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되찾기 운동 비판
:: 김한석 자유기고가
시대정신 29호 2012년 3월21일 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지금의 중국 동북(東北) 길림성(吉林省) 동쪽 끝에 있는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 한국에서 간도라고 하는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옌지다오라고 한다.(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 인용) ‘간도 되찾기 운동’이 서서히 국민적 관심을 모아가고 있다. 독도 분쟁으로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원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독도 분쟁으로 격앙된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간도 문제를 거론하는 횟수가 크게 늘었다. 독도는 우리 땅을 지킨다는 방어적 자세였지만, 간도 영유권 문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민들의 영토욕과 민족주의를 자극할 만한 좋은 소재가 된다. 올 초 언론들이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뉴스를 연일 보도하면서 반중(反中) 정서가 높아지자, 간도 문제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영토 집착심리를 이용해 간도 영유권을 주장, 정치적 지반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사가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과 민주당 한화갑 의원이다. 올해 4월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자신이 총재로 있는 한민족공동체발전협회가 주최한 출판기념회에서 간도는 청나라와 일본에 빼앗긴 우리 땅이라며 우리 영토를 한반도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향신문도 간도 영유권 문제를 앞장서서 제기하고 있다. ‘간도 되찾기 운동’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따져볼 생각은 하지 않고 국민들의 영토욕에 편승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특별취재팀까지 중국에 보내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을 직접 찾아 나섰다. 경향신문은 e간도 사이트(www.egando.co.kr)를 개설해 간도 영유권 회복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언론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아직 독도만큼의 폭발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중 간에 외교전쟁으로 비화될 소지는 충분하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지난해 8월 한국 방문 때 간도 영유권 문제를 한국이 거론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만큼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영토 문제에 대한 국제법적 해석 독도는 지키려고 하면서 간도는 되찾으려는 행동이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라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 대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독도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인천대 노영돈 교수는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은 소위 주인 없는 땅의 ‘선점설(先占設)’을 근거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약한 것이다. 그러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법적, 역사적 근거는 너무나 강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영유권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면 분쟁 당사국들은 이 문제를 UN에 해결을 요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유권에 관한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ICJ) 또는 국제 중재재판에 맡긴다. 현 국제법상 ICJ에의 제소는 일방적 제소로 되는 것이 아니고 분쟁 당사국 간의 합의에 의한 중재요청이 있어야 한다. 한국이 간도 영유권 문제를 분쟁화하는 데 성공하면 간도를 점유하고 있는 중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최소한 UN 안보리에의 상정은 가능할 수 있다. 현 국제법상 분쟁화에 성공하기만 하면 ICJ에의 일방적 제소도 가능하게 되어 있다(재판소 규칙 제38조 5항).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중국이 재판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이 성립하지 않는다. 간도 문제는 독도와 차이가 있다. 독도는 섬이지만 간도는 내륙이다. 독도 문제는 도서(섬) 지역 영유권 논란에 해당하지만 간도는 국경 분쟁에 가깝다. 현재 도서 영유권 문제는 국제재판소에 30건 정도 계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경 분쟁이 국제사법재판소나 중재재판소 결정을 통해 수용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 영토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각종 협약을 통해 일단락된 문제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각종 국경관련 분쟁은 국제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되기보다는 무력을 동반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에게 익숙한 중-소 분쟁, 중국-베트남 분쟁, 중국-인도 분쟁, 인도-파키스탄 국경 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도 영토 귀속 문제가 명분이나 원인이 됐던 사건들이다. 분쟁 지역을 역사적 사실로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영토 분쟁에 관한 몇 가지 특징을 학습할 수 있었다. 먼저 영토는 매우 뚜렷하고 명시적인 근거를 제시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과거 사료에서 한 국가가 그 지역을 관할했다는 기록을 제시하거나 과거 지도를 통해 영토 귀속 여부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는 상대 국가에서 반박 자료를 제시하면 재판에서는 효력을 상실한다. 영역을 표기한 지도는 양국이 합의해서 공동으로 작성할 경우 효력이 인정되지만 당사국이나 제3자가 단독으로 작성한 것은 증거능력이 없다. 또한 영유권에 대한 국제재판에서는 국가라는 주체가 지속적이면서 평화적으로 그 지역을 선점·관할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 지역을 누가 최초 발견했는지, 누가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었는지, 점유 주체가 국가적 실체인지, 지속성이 의미하는 시효가 몇 년이 적당한지를 명확히 하기가 쉽지 않다. 독도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일본이 에도 시대 초기 1600년경부터 독도를 이용해왔다고 주장하면 한국은 신라시대인 512년에 우리 역사에 기록돼있다고 반박하고, 일본이 조선시대 상당기간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였다고 주장하면 한국은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을 뿐이지 행정력이 미쳤다고 주장하고, 다시 일본이 패망 이후 연합국이 내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한국에 반환할 영토의 대상에 독도가 빠져있다고 제기하면 한국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훈련 제677조를 통해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 사실을 드는 식이다. 