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1)

이강기 2015. 9. 3. 17:35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1)    

 
난창봉기·추수봉기·징강산 유격전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 장정이전의 역사
공산당 창립·4.12학살의 상해…서울 능가 상전벽해
1차 全大 열린 2층 건물 옆 파리 연상 카페촌 묘한 공존
첫 난창봉기 기념 소총像, 폭력 對 비폭력 다시 생각케


한국일보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공산당의 첫 봉기인 난창봉기 기념탑

 

'권력은 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징하는 난창봉기 조형물

베이징(北京)발 상하이(上海)행 비행기. 비행기속에서 상하이,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난창 (南昌)을 중국현대사와 연결시켜 생각해봤다. 청나라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의 제국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1912년 멸망했다.

이후 중국은 각 지역을 지배하는 군벌들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쑨원(孫文)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서구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1912년 국민당을 창설했다.

한편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성립됐고 국제공산당본부(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국민당과 국공합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져 국민당의 장제스가 교장으로 취임했고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초빙됐다. 젊은 공산당원들도 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실세가 된 장제스는 1927년 군벌들을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들어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다. 수십만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이를 돕기 위해 총파업에 들어가 "장제스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상하이의 갱 두목이자 악덕 매판자본가과 뒷거래를 했고 장제스가 방조하는 가운데 갱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사라졌다. 역사적인 4.12학살이었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운동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은 반작용으로 무장투쟁이라는 좌파노선으로 선회했다. 그 첫 작품이 난창봉기이며 두 번째 작품이 추수폭동이다. 1927년 8월 난창 공안국 국장인 주더(朱德)가 국민당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초대해 발을 묶은 가운데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격파하여 난창을 장악했다.

그러나 광둥(廣東)으로 진군해 혁명근거지를 만들려는 계획은 이동 중 국민당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실패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에게 고향인 후난(湖南)에서 추수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9월 마오의 후난병력은 일부 소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피해도 컸고 목표한 창두(成都)ㆍ창사(張沙)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오는 후난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상하이의 두 얼굴

 

상하이는 중국 '붉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오랜 조차지였던 역사적 유산에 기초해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을 능가하는, 아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카이라인과 와이탄(外灘ㆍ해변가에 자리잡은 상하이의 유서깊은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이를 증언해준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 사회주의의 상징이자 메카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곳이 바로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하이의 선진적 노동자들은 1920년대 투쟁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중심적인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이 점에서 상하이는 상반되는 '두 개의 얼굴'을 한 도시이다.

1921년 7월23일. 마오를 비롯한 13명의 사람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내에 있는 한 이층건물에 모였다. 53명의 공산당원들을 대표한 대의원들로 이들은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30일 이 같은 모임을 냄새 맡은 경찰이 수색에 들어갔다. 이들은 급히 피해 인근 호수의 유람선에게 창당선언문을 낭독했다. 마침 제1차 전대 회의지에서는 저우언라이 회고전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성지답게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13명의 대의원들이 회의를 하던 방은 촬영이 금지돼 있었으나 사무실에취재목적을 설명해 촬영을 허락 받았다. 사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 장정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세력인 4방면군 사령관으로 장정의 방향과 관련해 마오와 갈등을 벌렸던 장궈타오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결국 당내 소외세력이었던 마오와 당내 최고엘리트였던 장궈타오가 장정을 놓고 갈등을 겪고 결국 마오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엄습한 것은 혼란감이었다. 이 유적 바로 옆에 파리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카페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의 최고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코앞에 이 같은 카페촌을 만들도록 허락한 중국. 이를 실용주의라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실 제 1대 전대 회의지와 카페거리 신천지, 이처럼 현재의 중국의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즉 지척에 위치한 이 두 곳의 공존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자본주의 못지않게 시장경제를 추진해 가고 있는 소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하이의 최고 매력은 와이탄의 야경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은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걸, 조명이 다 꺼져서 죽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지난 구정의 폭설로 발전과 송전에 문제가 생겨 관광객이 많은 주말만 조명을 켜고 주중에는 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불이 꺼져 황량한 와이탄거리의 모습이야 말로 환경오염과 에너지난에 봉착한 세계의 불안한 미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폭설의 경우 결국 환경오염에 따른 기상이변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상이변은 전력난을 낳았다.

