박헌영의 탓인 줄 알고 그에 대한 증오감을 토로했는데, 김일성은
박헌영의 횡포가 소련군정의 명령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줌으로써 몽양을 놀라게 했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여운형의 분노를 무시해버리는 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북조선에서의 합당 결과로 로동당이 가장 강력하고 권위 있는 정당이
됐으며, 지금 30만의 당원을 포괄하게 됐고, 북조선의 근로대중은 로동당의 창립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접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여운형의 행동에 대해 심각한 비난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당신과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여기에서 “희망했다”라는 말은 남로당 수립을 위한 박헌영의 조치가 소련군정의 명령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말은 여운형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질책이었습니다. 공산당에, 그리고 소련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갖다줬다는 말은 심각한 비난이었습니다. 조금 후인 10월22일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3당합당에 반대했던 공산당 대회파의 강진에 대해 합당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비난했고 그가 “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에 한없이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
여운형은 김일성이 박헌영의 ‘정치적 강간’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무시하고 자기를 질책하고 나선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인민당을 가로챈 박헌영을 무한히 증오하고 있었는데 박은 하수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신전술’
왜 소련군정은 박헌영으로 하여금 여운형의 인민당을 가로채도록 했던가. 왜 몽양을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고 김오성에게 지령을 내림으로써 몽양의 분노를 일으켰던가.
당시 몽양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러한 행동은 7월에 있었던 스탈린의 지령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 박헌영, 스티코프를 크렘린에 불러서 지령을 내렸는데, 요점은 미군정에 대해 강경정책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령은 나중에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전기회사들에 대한 파업으로 표현됐고, 또 대구에서 이른바 ‘인민봉기’로 전개됩니다. 북한에서의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과
남한에서의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은 이러한 강경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를 규합하고 명령체제를 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스탈린은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조선반도는 큰 무대 속의 하나의 작은 장면에 불과했습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시켜서 인민당과 신민당을 흡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요구했을 경우
몽양은 3당합당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합당’이라면 최소한의 예우가 있어야 했습니다. 북한의 경우를 보면 신민당의 당수였던 김두봉이
북로당의 위원장이 됐고, 실세인 김일성은 부위원장 자리를 맡았습니다. 형식상의 대접은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달랐습니다. 여운형을 설득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지, 아니면 좌우합작운동을 중지하라는
자기의 충고에도 불고하고 그 일에 집착하고 있던 몽양을 적대시했던지 박헌영은 몽양의 인격을 모독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민당을 강탈했고 남로당의
지도권을 공산당이 독차지하는 체제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치가 박헌영 단독의 과오가 아니라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알았을
때 몽양은 소련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46년의 소련공산당은 몽양이 1920년대에 동경하고 존경했던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하에서는 ‘설득’이라는 용어는 폭력과 공포의 유사어가 돼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지령이나 결정에 대한 의구심을 품거나 반문하는
것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만식은 평양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몽양이 가깝게 지내왔던 친구였기에 오랜만에 평양을 방문한
그는 조만식을 만나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조만식이 자유를 상실하게 됐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3당합당에 대한 김일성의
질책을 들으면서 조만식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좌우합작에 대한 집념
몽양은 서울에 돌아가서 좌익 3당의 합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대신에 인민당, 공산당, 신민당의
‘합당’에 반대하는 부류를 이끌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사로당과 남로당이 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남로당은 이를
거절했고 사로당이 해체하고 당원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로당은 여운형을 공격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사로당이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남조선공산당이 주관하고 있던 남로당에는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규율이
통용되었는데 사로당에는 공통적인 이데올로기도 없었고 지배적인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들 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박헌영에 반대한다는 것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응집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로당은 그런 허점 때문에 그리고 소련군정의 압력 때문에 사산(死産)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여운형은 인민당을 소생시켰고 좌우합작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에 대한 집착은 다음의 일화에 잘 드러납니다.
