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廷旭, 嚴相益, 金東吉, 鄭鎭弘, 강철수, 姜智遠, 金在祐, 愼達子, 千宙旭, 고도원 『이 아비와의
탯줄을 끊고 홀로 서거라. 당당히 선 너희들이 내 삶의 증거다.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증거였듯이』
[미리 쓰는 유서] 高廷旭 『소아마비 장애인을 남편으로 맞아 준 당신과 저 세상에서도 살고 싶소』
그때는 장애 없는 평범한 남편이 되어 아내를 한 번 번쩍 업어 주고 싶다.
高廷旭 소설가·아동문학가 1960년 서울
출생. 성균관大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저서 장편소설 「원균」,「세종로
1번지」, 동화 「아주 특별한 우리형」, 「안내견 탄실이」, 「가방 들어주는 아이」, 「헬렌켈러」 등. 『새댁, 이 아이는 홀트에 갖다 주구려』 일급 장애인으로서 이 땅에서
산 내 삶은 결코 쉽고 안락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새댁, 이 아이는 홀트에 갖다 주구려』
이제는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질병 소아마비. 돌 무렵 소아마비에 걸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이웃의 노파가 어머니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다시 태어나도 이 삶을 살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를 비롯한 모든 장애인들의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파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엄청난 불운으로 인생을 시작해 만난 그
나마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두 번째 행운은 열등한 자, 능력이 부족한 자, 결핍한 자로 여겨지는 장애인인 내가 非장애인인
똑똑하며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하고 소중한 1남 2녀의 아이들을 우리 부부의 힘으로 기르며 살았던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나를 비롯한 장애인들에게는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는 너무나 큰 꿈이다. 수없이 많은 장애인들이 배우자를 얻지 못해 고독하고
쓸쓸한 삶을 산다. 동료 장애인들보다 별반 나을 것 없는 내가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행운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유복하게 자란 아내는 일가 친척들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날 선택했다. 남녀간의 지극히 개인적이며 완벽한
상호작용이어야 할 결혼의 결정에서 나의 역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적으로 아내의 용기와 희생의 결단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결혼
문제에서 지극히 수동적이고 무능한 존재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도마에 오른 고기처럼 아내의 처분만 바랐고 아내는 나를 선택했다.
아내는 밝은 빛이 되어 주었다. 신혼 초 문학을 공부한 백면서생의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아내는 「돈 없다」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것은 늘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내 가슴에 못이 박히는 아픈 추억이다. 어진 아내를 만난 그것은 나에게 행운을 넘어서는 은총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장애인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아내는 꼭 다시 만나고 싶다. 그때는 장애 없는 평범한 남편이
되어 아내를 한 번 번쩍 업어 주고 싶다. 무거운 시장바구니도 들어 주고, 아기 업은 띠를 풀어 내 어깨에 매고, 높은 곳의 물건도 꺼내 주고,
형광등도 갈아 주는 자상한 남편이 되어 보고 싶다. 내 삶의 또 다른 행운은 작가로서 받은 것들이다. 작가가 된 뒤 많은
작품들을 써서 독자들에게 기억되었다. 특히 장애를 소재로 한 동화가 어린이 독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뇌성마비 장애아의 삶을 다룬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란 작품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장애의 유형별로 동화를 쓰기 시작한 게 오늘날 수십 권의 작품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맞서 싸우지 못한 후회 어린 시절 눈물 흘리며 읽은
동화의 감동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이렇게 어린 시절 읽은 동화에서 장애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새겨질 수 있다면, 그 작품을 읽은 아이들이 커서 만드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달리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곳이 될 거라는 믿음이
나의 창작세계를 이끌었다. 다행히 이제 많은 어린이들이 과거와 달리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덜 갖고 있음을 느낀다.
장애인 친구를 놀리거나 조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애쓴다. 그러면서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비교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
내가 의도한 일들이 이처럼 결실을 맺는 것을 본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고 기쁨이다. 게다가 내 작품 「가방 들어 주는
아이」가 모 방송의 선정도서가 되어 수익금의 일부를 어린이 도서관 짓는 데에 기여한 것도 소중한 추억이다. 과연 사람 구실은 꼭 허우대가
멀쩡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예라 하겠다. 마더 데레사는 늘 말했다. 『더욱 친절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아무리 좋은 뜻과 선행을 한다 해도 친절하지 않다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내와 가족들, 이웃에게 더욱 친절하지 못했던 것은
후회스럽다. 동시에 좀더 거칠게, 좀더 강력하고 집요하게 이 세상에 대항해 싸우지 못했다는 후회도 든다. 나의 평생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은 삶이었다. 대학 진학 시 고교 시절 내내 이과공부를 하고도 입학이 거부되어 국문과를 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학업에
신체적 능력의 차이가 없을 거라고 여겼던 박사과정 시절, 다른 학생들에게 다 배정하던 교양과목 강의를 학교 측에서 나만 소외시킨 일도 있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잡기 위해 대학에 원서를 내면 늘 장애가 이유가 되어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러한
차별과 편견을 향해 온몸을 던져 싸웠어야 했지만, 사는 것에 급급해, 또한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과 부끄러움으로 이 사회의 변화와 개혁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 내 시신을 소아마비 연구에 써 달라 어느새 나는 수많은 책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중견 작가가 되었다. 소설·동화·애니메이션·만화·영화를 비롯해 해외판권까지 다수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오롯이 내것이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장애를 갖게 됨으로써 인생의 험한 산길을 본의 아니게 걷게 되면서 만난 작은 들꽃들이며, 옹달샘이라 여길 뿐이다. 그것은 나의
개인소유가 아닌, 그 길을 함께 걷는 이 땅의 400만 장애인을 위해 쓰일 작은 자산인 것이다. 나의 개인 소유물들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책들은 모두 公共도서관에 기증하기 바란다. 장애인을 위한 제대로 된 도서관이나 장애인 역사 박물관을 만들어 거기에 도움이 되면
더더욱 좋겠다. 특히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에, 그리고 내가 쓰다 남긴 재산은 장애인을 위해 기증하니 이 땅의
장애인 복지 향상에 써 주면 고맙겠다. 지금은 사라진 질병 소아마비. 일그러진 나의 신체는 아마 그 후유증의 큰 증거물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의학 연구에 써도 좋고, 전시용으로 손질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이 땅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그날, 사람들이 나의 몸을 보면서 소아마비라는 질병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장애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는지
기억해 주면 좋겠다. 아울러 저런 험악한 몸으로도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면서 장애의 편견과 차별을 딛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행운으로 여기며
산 사람도 있었음을 생각해 준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미리 쓰는 유서] 嚴相益 『준비됐습니다, 하나님』 40代 중반
암선고를 받고 나는 알았다. 바로 이 지구가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嚴相益 변호사 1954년 경기 평택 출생. 경기高·고려大 법대 졸업. 제 24회 사법시험 합격.
