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안민수(자유기고가)
(시대정신 29호)
2012년 3월
1. 중국 정부의 민족주의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금기시되어 있다.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세르비아나 일부 아랍국가들, 이란, 북한, 이스라엘, 일부 중앙아시아 국가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문제국가들이나 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문제국가들로 알려진 나라를 제외한다면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중국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과 정부가 민족주의 성향이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국 정부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은, 그리고 고위 관료들은 분명히 민족주의 성향이 있다. 한국보다 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꽤 우려스러운 수준의 민족주의 성향이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국가이고 강대국이기 때문에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 성향도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들의 문화소양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표출되는 형태도 쉽게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러오고 있다. 중국인과 중국 관리들은 이런
측면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으며 조금만 더 반성적 관점에서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한·중·일 3국의 민족주의
적어도 표면적으로 중국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에 비해 낮은 편이다.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상대적으로 낮은 주된 이유는 국가에서 민족주의를 억제해왔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되면 국가유지가 어려워지고 혼란이 심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는 민족주의를 반국가적인 사상으로 규정짓고 강력히 탄압해왔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민족주의를 적대시한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중국에서 민족주의는 반동사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모택동 자신은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민족주의를 반동 시 하면서도 모택동의 민족주의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민족주의를 장려하고, 학교 교과서에서 민족주의를 긍정적인 사상으로 가르치고, 학교 교사들도 거의 일치되게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교육하고, 모든 언론매체가 민족주의를 고무하고 있는 한국의 민족주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일본의 경우에는 민족주의가 2차 세계대전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었고 공식적으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은 일정하게 금기시되어 있다. 그러나 1민족 1국가(완전한 1민족 1국가는 존재하지 않지만 대체로 1민족 1국가에 가까운 나라로서 한국과 일본이 있다)로서 민족주의에 대한 강력하고 끈질긴 유혹이 사회의 깊은 밑바닥에 지속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는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한국과 중국은 모두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물론 일본의 침탈로 인한 고통은 중국이 더 컸다.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에서 중국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 비해 대략 30배~100배 정도 많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10년간 아주 극렬한 전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서로 간의 원한과 보복이 점차 강력해졌고 잔혹한 행동들이 이어졌다. 2차대전 때 다른 지역에서는 그래도 최소 수준의 규칙은 비교적 지켜지는 편이었지만 중일전쟁에서는 규칙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주의조차 없었다. 국민군과 팔로군은 일본군 포로를 아주 잔혹하게 학대하고 고문하고 학살했으며 일본군도 역시 중국군에 대해 그렇게 대했다. 일본군의 731부대가 중국군 포로를 생체실험에 사용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땅에는 일본측 민간인들이 거의 없었다. 주로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측은 군인에 한정해 피해를 입은 반면, 중국측은 군인은 물론 광범위한 민간인까지 함께 피해를 입었다. 중국군에 협력했거나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잔혹한 보복을 당했으며 일본군이 마을 전체를 불살라버린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3.1운동 때의 몇 달간의 피해를 대단히 크게 생각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피해가 무려 10년간에 걸쳐 중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반일의식은 대단하다. 한국인의 반일의식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조장한 측면이 많지만 중국인의 반일의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반일의식이
민족주의에 영향은 주겠지만 반일의식이 바로 민족주의로 가지는 않는다. 중국에서는 역사에서 ‘일제에 대항해 싸운 것을 성스러운 투쟁’으로
규정하면서도 민족주의는 반동적 사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동거가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3. 중화주의, 민족주의, 중화민족주의
중화주의, 민족주의, 중화민족주의 이 3가지는 조금씩 그 성격이 다르다.