1946년 8월26일에 김원봉, 허헌, 그리고 박헌영을 포함한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은
여운형을 만나서 3당합당에 동의할 것을 권고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말을 ‘농담’으로 했습니다. “좌익 정당의 합당을 추진하며 이와 동시에 좌우 양
진영의 합작운동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몽양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지 않고 “찬성하며, 그렇게 할 경우 자신은
좌익정당의 합당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넓은 의미의 좌우합작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서 좌익 3당합당을 원했던 것인데
이 ‘농담’을 에워싼 대화는 해방 후 여운형의 이상을 집약한 것이었습니다.
몽양이 좌우합작에 집념했던 것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의 성과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이 혁명에
성공한 것은 국제공산당의 원조와 국공합작 덕분이었습니다. 1927년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숙청하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끝이
나지만 국공합작을 빼고 중국의 혁명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몽양은 중국에서처럼 해방 한국에서도 좌우합작이 되어야 통일독립이 이룩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몽양은 좌우합작 문제 때문에 납치와 폭행을 당할 뿐 아니라 자택에 대한 폭탄 세례도
받았습니다. 1947년 3월16일의 일입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고 이정구, 이상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여운형과 남로당의 관계가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악화되자 여운형의 측근들은 지금까지 삼가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조선노동당과 남로당은 소련의 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이 정책이 명백히 오류임이
드러난 경우에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두 정당은 사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하여 집요하게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근로인민당 결성
북로당과 남로당에 대해 가한 사대주의라는 비판은 공산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1946년 9월27일에 있었던 로마넨코 소장과의 대담에서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것은 “미국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데 반해 조선의 공산당은 모스크바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는데 ‘사대주의’라는 용어는
물론 쓰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본 대로 여운형과 공산당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으나 몽양은 여전히 민전(民戰) 의장단회의에
참가하고 있어서 기이한 감을 줍니다. 그런데 1947년 4월16일 정로식, 허헌, 김원봉, 홍증식, 이기석이 참석한 민전 의장단 회의에서의
여운형의 발언은 그의 시국관과 선택을 나타내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사가 됩니다.
그는 미소관계의 장래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는 곧 재개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년 뒤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혹은 10년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좌우합작운동 사명의 중대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김규식, 김한규, 김호 및 다른 중도주의자들은 반드시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는 “조선에 미군 군대가 주둔하고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들과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운형의 발언에 대해 민전 의장단의 반응이 어떠했던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소련군정은 여운형,
김규식 등이 이끄는 중간세력을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여운형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4월17일자 보고서의 표현은 당시
소련의 관점을 대표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핵 정책과 달러 정책 그리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진영의 승리를
믿지 못하는 중간파들 및 좌익진영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은 여운형과 김규식이 영도하는 좌우합작 노선에 자신의 희망을 걸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을
믿고 있는 여운형은 좌우합작 노선을 버릴 수 없는 상황이며 김규식과의 접촉을 중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통일과 민주역량의 성장에
대한 기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반동진영의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 합작노선의 실행을 끌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민주진영’이란 물론 공산진영을 말하는 것이며 ‘민주역량’이란 역시 공산진영의 역량을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된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은 4월26일에 여운형을 단독으로 방문했는데 이날 여운형이
내놓은 시국관은 그전보다 더욱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는 미소공위가 다시 실패작으로 끝난다면 조선 문제는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는 2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할 가능성조차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련과 미합중국 사이에, 혹은 남조선과 북조선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며, 전쟁이 발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기석은 새로 조직된 정당(근로인민당)의 상황은
어떠한가 물었는데 여운형은 미소공위가 재개되면 자신은 자주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근민당은 1947년 4월26일 준비위원회를 열었고 5월24일과 25일에 열린 결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장건상을 각각 선출했는데 어느 장소에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양은 근로인민당과 남로당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정의 5월4일자 보고서에 올라 있습니다.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다.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른 성명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이 이용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위의 정보를 보고한 남로당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근로인민당의 출범은 남로당 내에 동요를 일으키고 여운형의 위력이 작지 않음을 나타냈습니다. 이때까지
여운형은 공산당과 자기와의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선이 선명하지 않았으나 근민당은 그의 약점을 극복하고 장래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군정과의 비밀회동
몽양이 암살된 1947년 7월19일의 나들이는 정치인 여운형의 최종 선택을 나타내는 중대한
길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미군정의 2인자 E. A. J. 존슨을 만나기로 돼 있었습니다. 존슨은 그날의 사유에 대해서 장황한 글을 남겼는데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러치(Lerch) 장군이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남조선 과도정부가 드디어 설립됐다. 우리는 새로이
임명된 한국인 직원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행정에 전념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능력본위로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공연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측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무시되었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측의 영향을
막아버리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을 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인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창덕궁에서 멋지게 위장된(위장됐다고 생각했던) 비밀회의를 열고 내가 여운형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도록 했다. 그러나 중앙청에 있던 나의 사무실에 그를 초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지 사령관 휘하의 미 군정청에서는 우익세력의 독주를 막기 위해, 그리고 방향전환을
하기 위해 여운형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존슨의 관사로 초청했던 것입니다.
