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그너의 朝鮮士禍에 대한 硏究

E.W.와그너의 조선 사화에 대한 연구(1) 서론 (비공개)

이강기 2015. 9. 1. 23:15
E.W.와그너의 조선 사화에 대한 연구(1) 서론     
 
 
1. 서론

당파주의는 조선왕조(1392-1910)의 주요 정치현상이었다. 조선실록은 이 현상을 표현하는 데 당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당쟁시대가 시작된 역사적인 해는 선조(1567-1608) 8년인 1575년이다. 당파에 대한 최초의 호칭인 동인 서인이란 말이 분명 이 해에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런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시절 중앙정부 내에 중요한 두 부류의 지지자들 내지 동조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관료사회의 상당한 부분이 서로 적대하는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음을 상징한다. 그 후 계속된 당파의 분열, 세분화 및 재편성은 어느 경우 없이 초기의 이 원형과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17세기말이 되자 당파주의는 그 계보가 더욱 내구력을 갖게 됨으로써 고착화되어 갔는데, 앞서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재분열과 재편성을 거쳐 마침내 4개의 주요 당파, 소위 말하는 사색당파로 갈라졌다. 그 후 19세기말까지 200년 동안 이 사색당파는 조선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적 어휘에서 살아 움직이는 용어가 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특징은 사회가 당파분열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비해 정작 그 분열을 가져온 논쟁의 주제는 의외로 가벼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주된 논쟁은 후사(後嗣)문제나 죽은 왕비에 대한 적절한 거상(居喪)기간, 혹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개인적 증오에 기인된 갈등 같은 문제에 주로 집중됐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당파주의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성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된 노골적인 권력투쟁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거친 관점이며, 아무래도 조선의 당파분열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될 것 같지 않다. 특히 투쟁의 노선들이 어떻게 그토록 한결같았으며, 왜 조선의 당파분열이 그렇게도 끈질겼는지를 설명하는 회답이 될 것 같지 않다. 달리 말해, 권력투쟁이라는 해석만으로는 당파주의가 조선 후반기에 제도화되다시피 하여 그것을 타파하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줄기차게 지속돼 왔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문들은 차례로 다른 의문들을 제기한다. 도대체 한국에 어떤 특유한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에 와서 당파주의가 그토록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어떤 역사적 요인들이 후반기 당쟁의 외형을 형성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두 가지 의문 중 첫째 것에 대한 만족스런 회답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문화 발전의 주된 흐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번 의문에 대한 해답은 조선초기의 정치사에 대한 연구에서 더 쉽게 발견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당파주의는 1575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앞서 100년 동안 조선의 중앙정부는 거의 끊일 새 없는 정치적 혼란,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정부 내 정책입안기구 장악을 둘러싼 투쟁으로 날밤을 지새웠다. 이 갈등의 시기 중 약 50년 동안에 네 번의 큰 폭발이 있었는데, 이것은 맹렬하긴 했지만 그러나 정부기구 내에서 강력한 목소리를 내려는 간쟁기관들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 의 권력쟁취 시도의 일시적인 패배에 불과했다. 각각의 폭발이 일어날 때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 당파들의 공격이 간쟁기관들의 정치적 역할을 확대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다수의 관료들에게 집중됐다. 한국의 역사서는 이들 네 사건을 "지식계급 숙청(Literati Purges)" 즉 사화(士禍)라 부르고 있다. 이 네 번의 사화는 중국식 60갑자(甲子)의 해(年)의 이름을 따서 불려지고 있는데, 연도별로 무오사화(1498년의 사화, 또한 史禍로도 불린다), 갑자사화(1504년의 사화), 기묘사화(1519년의 사화) 및 을사사화(1545년의 사화)로 나뉜다. 이들 사화들 - 네 사화 중 첫 세 개가 이 논문의 연구대상이다 - 은 점점 증대하고 있는 간쟁기관들의 위세를 꺾거나 혹은 권력쟁취를 위한 간쟁기관들의 교묘한 조작을 차단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 사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당파주의가 가져 올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의 한 특별한 표현이었다.

당파주의는 조선왕조의 정치적 해결점을 내재하고 있었다. 한국의 군주제도는 항상 국왕의 권리행사에 부과된 엄격한 제한을 특징으로 해 왔다. 비록 한반도가 신라로 통일된 이후에도 역대 국왕들의 위상은 동배(同輩)들 중 제1인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반 지배계급(관료)은 이상하게도 고도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독점하고 있는 특권을 약화시키려는 새로운 주창자들로부터도, 그리고 이들 특권의 상실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사실상 통치가문(왕실)은 항상 양반계급과의 동거 속에서 안정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안정은 일종의 입헌적인 군주정체를 의미하는 가장 적절한 균형점에서 유지될 수 있었지만, 국왕은 명목상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고 양반들이 전제와 폭압의 도를 조정해 가며 더욱 정상 상태로 유지시켜 온 것이다.