軍 판사 역임. 수필집 「피고인 각하」, 「임종연습」, 「욕심 그릇이 작을수록 행복하다」 등 발표. 『나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 그리고
딸아. 쨍쨍한 청춘의 여름날이 언제나 계속 될 것 같더니 어느새 눈 덮인 겨울이 왔구나. 얼어붙은 산길 저편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구나. 아버지는 동면하는 짐승처럼 옷깃을 여미고 「준비됐습니다, 하나님」 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단다. 아빠는 어린 시절 너희 증조부의 죽음을 봤단다. 저녁을 잡수시고 조용히 누우셨는데 점차로 생명력이 빠져나가더라. 며느리인 어머니가
『연락해서 식구들 다 부를까요』 하고 물으니까 『놔둬라』 하시더라. 그리고는 조용히 혼자 저세상으로 가셨지. 너희 증조부는
평생 나그네셨지. 만주, 시베리아 그리고 강원도의 깊은 산골을 구름같이 흐르다가 본향으로 가셨지. 손자인 아버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 권력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어. 그 끝은 감옥과 처벌이라고. 나는 또 너희 할아버지의 임종도 지켰단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직감하자 아들인 나에게 『나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말씀하시더라. 순간적인 당황 같았어. 그렇지만 돌아가시기 30분 전쯤 아들인 나에게
『야, 저기 좋은 세상이 있는 걸 난 봤다. 그런데 의사들이 자꾸만 주사바늘을 찔러 못 가게 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는 구석에서 눈치 보는 할머니를 손짓으로 불렀어. 그리고는 이별의 악수를 하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당신 43년 동안 나하고 사느라고 고생 많았어. 그동안 내가 무섭게 해서 미안해.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야. 사랑했지. 잘 살다가
와』 그 한마디에 수십 년 응어리졌던 할머니의 한이 풀리는 것 같더라. 통곡하는 할머니의 진한 눈물은 모든 게 씻겨 나가는
용서더라.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다들 가 봐라』 하면서 잠자듯 눈을 감으시더라. 이게 아버지가 배운 의연한 죽음의 모습이었단다. 그런데 이
유서를 쓰고 있는 아버지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너희에게 보일까 봐 두렵단다. 죽음이 있으니까 그 이전을 삶이라고
표현하는지도 몰라. 한없이 산다면 죽음도 삶도 없겠지. 너희들은 짧은 인생을 축복같이 즐겁게 살았으면 한다. 그러면 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몇
가지를 말해 볼게. 고독이란 가난보다 더한 고통 중학교 시절의 아주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단다.
아버지는 냉기 도는 방안에 앉아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면서 울고 있었단다. 너무 외롭고 마음마저 얼어붙었기 때문이지. 맞벌이 부부의 외아들인
아버지는 항상 혼자였지. 몇 푼의 용돈조차 없었지만 고독이란 가난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단다. 그때 내 앞에 펼쳐져 있던 건 「원형의 전설」이란
장용학의 소설이었단다. 회사원인 할아버지의 문학 전집 외에 지겹게도 길던 소년 시절의 고독한 시간을 때울 방법은 별로 없었단다. 가난과
고독이라는 시련은 책을 읽게 하고 그 수많은 저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을 어렴풋이 배웠단다. 하나님은 책만 가지고 안
되는 부분은 현실의 고통을 통해서도 가르치시더라. 요즈음 같으면 학교폭력의 일환인데 아버지는 잠시 일탈한 생활을 하다가 동급생의 칼에 맞기도
했지. 얼굴에 서른 바늘을 꿰매는 상처면 요즈음도 중상에 속하지. 학생 때는 싸울 수도 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 그 후의 처벌이었단다.
아버지는 피해자였는데 그 형태가 거꾸로 둔갑을 했단다. 어느 날 선생님 한 분이 학생이던 나를 불러 일종의 양심선언을
하더라. 재벌집인 가해자 쪽에서 배심원인 전 선생님들에게 양복 한 벌과 금일봉을 주었다고. 자기는 그걸 거절 못 하고 교무회의에서 그냥 흐름에
따랐다고 말이지. 아버지는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단다. 어떻게 목성과 해왕성의 크기가 다르다고 불평할 수
있겠니. 재벌 아들과 가난한 회사원의 아들인 나는 같은 교복을 입었어도 같을 수 없는 거야. 아들ㆍ딸아, 소처럼 묵묵히 걸어가거라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마음에 매듭을 짓는 일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가난하고, 그렇다고 재능도 없는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단다. 아빠는 느려도 소처럼 한발 한발 내 식대로 가기로 했어. 느릿한 소걸음으로 산을 못 올라 입에 거품을 물고 고통스러워할 때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고삐를 끌고 산 위로 데려다 놓는 거야.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단다. 하나만
자랑하자. 머리가 나쁜 아버지가 그래도 고시에서는 최상위권에 들었단다. 소걸음으로도 頂上을 간다는 牛進主義(우진주의)를 실현한 셈이지. 너희들은
남과 비교하지 말고 항상 묵묵히 한발 한발 자기 앞만 보고 걸어갔으면 한단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꿈을 가졌단다. 여직원
한 명 정도 지키는 남향의 사무실 한쪽 벽에, 읽고 싶은 책을 꽉 채우고 살면 행복하겠다는 것이었어. 집도 작은 아파트에 소박한 승용차 한 대면
만족하겠다고 생각했지. 욕심 그릇을 작게 해야 행복을 쉽게 채울 수 있거든. 회사원인 너희 할아버지가 이렇게 가르쳤었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이 귀한 진리인 걸 깨달았지. 그래서 아버지는 법률사무소를 개설하고 목표를 정했단다. 최고의 독서가, 진실을 밝히는 글 쓰는
변호사, 그리고 영화 속의 빠삐용 같은 억울한 인물을 자유로 인도하는 뱃사공 변호사가 그거였어. 그런데 현실의 세상은 그런
낭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험악한 지옥이더라. 만나는 사람의 상당수가 철저한 악마적 속물성을 가지고 있었지. 유흥비나 성욕을 위해 남을 해치는
범죄인 자체가 극단적 이기주의자였지. 재물을 놓고 눈이 확 돌아 법정투쟁을 하는 사람의 본질은 더러운 욕심 그 자체였지.
이 세상은 몇 겹의 베일을 쓰느냐가 문제지 다 비슷한 것 같더라. 착한 사람들은 그런 욕심과 악마들의 먹이가 되는 사슴이나 토끼 같은 존재더라.
한번은 돈 많은 부인한테 고소를 당해 피고로 법정에 섰단다. 남편을 잔인하게 파멸시켜 달라는 걸 거절했었지. 엄청난 공격이 오더라. 조작된
증인, 치밀한 모략, 용병 변호사, 무관심한 재판장의 눈길을 경험했지. 선악보다 승부욕만 남고 누군가는 증오를 해야 하는 사람 같았어. 거기에
걸린 거지. 피고로 법정에 서는 순간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솟아올랐지. 아버지는 문득 사람마다 받아 마셔야 할 일정량의 고통의 잔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더라. 하루를 살아도 그날 하루분의 말썽과 고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시련을 피하지 마라 너희들도 시련이 오면 두
팔 벌리고 받아들이기 바란다. 시련을 피하지 말고 고통을 통해 그걸 극복해야 한단다. 40代 중반 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었지. 의사가 어쩌면 6개월 정도가 남은 생명이라고 했어. 죽음은 남의 일 같았고, 지금이 아닌 언젠가 나중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주변정리를 하나하나 했단다. 그런데 늙은 너희 할머니가 문제였어. 아버지는 수술 전 먼저 죽게 돼서 죄송하다고 할머니께 사과를
드렸지.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는 양로원에 가시라고 했어. 아직 젊은 너희 엄마에게 짐을 지게 하기 싫었단다. 걱정 말라는 너희 할머니의 뺨에
또 한 번 진한 눈물이 흘러내리더라. 수술하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엄청난 발견을 하나 했단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연녹색의 잎들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면서 바로 이 지구가 천국이었다는 걸 알았지. 그걸 정말 몰랐었다니까.