간도 영유권 주장이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영토 반납을 요구하면 그것을 기준으로 영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제적 합의나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각국 영토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획정해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국경합의가 되지 않거나, 주권이 미치는 범위인지 판단이 어려운 도서지역에 대한 영유권 문제에서는 양국이 국제사회의 중재를 요청할 경우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서지역에 한해서 영유권 판단이 애매해 양국이 국제사회의 중재를 동시에 요청할 때만 해당한다. 국제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회복된 영토 질서를 존중하고 현재의 영토를 유지하는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구토(舊土) 회복을 내걸었지만 국제사회는 이러한 주장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연합군을 결성해 이라크를 응징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져 영토를 결정한다면 아마 세계는 큰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영유권 분쟁이 가져오는 외교 및 군사적 충돌 독도와 같은 도서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도 국가 간 심각한 외교적 마찰, 때로는 군사적 긴장까지 야기시킨다. 하물며 간도처럼 내륙 영유권 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현재 간도는 중국의 영토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한다. 중국인들은 근세 들어 자국 영토를 많이 빼앗겨 영토 문제에 극심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또한 중국은 러시아와 국경분쟁, 인도와의 국경분쟁, 베트남과 국경분쟁, 중국·몽고·러시아 교차지점 국경 획정 문제 등으로 넓은 영토만큼이나 국경 문제로 주변국과 심각하게 대립해 왔다. 또한 중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티벳과 같은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에 초강경 대응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를 열어주면 도미노 이탈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도 중국에게는 자국 국민이다. 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호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같은 한민족의 후예라고 해서 국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중국 국민으로 중국 사회에 이바지하고 중국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할 것이다. 중국이 변경지방의 역사와 현상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중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동북공정, 서남·서북공정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하나의 중국’을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중국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꼽힐 만큼 21세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강대국이자 우리 이웃국가이며, 통일이 되면 국경을 맞대야 한다. 현재도 우리와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한 파트너이다. 또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중국이란 존재는 중요하다. 당장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핵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중국의 역할은 막중하다. 북한의 운명과 관련해서는 절대적인 키(Key)를 쥐고 있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중국과의 관계악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손실로 다가오게 된다. 우리가 간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중국은 우리와 외교관계 중단까지 검토할 것이다. 중국이 과거 국경분쟁 당사국들과 전쟁까지 감수했던 것을 보면 이것은 최소한의 상황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한국 경제는 당장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 것이다. 한국의 도전에 대비해 중국과 북한이 군사동맹을 강화하면 안보뿐만 아니라 북한 문제 해결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핵 문제도 어떤 상황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북한이 비상 사태에 돌입할 경우 중국이 한국과 선린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간도가 아니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간도 문제가 그만큼 우리에게 사활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간도가 우리 영토로 귀속될 수 있는 분명하고도 합리적인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간도의 명칭과 범주 간도라는 명칭도 분명치 않다. 한국과 중국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며 국가 내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고 있다. 아직 어느 것이 정설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이 원래 중국에서 사용하던 명칭이 아니라 19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으로 본다. 조선과 일본이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창작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상당한 역사성을 부여한다. 14세기 명나라가 동북지방을 평정한 이후, 또는 그 이전부터 사용된 용어이며 19세기 조선 사람들이 간도에 대량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간도가 어떤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일부에서는 동북지방 요동 전체를 모두 포괄한다고 보기도 한다. 압록강과 인접한 요녕성(遼寧省)을 중심으로 서간도, 연길을 비롯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동간도, 흑룡강성(黑龍江省)을 중심으로 북간도로 나누는 식이다. 일반적으로는 길림성 연변 일대와 러시아 연해주 남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간도협약은 그 효력 문제를 떠나 일본과 청나라가 공식 문서를 통해 영토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 간도협약 당시 간도는 서쪽으로는 백두산을 비롯하여 서북쪽으로는 노령산맥과 북쪽의 노부령 산맥을 거쳐 태평령 이남의 혼춘 지방을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보았다. 행정구역으로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현과 안도현의 일부를 포함하게 된다. 간도의 역사 간도는 청나라 건국의 주역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들이 청나라 건국의 주축이 되면서 중원으로 이주해버리자 이곳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러나 청조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간도지역을 신성시했다.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국운이 다할 경우 다시 돌아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청조는 간도 일대를 봉금지(封禁地)로 공시하고 조선 사람들이 몰래 들어와서 농사를 짓는 행위를 철저히 금했다. 그러나 산동지방 등의 유민과 조선 사람들이 계속 잠입하면서 관리자들과의 마찰이 끊이질 않았다. 1710년(숙종 36년) 조선인이 청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청조는 이 지역 관할권을 확립하기 위해 관리를 보내 국경실사(國境實査)를 했다. 이 결과 청나라와 조선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양국의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국 간 영토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불씨가 되었다. 