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중국의 민족문제 실태와 정책*

이강기 2015. 9. 3. 22:43

중국의 민족문제 실태와 정책*

 

 

최우길 

 

선문대학교 국제·유엔학과 교수

 

시대정신 29호

2012년 3월21일

 


 

* 이 글은 중국의 민족 문제에 대한 개론적 설명으로, 각주와 참고문헌을 달지 않았다. 주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와 참고문헌은 다음 책을 참조할 것. 최우길, 『중국조선족연구』(선문대학교 중한번역문헌연구소, 2005)

 


 

중국은 다민족통일국가이다. 다수민족인 한족을 비롯하여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은 한족 이외의 55개 민족을 일률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사실 전체인구의 90% 이상이 다수민족인 한족이므로 ‘일민족돌출형(一民族突出型) 다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 소수민족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1982년(제3차 전국인구조사) 67,295,167명, 1990년(제4차 전국인구조사)에는 91,200,314명, 2000년(제5차 전국인구조사)에는 106,430,000명으로 늘었고, 전국인구에 대한 소수민족 인구의 비율도 8.41%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국토의 변방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소수민족의 자치구역의 면적은 617만㎢에 달해 국토 총면적의 64.3%에 이른다. 이런 숫자가 보여주듯 소수민족 통합의 문제는 중국 국가통일에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 중국의 민족문제

 


 

소수민족의 인구가 중국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작으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그 중요성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수민족지역이 갖는 전략적인 중요성이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중국의 서부·남부·북부·동북부 등 변방과 국경지대에 걸쳐서 살고 있다. 몇몇 소수민족의 경우 인접국가와 중국에 걸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국경분쟁의 소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둘째, 소수민족의 거주지역은 인구밀도가 비교적 낮다. 주로 한족 거주지역으로 높은 인구밀도를 보이며 포화상태에 있는 중국의 동부 연안지방에 비교하면 소수민족지역은 아직 인구의 흡인력을 가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소수민족지역은 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석유·석탄·금 등 귀중한 자연자원이 주로 소수민족지역의 산물이다. 현대화와 경제발전의 당면 목표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지역의 자원에 대한 올바른 개발과 이용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개방·개혁정책을 채택한 후 경제발전과 경제적 통합을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지역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서부대개발 정책과 논의는 이 같은 맥락과 연결이 된다. 넷째, 정치적 선전의 차원에서 중요하다. 중국의 국가통합 또는 체제통합의 차원에서 소수민족들의 불만이나 분리운동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56개 민족이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되었다는 90년대 이후 중국 민족학계의 논의도 정치적 선전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섯째, 관광자원으로서의 소수민족지역과 인구의 중요성이다. 특히 개방정책을 채택한 이후, 소수민족지역의 문화, 예술, 종교, 관습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중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은 소수민족 또는 개별민족의 민속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관광자원의 개발과 관광객 유치에 노력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국은 소수민족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통합을 국가발전의 주요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소수민족문제는 통합의 문제이다. 영토적으로 그리고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떻게 중국에 통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영토통합이 중시되었다면, 그 이후 정치적 통합이 중요하였을 것이다. 최근의 양상은 현대화 및 경제발전의 차원에서 어떻게 한족 사회 또는 발전된 연안지방에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소수민족지역의 주요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은 어떤 입장에 근거한 것일까. 동화정책(同化政策)일까, 아니면 다원주의적 정책일까. 소수민족에게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 사용을 허용하고 민족교육정책을 장려하고 인구정책에서 ‘하나 낳기 정책’의 예외를 인정해 주는 등, 여러 혜택을 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면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통합 또는 동화정책이라기보다는 다원주의 정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족단결을 강조하고 있다든지, 다수민족인 한족의 문화가 수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워낙 강력하다든지, 대부분의 소수민족지역에 이미 한족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든지 하는 현실적인 면을 보면, 공식적으로 동화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정책 방향은 동화인 것이 분명하다. 공산주의의 민족이론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즉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이 번성하는 시기이지만, 결국 민족은 소멸할 것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중국에는 현재 55개 소수민족이 있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1949년 중국 건국 초기 소수민족의 수는 9개→38개→54개로 늘어났고, 55개가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이 말은 중국의 소수민족은 중국 정부가 인정한 민족이어서, 그 수는 기준을 정하기에 따라 수백 개도, 십여 개도 될 수 있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대부분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문화적 민족으로서의 주·객관적 경험에 있어서 한족과는 이미 구별되는 몇 개 민족들은 분명한 민족집단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많은 소수민족의 경우, 민족성분이나 호칭을 정하는 민족식별의 과정은 ‘국가가 민족의 지위를 인정하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민족은 국가통합 또는 국민통합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위로부터의 국민형성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변경 거주 원주민들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 통합하고 귀속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중국 정부는 1950년대 초, 민족조사 및 민족식별작업, 민족언어창조작업 등을 통하여 새로운 민족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위로부터의 국민형성’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같은 ‘민족 만들기’를 통해 이름도 없던 변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집단들이 ‘민족’으로 승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문화·정치적 공동체를 이루어온 역사적 경험을 가진 민족, 예를 들면 몽골족, 티베트족 등과 동격의 민족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한때 유라시아 대륙을 풍미했으며 중국을 지배하였던 몽골족과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종족집단은 민족평등의 차원에서 똑같은 하나의 민족일 뿐이다.