아버지는 수술대에 올라 의식을 잃기 전에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단다. 「하나님,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살다 갑니다」 순간 평생 살아온 장면이 파노라마같이 펼쳐지더라. 후회가 되더라. 진실한 사랑을 심어둔 것도 아니고 선행을 한
것도 없고 즐기지도 못하고…. 「만약 살아난다면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천장이 두 개로 확 쪼개지면서 난 깊은 어둠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단다. 여섯 시간의 수술 끝에 다행히 아버지는 깨어났단다.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 줬어. 암이 아니고 큰 폴립이었대. 그때부터 아버지는 가을의 투명한 계곡물, 고드름 속의
오색영롱한 빛깔들만 봐도 행복했어.행복은 별게 아니란다. 그냥 그걸 보는 눈이 열리면 되는 거야. 마음이 푸근한 사람과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행복이지. 수술 후 아버지는 돈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됐단다. 아무리 비싼 빌딩도 내 뱃속에 있는 조그만 암 덩어리보다
가치가 없더라.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저 세상에서 영혼들이 모이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고 한단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쇼를 했다고 말이다. 너희들은 남은 인생을 하루하루 축복같이 즐겁게 살다 오너라.●
[미리 쓰는 유서] 金東吉 『떠나면서 내가 부탁하는 것은 내 조카 지순이 하나뿐이다』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남길 말이 없다. 한평생 정직하게 살고 싶었지만, 정직하게 살지
못했다. 金東吉 연세大 명예교수 1928년 평남
맹산 출생. 평양고보·연희大 영문과 졸업. 연세大 사학과 교수·부총장, 통일국민당 최고위원, 제14代 국회의원,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역임.
질긴 목숨 옛날에는 회갑이 되기까지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칠십을 사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그러니 내 나이 78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닐 뿐 아니라 한국인의 평균수명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내 나이 또래는 20代에 6·25 전쟁을 겪어야 했던 불행한 세대이므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먼저 간
친구들이 무척 많다. 유력한 잡지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하시지요』 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글은 결코 쓰지 않았을
것이다. 80년 가까운 긴 생을 돌이켜 볼 때 남기고 싶은 말이 뚜렷하게 없기 때문이다. 일제下에 태어나서 18세가 되기까지 일본 놈들 밑에서
시달리며 살다가 감격의 8·15 광복을 맞았는데,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고 국토의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 앞에 여전히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던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논두렁 길을 따라 숨소리를 죽여 가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새벽이 되기까지 걷고 또 걷던 그날의 나는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6·25를 겪었고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창경원에서부터 걸어서 부산까지 가던 일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겨울이 그렇게도 춥던 1950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벌어진 장정들의 강제
이동이었다. 먹으라고 주는 것은 주먹밥 한 덩어리, 온기라곤 전혀 없는 차디찬 극장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나누어 준 거적대기를 깔고 밤을 세운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은 질긴 목숨이다. 나는 광복이 될 때 북한에 살았으므로 소련군 등에 업혀
본명이 김영주라는 金日成이 거물이 되어 평양에 입성하는 모습도 내 눈으로 보았다. 30代의 젊은 독재자가 평양역전 광장에서 연설하던 모습도 내
눈에 선하고, 그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내 귀에 쟁쟁하다. 北에 적위대가 조직되면서 사상적으로 의심받던 젊은 놈들은 모조리 붙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내 친구 하나는 이른 새벽 꽁무니에 타월 하나 차고 동네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목욕하러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부모는 속이 타서 보안대, 경찰서, 적위대본부 등을 찾아다니며 『새벽에 목욕간 내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나요,
죽었나요』 라고 물어도 모두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부모는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金日成을 원망하며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너절한 나를 알아 준 모든 이에게 감사 그런 체험을 가진 나로서는 공산당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이가 갈린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2005년이라면 꼭 60년 전에 경험한 비극이지만 오늘도 나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사회주의라는 이름의 독재체제를 증오하는 사람이다. 나는 본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에 가담해야
마땅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金日成 체제의 잔인함에 격분하여 그자들과의 타협은 한평생 불가능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자유를 위하여 군사독재와 맞서서 싸운 것은 사실이고 그 군사정권에 의하여 1심에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의 중형을 언도받고 화가 나서
항소를 포기하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에 풀려난 것도 사실이지만, 나보다 더 심한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특별히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야 할 까닭도 없다. 민주화 투사라면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는 자들을 볼 때 나는 분개한다. 그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었다면 보상은 오히려 애국심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 아닌가. 안중근 의사에게 얼마를 보상하겠는가. 윤봉길 의사에게 얼마를
보상하겠는가. 부실공사 때문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에게는 꼭 보상이 있어야만 했다.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이 있었다면 그 희생 자체가 명예로운 것 아닌가. 보상을 받겠다는 자나 보상을
하겠다는 자나 모두 제 정신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겸손하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남길 말도 없다. 나는 한평생 정직하게 살고 싶었지만 정직하게 살지 못하였다. 용감하게, 고상하게 살고 싶었지만 돌이켜 보면 비겁하게,
지저분하게 산 것이 분명하다. 그런 한심한 인간이 무슨 말을 감히 하겠는가. 다만 나에게는 좋은 부모, 좋은 형제,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떠날
날을 저만치 바라보는 오늘, 나는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그들이 나의 거짓됨을, 나의 너절함을 감싸 주어서 남들은 내가 괜찮은
사람인 줄 잘못 알고 있다. 나에게는 매우 예쁜 조카가 하나 있다. 이름은 지순이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내
눈에는 그 아이가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내 눈에는 달보다 아름답다, 별보다 아름답다. 장미꽃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것은 이 어린 소녀 하나뿐이다. 물론 이 아이의 부모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데 내가 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랑스런 어린이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 이 어린이를 위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지순이가 앞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하게 자라서 행복한 세상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떠나면서 내가 부탁하는 것은 지순이
하나뿐이다. 어느 무명詩人이 남겼다는 詩 한 수를 읊조리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千(천)의 바람이 되어> 나의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나
거기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았어요./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불고 있으리다./나는 흰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무르익은 곡식 위에 비치는
햇빛이 되리다./부드럽게 내리는 가을날의 보슬비 되리다./고요한 아침에 그대 눈 뜨거든/나 조용한 새가 되어 원을 그리며/재빨리 하늘 향해
솟아오르리./밤이 되면 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되리다./나의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나 거기 없어요. 나 죽지 않았어요.●
[미리 쓰는 유서] 鄭鎭弘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암
선고를 받은 후 8년간 아버지가 내게 늘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낙관과 긍정을 내 아들과 딸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鄭鎭弘 중앙일보 논설위원 1963년 서울
출생. 성균관大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역임. 저서 「감성
바이러스를 퍼뜨려라」, 「아톰@비트」, 「커뮤니케이션 중심의제 시대」 등. 「아버지 학교」에서 배운 것 「미리 쓰는 유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한 대목은, 이제 마흔 문턱을 넘은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과연 「유서」를 쓰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또 정작 내게 있어
과연 지금이 그것을 쓸 만한 시기인지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살려면 아직 좀더 젊을 때, 그래서 뭔가 삶의 변화를 줄 여력이
내게 있을 때 「유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때에 맞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덜커덩 당황하듯 맞이하는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이렇게
「유서」를 써 보면서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마주하는 그 순간이 한결 수월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먼저, 내가 남길
유산에 대해 말하겠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낙관과 긍정」, 「칭찬과 격려」였다. 나 역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것들을 고스란히 내 아들과 딸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평안도
출신의 월남민이셨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암 판정을 받으셨지만 8년을 투병한 끝에 내가 열여섯 살 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16년의 세월 중 절반인 8년 동안 「아버지 학교」를 다녔다. 그 8년 동안
나는 학교를 다녀온 후에 어김없이 「아버지 학교」로 다시 등교했다. 학교를 다녀오면 으레 집에 계셨던 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그 시간부터 나는
「아버지 학교」의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5남매 중 막내였지만 정작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나의 형님이나 누님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삶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살아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나는 내 자식들에게 전해 주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낙관과 긍정」이다.
