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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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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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29-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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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문학(1) 新文藝運動의 先驅者, 榮光의 朝鮮先驅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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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朱耀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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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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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의 文藝運動은 아직 先驅時代에 잇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구자라고하면 현재
文壇에서 奮鬪하는 諸氏를 다 가르켜 선구자라고 할 것이다. 春園, 六堂 등이 아직 40을 넘지 못한 이 때에 先驅를 논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닌
것이 아니다. 오즉 편집자의 청하는대로 필자의 소년시대의 기억을 적어서 塞責을 하고저 한다. 이 애기가 단편적이요 史實에 粗漏할 것은 미리 알고
읽기를 바란다. 「江上奇遇」니 「月下氷人」이니 하는 類의 소위 新小說을 누가 제일 먼저 썻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春園의 「無情」이나
「어린 벗에게」가 나오기 전에 하여간 그런 類의 소위 新小說이 出世하엿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만흔 通俗小說이―그 중에는 대부분이 문학적 가치가
업는 ?作이엇스나―어쨋던 新文學건설의 第一聲을 지은 것만은 틀림업는 줄 안다. 기 중에도 『鬼의 聲』『雉岳山』? 등의 名篇을 남긴 菊初
李仁稙선생의 일음은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朝鮮文學史上에 올러야 할
것이다. 물론 문단자체나 문체나 또는 문학청년에게 계속되는 영향을 주엇다는 점에 잇서서는 李仁稙先生의 소설이 六堂의 文과 春園의 그것에 비길 수 업는
것이나 그의 작품에 나타난 독창적 체재와 사회에 대한 비판력과는 실로 당시에만 獨步일 뿐아니라 지금까지라도 추종을 불허할 것으로
안다. 『聖經』의 朝鮮譯이 ?한 新文藝運動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일 것이니 거기 관계된 인물을 열거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다.
『聖經』의 문체는 지금 보아서는 이미 舊態가 만하 改譯의 필요도 잇겟거니와 당시에는 실로 始創的 문체인 동시에 諺文體의 基調가 됨이 마치 前日의
經書諺解가 今日 古文體 硏究의 중요자료가 됨과 갓다. 최근까지라도 終聲의 사용법이라던가 上下母音의 구별, 한자 及 朝鮮音의 역사적 철자법이나
聖經을 표준삼게 되어 잇섯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이후의 신문잡지가 이를 깨트려 버렷지마는. 純諺文으로 된 세계지리책 『士民必知』 역시
純諺文으로 된『植物學』『動物學』등도 서양선교사의 업적의 하나려니와 지금은 그런 것이 잇섯던 것을 아는 이조차 업는 듯하다. 필자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과학의 純諺文化가 뒤미처 일어나는 日本文化輸入熱로 인하야 깨어저 버린 것이다. 또 一方에 잇서서는 『幼年必讀』이니 『作文法』이니
『乙支文德傳』이니 하는 讀本들에 잇던 OO적 문학이 韓日合倂으로 인하야 전부 말소가 되어버린 것도 큰 타격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皇城新聞, 獨立新聞, 大韓每日新聞, 基督申報 등의 초기의 신문지가 대부분의 정력을 정치에 주입하면서도 널븐 의미로의 문학의 발전을
촉진하얏슬 뜻하거니와 문장과 문예를 주로한 활동은 六堂 崔南善씨의『少年』잡지를 어더 비로소 시작된 줄 안다.
『靑春』『샛별』『붉은 저고리』『아이들보이』로 『東明』에 니르기까지 六堂은 文에 잇서서 〈16〉 그 莊重苦澁한 논문체와 明快軟柔한 동화체의
창시자로 또는 보육자로 그 지위를 독점한다할 것이다. 六堂이 文을 鍊하고 또 鍊하야 마참내 그의 史學과 함께 苦澁의 평을 밧기 시작할 때에
대담한 개인주의와 경쾌한 新문장으로 新文壇의 正路를 개척한 것은 두말할 것 업시 春園이엇다.『新生活論』등의 논문체『無情開拓者』의 새로운
소설체『吾道踏破記』의 기행체『어린 벗에게』의 편지체 닥치는대로 아니되는 것이 업시 새로운 모형을 造出한 春園의 공은 新文學史上에 持筆할 것임은
아모나 異論이 업슬 뜻하다. 사상적으로 보더래도 먼저 儒敎道德의 否認으로부터 출발하야 개성의 존중을 力說한 도덕적 반항주의는 당시 청년의 洽然히
歸依한 바 된 감이 不無하얏던 것이다. 趙一齊씨가 『金色夜叉』를
『長恨夢』으로 번역하고 何夢 牛步의 번역소설도 뒤밋처 나왓스나 과연 文壇적으로 영향이 컷는가는 疑問視할박게 업다. 『15少豪傑』이니 『銀世界』니
『指環黨』이니 하는 서양소설의 번안도 필자의 기억에 남어잇거니와 역시 문단이란 것과는 좀 교섭이 덜된 듯하다. 己未年을 一期로 햐야 東仁
想涉 늘봄 등이 작품을 쓸 때부터 문단은 점차로 多事하게 되엇다. 오직 그 前記에 잇서서 문단적 활동을 보이던 小星 瞬星 其他 數人이 지금은
문필을 떠낫다 하지마는 숨은 공이 만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잇다.
新詩의 발생도 그 기원을 찻기 곤란하다. 春園 六堂의 作中에
이미 新詩의 ?胎를 보앗다고 할 것이며 其後에 알리지 못한 창시자로는 流暗 金輿濟君의 작품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 어떤 석상에서 필자가
진술한 담화를 岸曙 金億君이 잘못 전해 듯고 공격하엿다는 말을 들엇거니와
필자의 新詩 試作이 마치 新詩의 始祖인 듯이 말하얏다는 것은 誤傳이다. 新詩 특히 자유시를 의식적으로 처음 쓴 이는 아마도 流暗으로 처음이라 할
것이다. 前記 담화 석상에서도 필자는 이것을 言明하얏던 것이다. 岸曙의 안심을 이 기회에 발애 둔다. 그러나 新體自由詩를 문단적 현상으로 世人의
이목을 모듭게 한 것은 아도마 「「創造」」창간호에 게재된 필자의 試作이 시초가 아니엇는가 생각한다. 그리고 마츰내 自由詩로 詩壇을 風靡하는
현상을 引起한 그 當面의 책임자는 『해팔이의 노래』『懊惱의 舞蹈』『新月』등의 저자인 岸曙라 할 것이다. 평론의 先鞭者가 누굴까. 제일 먼저
희곡을 소개한 사람이 누굴런지. 春園에게로 두 가지의 榮譽가 다 갈뜻 하나 필자의 기억이 정확치 못하다. 『서울』 『曙光』 『東明』으로
『白潮』『金星』등의 문예잡지가 배출하야 문단의 諸子가 은하수의 별가치 닐어날 때 쯤은 필자는 잠시 朝鮮의 문단을 이별하지 아니치 못할 형편이
되엇다. 그리하야 필자의 소년시대도 於焉間 지나가고 문단도 제법 발띔을 시작하얏든 것이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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