 


 

중국 민족관계의 특징은 지역성과 종교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중국 소수민족은 대다수가 중국의 서부, 남부, 북부 등 변경지역에 살고 있다. 한족지역과 소수민족지역의 구분이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호구제도에 의해 인구이동이 제한되어왔고, 최근에 이르러야 비로소 임시호구제도 등으로 이동의 자유가 용인되고 있다. 혹자는 인구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 될수록 민족 간의 교류와 이해가 증진될 것이고, 민족 간의 차이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실 최근 인구이동은 중국 내지와 변경의 ‘양방향으로의 유동’을 낳고 있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성 외에 종교 신앙의 경계가 분명하다. 신쟝(新疆)은 이슬람지역이고, 티베트족은 주로 티베트 불교도들이다. 민족종교를 가진 소수민족들은 그에 따른 독특한 생활습관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무신론적 입장을 이들에게 강요하였을 경우, 비극적 경험을 낳았던 역사적 선례가 비일비재하다. 중국 공산당은 소수민족들의 명확한 지역성과 종교성의 경계는 인위적으로 타파될 수 없으나 장기적인 역사발전과정 속에서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 전망과는 달리,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채택은 민족 간의 차이를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고 민족 간의 모순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민족 간의 차이가 줄어들지 모르나, 중단기적인 면에서는 민족 간의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신중국 성립 이후 레닌의 민족강령과 5대 기본원칙 즉, 국가통일, 민족평등, 민족 특수성의 중시, 단결호조(互助), 공동번영의 원칙을 근간으로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민족평등정책, 민족단결정책, 민족구역자치정책, 사회개혁정책, 민족지구 경제 및 문화발전정책, 민족언어문자 존중정책, 민족풍속 및 습관 존중정책, 종교 및 신앙자유정책, 민족 및 종교지도자 단결정책 등 9개 정책이 있다. 이 같은 정책은 민족평등, 민족구역자치, 민족단결 등 세 가지 방면으로 귀결된다. 민족평등은 중국 정부가 민족문제를 처리하는 근본원칙이며, 민족단결은 사회주의가 중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본 보증이라고 한다.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소수민족 집거지역에서 여러 민족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국의 기본적인 정치제도이다. 중국 민족정책의 법률적 기초는 1952년의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자치실시강요’와 1984년 제정된 ‘민족구역자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앙-지방의 권력배분에 있어서 단일제 국가형태를 취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집중제’를 강조하면서도, 줄곧 ‘다민족국가’의 자세를 견지해 오면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정책이자 정치제도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채택하여 왔다. 즉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들이 집중해서 거주하는 지역에 구역자치를 실시하면서 소수민족의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2. 중화민족론

 


 

