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조선시대 - 중국에 이런 치욕을 당하며 살았다

이강기 2015. 9. 3. 17:57
조선시대 - 중국에 이런 치욕을 당하며 살았다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여인

조선 초기 중국을 사대(事大)하는 것으로 국가의 안보를 담보한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사대의 징표를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중국은 조선이 진정으로 사대를 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말과 소, 여자, 내시 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조선 초기 실록을 들여다보면 “모월 모시 말과 소 몇 마리를 중국에 바쳤다”는 기록이 수없이 등장한다. 중국이 말과 소를 계속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의 주력 산업은 농업이었다. 때문에 농업의 직접적인 동력원이 되는 소를 공출함으로써 농업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유통의 직접적 동력원인 말을 공출해 감으로써 유통을 마비시켜 조선의 생산성을 저하시키기 위함이었다.

군대란 평시에는 전적으로 소비집단이기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저하되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 된다. 중국은 말과 소를 대대적으로 징발해 감으로써 조선의 주력산업 생산성을 떨어뜨려 안보를 중국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성을 요구한 것은 전략적 차원의 배려라는 증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에 다수의 조선 처녀들이 중국에 뽑혀가 기구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연들이 다수 실려 있다.

사건의 발단은 태종 8년(1408) 4월 16일. 이날 중국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네가(중국 사신) 조선 국왕에게 말하여 미녀 몇 명을 골라 데리고 오라"는 칙서를 낭독했다. 임금은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같은 해 7월 2일에는 중국 사신 황엄(黃儼)이 경복궁에서 처녀를 선발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날 중국 사신은 "처녀들이 한결같이 박색"이라고 성을 내며 담당 관리를 포박하고는 "어째서 아릿다운 처녀가 없느냐. 네가 감히 다른 뜻을 가지고 형편없는 여자들만 뽑아 올린 것 아니냐" 하며 욕을 보였다. 입장이 곤란해진 임금이 황희를 보내 중국 사신을 달래야 했다.

<"이 계집아이들이 부모의 곁을 떠날 것을 근심하여 먹어도 음식 맛을 알지 못해 날로 수척해진 때문이니 괴이할 것 없소. 다시 중국의 화장을 시켜놓고 보시오" 하니 황엄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실록은 행여 자신이 선택되어 이역만리 중국 땅에 끌려갈까 무서워 갖가지 꾀를 쓰는 조선 처녀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다리가 병든 것같이 절룩거리니 황엄이 매우 노했다. 사헌부에서 딸을 잘못 가르친 죄로 조견은 개령에, 이운로는 음죽에 귀양 보내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 8년 7월 3일 의정부에서는 각도에 순찰사를 파견하여 다시 처녀를 선발하도록 하고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지난번엔 도내의 처녀들 중 빠진 자가 많았다. 각 지방에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가 있거든 모두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시켜 중국 사신의 사열을 기다려라.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지 않거나, 침을 찌르거나, 머리를 자르고 약을 붙이는 등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는 자는 모두 '임금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죄'로 처단하거나 가산을 적몰하라.">

전국에서 난리법석을 벌인 끝에 같은 해 11월 12일 사신 황엄은 처녀 5명을 선발해 중국으로 떠났으니 끌려간 처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공조 전서 권집중의 딸(18세) ▲인녕부 좌사윤 임첨년의 딸(17세) ▲공안부 판관 이문명의 딸(17세) ▲충좌 시위사 중령호군 여귀진의 딸(16세)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14세) ▲이밖에 수행원으로 28명이 동행했다.

이들의 행차에 생이별의 피끓는 마음이 담긴 부모 친척들의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했는데, 길창군 권근은 비운의 처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구중궁궐에서 요조숙녀를 생각하여
만리 밖에서 미인을 뽑는다…
부모를 하직하니 말이 끝나기 어렵고
눈물을 참자니 씻으면 도로 떨어진다
슬프고 섭섭하게 서로 떠나는 곳에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르도다>

틈만 나면 처녀 요구

중국으로 끌려간 처녀들은 나라 전체를 뒤지다시피 하여 찾아낸 만큼 미모가 출중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태종 9년(1409) 5월 3일 중국 사신이 와서 하는 말이 "지난해 보낸 처녀들이 한결같이 박색이었다"며 또다시 처녀를 요구했다.