1) 중화주의
중화주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논쟁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민족주의적인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중화’나 ‘중화주의’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좀 더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겠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를 기초로 해서 볼 때 그것은 ‘민족’보다는 ‘문명’과 관련이 있다. 황하문명이 탄생한 이후 황하문명과 그 영향권 밖의 지역은 그 문명화 수준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이러한 분명하고 커다란 차이는 수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한나라가 출발할 때까지 요동과 한반도, 양쯔강 이남지역은 이러한 문명지역의 범주 바깥에 존재했다. 이렇게 문명지역과 그 바깥지역을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중화’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서부지역은 위만과 한사군의 영향을 받아 빠른 속도로 ‘중화문명’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 우수한 문명을 지닌 북방인이 한반도 남쪽을 침략해 들어가 국가를 건설하는 등 점차 이러한 문명은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중화문명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 한반도는 나중에는 완전히 중화문명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반도가 완전히 중화문명에 들어간 시기를 통일신라 전기로 보는 관점과 고려 후기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어쨌든 분명한 것은 고려 후기 정도의 시기에는 한반도는 완전히 중화문명권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초기에 ‘중화’ 혹은 ‘중화문명’은 농업, 제련, 토목, 도시건설, 건축, 정치제도, 문자, 철학, 과학, 예술, 산업기술, 종교 등 모든 부문에 있어서의 ‘선진문명’을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이것은 ‘유교문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나중에도 물론 선진문명의 의미가 들어있기는 했지만 점차 유교문명을 의미하는 측면이 강해졌다.
조선시대 후기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조선에서 조선중화론 혹은 소중화론이 유행했던 것을 보더라도 한반도가 중화의 범주에 완전히 들어갔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유교문명의 범주 바깥에 있던 오랑캐가 중국을 완전히 지배했으니 이제 중화의 중심은 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중화가 민족 개념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아예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화의 범주에는 한반도와 요동 동부지역이 아주 명확히 포함되었고, 청나라 시절에 들어가서는 중화의 범주가 요동지역 전체와 대만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과 광서지역과 운남지역은 연구가 좀 복잡해지지만 어쨌든 베트남의 경우 중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현재의 중국 영토 중에서 티벳과 위구르, 닝샤, 칭하이, 몽골 등 전 국토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은 역사 속에서는 중화의 범주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거의 명백해 보인다.
그러면 ‘중화주의’란 무엇인가? 현대 정치사상이나 현대 철학사상에서 중화주의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선진문명에 대한 존중과 이를 비문명권으로 적극적으로 확산하거나 비문명권의 침공으로부터 선진문명을 보호하자’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선진문명’이라는 개념은 점차 ‘유교문명’으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화주의는 민족주의와 연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계주의 혹은 국제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 세계를 민족 단위로 보기보다는 문명지역과
비문명지역으로 나누고 문명지역을 중심으로 비문명지역을 적극 포섭하고 문명화한다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중화란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러한
개념 혹은 사상이 진보적인 것이었음은 명백한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진보적 요소는 조금씩 퇴색해가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진보적 요소는
남아있었으며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발흥할 때까지 최소한 수구적이거나 반동적인 지위를 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민족 단위로 서로 배척하거나 자기들끼리만 뭉치려고 하거나 타민족에 대해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티벳이나 위구르의 독립운동이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세계 많은 지역의 분리독립운동이나 기타 분쟁이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이 강한지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다. 한족이 장족을 배척하고 몽골족이 조선족을 배척하고 묘족이 한족을 배척하는
등의 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 의미의 민족주의와 중국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3) 중화민족주의
중화민족주의란 중화라는 말과 민족주의라는 말을 묶어놓은 말이지만 역사 속에서 사용되었던 ‘중화’라는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역사 속에서 사용된 중화라는 말은 민족주의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으로 민족주의와 같이 사용될 수는 없다. 중화민족주의에서 사용된 중화라는 말은 ‘중화인민공화국’ 혹은 ‘중화민국’의 앞머리 글자를 딴 것일 뿐이다. 중국이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국가의 단결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분열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에 국가의 범주와 민족의 범주를 통일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중화민족주의란 민족의 범주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민족주의라고 불러야할지 좀 불분명한 점도 있지만 사실 지난 100여 년간의 변화를 놓고 본다면 그 흐름상으로는 한족, 장족, 묘족을 포함한 중국의 대부분의 민족이 소멸하고 명백히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으로 흡수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 위구르족, 티벳족, 조선족 이 3개 민족을 제외하고 나머지 민족들은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으로 융합해 들어가는 현상이 아주 분명하다. 티벳족과 조선족은 그 경계선에서 융합되어 들어가는 측면과 그 반대의 측면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며 위구르족은 당분간은 융합이 쉽지 않은 상태에 있다.