중화민족론은 중국의 원로 사회인류학자인 페이샤오퉁(費孝通)이 1988년 홍콩의 한 심포지움에서 ‘중화민족다원일체론(中華民族多元一體論)’을 제기하면서 중국 및 해외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개념이다. 페이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이 개념을 처음 언급하였고, 중국의 민족학계는 이 개념에 입각하여 북경대학 <사회학인류학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근년 ‘중화민족연구’와 ‘다원일체연구’를 주제로 중화민족론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중화(中華)’는 이미 2천년 전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으로서의 중화세계관에서 나온 것이고, ‘민족’은 ‘네이션’이라는 유럽 근대국가 또는 국민민족의 개념이 19세기 이후 동양 삼국에 한자로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중화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 또는 중국적 세계관과 유럽적 근대국제질서의 교묘한 조화를 시도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페이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족이 역사적으로 중국 영역에 존재하게 된 것은 여러 민족의 접촉, 혼합, 융합의 과정을 통해서이며, 그 가운데 ‘중화민족의 응집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 중국 영내에 사는 여러 민족들은 다원적이면서도 일체를 형성하여, ‘중화민족다원일체격국(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 즉 중화민족은 다원적이면서 일체를 이루는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셋째, 중화민족은 ‘자연발생적인 민족실체’로서 수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되어오다가, 19세기 중엽부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자각적인 민족실체’가 되었다. 페이에 따르면, 중화민족은 중국영내에 있는 56개 민족의 민족 실체로서, 중화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은 보통 민족의 일체감보다 한 단계 높은 것으로, 중국 영내에 사는 모든 민족들은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 페이는 여러 민족이 분산되어 존재해온 다원적 상황이 일체화한 과정이 중요하며, 이 경우 응집력의 핵심은 한족이었으며,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의 정체성은 서로 모순되는 측면도 있지만 공존할 수 있다고 한다.

 


 

페이는 중국의 각 민족은 오랜 역사기간 동안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투쟁해 오면서 동일 세계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족은 오랜 역사 기간동안 이미 여러 민족이 융합하여 형성된 민족이고, 한때 중원의 주도권을 쥐었던 만주족, 몽골족이나 투쟁에 참여하였던 회족 등도 이제 ‘다원일체’를 이루어 중화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화(中華)를 둘러싸고 존재했던 많은 민족들은 ‘네가 오면 내가 물러나고, 내가 오면 네가 가는 식(來來我去 我來來去)’의 통합과정을 거쳐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我中有來 來中有我)’ 상태가 되어, 이제 중화민족으로서 “다원일체통일체”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중원은 천하의 무대이다. 주변 민족은 강대해지면 무대에 등장하여 연기를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사회주의 민족이론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경제가 고도로 발전하여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면 민족이 소멸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고 하는 민족소멸론과도 연관이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중국은 현재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다는 것인데, 이 시기에는 민족문화가 발전하고 번영하여 민족 간의 차이가 나타나면서 민족의식이 강해진다고 지적한다. 이 시기에 각 민족들은 개성(민족의식)을 강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다 큰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즉 역사적으로 형성된 불평등을 해소하고, 문화상의 차이, 협애한 민족 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적 차원의 경제공동체를 이루면,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가능성까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여러 민족을 포함하는 한편, 단순히 혈통에 의해 구분되는 사회가 아니며, 인간이 어느 국가 또는 민족에 속한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사회가 아니다. 이런 논리는 논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겠으나, 예측할 수 있는 장래에 현실화될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역사발전 단계의 장기적 측면에서, 민족이 소멸하고 대동(大同)의 세계로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 중화민족론에서 추론할 수 있는 미래의 민족관이라고 할 수 있다.

 


 

페이의 ‘다원일체’는 현재 중화민족이라고 하는 통일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한족과 각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또는 상위의 개념으로서 중화민족이 존재하는 것이다. 중화민족에는 한족을 포함, 중국의 56개 민족이 포함된다. 이 경우에 중화민족은 사회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정치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소수민족지역에서 받아들여지거나 인정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상기시키는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족주의는 한족을 다른 소수민족의 상위에 놓는 개념이다. 즉 민족동화 또는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한족을 중심으로 다른 소수민족이 한족에 동화 또는 융화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융합은 자연스럽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 반면에, 동화는 주관적인 의지의 측면이 강조되는 말로, 의지적·강제적인 조작을 포함한다.