<"지난해 너희가 바친 여자는 살찐 것은 살찌고, 마른 것은 마르고,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가 좋지 못했다. 다만 너희 국왕의 공경하는 마음을 생각해 비(妃)로 봉할 것은 비로 봉하고 미인(美人)으로 봉할 것은 미인으로 봉하고, 소용(昭容:비와 미인, 소용은 중국에서 궁녀에게 내리는 관명)으로 봉할 것은 소용으로 봉하기를 마쳤다. 왕이 만일 뽑아둔 여자가 있거든 한두 명을 다시 데리고 오라.">

이후로 중국은 기회만 나면 처녀를 요구해 왔다. 세종 8년(1426) 4월 10일에는 차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 노비를 보내라는 요구에 20명을 뽑아 보냈으며, 중종 16년(1521) 4월 29일에는 "어린 화자(火者:중국에 보내던 환관 후보자)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와 어린 계집을 선발하되 성질이 부드러워 부리기 쉬운 사람으로 수십 명씩을 뽑아 보내라"는 요구가 왔다.

이런 요구에 궁중회의를 열어 사대부 집안 처녀 대신 천민 여자를 뽑아 보낼 비밀계획을 세웠다. 다음은 중종 16년 6월 2일 실록.

<홍경주(이조판서):"서울 사람 대신 지방 사람을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울 안의 천인(賤人) 여자를 뽑다가 이 말이 중국 사신에게 들어가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하들:"몇 명을 선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임금:"10인을 뽑으면 어떠냐."

임유겸(한성 판윤):"20명쯤 뽑아 명나라 사신이 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15명만 뽑으면 된다.">

임금은 같은 날 처녀 선발과 관련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당시 처녀 선발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끔찍한 행사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자 뽑는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느냐. 9세부터 12세까지 각 도 감사가 친히 가려 뽑아서 사신들로 하여금 시비 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혹시라도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 자살하는 폐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 보내라. 뽑힌 자가 정밀하지 못하면 담당 관원과 감사를 힐책하겠다.">

이 시절 중국 조정의 처녀 요구에 못지않게 골치 아픈 일은 중국 사신들이 잠자리에서 여자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태종 3년(1403) 8월 19일 실록.

<중국 사신 마인(馬麟)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처음에 중국 사신이 오면 기생이 시침(侍寢)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유사길이 받아들이지 않은 뒤로부터 이를 폐지했다. 이때 마인이 자진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세종 16년(1434) 10월 27일에도 중국 사신에게 기생을 바친 사례가 발견된다.

<(중국의) 세 사신이 기생을 관계하려 하여 도감에서 여자를 바쳤다. 이튿날 사신들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사흘에 한 번씩 문안하시오" 했는데, 그 이유는 일찍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다.>

인조 15년(1637) 11월 18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기생을 요구하자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시절 중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운이 좋게도 출세하여 중국 상류사회로 진출한 사례도 더러 있었다.
태종 17년 5월 9일 "중국에 보낼 처녀 두 명을 뽑았는데, 황씨와 한씨를 상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씨는 한영정의 딸로서 품위 있고 아름다운 용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명나라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세종 6년 10월 17일에는 한씨가 대행황제(大行皇帝:명나라 태종)가 죽었을 때 순장(旬葬)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됐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아 나는 간다" 했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어 죽었다.

여러 궁인들이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했다.>

한여인의 드라마틱한 죽음에 이어 세종 9년 5월 1일 실록을 보니 한영정의 막내딸이 또다시 중국으로 끌려가는 사연이 등장했다. 한영정은 두 딸을 중국으로 떠나보낸 비운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처녀 한씨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 따라 죽었다. 이때 막내딸 얼굴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중국에서) 뽑아가게 되었다.

한씨가 병이 나서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고 하오" 하고 칼로 침구를 찢고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주었다. 침구는 시집갈 때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막내딸이 중국으로 끌려가 또다시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으니 그 정황은 성종 10년 7월 4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확(韓確)의 누이가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선종황제(宣帝:명나라 4대 황제)의 후궁이 되고 성황황제(成帝:명나라 5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환관 정동(鄭同)과 결탁하여 자주 정동을 본국(조선)에 파견하여 옷과 노리개, 음식 등을 바치게 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혹독하게 거둬들여 큰 병폐가 됐다.

또 칙령으로 한씨의 일가친척을 해마다 성절사(중국 황제 생일에 파견하는 사신)로 입조하게 하므로 한치례와 한치인, 한치의(이들은 모두 한확의 아들임), 사촌인 한치형, 한충인, 조카인 한한, 한찬, 한건이 번갈아 중국 조정에 드나들었다. 한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얻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중국으로 끌려간 여인들의 모습은 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면 백성들은 언제나 비참한 꼴을 당한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이처럼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고도 또다시 일제시대에 정신대의 이름으로 많은 처녀들의 몸과 마음을 버리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인가.
(월간조선 김용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