어디 전력뿐이랴. 고갈의 위기에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석유값은 또 어떠한가. 사실 이 같은 에너지, 그리고 천연자원 문제 때문에 중국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중앙아시아 등 에너지와 자원강국들로부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방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의 석유와 에너지의 소비량은 앞으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국, 나아가 세계의 에너지난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 뻔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색상으로 원을 그린 천장과 벽.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거대한 소총.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해, 포스트모던한 팝아트 설치 미술의 한 장면이었다.

다음 날 난창봉기 기념관을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충격적이게도 이 같은 형상이었다. 공산당의 혁명유적 기념관이니 당연히 무겁고 칙칙한 사실주의적 조형을 기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창봉기는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배반당한 뒤 행한 첫 무장봉기이다. 따라서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한 조형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말이었다.

조형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오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말이 잘못 인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마오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나 의회와 같은 민주적 정치를 혐오하고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곤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그 같은 발언이 나오게 된 맥락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오는 이 발언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의해 국공합작을 배반당하고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결정한 우한(武漢)회의에서 했다.

따라서 그 말은 피의 희생의 생생한 체험에 기초해 평화노선은 적의 폭력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을 가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현실분석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거꾸로 선 장총 조형물을 보면서 역사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가 결국 승리하며 비폭력의 힘이 폭력보다도 더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규범적으로는 폭력이나 이에 대한 대항폭력(난창봉기식의), 나아가 비폭력을 넘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반폭력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현실을 알수록 역사에 있어서 폭력의 힘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자신이 없어진다. 고대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같은 무장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운동만 했다면, 그리고 중국의 농민들이 공산당의 지도아래 홍군을 조직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면, 노예의 사슬과 오랜 봉건적 수탈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 별로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농민혁명 숨결 '마오의 고향'
길 없는 곳에서 길은 시작됐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2〉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마오쩌둥의 첫 혁명근거지로 유명한 징강산의 혁명열사기념비. 기념비 바로 옆에는 당시 고난을 겪던 홍군과 그들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등 주변이 혁명의 성지답게 잘 정돈돼 있다.

 

난창(南昌) 다음의 행선지는 추수폭동의 현장이자 마오의 고향인 창사(長沙). 창사는 후난(湖南)성 최고의 관광지인 장지아지에(張家界)를 가본 이들이라면 중간에 들렀을 후난성의 성도이다. 난창에서 창사까지는 530km로 도로사정이 나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행히 추수폭동기념관은 창사시 70km 못 미친 원자(文家)시에 위치해 오후 5시 전에 도착했다. 내부 수리 중이어서 닫힌 기념관에 다행히 수위실 직원이 있어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왔다고 하자 문을 열어 줬다.

원자시는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등 후난지역 공산당원들이 창사부근의 여러 지역에서 추수폭동 후 국민당군의 추격을 받자 이곳에 모여 창사 공격을 포기하고 징강산(井岡山)이 있는 남쪽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그 곳에 유격기지를 만들어 지구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곳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난창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장총을 형상화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농민봉기를 상징하기 위해 장총과 횃불을 든 농민의 손을 형상화했다. 기념관 안에는 추수폭동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농민, 혁명 중심에서 소외층으로

 

추수폭동은 후에 중국혁명의 주동력이 된 농민이 처음으로 중국현대사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전까지 중국공산당은 러시아혁명의 경험과 이에 기초한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해 농민이 아닌 노동자를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의 학살로 끝나기는 했지만 상하이(上海)의 노동자 봉기가 보여주듯, 그 때까지만 해도 기존질서에 전투적으로 저항해 싸운 건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추수폭동을 통해 중국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압제에 저항해 무기를 든 것이다. 장정에 참여한 홍군 중 농민은 노동자(30%)보다 두 배 이상 많은 68%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중국을 가능케 해준 일등공신은 농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재 농민, 특히 농민출신으로 도시에서 불법노동일을 하고 있는 농민공, 그리고 노동자는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외세력이다. 물론 개혁개방에 따른 경제발전으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농민들이 절대빈곤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심각하다. 중국사회과학원이 최근 지난 10년간의 개혁성과의 분배율을 조사한 결과 공무원(29.2%), 연예인(20.2%), 민영기업주(자본가)와 자영업자(17.7%), 국영기업 및 집단기업 간부(16.1%) 등이 많은 수익을 나누어가진 반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공(0.5%)과 농민(1.3%)은 노동자(0.9%)와 함께 가장 수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해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농촌세를 폐지하는 혁명적인 조치를 취했다. 유구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이 소작료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심각한 도농간 양극화 해결에는 역부족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우울한 기분으로 기념관을 나왔다.