아버지는 일이 아무리 복잡해지고 어려워져도 항상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관찬아(괜찮아),
관찬아. 정~말 관찬아. 내 이름이 정·관·찬이잖네. 까짓것 불이 나도 관찬아. 여기 방·화·선이 있잖네』 내 아버지의
휘자는 鄭(정) 觀(관)자 燦(찬)자이시다. 또 내 어머니의 휘자는 方(방) 嬅(화)자 善(선)자이시다. 외람되게도 당신들의 이름을 빗대어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낙관과 긍정」 바로 그것이었다. 때로 그것은 근거 없어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턱없어 보이는 「낙관과 긍정」이 나를 키웠고, 우리를 키웠고, 이 나라를 키우지 않았나. 자식에게
돈만 물려주면 그 자식은 평생 나태하기 쉽다. 자식에게 명예를 물려주면 그 자식은 평생 그것에 가위눌려 살기 십상이다. 하지만 「낙관과 긍정」을
물려주면 없는 가운데서도 부자가 될 수 있고, 鄙陋(비루)한 가운데서도 입신양명할 수 있다. 「칭찬과 격려」의 달인, 어머니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칭찬과 격려」의 달인이셨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칭찬과 격려」만큼 나는 성장했다. 어머니는 내가 못 해도 칭찬했고 모자라도
격려했다. 하지만 정작 난 내 아들에게 내 어머니가 내게 했던 것만큼의 칭찬과 격려를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커 준 내
아들에게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 아들과 내 딸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하고 긍정해라. 그러면 그
「낙관과 긍정」의 놀라운 힘이 막힌 삶에 돌파구를 낼 것이다. 아울러 칭찬하고 격려해 줘라. 먼저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해라. 그리고 자식에게
가족에게 나아가 이웃에게 동료에게 칭찬하고 격려해 줘라. 그러면 너희들의 삶도 그만큼, 아니 더 놀랍게 풍요로워질 것이다.
내 아들아, 내 딸아! 탯줄을 끊고 당당히 홀로 서거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詩 「歸天(귀천)」이다. 그렇다. 이 세상 살고 가는 일이 소풍 다녀오는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소풍을 갈 때는 가방이 제법 불룩하다가도 정작 돌아올 때는 그것이 홀쭉해진다.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 등 가방 속에
담아 갔던 것들을 적절히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갈 때는 홀쭉해진 소풍가방마냥 대부분 먹을 것 먹고, 쓸 것 쓰고 빈 가방으로
때론 그 가방마저 놓고 가야 한다. 하지만 소풍을 다녀오면 홀쭉해지는 가방일지라도 거기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묻어 가듯이, 우리 인생의 소풍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그 가방엔 인생소풍의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만약 그 인생 소풍의 추억들 가운데 오직 하나를 택해 그것을 가져가도록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이 장면을 택하리라. 다름아닌 내 딸아이를 직접
받아 그 탯줄을 끊어 주던 순간 말이다. 힘겹게 어미의 산도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그 아이는 삶의
승리자였다. 바로 그 아이의 탯줄을 내 손으로 직접 끊었다. 그런데 어미와의 탯줄을 끊는 그 순간, 그 아이는 나 곧 아빠와의 보이지 않는
탯줄이 이어졌다고 나는 믿는다. 어미와의 생물학적 탯줄이 끊어지는 그 순간, 아비와는 사회적 의미의 탯줄이 이어진 셈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는 스스로 이 아비와 연결된 탯줄마저 끊어 내고 마침내 진정한 자아로 꿋꿋하게 설 날이 있을 것이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언젠가는 이 아비와의 탯줄을 끊고 홀로 서거라. 그리고 더 당당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거라. 그 모습을 내가 살아서 볼지, 죽어서 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어디서든 지켜볼 것이다. 그렇게 당당히 홀로 선 너희들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이 땅에서 살았던 존재의 증거다. 바로 그렇게
당당히 선 너희들이 내 삶의 증거다.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증거였듯이. 삶의 매순간이 내 인생의 꽃봉오리다 사실,
살면서 가장 많이 후회가 되는 것은 내가 한 말에 대한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말을 해서 그것이 화살처럼 그들
마음에 꽂힌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내 아들과 딸에게 진정으로 당부하고 싶다. 『세상을
향해서는 주저없이 외쳐라.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말을 아껴라. 그리고 더 많이 들어주라. 잘 듣는 것, 즉 경청이야말로 사랑하고
베푸는 일의 기본이요 사람됨의 진짜 바로미터다』 아울러 누군가 내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뭘하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굳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다』고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매순간 순간이 삶의 꽃봉오리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매 순간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싫다. 거기엔 왠지 핑계의 그늘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추구하는 것은 끝까지 해보는 거다. 후회 없이 남김 없이 그렇게 말이다. 그래서 나 죽거든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해서 그
유분일랑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묻혀 있는 교회묘지에 뿌려 주길 바란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남은 내 가족들에게 남길 말은 오직 하나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사랑했노라』고, 『정말로 사랑했노라』고 전하고 싶다.●
[미리 쓰는 유서] 강철수 『내 사랑하는 자식들아! 아빠가 다시 말한다. 미안해』 다시 못 올 다리를 넘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절절이 내 애간장을 뒤집는다. 하찮기만 하던 일상이 모두 소중한 나의
분신이었다. 강철수 만화가 1944년 경남 진주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만화가. 「명탐정」으로 데뷔.「바둑스토리」, 「발바리의 추억」, 「돈아돈아돈아 」 등 발표.
죽는 건 장난이 아니구나! 東京에 사는 S라는 일본인
친구는 한국음식, 한국드라마에 푹 빠지더니, 드디어 한국문화에 홀랑 미쳤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을 헤집고 다니면서 온갖 잡동사니를 다 사
가더니, 급기야는 그 무거운 쌀뒤주에 맷돌까지 낑낑 안고 갔다. 그런데 그들 친한파 부부가 최근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건강도 예전같지 않고,
어차피 때가 되면 가야 한다는 것쯤은 각오한 바지만, 집안 가득 들어찬 애장품을 다 어쩌냐는 것이다. 그렇게도 할 걱정이
없느냐, 죽는 마당에 그딴 것이 무슨 대수냐, 갖다 버리면 사람들이 주워갈 것이고, 정 아까우면 고물상을 불러 상담을 하라고 했더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단다. 조그만 찻숟갈 하나, 녹슨 주전자 하나마다 사연이 있고, 연도별·계절별 떠오르는 추억이 눈에 밟혀 절대로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단다. 그럼 결국 못 죽겠다는 거 아니냐. 우리는 반농담 반진담, 냅다 떠들어 댔다. 연신 웃으면서 그러나 부부는 순간순간 우울한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그것은 나한테까지 전이되었고, 나는 비로소 죽는다는 것이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밤늦게까지
왁지지껄 술을 마시고, 다음날 겨우 감정을 추슬러 비행기를 탔는데 오잉? 서울에 오니 이 무슨 소나기 피해 온 사람한테 우박이람.