 


 

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사회인류학자인 마륭(馬戎)은 페이가 제시한 중화민족의 개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중국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수천 년 동안 중국에는 여러 족군(族群)이 존재하였는데, 이는 종족적 의미라기보다 문화적인 의미였다. 중국이 주변의 이민족을 바라보는 관점은 한(漢)문화로의 친화 정도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민족을 배척하지 않는 민족관념이었다. 또한 이민족문화의 융합에도 상당한 관용을 보였다. 둘째, 중국의 민족개념은 구미에서 출발한 민족과는 구별하여 관찰하여야 한다. 영어의 ‘네이션’은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수준의 민족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는 독립된 집단으로 국가를 형성할 만한 소수민족집단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자국의 소수민족을 영어로 표현할 때 ‘nationality’ 또는 ‘minority nationalit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셋째, 중국 공산당이 옌안시대 이후 소련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한 독특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민족관이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기본적으로 스탈린의 민족이론에서 출발, 민족간부의 육성, 민족언어의 평등, 민족융화를 통한 공화국 건설 강화 등 여러 측면에서 소련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민족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세 가지 전제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마륭의 입장이다.

 


 

한편, 중화민족 개념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 소련이 형성하였다고 주장한 ‘새로운 소비에트민족’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구소련과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구소련에서 러시아민족은 전체 인구의 48%에 불과하여, 중국에서의 한족의 위치와는 사뭇 대조를 보인다. 중국의 경우,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가 밀접했으며, 만주족이나 몽골족 등은 중국의 통일에 기여하기도 하는 등 현 중국 또는 중화민족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의 민족정책은 소수민족들에게 러시아의 문화와 언어를 강요하는 동화정책이어서 첨예한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반해 중국의 민족정책은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격변기 외에는 민족평등과 민족단결의 원칙으로 하는 민족구역자치정책이 제대로 지켜지는 양상을 보였다. 민족자치지구의 인구구성 면에서도 티베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족이 절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내몽골자치구에 몽골족과 소수민족은 전체인구의 14%에 불과하고, 한족이 86%를 점하고 있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다분히 정치적 함의를 띠고 있다. 공산권의 몰락과 개혁 개방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는 20세기 말에 다민족통일국가 중국의 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중화민족을 의미하는 관념이 중국의 민족현실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중국 국가의 통일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방향성의 측면에서 중화민족론은 현재로서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화민족론은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가와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혼동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56개의 민족이 모두 중국 국가의 공민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중화민족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일체감을 갖게 되었다는 분석은 지나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3. 중국의 민족갈등 양상

 


 