저녁은 후난식으로 했는데 역시 명성대로 매웠다. 후난 출신답게 매운 음식을 좋아한 마오는 평소 “혁명가는 매운 것을 잘 먹어야 한다”며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명 이더ㆍ李德)을 놀리곤 했다는데, 그래서 호남출신에 혁명가들이 많은 것인가?

 

마오의 생가로 가는 비포장길

 

샤오산(韶山)은 창사에서 서남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은 이 곳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잡혔을 정도의 오지이다. 길조차 없던 이 곳에서 마오는 태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국부가 된 마오의 생가 아닌가. 따라서 샤오산을 찾아가는 길은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길이 비포장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같으면 아스팔트로 잘 닦아놓았을 텐데 이렇게 엉망인 것은 마오에 대한 우상화가 덜 됐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엉망인 길이 참을 만 했다.

도착하자 국부의 생가답게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특히 관광버스들이 많았다. 완만한 언덕길로 올라가자 왼쪽에 연못이 나오고 오른쪽 언덕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생가가 보였다. 마오가 공부보다 일을 하라는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투신을 하겠다고 겁을 주어 아버지의 항복을 얻어냈다는 연못이다. 뒷날 마오는 “대가 끊기기를 원치 않는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해 승리했다”며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계급투쟁에 승리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빚 투성이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마오가 집에서 운영하는 쌀가게의 도제가 되어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업료마저 안 주겠다고 하자 서당에 가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해야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의 편이었다. 어머니와 외가의 설득으로 그는 사범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좌파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가 아는 마오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 역사란 묘한 것이다. 생가는 당시의 중국 농촌기준으로는 상당히 부유한 수준의 꽤 큰 집이었다. 방이 여섯 개 달린 기와집이니 부농이었던 셈이다. 사실 펑더화이(彭德懷) 등 일부를 제외하면 마오, 덩샤오핑(鄧小平),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혁명 지도자들도 대부분 부농이나 중산층 출신이다.

 

징강산과 좌파 수호지?

 

창사에서 징강산으로 향하자 첩첩산중에 들어섰다. 80년 전 추수봉기에 실패하고 마오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남은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향하던 그 길이다. 감회가 무량했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징강산은 해발 900m 정도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진 평평한 산이다.

그러나 후난과 장시성의 경계에 위치해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이미 이 지역에는 500명의 화적 떼가 자리잡고 주민들에게 소작료와 세금을 받으며 사실상의 정부로 행세하고 있었다. 마오는 이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남부로 가기 위해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들과 공존하기로 했다. 이후 지역 토호들을 공격해 처형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이들을 부하로 두게 된다.

보기에 따라, 그가 자주 읽었던 수호지의 의적과 비슷한 모습이 된 것이다. 즉 현대판 송강 비슷해졌다. 신문은 그를 중요한 화적두목으로 보도했다. 그 때문에 마오는 모스크바와 중앙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주더(朱德)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전설적인 ‘주-마오 군대’군대가 탄생했다.