남로당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를 배반자, 기회주의분자라고 규탄했고, 그는 폭행도 당하고 가옥이
폭탄세례를 받기까지 했는데 그가 실권을 가진 민정장관 자리를 맡았을 경우 어떠한 사태가 전개됐을까 생각하게 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미군정 치하에서 민정장관 자리를 맡을 의향을 갖게 됐던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몽양은 어떠한 조건들을 제출했을 것인지, 미군정이 몽양이 제출했던
조건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합의의 가능성은 있었다고 보입니다.
여운형의 인생행로, 특히 그의 사상 형성 과정을 보면 그는 어떠한 논문이나 책, 또는 연설을 읽거나
들음으로써 사상을 형성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사상을 정립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동학을 따른 조부 슬하에서 자라났고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과격한 계급사상을 배척해 신분의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모의 상을 치른 후에 노비들을 해방시킨 것은 이런
생각의 결정(結晶)이었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그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는데 물론 이것은 조국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던 소련을 선호했고 공산당과 손을 잡았는데, 해방 후 그는 다른 형태의
소련과 다른 형태의 공산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약소민족의 해방을 돕는 데에 적극적이던 소련은 1939년에 독일과 중립조약을 맺은 이후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들을 흡수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버렸고 동아시아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기에 바빴습니다. 물론 서방의 제국주의국가들에
포위된 상태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 스탈린의 구실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약소민족들의 권익은 물론 개인이나 어떤 정당의 권익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여운형의 사상
몽양은 이러한 논리에 수긍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의도 없이 자의로 권익을 박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몽양은 동지로 삼던 박헌영이 ‘정치적인 강간’을 한 데에 대해 분개했습니다만 그가 소련의 지시를 따랐을 뿐임을 알았을 때
생각을 다시 하게 됐던 것입니다.
위에서 몽양은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반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복잡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나 조선반도가 분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지만 여운형은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상하이에서 체포되기 바로 전에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강연을 했는데 지상천국인 동남아시아 지역을
백인국가들이 강점하고 있으므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조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여권이 압수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몽양이 다녀간 5년 후인 1934년에 미국은 필리핀에 독자적인 헌법을 채택하도록 했고
12년간의 자치기간을 거쳐 1946년 7월에 독립하도록 했으므로 ‘제국주의’ 문제로 미국을 반대할 이유는 없어졌습니다. 바로 1년 후에 몽양은
암살됐는데 몽양의 차녀 여연구씨는 부친을 암살한 것은 종파분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박헌영 계열이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저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련 문헌을 읽으면 읽을수록 평양비행장에서 만난
여연구씨의 말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남로당은 몽양의 장례식을 유사 이래로 가장 성대한 행사로 치렀고 ‘몽양을 암살한 우익진영’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부르짖었는데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로당은 바로 그전까지 몽양을 맹렬히 매도했고 폭행을 가한 일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운형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분을 어떠한
틀에 맞추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그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몽양 여운형은 생존의
희락과 희망과 자유와 평등과 존귀(尊貴)가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 원했고,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거듭했으며, 일제하에서는 쓰라린
투옥의 경험을 두 번이나 했는데 해방된 조국에서는 매도(罵倒)와 폭력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나 기타 종류의 애국운동은 결과만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의 과정 역시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끝)
신동아 576호
200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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