유서를 미리 써 내란다. 짐짓 놀라는 척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 나이쯤 되면 이미 죽음은 친근한 화두 아닌가. 나는 「느닷없는
인생의 퇴장 」에 당황하지 않으려고 꽤 오랜 기간 내공을 쌓아 왔다. 인사동에 나가 뒤주도 맷돌도 사지 않았고, 위장전입까지 하면서 땅도 사두지
않았다. 수백억 재산을 남겨서 후손끼리 혈투하게 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원고청탁서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어!
이게 뭐야. 학생들 수학여행도 준비기간이 있고, 군대를 가는 데도 상당한 선택과 여유 날짜가 주어지는데 이게 무언가. 내일 당장 세상을 하직하니
모든 인생의 잔무를 오늘 다 정리하고 소회를 제출하라? 그리던 만화는 인생을 접는 마당이니 자동폐업한다 치자, 사랑하는 가족들과 기본 고별사만
해도 울고불고 뒤풀이까지 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가족뿐인가. 이웃이랑 먼 친척… 사돈의 팔촌, 내가 몸담았던 직장, 전 직장, 전전
직장, 어디 그뿐인가. 초·중·고·대학 동창, 고향친구, 아직 살아계신 은사, 각종 동호회… 후배… 이 많은 얼굴들을 하루에 다 만나라고? 서열
정해 휴대폰 인사만 하는 데도 하루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뿐인가. 그런 「공적」인 관계 말고도 저 많고 많은 밤무대
지인들, 단골 삼겹살집 아저씨, 중국집 경리, 치킨집 아줌마… 그 또한 시간이 없으니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끝낸다 치지만, 단골 카페
외상값은 또 어쩔 것인가. 김 마담, 박 마담, 최 언니, 정 언니, 미스 김, 미스 리, 미스 송…. 다 큰자식들한테 혹시 들킬라 쉬쉬 쌓아온
유대의 끈, 형설의 공을 어찌할 것인가. 특히 새로 온 얼굴이 예쁜 미스 ○. 잔뜩 흑심을 품고 매상만 올려 주고 미처 사연을 못 만들고 떠나는
사연. 죽는 마당에 그런 쓰잘 데 없는 「불륜버전」까지 챙길 틈이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유서를 쓰자니 모든 것이 새록새록 가슴을 후빈다
해외출장이 아니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다리를 건너간다 생각하니 모든 것이 절절이 뭉클뭉클 새록새록 내 애간장을 뒤집는다.
아아! 이제 와서 보니 하찮기만 하던 일상의 모든 것이 소중한 나의 분신. 사람만이 아니고 내가 정 주었던 개와 고양이, 금붕어까지 내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아픔으로 또렷이 다가온다. 나를 괴롭히던 바퀴벌레와 모기·파리까지, 손때가 묻은 휴대폰, 열쇠고리, 젓가락, 이쑤시개까지 오늘따라
아련한 추억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곧 죽을 사람이 싱거운 농담한다고 하지 말라.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간혹 교통사고나
지병으로 죽음의 언덕 너머까지 갔다가 왔다는 이들이 말한다. 살아온 全생애가 비디오테이프처럼 한눈에 다 보이더라고.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내일
이 세상을 떠난다 생각하니 내가 살아온 장면들이 한눈에 쫙 보인다. 매시 매초가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보니 하루하루 매시 매초가 행복에
겨운 나날들이었다. 애증의 세월은 애정의 세월이었다. 때로는 배 고프고 돈이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먹었고
마셨다. 마누라가 야속하고 자식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결국은 내 행복의 주춧돌이었다. 세상에 행복의 꽃가루가 묻지 않은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곤궁은 부요의 초기 단계요, 비극은 희극의 예고편이었다. 출세를 하고 벼슬을 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하찮은
명예, 돈 그게 다 무엇인가. 죽으면서 보니 인생의 조그만 에피소드 한 편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행복의 안개비에
젖어 살면서 느끼는 이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죽음을 앞두고 이제야 깨달았다. 아직 취직이 안 돼 불행을 느끼는가?
그 불행은 착각이고 오해다. 그대는 지금 부장이나 사장 자리에 앉기 위한 기초단계를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날 것 같다고 과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쪽 진실을 안다면 돌아올 것이요, 만약 그대로 떠난다면 더 큰 행복의 시작이다. 반드시 더 나은 상대가 다가올 것이다.
인생 칠십은 긴 듯싶어도 바람처럼 지나간다. 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처럼 청춘만큼 속히 달아난다. 모처럼 주어진 러닝타임
70년. 슬퍼하고 주저앉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나는 아스팔트가 되고 싶다 내 인생에 후회가 있다면 좀더 빨리 행복의 실체를
읽지 못한 점이다. 미련이 있다면 양손에 가득 움켜 쥐고 있던 행복의 꽃씨를 더 많이 이웃에 나누어 주지 못한 것이리라. 그래서 너무 미안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미안하고 저승에 가서도 미안할 것이다. 술을 아주 좋아하던 어떤 詩人이 만약 자기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소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좌중을 웃긴 적이 있었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선택권이 부여된다면 나는 아스팔트가 되고 싶다.
내가 사는 동안 잘 해주지 못했던 사람들,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 나를 마음껏 밟고 다닐 수 있게 말이다. 나는 거리에 납짝 엎드려 매일매일
미안했노라 참회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길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신뢰해 주었던
내 가족, 내 친구들, 늘 내게 깨달음을 주던 선후배들, 내 만화를 읽어 주어서 나를 먹고살게 해준 독자들 고맙습니다. 특히 내 사랑하는
자식들아! 아빠가 다시 말한다. 미안해.●
[미리 쓰는 유서] 姜智遠 『딸들아, 너희 엄마를 부탁한다』 세상을 떠나면서 정말 용서를 구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힘이 돼 드리지 못한 분, 내 입바른 소리에 마음 상했을
분…. 姜智遠 변호사 1949년 서울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1972년 행정고시 합격.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 청소년보호위원장, 서울 고검 부장검사 등 역임. 現
청지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 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정말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나에겐 이런 저런 이유로 힘없고 고통받는 이들이 도움을 청해 오는 일들이 많았다. 포악한 남편에게
수도 없이 폭행을 당해 온 아내, 평생 재벌의 뒷바라지를 해 왔으나 어느 날 갑자기 내쳐진 여인, 자살한 아이를 뒤로 하고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법정투쟁에 나선 어머니, 죽고 싶다고 고소해 온 특목高 학생, 교육부를 규탄하고 교육정책을 뜯어 고쳐 달라고 호소해 온 젊은이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모두 도와드리질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시간이 무한정으로 허락하지 않았고, 또 모두 무료 변론으로 소화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해가 될 일은 아니지만 그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모두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정 탓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싸우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 상대방이 된
이들에게는 큰 충격과 상처를 드렸을 것이다. 한 성매매 업주는 우리가 제출한 소장을 받아 보고는 자살하고 싶다고 전화를 해온 적도 있었다. 못된
성폭행범들은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그들의 잘못은 분명 잘못이고, 또 나로서는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중엔 나를 원망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나는 죄를 미워했을 뿐 사람을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고. 어디 그뿐일까. 입바른 소리를 잘 해온 탓으로 혹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은 이들은 없을까. 시간에 쫓긴
나머지 자상한 배려를 다 해드리지 못해 섭섭해하신 분들은 없을까. 기대가 너무 커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드리지 못해 속상해하신 분들은 없을까.
