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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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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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29-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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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문예(2) 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 榮光의 朝鮮先驅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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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金基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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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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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千里」에서 「朝鮮先驅者號」를 낸다 한다. 그리고 나더러 朝鮮
프로레타리아문예의 선구자 중의 3,4인에 대한 논평을 하야달라 한다. 나는 重任을 감당할 준비가 업슴으로 처음부터 사퇴하얏다. 그러나 巴人兄은
긔어코 나로 하야금 이 붓을 잡게 하얏다. 朝鮮프로레타리아 문예의 선구자는 朝鮮프로레타리아 藝術同盟 외에 또 업다. 즉 선구자는 우리들 중에 잇다. 우리는
藝術同盟 中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프로문예운동의 확립을 위하야 문장으로 또는 실천으로 노력하야 오고 항상 그 운동의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안는
朴英熙君과 역량잇는 작가로서 崔鶴松 李箕永 兩君과 시인으로 林和 辛夕汀 등 諸君을 발견한다. 이 사람들의
존재는 藝術同盟體 중에서 光輝잇는―적어도 光輝잇게 하여가는―존재임에 틀림업다. 朴英熙군의 사상적 전환은 1923년부터 시작되엇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그전부터 親友로 또는 현재의 동지로서의 내가 그와가티 보앗다하는 것일 뿐이니 혹은 그전부터 스스로 전환하고 잇섯든 것을 내가 늣기지
못하얏는지 그것은 알 수 업다. 하여간 1923년이라 하면 朝鮮의 문학사회에 잇서서 전혀 프로문예의 존재가 업섯든 때이다. 사회운동에 잇서서
뿌르조아적 民族主義運動으로부터 分裂對立하야 무산계급의 운동이 수립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직전부터이엇슴으로 문예에 잇서서도 1923년은 그
孕胎期이엇다고 보는 것이 可하다. 그럼으로 朴군의 사상적 전환은 朝鮮프로文藝의 역사에서도 중요시되지 안흘 수 업다. 君은 본래는 시인이다.
셀리!와 빠이론의 詩를 조화하고 볘르레ㄴ, 믓세, 랑보-등의 詩를 愛誦하고 그 중에서도 샬르, 뽀-드려-詩를 또는 에드가, 알란, 포-의 詩를
가장 사랑하얏다. 그는 象徵派로부터 들어가지고 가장 極端을 대표하는 떼가당으로부터 달음질하엿든 것이다. 그의 취미, 감정, 사상의 경향은
1923년까지 이와 갓햇다. 그러나 無價値의 철학 허무적 사상(당시까지의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사상은 이것을 토대로 하고 잇섯다고 본다) 퇴폐적
감정은 한번 그가 맑스적 唯物史觀에 의한 현사회의 비판의 눈을 엇게 되자 전환되지 아니할 수 업섯다. 유물사관에 의한 비판의 방법은 그로 하야금
자기자신의 사상 감정의 動機 그 물질적 원인까지 究明하게 하얏든 것이다. 그는 당시 예술지상주의자들의 同人雜誌(白潮)에서 탈퇴하야가지고 새로운
생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얏다. 1925년 「開闢」 新年號에서 발표된 「상양개」는 그가 최초로 세상에 내노흔 프로레타리아문예적 소설이엇다.