중국에 살고 있는 56개의 민족이 다원적일체인 중화민족을 형성하였다고 하는 중화민족론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의 양상은 소수민족들의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현대 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은 주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마오쩌둥 시대의 정치캠페인에 의해서였다. 당시 소수민족지역에서 행해졌던 강제적인 동화정책은 오히려 소수민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켰다. 개혁 개방기의 민족구역자치정책도 소수민족들의 정체성을 대폭 허용하였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 민족식별작업을 통해 다양한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민족평등과 민족단결의 원칙 하에 민족자치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치적 격변기에 그러한 민족정책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대한족주의의 양상과 강제적인 동화정책의 모습을 띠기도 하였다. 1950년대와 1980년대 소수민족에 대한 특별법, 소수 민족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원조, 소수민족 특별대표제의 보장, 인구정책과 대학입시에서의 특혜, 민족성분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 등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경험, 현대화로 인한 위기의식과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소수민족 내부적으로는 정체성이 고양되었고, 한족과의 관계에서는 갈등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중국에서의 민족 갈등의 원인은 역사적 갈등, 정치적 갈등, 경제적 갈등, 문화적 갈등 등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다. 역사적 갈등은 소수민족에 대한 한족의 역사적 평가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중화사상 또는 화이(華夷)사상의 관점에서 소수민족을 오랑캐로 바라보았고, 이들을 중심과 주변의 시각에서 금수(禽獸)와 동일한 미개한 존재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소수민족 집단이 인정받는 것은 유교원리에 바탕을 둔 교화(敎化)를 받느냐 여부에 달려있으며, 이는 바꿔 말하면 한족에게 복종하느냐 또는 반항하느냐에 따라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중국식 사회주의도 중화적 관점은 여전하여, 사회경제적 발전의 정도에 따라 소수민족의 등급을 매기거나, 그들을 한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발전이라고 규정한다. 전통 중국에서는 문명과 미개를 가르는 기준이 유교원리였다면, 현대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문화가 그 기준이며, 전통 중국에서 주변민족들이 황제로 대표되는 한족에게 복종하였다면, 이제는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한족에게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50년대의 반우파 투쟁이나 대약진운동, 그리고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은 소수민족에게는 한족의 소수민족 문화 및 종교에 대한 탄압, 즉 한족 對 소수민족의 민족적 갈등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한족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위계 의식, 문명과 문화의 전위로서의 우월감과 의무감, 소수민족에 대한 교육자 및 상급자로서의 의식이 남아있고, 이는 끊임없이 한족-소수민족 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갈등의 요인으로는 진정한 민족자치의 부재, 다원적인 다민족사회가 단일 정당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모순을 들 수 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은 민족자치법을 새로 제정하고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의 민족위원회의 역할을 강화하는 등 진전된 정책을 취했지만, 조항의 대부분이 뜻이 분명치 않아 자치를 보호할 효과적인 체계가 없으며, 법 이행에 의한 차후의 법적 조치도 없었다. 진정한 민족자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는 ‘당 우위의 원칙’이다. 즉 중국의 모든 기구에서 당 우위의 원칙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으며, 민족자치의 경우 자치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수행은 당의 감독과 지시를 받게 되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 자치주 정부의 주장(州長)은 원칙적으로 조선족이지만, 역대 주당위 서기는 거의 모두 한족이었다. 모든 자치정책은 당의 제한을 받게 되어있으므로, 실제적이고 자치지역의 현실에 맞는 정책을 입안하거나 시행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즉 자치는 경제·문화·행정적인 면에서 제한적 의미의 자치이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자치는 아닌 것이다. 소수민족지역에 가장 중요한 자원배분 또는 개발의 문제, 인구이동문제, 환경문제, 국방과 관련된 문제 등은 지방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 티베트의 망명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독립을 주장하기보다, 진정한 자치의 시행, 한족이주 제한, 환경 보호 및 핵반입 금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적 갈등의 요인으로는 소수민족지역과 한족지역의 경제발전의 격차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중국의 주요문제 중의 하나인 동서문제 또는 발전된 연안과 내륙낙후지역 간의 문제이다. 이는 ‘내부 식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수민족지역은 대부분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상의 불평등’이 존재할 뿐 아니라, 원자재와 에너지 자원의 착취도 존재한다. 소수민족지역에는 기본적으로 자본이 투자되지 않았으며, 자원개발의 경우에도 그 이득은 그 지역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한족지역으로 옮겨갔다. 개혁 개방정책의 결과, 국가의 개입이 현저하게 줄었으나, 여전히 소수민족지역에는 이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서부개발계획은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경제통합의 측면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 민족문제의 어려움은 그것이 중국 국가통합의 문제, 또는 국민통합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화민족론의 등장도 56개 민족을 포괄함으로써 중국 국민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이기는 하지만, 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현실적으로 중국으로의 통합을 반대하는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소수민족들의 내용적 다양성은 국민적 통합으로의 중화민족 개념에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의 대부분은 중국 국민임을 인정하기도 하겠지만, 그 중 많은 이는 중국의 국민통합에 반대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소수민족들은 국가 또는 국민으로의 통합적인 구심력만을 받고 있지는 않다. 교통 통신의 발달, 국제적 연대 등으로 인하여 정체성의 재발견이라고 하는 원심력도 받고 있다. 신쟝(新疆)의 여러 민족들은 국경 넘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그들의 동료들이 있다. 또 1천 7백여만 명에 달하는 중국 회교도들의 국경을 넘어서는 신앙공동체와 원리주의 운동이 존재한다. 티베트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워놓고 세계적으로 비폭력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인 과경(跨境) 또는 과계(跨界)민족으로 꼽히는 조선족은 한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다. 중국 남부의 묘족(苗族) 등도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에 같은 족속이 살고 있다. 중화민족론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중화민족의 일원인데, 소수민족집단의 새로운 정체성 인식, 한족과의 민족갈등, 국민통합으로의 구심력과 해체로의 원심력 존재 등의 요소는 현실적으로 중화민족론의 적용과 전개를 어렵게 한다.