나는 그분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사람이 부족한 탓으로, 특히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그분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지 못한 적이 있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여보, 건강을 돌보세요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들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성 문제에 대해서,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교육
문제에 대해서, 우뇌와 문화적 감수성에 대해서, 세상의 조화에 대해서 가족들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원천이었다. 최근
수년간 나의 부모님은 차례로 타계하셨는데, 평생 동안 나의 부모님을 잘 모셔준 아내에게 특별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아내의 친정 부모님도
우리가 모셨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만일 훌쩍 세상을 떠나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정말 애석한 일이다.
당신이 혼자서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무척 기쁘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아내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한눈 팔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일, 무슨 일이든 진실하게 해 낼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대법관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산더미 같은 사건기록 보느라 눈이 자꾸 나빠지는 것,
운동이 부족한 것 등이다. 부디 몸 관리에도 신경 써 주길 부탁하고 싶다. 딸들에게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도식적인,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스스로 제 적성을 찾아 자기개발을 해 가고 있으므로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좋은
성격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따뜻하게 세상을 마주 하는 성정들을 믿기 때문이다. 다만 딸들에게 부탁 한마디 하고 싶다.
너희들의 엄마가 늙거든 잘 모셔 달라는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실버타운에 들어가겠다고 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하는 데까지는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싶다. 딸들이 친정엄마를 모시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또한 마음 편한 일이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 줄 수는 없을까
기대해 마지 않는다.●
[미리 쓰는 유서] 金在祐 『부디 시간을 아껴 써라. 너희를 여기에 부른 神의 뜻을 생각해라』
눈을 감는 순간 너희들이 재롱부리는 모습이 내 망막에 떠오를 것이다. 늘 같이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내
가슴에 안은 채…. 金在祐 (주)벽산 사장
1944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大 경영학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大 국가정책과정 수료. 삼성물산 특수사업본부장, 삼성항공
방위산업본부장, 삼성물산 자원정산업부문총괄 부사장, 삼성중공업 기전산업부문장 부사장 역임. 일 때문에 놓쳐 버린 너희들의 재롱 너희 셋을 출가시키고 「자식은
중학교 이전이 제일 귀엽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다. 갓난아기에서 초등학교쯤까지의 그 시간이 자녀를 키우는 기쁨을 만끽하는 때다.
하지만 아빠는 너희들의 그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빠는 오지를 돌며 상사맨으로 일했다. 레바논에서 內戰이 터졌을 때
첫째와 둘째는 엄마와 함께 귀국을 해야 했다. 그때 너희가 세 살, 두 살이었지 싶다. 나는 혼자 남게 됐다. 부모와 한없이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재롱을 피우는 너희를 보는 그 기쁨을 나는 놓쳐 버렸다. 그 기쁨을 놓친 게 아빠는 가슴 아프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눈을 감는 순간 너희들이 재롱부리는 모습이 내 망막 위에 머물 것이다. 같이하지 못한 미안함은 내 가슴에 안은 채
너희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아빠는 1970년대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인근 중동지역에서 보냈다. 「내가 왜 이 모래 바람
부는 황무지에 와 있나」 하고 회의가 밀려들 때면 차를 몰고 사막길을 무조건 달렸다. 사막 한가운데서 먼동이 터오는 시간을
만났다. 떠오르는 태양이 뿜어내는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위대한 빛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기쁘고 감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 「사비쉬 마스히」는 아빠에게 큰 힘을 주었다. 그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너는 그냥 여기 던져진 게 아니야. 남보다 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더 힘든 일을 맡은 거야. 네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 왔을 거야. 너를 여기에 부른 神의 뜻이 분명히 있을 거야』 아빠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짓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버렸다. 사우디에서 아빠는 새벽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을 하려면 생각을 비워야 한다.
사람들은 하루에 6만5000가지를 생각하는데, 다음날 똑같은 생각을 반복한다고 한다. 우리는 주어진 능력의 4%만
발휘하고, 96%의 능력은 쓸데없는, 되돌이킬 수 없는,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일을 생각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아침 명상은
쓸데없는 6만 가지의 생각을 비워내는 시간이 됐다. 처음에는 올빼미형인 너희 엄마와 리듬을 맞춰 볼까, 늦게 귀가한 다음날 잠을 더 자볼까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명상의 시간이 즐거워졌다. 생각이 샘솟았다.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아빠가 살아오는 동안
후회하는 게 있다면 「미래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달았다는 점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 부디 시간을 잘 써라. 그러면 미래는 너희의 것이다. 지금 우리 곁에는 낭비되고 새나가는 것이 너무 많다. 가장 아까운
게 낭비되는 시간이다. 인생에 있어 첫 조준이 가장 중요하다. 초등학교에서의 교육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아빠는 믿는다. 올바른
초등교육이 실수 없는 인생의 기초가 된다. 우리 손자 손녀들이 제대로 된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 다오. 인생은
한 번 왔다 가는 것이다. 가져갈 수 없는 재산이나 명예보다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나이 육십을 넘기고
친구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서 아빠는 죽음에 대해 문득문득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일상에 묻혀 죽음이라는 화두는 멀어졌다. 내가 살아오면서
무엇을 느꼈고, 말 한마디는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미래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죽음은 이미 결정된 언젠가의 미래다. 아빠는 그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미리 쓰는 유서] 愼達子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마치 난투극
같은, 마치 형벌 같은 괴로운 시간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데도 지금 돌아보면 두 팔을 크게 벌려 안아 보고 싶다. 시간은 이렇게
부드럽게 변용된다. 愼達子 시인·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박사. 「현대문학」으로 등단. 평택大 국문과 교수 역임.
現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대한민국문학상 등 수상. 저서 「물 위를 걷는여자」,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등.
지나온 길은 모두 아름답다 내 마음속에는 늘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흐르고 있다. 「生의 혐오」와 「生의 황홀」 아니면 「生의 불안」과 「生의 평화」 그리고 내 「生의 불만」과 「生의 만족」이 순간
순간 내 마음의 강을 교차해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숨겨져 있으면서 가장 확실한 얼굴로 존재하고 있는 감정은 내
삶과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나 분명히 결론이 나 있는 내 삶에 대한 종결을 어떤
색채로 남겨야 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나 큰 과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 삶이 바로 내 죽음의 정확한 이름표가 되고, 내 죽음의 냄새가 바로 내
삶에서 녹아 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치의 덤 없이 냉정하게 판결나는 내 죽음으로 더 명확히 조명되는 내 삶은 그래서 사실
얼마나 두렵고도 소중한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를 위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삶은 언제나 지금 바로 이
시간의 시간 연속으로 내가 스스로 순간의 몰입에 최선을 다하며 고통의 우물 속에서 기쁨을 올리는 물긷기와 같은 것이었다.