흔히 중국에는 다섯 성지가 있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마오의 시신과 혁명박물관이 있는 베이징(北京)이다. 두 번째는 마오의 생가인 창사, 세 번째가 바로 징강산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마오가 장정 중 권력을 잡게 되는 준이(遵義)이고, 마지막으로 장정을 끝내고 홍군의 수도가 된 옌안(延安)이다. 징강산은 5대 성지중의 하나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고급 리조트와 숙소들이 즐비해 마치 한국의 고급 리조트타운에 온 기분이었다. 수백억원을 들여 외양만 번지르르하게 만들어 놓아 그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광주 5.18기념묘역처럼 혁명유적의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화돼 있다는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상당히 많은 계단을 지나자 뾰쪽한 금빛 조각들이 난창과 창사에서 본 소총 조형물처럼 하늘을 향해 찌르고 있는 모양의 징강산 혁명열사기념비가 나타났다. 징강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창을 든 어린 손자와 함께 아마도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깊은 주름의 할머니의 모습의 조각이, 오른쪽에는 홍군과 그를 그리는 아내의 모습을 한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깊은 주름의 할머니는 발 밑의 호화스러운 리조트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死地에 남은 동료 목숨값으로 백만대군 포위를 뚫고…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3〉장정의 출발
1만명 희생된 원조 출발지 루이진 毛가 도강한 위두의 위세에 밀려나
준설작업으로 엉망진창된 위두江엔 여덟 자식 잃은 어머니 통곡이 흘러
수소문 끝에 만난 99세 老홍군 "농민 세상 약속 믿고 주저 안했지"



서강대 정외과 교수

총론-21세기 중국과 장정
<1> 장정이전의 역사
<2> 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3> 장정의 출발
<4> 샹강의 패배
<5> 마오의 부활
<6> 적수를 네 번 건너다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시작하면서 건넜던 위두 강변의 도하지점. 기념석 아래 강 위에 당시 부교 건설을 위해 사용한 것과 같은 작은 배들이 매어져 있다.

청바오양(曾保樣) 할아버지

 

징강산(井岡山)에서 세력을 키운 마오(毛澤東)는 산을 내려 와 국민당이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장시(江西)성의 루이진(瑞金)지역을 장악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은 장시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 인구 1,000만명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마오가 루이진으로 정했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오를 국가수반인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했다(당시 모스코바는 대부분의 자금을 제공하고 있어서 중국공산당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중앙당이 위험한 상하이(上海)를 떠나 안전한 루이진으로 이동해오면서 당서기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이후 모스코바에서 유학한 스물 다섯 살의 청년 보구(博古)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도착해 당을 장악했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도 도착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을 움직이는 삼두체제가 자리 잡았다. 마오는 권력에서 소외됐다.

한편 국민당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마오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홍군을 소부대를 나누어 유격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패배주의로 비판을 받았다. 홍군은 적의 약점을 이용해 네 차례의 포위작전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34년 들어 국민당군은 100만 대군을 동원한 5차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삼인위원회는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나가 다른 곳에 있는 홍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장정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자신들이 결정한 이 같은 홍군의 이동이 1만km의 역사적인 장정이 되리라고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마오도, 장제스(張介石)도 마찬가지였다.

 

■ 원조 논쟁

 

저녁 늦게 루이진에 도착해 찾은 곳은 홍군광장. 31년 11월7일 중국공산당이 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마오를 주석으로 선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는 하얀 돌로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서’라고 써있었고 그 글씨가 끝나는 곳에 포탄모양을 한 붉은 색의 높은 기념탑이 나타났다.

루이진의 상징이 된 홍군열사기념탑이었다. ‘기이한 살생부’(루이진에 남을 사람들의 명단)에 의해 주력군이 루이진을 빠져 나가도록 이곳에 남아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옥쇄한 이름 없는 홍군들을 생각했다. 그들이야 말로 잊혀진 장정의 진정한 영웅들이 아닌가.

해가 진 캄캄한 밤길로 루이진을 벗어나자 루이진시의 경계에 ‘장정 출발지 루이진’이라는 현수막이 나타났다. 오던 길에 지나온 위두(于都)에서도 ‘장정 출발지 위두’라는 현수막을 본 기억이 났다. 그럼 장정 출발지가 두 군데란 말인가? 한마디로 마포에 가면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 ‘원조 최대포’ 간판과 같은 ‘원조 논쟁’이다.

장정 출발지 원조는 과연 어디일까. 루이진인가, 위두인가?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위두이다. 루이진에는 소비에트임시정부 흔적 등은 남아 있지만 장정과 관련된 제대로 된 기념관이 없다. 그러나 위두에는 거대한 장정 기념관과 장정 기념탑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장정출발을 하려면 루이진이 아니라 위두로 간다.

