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중국은 각 지역을 지배하는 군벌들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쑨원(孫文)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서구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1912년 국민당을 창설했다.
한편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성립됐고 국제공산당본부(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국민당과 국공합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져 국민당의 장제스가 교장으로 취임했고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초빙됐다. 젊은 공산당원들도 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실세가 된 장제스는 1927년 군벌들을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들어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다. 수십만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이를 돕기 위해 총파업에 들어가 "장제스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상하이의 갱 두목이자 악덕 매판자본가과 뒷거래를 했고 장제스가 방조하는 가운데 갱들은 기관총을 설치하고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사라졌다. 역사적인 4.12학살이었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운동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은 반작용으로 무장투쟁이라는 좌파노선으로 선회했다. 그 첫 작품이 난창봉기이며 두 번째 작품이 추수폭동이다. 1927년 8월 난창 공안국 국장인 주더(朱德)가 국민당군 지휘관들을 연회에 초대해 발을 묶은 가운데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격파하여 난창을 장악했다.
그러나 광둥(廣東)으로 진군해 혁명근거지를 만들려는 계획은 이동 중 국민당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실패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에게 고향인 후난(湖南)에서 추수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9월 마오의 후난병력은 일부 소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피해도 컸고 목표한 창두(成都)ㆍ창사(張沙)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오는 후난과 장시성 경계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상하이의 두 얼굴
상하이는 중국 '붉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오랜 조차지였던 역사적 유산에 기초해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을 능가하는, 아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카이라인과 와이탄(外灘ㆍ해변가에 자리잡은 상하이의 유서깊은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이를 증언해준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 사회주의의 상징이자 메카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곳이 바로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하이의 선진적 노동자들은 1920년대 투쟁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중심적인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이 점에서 상하이는 상반되는 '두 개의 얼굴'을 한 도시이다.
1921년 7월23일. 마오를 비롯한 13명의 사람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내에 있는 한 이층건물에 모였다. 53명의 공산당원들을 대표한 대의원들로 이들은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30일 이 같은 모임을 냄새 맡은 경찰이 수색에 들어갔다. 이들은 급히 피해 인근 호수의 유람선에게 창당선언문을 낭독했다. 마침 제1차 전대 회의지에서는 저우언라이 회고전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성지답게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13명의 대의원들이 회의를 하던 방은 촬영이 금지돼 있었으나 사무실에취재목적을 설명해 촬영을 허락 받았다. 사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 장정에 참여한 또 다른 주요세력인 4방면군 사령관으로 장정의 방향과 관련해 마오와 갈등을 벌렸던 장궈타오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결국 당내 소외세력이었던 마오와 당내 최고엘리트였던 장궈타오가 장정을 놓고 갈등을 겪고 결국 마오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엄습한 것은 혼란감이었다. 이 유적 바로 옆에 파리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카페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들의 최고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코앞에 이 같은 카페촌을 만들도록 허락한 중국. 이를 실용주의라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실 제 1대 전대 회의지와 카페거리 신천지, 이처럼 현재의 중국의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즉 지척에 위치한 이 두 곳의 공존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자본주의 못지않게 시장경제를 추진해 가고 있는 소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하이의 최고 매력은 와이탄의 야경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은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걸, 조명이 다 꺼져서 죽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지난 구정의 폭설로 발전과 송전에 문제가 생겨 관광객이 많은 주말만 조명을 켜고 주중에는 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불이 꺼져 황량한 와이탄거리의 모습이야 말로 환경오염과 에너지난에 봉착한 세계의 불안한 미래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폭설의 경우 결국 환경오염에 따른 기상이변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상이변은 전력난을 낳았다.
어디 전력뿐이랴. 고갈의 위기에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석유값은 또 어떠한가. 사실 이 같은 에너지, 그리고 천연자원 문제 때문에 중국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중앙아시아 등 에너지와 자원강국들로부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방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의 석유와 에너지의 소비량은 앞으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국, 나아가 세계의 에너지난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 뻔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색상으로 원을 그린 천장과 벽.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거대한 소총.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해, 포스트모던한 팝아트 설치 미술의 한 장면이었다.
다음 날 난창봉기 기념관을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충격적이게도 이 같은 형상이었다. 공산당의 혁명유적 기념관이니 당연히 무겁고 칙칙한 사실주의적 조형을 기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창봉기는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배반당한 뒤 행한 첫 무장봉기이다. 따라서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한 조형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말이었다.
조형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오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말이 잘못 인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마오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나 의회와 같은 민주적 정치를 혐오하고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되곤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그 같은 발언이 나오게 된 맥락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오는 이 발언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의해 국공합작을 배반당하고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결정한 우한(武漢)회의에서 했다.
따라서 그 말은 피의 희생의 생생한 체험에 기초해 평화노선은 적의 폭력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을 가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현실분석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거꾸로 선 장총 조형물을 보면서 역사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가 결국 승리하며 비폭력의 힘이 폭력보다도 더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규범적으로는 폭력이나 이에 대한 대항폭력(난창봉기식의), 나아가 비폭력을 넘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반폭력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현실을 알수록 역사에 있어서 폭력의 힘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자신이 없어진다. 고대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같은 무장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운동만 했다면, 그리고 중국의 농민들이 공산당의 지도아래 홍군을 조직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면, 노예의 사슬과 오랜 봉건적 수탈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 별로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