말하지만 나는 그랬다. 결코 물이 있을 리 없는 박토에 맨손으로 땅을 파는 갈증을 견디며 끝내 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갈증을 푸는 물로
대신했던 것이다. 지나온 길은 모두 아름답다. 분명히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음에도 지나온 시간들은 미사시간처럼 장엄하고
고요하며 감동이 있다 마치 난투극 같은, 마치 형벌 같은 괴로운 시간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데도 지금 돌아보면
두 팔을 크게 벌려 안아 보고 싶다. 시간은 이렇게 부드럽게 변용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전학을
가면서 生의 새로운 깃발을 올리던 날 다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生의 뿌리를 내리며 서울의 바람에 연약한 뿌리를
흔들리면서 단 하나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에 전 生을 걸었던 젊은 날은 아름다웠다. 대학 시절 서울은 나의 全세계였고
全우주였고 내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나는 거기에 내 삶을 건축하고 길을 만들고 사랑을 살게 하고 싶었다. 초라한
자취방의 책상 앞에서 내가 바라는 生을 만들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만용을 부리며 밤새워 책을 읽고 울고 詩를 쓰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모든 것이 내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그 시절이 아마도 내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닌가 한다.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면서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미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모범적 인간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 세상을 떠돌다가 그 어떤 책임감도 없이 홀로 죽어야 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아주 모범적 인간의 생활
속에서 자유로운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삶이라는 조종자에게 한마디 대들지도 못하고 억척스럽게 살고 있었다. 삶은 이렇게 잔인하고 매정했다.
나는 늘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나의 삶인데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을 나는 운명이라는 말로 위로했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 운명도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키운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삶은
너무 일찍 늘 무대에서 공연되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객석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말이 또 하나의 내 삶을 만들곤 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무대에서 오랫동안 내 生은 싸구려로 공연되었고 객석에선 내내 많은 입이 많은 말을 만들어 내었다. 내
生과 전혀 다른 인생이 많은 입들로 시나리오로 만들어지곤 했다. 더구나 가끔, 아니 자주 내 인생은 그 말하는 사람들의 말로 내 生과 다른
줄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은 억울하다기보다 아프고 괴로웠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평범이었다. 상식적인
삶이었다. 상식적인 삶이야말로 훌륭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지상의 가장 큰 철학으로 배우며 받아들였다. 내 생의 가장 큰 후회는 바로 이 평범과
상식에서 벗어난 그 특별함이었다. 이 특별함의 무게는 도무지 단 한 번의 징벌로 갚아지지 않고 일수놀이의 이자처럼 늘 나를 떠나지 않고 그
존재를 보이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내 인생이 아쉬움의 투성이가 된 것은 아니다. 아쉬움이야 어딘들 없겠는가. 어느 生의
대목에 있어서도 아쉬움은 남아 있는 것,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노력의 힘이 부족했던 것에 늘 아쉬움이 있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조금 더, 내가 쓴 모든 글에서도 조금 더, 사랑하는 일에서도 조금 더 노력이 부족했으며 그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대목에서 나는
두렵다. 몸이 편하자고, 마음이 편하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면 그것은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때 단 한 번의 기회였으므로. 나는 사랑에도 특별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내 生에 총격을 가하는
일이라도 진정으로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무릎을 꿇고 그 사랑을 큰 느티나무로 키우고 싶었다. 사랑이란 미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늘 이유를
달았다. 현실이 여의치 못하다고 지금은 사랑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핑계를 대면서 사랑을 유보시켰다. 사랑을 이유로 죽고
싶다고 말한 젊은 날의 소망은 치기로 몰아세우고 늘 사랑은 다음으로 미루어 왔다. 사랑이란 미루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야말로 이유와 핑계와
현실을 따지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이더라도 지금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을 대단한 주인으로 섬기면서 계산과 이익으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점은 늘 아쉬운 일이다. 제대로 사랑을 했다면 인생은 거의 성공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生을 정직한 일에도
의미를 둔다. 나는 詩人이므로 진실에 진정성에 우선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나의 장점이면서 나에게 장애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들에게 진실과 정직을 강조한다. 정직했으므로 손해를 본다면 그 손해를 기꺼이 받아라. 나는 내 아이들에게 정직성과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도록
말한다 가을에 국화꽃이 핀다. 그렇다면 여름 폭풍이 몰아치는 그 순간도 꽃이 피어날 것을 아는 꽃 피는 예비의 시간에
우리는 있는 것이다. 돈보다는 사람을 버는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富와 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기어이 이기겠다는 집념도 버리라고 말한다. 때때로 인생은 나 자신 이외에
관장하는 분이 있어 준 만큼 상을 내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더 주었다는 마음으로 살기를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바란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망은 세상의 명예를 얻는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응집력 있는 사랑의 힘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명예를 얻고도 가족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호화로운 집이 있어도 生의 노숙자 몰골로 떨어져 버리고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외로움이라는 질병으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죄는 짓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가장 큰 명예는 내게
아이들이, 그것도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내 아이들에게 고백하는 일이다. 죽기 전 5분의 시간을 허락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내 詩에 갖는 소망과는 전혀 다른 한 어머니로서 갖는 최대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詩가 되기를
바란다. 내 詩에 내 삶이 녹아 있고, 누구도 아닌 내가 살아 있는 詩를 쓰고 그것이 문학이라는 가치의 무게와 공감대와
연결되기를 나는 바란다. 詩는 나를 울렸고 나를 쓰러지게 하지만, 나를 웃게 만든것도 나를 일으킨 것도 詩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다시 태어나도 나는 지금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되리라 믿는다. 조금은 바보같이, 조금은 어리석게 사랑과
詩와 가족을 위해 이른 아침 시간 기도를 하면서 살게 되리라 믿는다.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소심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계를
배우기를 기대한다 내일 내가 죽는다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죽기 전 5분의 시간을 허락받는다면 옆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 2분,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데 2분, 그리고 자연을 둘러보는 데 나머지 1분을 쓸 것이다. 내 生은
흠집투성이고 얼룩도 많고 거칠고 위기에 내 몰렸던 적이 많지만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그것이 또한 내 마음의 큰 모순이지만 나는 이 모순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중요성을 깨우친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창으로
보이는 나무, 내 生의 길목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 내 머릿속으로 흐르는 한 구절의 詩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는 눈 감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눈 감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사랑이 부족한 것을 용서하세요』하고 눈감고 싶다. 내 하느님이
이를 허락하시기를 나는 오늘도 기도하면서….●
[미리 쓰는 유서] 千宙旭 『변변한 유산 하나 남기지 못한 세월이 후회스럽구려』 당신과 두 아이, 부모님께 소홀했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千宙旭 동우물산 대표이사 1948년 경남 마산 출생. 마산高·고려大 경영학과 졸업. 삼성그룹
비서실, 삼성물산 싱가포르 지사장, CJ코퍼레이션 사장 역임. 現 환경관련기업인 경기특장개발 회장. 떠오르는 상념들 오늘은 지난 일들이 자꾸
떠오르는구려. 시골 도시 변두리의 산 아래 기찻길 옆 동네에 살면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잠자리도 잡고, 냇가에서 가재도 잡던 코흘리개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1년간 신문배달도 하고 가출하여 길거리에서 자기도 하고 아이스케키 장사도 하던 그
시절도 생각나고, 도시락을 두 개 넣은 책가방을 메고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내성적인
내 성격을 고쳐 보겠다고 의식적으로 말을 많이 하고 남 앞에 자주 나서던 대학생활도 생각나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해병대 졸병으로 지원입대해서
겪은 군대생활도 생각나고, 비행장이던 여의도에서 2개월간 겪은 그 땡볕의 국군의 날 행사 연습도 생각납니다. 회사에 입사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던
신입사원 시절도 생각나고, 서른 살을 넘겨 맞선 한 번 보고 결혼한 신혼 시절도 생각나고, 두 아이들이 유치원 들어가던 날과 대학 졸업하던 날도
생각나고, 내 인생의 황금기인 해외지사장 시절도 생각나고, 대표이사 시절도 생각나며, 또한 내 사업을 한번 해보겠다고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둔
일도 생각나는구려.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온 것 같구려.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이건, 어떤 일을 하건 나는
최선을 다 했으며,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다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서 후회스럽고 아쉬운 점이 참 많구려.