백두산 정계비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이 있으니, 그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고 새겨져 있다. 후일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두만강의 중국식 발음이 토문강임)했다. 그러나 조선은 백두산에서 흘러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토문강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내세워 두만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조의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이주는 계속되고 한족도 이곳으로 넘어와 섞여 살게 되었다. 청나라는 1882년(고종 19년) 토문강 이북·이서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청나라 사람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고 조선인의 철수를 요구하자 조선이 이 지역 영토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 청나라와 조선 간에 3차례에 걸쳐 회담이 개최됐지만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갈등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이 혼란기를 틈타 1900년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였다. 1902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보호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실시했다.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5년 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얻기 위해 청나라와 협상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간도가 청국 영토임을 일본이 인정하면 만주에 있는 일본의 이권에 대해 양보하겠다는 확약을 하고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간도협약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간도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 연변을 중심으로 조선인 거주지역에는 조선 공산주의 세력도 존재했지만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정치적 지위를 장악하게 된다. 1952년 연변(延邊)조선족자치구(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간도 영유권 주장 논리 간도 한국 영유권론자들은 간도협약 이전 간도는 명확한 국경선이 없는 ‘복수주권지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두산 정계비에도 토문(土門)이라고 기록됐다고 본다. 조선인의 간도 이주도 15세기 이전부터 시작됐으며 20세기까지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간도는 실제 조선인 거주지역이 됐다고 말한다. 1903년부터는 조세를 걷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조선의 실제 행정이 실시됐다고 본다.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증거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점을 들고 있다. 1) 간도는 복수주권지역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간도는 청나라를 일으킨 중심세력인 건주여진이 정착했던 곳이다. 이들이 청나라 건국세력이 돼 중원으로 집단 이주해버리자 갑자기 사람이 살지 않게 돼버렸다. 사람은 거주하지 않았지만 청조가 이 지역에 봉금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은 이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은 무주지가 아니다. 원주민이 청나라 건국의 주축세력이 돼 중원으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청조가 그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단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청의 관할권 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조선인이 집단 이주하고 일정하게 행정을 실시했다고 해서 이러한 행위를 무주지(주인 없는 땅)에 대한 선점으로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1909년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조선인 수는 82,900여 명이고, 청국인은 27,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북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이 일부 행정을 실시한 것도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청이 봉금지로 설정한 간도에 사람들이 들어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토착인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됐다고 해서 그 지역의 영유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교민이 LA 특정지역에 미국인보다 많이 거주한다고 해서 그 지역이 한국 땅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행정권도 청나라가 외세의 침탈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행사한 자치권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자치권도 평화적이고 지속적으로 행사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청일전쟁 이후 간도 관할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볼 때 이 지역에서 행정을 편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간도협약 이전 간도가 복수주권지역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청조를 건설했던 여진족은 오랫동안 중원에 거주하면서 한인과 통합되었다. 간도의 주인이었던 건주여진이 청의 주인 노릇을 하고 이후 조선인 사회와 합쳐진 상황에서 조선인이 그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2)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土門)을 토문강으로 해석하기 힘들다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해석도 우리측 주장은 무리가 많다. 청조가 간도를 봉금지로 보호해도 조선인 이주가 계속되고 범죄까지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국경 획정 사업을 벌인다. 조선과 청조가 국경 실사 작업을 벌인 후 양국 합의 하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획정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이 백두산 정계비다. 조선인의 이주를 막고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정계비를 세웠음에도 오히려 청조가 간도를 모두 양보하는 비문을 작성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로는 압록, 동으로는 토문이라는 것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상징하는 상식적인 판단이다. 한국측 주장대로 백두산에서 흘러나와 송화강(하얼빈 경유)으로 이어지는 토문강을 기준으로 하면, 동북지방 절반이 조선 영토로 편입될 수도 있다. 연길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뿐만 아니라 지린(吉林), 하얼빈(哈爾濱)을 경계로 북쪽이 모두 포함되는지, 아니면 동북으로는 경계가 불분명해 어떤 영토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시 자신들이 거주했던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조선인들과 함께 현지 조사를 했던 청나라 관리가 문제가 됐던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뛰어 넘어 길림성 전체를 조선에 양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3) 해방 이후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중국 영토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해방 이후 간도 영유권이 바로 중국에 귀속됐다는 것이다. 