 


 

20세기 말 중국의 민족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구소련의 해체와 이에 따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독립을 들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은 신쟝지역에 위그르족, 카자흐족, 투르크족 등 이슬람계통의 소수민족들에게 큰 자극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1920∼30년대에 동투르크스탄운동 등 독립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 민족독립운동이 촉발될 것이라는 예상을 낳기도 하였다. 이런 우려는 수년에 한 번씩 간헐적으로 무력 충돌을 빚으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대만의 독립 움직임도 중국에게는 민족정책의 실천에 있어서 압력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4. 국가통합으로서의 민족정책, 그 한계

 


 

1949년 건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국가통합의 노정에서 보면, 광대한 소수민족지역과 인구를 신중국에 단계적으로 통합시켜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통합의 단계는 크게 영토적 통합, 정치적 통합, 경제적 통합의 세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통합의 세 단계가 시기적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완전히 한 단계가 완성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던 것은 아니다. 다만 소수민족정책을 중심으로 거시적으로 관찰할 때, 중국의 국가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민족정책이 건국 이후 어느 시기에도 최우선 순위의 정책은 아니었다. 또한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가 다른 국내정책과 상관없는 독립변수는 아니었다. 민족정책은 중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나 정책 노선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국가통합의 첫 단계로 1950년대 초 중국 정부의 목표는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영토적 통합으로 이들 지역을 물리적으로 수평적으로 신중국에 붙들어 매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소수민족에게 정치적 평등권을 부여하고, 소수민족 전통사회에 대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등 전반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방법을 취하였다. 이 같은 부드러운 방식은 1950년대 말을 기점으로 급변하게 되면서 통합의 두 번째 단계로 연결된다. 정책 변화의 동기는 이제 어느 정도 영토통합이 완성되었으므로 새로운 단계로의 전이가 필요한 측면도 있었지만, 초기의 점진적 정책으로 국가통합의 과정이 촉진되지 않고 오히려 소수민족들의 ‘지방민족주의’를 촉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측면이 있었다.

 


 

국가통합의 두 번째 단계는 정치적·사상적 통합의 단계였다. 초기의 경험에서 중국은 지방민족주의를 억제하고 수직적 통합을 서두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는 1950년대 후반의 대약진운동,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과 맞물리면서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중·소 국경분쟁 등으로 국가안보와 생존의 어려움 속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통합과정은 영토적 통합과 함께 가속화하였다. 그러나 강제적인 통합과정은 국가경제와 인민의 삶을 파탄지경으로 밀어 넣었고, 소수민족지역에서는 지나친 대한족주의의 횡포로 민족적 정체성을 촉발시키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1978년 개혁 개방정책이 채택된 이후 4대 현대화의 기치 아래 소수민족지역에서는 한족지구와 소수민족지구에 ‘사실상 존재하는 불평등의 제거’를 목표로 경제적 통합이 추진된다. 20여 년에 걸친 경제적 통합과정이 현재로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한족지구(동부연해지구)와 소수민족지구(서부지구)의 경제적 발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지역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다. 소수민족들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국민통합으로 나가기보다, 자집단 정체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구소련과 동구권 등 공산권의 붕괴와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독립 등 국제적 분위기와 큰 관련이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는 민족이 번성하는 시기라고 규정하면서, 민족자치를 강화하고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쓰는 등 소수민족과 그 지역에 대한 점진적인 통합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건국 50년의 어느 시기에나 소수민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입장은 국가통합 또는 국민통합의 방향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다만 통합의 전략이나 속도에 따라, 급진정책 또는 점진정책으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은 기본적으로 동화정책이며, 이는 전통 중국 왕조들의 민족정책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중국 정부가 애쓰고 있는 서부개발전략도 소수민족 또는 그 지역에 대한 국가통합 또는 국민통합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 국가통합으로서의 민족정책은 여러 국내외적 상황을 맞이하여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국제적 상황이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의 시대를 지나, 국가 상위 그리고 하위의 양방향으로 통합과 분리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통합으로서의 국민개념보다는 분절적 힘인 소집단 정체성, 즉 ‘에스니시티’(ethnicity, 민족성)가 현실적인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다양한 소수민족들은 ‘중화민족’으로의 통합 유인을 받고 있는 동시에, 이슬람 원리운동,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 등 국제적 연대와 연결되기도 한다. 국내적으로는 여러 갈등요소로 인하여 위기에 처한 소수민족집단도 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정체성이 강화된 소수민족도 있다.