물론 당지도부가 위두를 장정의 도강지점으로 선택해 34년 7월 루이진에서 위두로 사령부를 옮기고 장정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정부와 주력군은 루이진에 있었고 위두가 루이진의 서쪽에 위치해 루이진에서 위두를 통해 서쪽으로 장정을 떠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이진이 장정의 출발지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즉 ‘원 출발지’는 분명히 루이진이었다. 참가자들만 해도 그렇다. 루이진은 당시 23만명 인구에 3만5,000명이 장정에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위두는 비슷한 22만명 인구에 1만6,000명이 참가해 1만명이 희생됐다. 숫적으로도 루이진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왜 원조논쟁에서 위두가 우세인가. 간단하다. 출발당시 당지도부가 위두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오가 위두로부터 장정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고 따라서 원조논쟁에도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장정 출발당시 마오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는 것이지 원래 소비에트수도는 어디였고 주력군이 어디서 출발했는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참과 거짓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란 결국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력관계를 의미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주장이 생각났다. 역사가 기억을 둘러싼 정치투쟁인 것이 바로 이 같은 이유이다.

기념관 가는 길은 공사 중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기념관을 가기 위해 이리 저리 헤맸다. 거기에는 위두강의 도하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있었고 그 뒤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가자 장정을 결정한 3인방의 얼굴로부터 장정을 위해 위두강을 건너기 위한 부교를 만드는데 사용했던 문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군인 신발 만들기 등 위두 주민들이 장정을 떠나는 홍군을 위해 했던 다양한 지원들을 유형별로 그려 놓은 것이다.

홍군과 민중은 물과 물고기과 같은 관계여서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홍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마오의 지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도하지점에 기념돌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뒤로 배가 놓여 있었다.

이 같은 배 800척을 동원해 부교를 여러 개 설치하고 34년 10월16일 저녁 6시 횃불을 켜고 강을 건너 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마오는 말라리아의 후유증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강을 건넜다. 당시 그는 마흔 살이었다.

74년 전 마오가 건넌 위두강은 모래를 캐내기 위한 준설작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 되어 옛날의 맛은 나지 않았지만 강을 바라보고 있자 이날 열 명의 자식 중 여덟 명을 장정에 떠나보냈다는 위두의 한 어머니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49년 홍군이 장제스군에 승리한 뒤 위두를 지나간다고 해서 이 어머니는 3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거리에 나와 자식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99살의 노홍군을 만나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99살의 장정 참여 노(老)홍군을 만났다. 홍군 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생각 밖으로 건강했지만 귀가 어두워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놀라며 반가워 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사탕을 선물하고 기념품으로 만들어간 장정 기념 손목시계도 직접 손목에 채워드렸다. 막내아들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어 청바오양(曾保樣) 할아버지를 상대로 인터뷰를 했다.

-언제, 왜 홍군이 가담했습니까?

“22살이었던 1932년이었어. 당시 소작을 짓는 소작농이었지. 그런데 농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주저 없이 참가했어.”

-장정 중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펑더화이(彭德懷)부대에서 기관총사수를 했지. 7kg이나 나가는 기관총을 메고 다녔어. 한번 져봐, 얼마나 무거운지.”

-가장 힘들었고 위험했던 일은 뭐였던가요?

“라오산(老山)이나 대설산 같은 고산을 넘는 것이었지. 가파른데다가 산소가 부족해 여러 번 기절할 뻔했어. 내 부대에서 7~8명만 살아 남았지만 나는 상처하나 안 입었지. 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이 돌봐주신 것이지. 그래서 이후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소고기를 안 먹어.”

-장정 후 무엇을 했습니까?

“옌안(延安)에 있다가 일본이 망한 뒤 장제스군과의 해방전쟁에까지 참전하고 당의 배려로 결혼했다가 53년 고향으로 돌아왔어. 장정 전에는 글을 못 읽었는데 장정 중 글을 배워 귀향한 뒤에는 정부의 농업생활조합 같은 데서 창고관리원으로 일했어. 장정 참여했다고 정부가 30년 전 5,000위엔을 지원해줘서 지금의 집을 지었어.”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3남 1녀고 마누라는 5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어. 현재 막내가 나를 모시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