그리고 2월(?)에 그는 曙海, 箕永, 宋影, 星海, 抱石, 承一, 永八, 筆者 등의 작품의 경향을 분석하고 종합하야 이것을 新傾向派하고
명명하얏섯다. 오늘날 문단에서 新傾向派라고 쓰는 용어는 실로 君이 비로소 쓰기 시작한 말이다. 1925년 7월에 프로레타리아 藝術同盟이〈18〉
처음으로 성립되엇슬 때도 君의 힘이 적지 아니 하얏섯다. 그러나 동맹은 7월에 성립되엇섯슬 뿐이오 26년 겨울까지 그 존재를 들어내지
못하얏섯스니 대개 그때의 盟員諸君들에게는 맑스주의적 의식이 缺如하얏섯다고 말하야도 과언이 아니라 할만 하엿든 까닭이다. 그러고 이 말온 필자
자신에게도 부합되는 것임에 틀림업다. 그러나 1926년에 이르러서는 일반 정세의 변화 와 또는 맑스주의적 사상의 심화에 인하야 藝術同盟은
再發起되어가지고 실로 「일하는 단체」가 되엇다. 君은 그 이래로 지금까지 同盟의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직접 지도에 종사하며 잇다. 그의
성격은 침울한 편이오 강직하다기 보다는 굴절이 만코 정열보다는 이성의 冷氣가 더 강한 터이다. 그럼으로 그는 容易히저 사람을 사랑하지도 안흘
뿐더러 저사람의 사랑도 밧지 못한다. 그의 의심하고 따지는 성질은 간혹 그로 하야금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하고 ?는 일을 그르치게 하는 수도
잇다. 이 점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朴君은 넘우 偏狹하다」는 비난을 밧는 점이라. 그러나 모난 곳이 업시 사람이 넘우 원만하야도 결국은
「好人」박게는 되지 안흘 것이니 올케나 글흐거나 한번 자기의 主見을 세웟거든 끗까지 그 의견을 고집하야 가다가 정말로 뉘우치는 때에는 처음서부터
거러온 길을 다시 밟어나가게 되는 한이 잇슬지라도 일관하야 動치 안는 성격이 든든하기는 든든하다 할 것이다. 영리하지 못하니까 그와 가티 多大한
손실을 하얏다고 말할 수 잇겟지만은 넘우 민첩하야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적지 안흔 것을 생각할 때에 「固執不通」의 인물도 필요를 크게 늣긴다.
그런데 朴君은 다른 사람이 보는 바와 가티 그다지 심한 「固執不通」도 아니다.
朴君은 소설도 쓰고 평론도 쓴다. 어느 편이 朴君의
장기이냐고 한다면 아무리해도 평론이 그의 「得意의 것」이라 할 것 갓다. 그의 소설은 「산양개」 이후로 「徹夜」 「地獄巡體」 「出家者의
편지」기타 4,5편의 단편작이 잇지만 나의 기억에 의하면 프로 작품으로서 호평을 바든 것이라고는 「出家者의 편지」박게는 업는 듯 십다.
「산양개」도 그의 최초의 작품이오 또는 新傾向派 최초의 産物이엇든 까닭으로 주목의 초점이 되어서 깍고, 치키는 두 가지의 비평을 바든 일이
잇스나 사실을 말하자면 잘된 작품은 아니엇다. 그가 평론을 힘써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이삼년간이라 「鬪爭期에 처한 비평가의 태도」
「新傾向派文學과 無産派文學」(?) 文藝運動의 방향전환」 「無産文藝의 意識過程」(?)등 1927년 「朝鮮之光」 新年號 紙上부터 연속하야 발표한
이상의 諸論文과 諸評論은 당시에 우리들의 藝術運動에 잇서서 적지 아니한 임무를 다한 文字이엇다. 지금와서 우리들의 藝術運動 過去過程을 알러고
하는 사람은 이때의 君의 諸論文을 보지 안코서는 이해할 수 업게 되엇고 지금으로부터의 우리의 운동을 어떠케 인도하얏스면 조켓다는 이론을 끄집어
내려고 할지라도 역시 君의 前記 諸論文의 비판이 압스지 안코는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런 까닭으로 君은
작가이라(35頁에)기보다는〈19〉(제19頁에서) 理論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러케 말하는 이유는 비단 이 사실뿐만이 아니다. 그의 小說은
「描寫」가 아니고 「論文」이 되어 버리는 것도 큰 이유이라 할 것이라. 그런데 과거에 잇서서 그의 小說도 그러하엿거니와 현재에 잇서서 그의
論文도 뒤에서 쪼처오는 사람이나 잇는 것처름 밧브게 쓰는 탓으로 동이 안닷는 대문이 적지 안타는 말을 나는 항상 듯는다. 들을 뿐만 아니라 내
自身도 「센렌스」의 構成이 非文法的으로 된 것을 君의 論文 가운대서 屢屢히 발견한다. 이런 것은 조금 주의하야 주면 조흘 것이라고
밋는다. 하여간 君은 藝術同盟의 組織者요, 현재 指導分子요, 朝鮮프로文藝運動의 先驅者의 一人이다. 지금 녯날의 雜誌가 手中에 업서서 君의
論文이나 作品을 참고하야 구체적으로 소개할수 업는 우에 또는 시간의 餘裕가 업서서 이러케나마 충실히 그를 紹介, 批評하지 못하고 마럿다.
作家로서의 曙海, 箕永, 林和, 夕汀 등 諸君을 또한 소개하지 못한 것도 유감이다. (京元車中에서-
끗)〈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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