중화민족주의는 모택동식 사회주의에 대신해서, 첫째 국가이념의 역할과 국민정신의 지주 역할을 하며, 둘째 국가의 분열을 방지하며, 셋째 국민의 단결된 힘을 발양해내 빠른 속도로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다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중화민족주의는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위구르족, 티벳족, 조선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이 자신의 호적에 적혀있는 민족보다는 ‘중화민족’에 더 많은 정체성의 일치감을 갖게 되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런 방향으로 정체성이 변화했다.
‘중화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주의와 다르다고는 하나 점차 다른 민족주의와 비슷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고 그 완성태가 다른 민족주의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60~70년대 민족주의가 허물보다는 공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흔히 말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흔쾌히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그런 주장을 완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은 강대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개발 기간과 같은 논리,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는 없다. 강대국에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 중화민족주의에 대해 조금씩 제동을 걸어나가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판단된다. 만약 중국 정부가 중화민족주의를 계속
방치하거나 더 조장하게 되면 중국과 이웃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큰 재앙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중국이 될 것이다.
4. 중국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세계화
현대사회는 교통과 통신, 산업의 급속한 발달로 세계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중국에서는 현재 두 개 차원에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 하나는 탈민족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탈국가화이다.
그 중에서 탈민족화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탈민족화가 민족주의 자체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중화민족주의라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훨씬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지는 중국인들에게 달려 있다. 그들이 탈민족화 경향을 이용하여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때 그것은 주변국과 세계의 모두에게, 특히 그들 자신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중국은 사실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다. 청조가 무너진 후, 군벌들이 중국을 분할통치해왔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대약진이다, 문혁이다 해서 제대로 국가운영이 되지 않았다. 1978년 이후 겨우 처음으로 근대국가다운 국가운영을 하고 있으니 국가운영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그들에게 있을 수 있다.
즉, 국가의 범주에 부합하는 민족개념, 다시 말해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해서 국민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적 단결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탈국가화를 억제하여 국력의 집중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는 초기 근대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 인류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는 13억의 인구를 가진 초대국 중국이라는 것이고, 둘째 급속히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에 이런 현상이 별로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고, 셋째 동아시아의 특성 때문에 민족주의의 격화가 높은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의 강화가 당장 현실적인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억제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5. 주변국이 취해야 할 태도
민족주의가 격화되면 약소국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아무런 군사적,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역, 투자, 인적교류가 중단되었을 때 또는 중단까지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크게 위축되었을 때 한국이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가 격화될 조짐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이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앞장서서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있다.
고구려사 문제를 보더라도 한국 정부는 문제가 이렇게 커지기 전에 고구려사에 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하는데 기회주의적이고 피동적 입장에 있다가 지금은 우파 민족주의 언론과 좌파 민족주의 언론이 합작하여 비이성적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까지 부화뇌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할 야당은 오히려 더 앞장서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우파 민족주의 언론과 야당은 여당이 과거사 문제를 들고 나오자 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돌리고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 목적으로 고구려사 문제를 이용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에는 그 자체의 파괴적 본성이 너무나 위험하다.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민족주의를 이용해서 무엇을 도모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민의 안녕과 복지, 행복을 원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동아시아지역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일이 갖는 위험성을 끈기있게 설명하고 이러한 행태를 극복해내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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