당신과 우리 두 아이들 그리고 나의 부모님과 당신 부모님께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구려.
당신과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연애 시절, 나는 40代가 되면 40평, 50代엔 50평, 그리고 60代엔 60평짜리 아파트에서
호강시켜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단돈 100만원으로 14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했지요. 그러나 결혼 후 모든 집안 일은
당신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매달렸던 나, 해외에 근무하던 그 좋은 시절 우리 가족끼리 휴가 한 번 제대로 갈 수 있는 시간을 내지 못했던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한 理財(이재)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회사 일만 했던 나. 당신은 이런 나에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아 주었는데, 나는 당신과 우리 아이들에게 변변한 유산 하나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 정말 아쉽고
후회스럽구려. 우리 아이들이 자기가 바라는 대학에 들어가고, 학교 다닐 때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잘 성장한 것은 모두
당신 덕분이 아닌가 하오. 당신이 받았을 스트레스가 짐작이 갑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4남 2녀 중
맏이이자 우리 4촌까지 포함해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유학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을 잘 모시는 모범을 보여야
했고, 동생들의 장래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었다오. 이런 나에게서 당신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소. 나이가 들어갈수록 당신의 생각과 처신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당신을 이해하고 믿게 되었소. 나는
4남 2녀의 우리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지금 우리 나이가 되어서도 서로 오고 가는 가까운 친척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오.
사랑하는 나의 두 딸들아. 이 아빠가 너희들에게 몇 마디 하고 싶구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이제까지 아빠가 살아오면서
너희들에게 항상 갖고 있던 생각이다. 사랑하는 나의 두 딸아, 나약한 여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건강해야
한단다. 정말이지 건강보다 더 값진 것은 이 세상에 없단다. 그리고 젊음은 짧고, 인생은 길단다. 젊음은 한순간에 휙 하고
스쳐가는 봄바람 같은 것이니 지금 젊을 때부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단다. 여성다우면서도 여성을 벗어나야 한단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네 스스로 성(城)을 쌓고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여성이라는 것이 무슨 특권인 양 착각해서도 안
된단다. 그리고 일기를 쓰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거란다. 일기는 자신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 뿐 아니라, 계획적으로 일하게 하며 생각을 하도록
만든단다.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단다. 독서는 인생을 윤택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힐 뿐 아니라, 간접경험을 통해서 너희들에게
자신감이라는 좋은 힘을 키워 주는 것이란다. 그리고 너희들은 법과 사회질서를 잘 지켜야 한단다. 인생을 살다 보면 법과
질서를 지키면 손해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너희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너희들이 이 지구에서 어디를 가고 어느 나라에서 살더라도 어느 가을 오후 노을이 지는
날 외로움이 밀려오면 김치와 깻잎과 된장찌개가 생각나는 영원한 대한한국 사람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단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해외 주재원 시절과 대기업에서 대표이사를 하던 시절, 의도적으로라도 시간을 내서 국내외 여행도 다니고, 많은 대화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당신에게 미안하고 아쉽구려. 우리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더
태어난다면 그때 다시 만나 더 좋은 인생을 살고 싶구려.●
[미리 쓰는 유서] 고도원 『제 영전에 장미꽃 한 송이를 놓아 주십시오』 내가 다시 태어나 나를 더 일찍 디자인하게 된다면, 누군가 내게로 와서 한없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고도원 아침편지 문화재단 이사장
1952년 전북 부안 출생. 전주高 졸업. 연세大 종교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 「연세춘추」 편집장, 「뿌리깊은 나무」,
「중앙일보」 기자. 청와대 연설담당 비서관. CBS 「고도원, 이효연의 행복한 세상만들기」 진행.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미리 유서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내심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유서를 써야 하는 지금 가장 큰 추억은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다.
내가 대학을 다닌 1970년대는 암울한 유신시대였다. 「연세춘추」 편집국장이었던 대학 4학년은 사실 영예이기도 하지만 무덤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고, 신문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긴급조치 9호로 제적당했다. 그리고 구치소를 거쳐
강제징집을 당해 군대에 가게 됐다. 마음의 괴로움은 둘째고, 우선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뵈러 가야 했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못난 아들이 우주의 중심이었고, 당신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시골 목사이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목사가 되길 간절히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연세대학교 종교학과를 다니고 있던 터였다. 어머니에게 차마 제적당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절망하시고 희망을 잃어 상심한 어머니를 봐야 한다는 게 내겐 아픔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를 보기 위해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시골집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 나오시면서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장하다. 하나님이 너를 다른 방식으로 쓰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걸 게다』 그 어머니의 말씀으로 내가
다시 살아났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의 해방과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군대를 갔고, 제대해서 웨딩드레스 숍을 열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다. 지금 되돌아 보면 내가 「아침편지」를 하고 있는 게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그때 말씀하신 「다른
방식으로 쓰게 하시려나 보다는」 말씀은 아닌지, 어머니의 예견이었나 보다 생각한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수도 없이 고마운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겐 어려울 때마다 기다렸던 것처럼 나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다.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다. 가끔 나는 이러한
행운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발」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내가 나를 위해 열심으로 기도해 주고 있지만 말이다.
일요일 오전 9시50분이 되면 우리 가족은 교회에 간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보이지 않는 약속을 지켜 줘서 가족들에게 고맙고 행복했다.
내게는 대학원 다니며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딸과, 군대를 제대하고 남아공으로 세상 공부를 하러 떠난 아들이 한 명 있다.
『작은 잘못을 경계하라』 내가
떠나면서 많은 것을 줄 수는 없지만 평상시 당부했던 몇 가지 말들만은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평소 자식들에게
『작은 잘못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큰 잘못은 부모나 다른 사람에 의해 거두어지고 용납되기도 하지만, 작은 잘못은 자기의 몫이고 방향을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로서 작은 잘못에는 엄격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잘못은 무조건 안아 주고 집에 들어오면 용서해 주고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노력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언제나 그랬듯이 너희들이 잘 알아서 할 것을 나는 믿는다.
만약에 내가 다시 태어나 나를 더 일찍 디자인하게 된다면, 나는 의사 앞에서 열어 보이듯 누군가 내게로 와서 한없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영혼, 한 영혼을 만나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그 사람이 우주를 변화시킨다는 믿음으로 그 일을 하고 싶다. 나의
꿈이고,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나를 이끌어 주신 많은 고마운 知人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침편지」로 삶의
공감을 함께 나누어 주신 분들에게 2003년 8월21일에 올린 편지로 이 뜨거운 마음을 대신하며 인사를 올린다.
<장미꽃 한 송이〉 아침편지를 받아 보시는 많은 분들이 간혹 저를
만나면, 고마움을 표시하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혹, 무언가, 꼭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드신다면 그 천상병 시인의
歸天(귀천) 시구처럼, 저 먼저 세상 소풍을 마치고 천상에 오르는 그날, 제 영전에 장미꽃 한 송이를 놓아
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훗날 누군가 많은 아침가족들이 저와 아침편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슴에 품고, 저의 영전에 올려놓는 모습을 꿈꾸어 보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꿈입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