 


 


 

5. 조선족의 경우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이 민족단결과 민족평등의 기치 아래 민족구역자치정책을 펼쳐오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족의 경우, 민족자치지구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이루고 조선어를 사용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민족습관을 존중받는 등, 우대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족정책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일면 사실이기는 하나, 전체의 모습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입장은 중화사상에 근거한 ‘한족우월주의’이다. 이론상 다민족 상태의 ‘장기적 공존’과 ‘민족융합’을 내세우고 있으나, 결국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동화’ 또는 ‘민족소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실상 소수민족의 민족주의가 용인되는 것은 문화적인 경우에 한한 것이요, 정치적인 차원의 것은 예외이다. 민족자치라고 하나, 이 경우에도 철저히 ‘당정분리 및 당 우위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어 한계가 엄연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연변자치주의 경우, 행정부의 수반인 주장(州長)은 조선족이 하는 것으로 자치조례에 규정되어 있으나, 사실상 자치주의 최고 간부인 당위서기는 통상 한족이 맡아왔다. 또한 최근 중화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한족을 비롯한, 중국의 56개 민족이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중화민족론에 이르면, 중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민족정책의 본질을 좀더 이해하게 된다. 80년대 개혁 개방정책의 채택 이후 소수민족지역에도 외부세계의 영향이 커지면서, 중국 정부가 몽골족, 티벳족, 회족, 조선족을 “중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네 개 민족”으로 규정하였다. 1990년대 초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붕괴 이후, 중국 중앙정부가 소수민족지구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0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50주년을 전후하여 주공산당위원회와 주정부의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접하면 조선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우려를 읽을 수 있다. 50주년 당일인 9월 3일자 연변일보는 중국 건국 전 이미 동북지방에서 중공연변지위 서기를 지내고 1952년 9월에 창립된 연변조선족 자치구의 주석에 임명되었다가, 후에 문화대혁명 때 핍박으로 인한 병으로 죽음을 당했던 주덕해(朱德海)를 “연변의 영원한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자치주 창립경과를 “50년 전의 장엄한 시각”이라는 표제로 보도하고 있다. 이 글은 “주덕해 동지는 광범위한 간부와 군중들로 하여금 정확한 조국관·민족관·역사관(3관)을 수립하게 하였다”고 강조하면서, “연변을 위대한 조국과 갈라놓을 수 없으며 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의 성원이기에 반드시 당의 민족구역자치정책에 따라 새로운 연변을 건설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50주년을 맞아 초대 주장을 소개하는 것이 단지 의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2002년 초부터 연변당위가 강조해 오던 ‘3관 교양사업’의 내용을 보면, 주덕해에 대한 해묵은 찬양은 50주년 기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2003년 9월 3일 중공연변 조선족자치주위원회 서기인 전학인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 주장 남상복은 축하메시지를 통해 그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즉, 연변당정의 최고일꾼들은 “연변의 정치안정과 민족단결을 수호”할 것을 강조하면서, “각급 지도간부들은 맑스주의 민족관, 조국관, 역사관을 일층 수립하고 민족단결을 강화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고 민족단결의 모범이 되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연변당위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50주년을 맞기 두어 달 전부터 “3관 교양을 전개하여 ‘세 가지 대표’를 실천집행하자”는 구호 아래 조선족들에게 올바른 3관, 즉 ‘조국관·민족관·역사관’을 “잘 학습하고 잘 연구하고 잘 장악하고 잘 관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3관 교양사업’의 전개는 지난 몇 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이 강조하면서 2002년 11월 16기 당대회에서 개정된 중국 공산당규약에 새로 삽입한 바 있는 ‘3개 대표이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이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 선진문화의 전진방향, 그리고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는 3개 대표이론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양상으로 연변지역에서 ‘3관 교양사업’ 또는 ‘애국주의 선전교양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의 배경은 90년대 이후 중국 정부가 강조하였던 ‘화평연변’의 현실인식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즉 “국외 적대세력들의 서방화와 분열화의 음모가 시종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조국을 사랑하고 중화를 진흥시키고 경외침투를 방어하는 사상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간고하고도 중대한 정치과제”라는 것이다. 물론 3관 교양에 대한 강조가 갑자기 제기된 것은 아니다. 중국국가교육위원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1992년 ‘민족교양을 강화할 약간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통해 민족단결과 민족정책 교양내용을 규정하면서, ‘민족이론과 민족정책에 대한 교양, 민족차별과 민족분열을 반대할 데 대한 교양’ 등을 학교교육의 중요한 내용으로 정하였다. 중국 당국은 최근 3관 교양사업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수요, 민족지구의 발전과 다민족 공동번영의 수요, 사회안정 추진과 민족분열 방지 및 국가의 장기적 안녕을 담보하는 수요”라고 재삼 강조하고 있다. 또한 “反중국서방세력과 민족분열세력이 민주, 인권, 민족, 종교, 역사 등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나라(중국)에 대한 ‘서방화’와 ‘분열화’ 전략을 감행하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2002년 7월 연변의 주요 당정간부들은 공식적인 발언을 통해 ‘맑스주의 조국관·민족관·역사관’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맑스주의 조국관의 근본요구는 바로 자기의 조국을 열애하는 것이다. 중국은 전 민족 공민의 유일한 조국이고 여러 민족은 중화민족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며 국가의 영토는 신성불가침이며, (중략) 조국통일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일체를 달갑게 희생하고 기여해야 한다. (중략) 맑스주의 민족관에 의하면 한족은 소수민족을 떠나지 못하고 소수민족은 한족을 떠나지 못하며 소수민족은 소수민족을 떠나지 못한다. (중략)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통일된 다민족국가이며 여러 민족은 조국대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성원이다. (중략)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다시피 예로부터 연변은 중국 영토였고 조선민족은 중화민족대가정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었다. 맑스주의 역사관을 수립하려면 반드시 객관적으로 역사를 대해야 한다. 특히 중화민족의 5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학습하고 연변의 근대발전사를 학습해야만 역사적인 문제에서 시비를 똑바로 가를 수 있다.(전학인, 연변주당위서기)