조선왕조 역시 이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고려에서 조선(이씨 왕조 때의 한국의 공식국명)으로 바뀌면서 양반계급의 구성에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통치가문(李氏)은 더 많은 특권을 누려온 양반들이 지키고 있는 (고려)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특권을 덜 누려온 일부 양반들의 지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양반계급 내에서 고려말의 이 특권의 불균형을 역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유도해 냈다. 하지만 결국 조선의 국왕들은 자신들이 구 세력과 신진 세력 둘 다에 속박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치적 특권을 요구하는 양반계급이 실질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새 왕조는 정치적 승진을 바라는 상당수의 색깔이 다양한 양반들에게 은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왕조의 존속여부도 이들에게 신세를 갚는 태도에 달려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왕조의 안전을 고려한 왕조 창업자들은 새 왕가의 영속성을 보증하기 위해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방책에 의존하려고 했다. 하나는 공신(功臣)제도였고, 다른 하나는 유교도덕 체계의 적용과 그것의 필연적 결과인 정치체제 및 운영의 근본원리였다.

왜 이들 두 방책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었을까? 공신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경제적 포상이 따랐다. 그러나 유교 교리는 탐욕적인 본능을 금기시 하고 그 대신 검소와 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다. 공신들은 비정상적인 정치적 출세기회를 요구했지만, 그러나 유교 교의는 다른 형태로 양반들에게 혜택을 주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공정하게 관리되는 시험을 통해 등용하고 증명된 행정능력에 따라 승진을 시키는 원칙이다. 공신신분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무인(武人)들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왕위계승 분쟁으로 인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인격과 교양면에서 무인들의 재능은 전형적인 유교 문민행정관들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이 바람에 문민행정관들은 심지어 논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그들에게 위임돼 있는 의무인 국방을 위한 군사훈련 마저 등한시하는 기풍에 빠져들었다.

공신신분에 따라다니는 특전과 권력은 가장 뚜렷한 본보기로 제공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누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와는 상관없이 등급별로 꼭 같은 수준으로 제공되는 점에서 분명 모순점을 안고 있었다. 그들이 공신이든, 왕실과의 혼인으로 연결된 외척이든, 혹은 어떤 특별한 강점을 갖고있지 않은 단순한 직업관료든지 간에 다량의 토지를 하사 받고 굉장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특별한 지위에 대한 갑작스런 공격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고위 신분은, 주로 유교이념에 더 깊이 매료돼 있으면서 특전을 덜 받고 있는 더 젊은 관료들로 짜여있는 정부기관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다. 특히 간쟁기관들은 국가의 양심을 대변했다. 그들은 이상적인 일련의 도덕적 규범을 내걸고 그에 위반하는 관료들이 없나 하고 늘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정책평가와 개인에 대한 사정(司正) 둘 다를 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력을 위임받은 간쟁기관들은 자연히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에게 그들의 주의력을 집중시켰다.

간쟁기관들과 정부 고위인사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충돌에서도 궁극적인 승리는 오직 최종적인 국왕의 권위에 의해 결정될 수 있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응집력과 활기가 부족했으며, 유교이념의 변칙요인에 의해 더욱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 이들 권력자들의 존재 자체를 때때로 경멸했던 유교교의의 심판에 그들이 내맡겨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들 권력자들의 대대적인 정부에 대한 불만은 실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왕권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개인적 표준에서의 계속성은 결여돼 있었지만, 간쟁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확고부동한 유교이념의 토대로부터 공동체의 계속성과 사명감 둘 다를 유도해냈다. 그들의 정당성 역시 왕과의 친밀하고 빈번한 접촉에 의해 부여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짖는 심판은 간혹 무정형(無定形)한 것이었으며, 왕에 대한 그들의 청원은 자연히 현존질서의 교란을 꺼리게 됨으로써 도를 벗어난 급박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간쟁기관에 소속된 관리들의 열성과 끈기의 문제였기 때문에 - 그리고 간쟁(諫諍)의 개념에 대한 왕권의 배려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 국왕들은 최종적인 선택에 직면할 때까지 최소한의 요구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논고에서 다룬 500년의 조선 역사는 일부 간쟁기관들의 꾸준한 권력 증대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점점 증대해 가면서 간쟁기관들은 지혜를 감소시키는 데 그리고 비관용과 당파근성을 증대시키는 데 그 권력을 사용했다. 그 진행이 폭력적인 수단에 의해 급격하게 저지될 때까지 그러했다. 그러한 사건이 사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