 


 

3관 교양으로 확고한 사상방선 구축해야(『연변일보』, 2002. 7. 8.)

 


 

중국조선족이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사회발전법칙에 부합되는 것이다. (중략) 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속에 융합되어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서 중요한 일원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여야 한다. (중략) 중국조선족의 민족이익은 중국국가이익의 일부분이고 나라의 번영창성이 없으면 민족지역의 가속발전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연변일보』, 2002. 7. 13.)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3관 교양사업’을 통해 “중국은 우리나라 여러 민족 공민의 유일한 조국이고 여러 민족은 중화민족의 중요한 구성부분이고 각 민족의 지위는 평등하며 나라의 영토는 신성불가침”이라는 사상관념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국가통합의 명분으로 ‘민족주의(중화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족문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등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의 고대사를 둘러싼 이견 등 역사와 민족개념을 둘러싼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 연변지방에서 ‘3관 교육(올바른 국가관·조국관·역사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중국 당국은 조선족들에게 “조국이 어디인가”, “조선족은 어느 민족인가”, “연변의 역사는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며,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맺는말

 


 

중국의 민족정책은 개혁 개방시기를 맞이하여,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과 인민공사운동 및 1960년대 중반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의 급진적 동화정책인 대한족주의의 입장을 벗어나, 온건하고 점진적인 정책으로 변화하게 된다. 소수민족의 특성이 다시 강조되고, 소수민족의 문화, 언어, 교육 등이 장려되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정책과 연결되는 것이다. 민족정책의 기조인 이론상에서 ‘민족문제는 계급문제’라던 마오의 주장이 후퇴하고, ‘민족문제는 장기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급진적인 민족동화보다는 자연스럽고 장기적인 민족융합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다. 소수민족문제는 4개 현대화의 관점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기본입장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 보든, 공산주의의 민족소멸론에서 보든, 결국 동화정책인 것에는 다름이 없다. 동화의 방법 면에서 급진-점진, 과격-온건의 차이가 있을망정, 그 추구하는 바는 결국 동일한 방향이라는 사실이다. 개혁 개방 시기의 민족정책이 온건하고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전통 중국의 동화정책 또는 공산 중국의 민족소멸론에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학계가 한족을 비롯한 중국의 56개 민족이 이제 중화민족이 되었다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사회학적 개념이기보다, 선전적 구호로서의 정치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중화민족이라는 일체의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개혁 개방 시기 이래 중국의 민족정책이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관측할 수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개혁 개방의 시기에 커다란 전환을 겪었다. 이 글에서 연변에서의 3관 교양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개혁 개방과 한국과의 교류 등으로 인한 조선족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 정부가 조선족을 바라보는 태도는 조심스럽다. 연변이라는 변경적 상황, 조선족의 역사적 경험, 중앙정부의 우려와 의심의 눈초리, 중국과 한국·북한 사이에서의 이중정체성 등은 21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중국 조선족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시대정신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