김일성 부대 소속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들어가 사업을 한 사실이 있지만, 이것은 영유권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공산주의 정치사업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공산당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관할이 된다. 해방시기 주은래는 간도지역 5개 국경도시를 북한 영토로 귀속시킬 의사가 있었으나 반대 의견이 많아 실현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1962년 ‘조·중 변계조약’으로 천지의 북쪽 수면(40%)은 중국령으로 되고 남쪽 수면(60%)은 북한에 귀속되게 되었다. 또한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동쪽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선은 천지 동쪽에서 ‘원지’에 이르는 북위 42°11′선으로 되었고, 백두산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국경선은 압록강 상류 발원지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남북 방향의 선으로 획정되었다. 북한과 중국 간의 국경 협정에서는 간도 문제 자체를 거론하지 않았다. 양국이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획정 지으면서 향후 간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백두산 일부도 중국령으로 귀속된 마당에 간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4) 간도는 중국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쓸 만큼 사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중국이 어느 날 순순히 간도를 한국에게 양보하겠다고 결정한다면 상당한 이점이 존재할 것이다. 경제적인 면만을 따져도 그렇다. 만주에 거주하는 1억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접 시장을 형성할 수 있고, 중국 본토 시장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러시아와의 교역에도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간도를 순순히 넘겨줄 가능성은 1%도 안 된다. 설사 간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시킨다 해도 그 효과가 클지 의문이다. 중국이 개방경제를 선언한 이후 우리 상품이 중국 동북지방에 진출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당장 연길에 가도 한국 상품이 넘쳐난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자본과 인구 이동이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한국이 간도를 행정적으로 관할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롭게 투자하고 시장을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간도가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심지라는 생각도 시대에 뒤떨어진다. 물론 내륙으로 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이점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말을 타고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교통과 통신이 자유화되고 다양한 운송수단이 개발된 시대이다. 간도를 거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중국이나 러시아로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5) 민족의 발상지이자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역사가 웅비된 곳이기 때문에 영유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한민족만의 역사인지는 아직 논란이 많다. 민족주의 사학계열에서는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용납하지 않지만, 이를 비판하는 측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국이 자기 선대의 최초의 역사공동체로 볼 수 있는 국가는 삼한이라는 지적도 있다. 굳이 역사 편입 문제를 따지지 않고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한반도 역사로 인정해도 그들이 살았던 구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한 국가가 민족의 발상지나 선조들의 활동지역을 다시 되찾겠다고 선언한다면 바보 취급을 받거나 국제법의 제재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반드시 선조들이 살았던 땅을 다시 회복해야만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옛 정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엉뚱하다. 지금 간도를 되찾는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얻을 것은 옛 성터나 몇 가지 유물이 전부 아니겠는가. 이러한 유물은 간도를 되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중국을 방문해서 볼 수 있다. 고구려 기상을 느끼고 싶다면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면서 고구려 유적을 돌아보면 될 일이다. 당시 영토를 회복해야 민족의 정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고향 땅은 모두 자기 땅이어야 조상의 얼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6) 간도 문제를 지금 제기하지 않으면 완전히 중국 땅이 된다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다 간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 중에 하나가 국제법상 영토시효는 100년이기 때문에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2009년 이전에 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기간 점유를 해야 선점이 인정되는가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이러한 ‘100년 설’ 주장을 인정한다 해도 영유권 주장의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10년 안에 해결하겠다는 것은 결국 국제재판소로 이 문제를 가져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재판에서 이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간도 문제를 앞으로 10년 이내에 국제 재판에 회부하는 데 동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전혀 현실성 없는 주장이 된다. 또한 10년 이내에 해결해야 한다면 간도 영유권 제기는 북한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른 시일 안에 북한이 여기에 동의할 가능성은 없다. 설사 국제 재판에 회부돼 우리가 영유권을 얻는다고 해도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간도를 편입시키지 않을 것이다. 통일 이후에 거론해도 늦지 않는다는 정부의 궁색한 변명이 이들의 주장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간도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대응 방향 우리 사회에서 간도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단순히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그것이 미치는 파장이 작은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 극우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지만 주변국가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크다. 시마네현이라는 일본의 소도시 의회가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 넣은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중국측에서도 여러 차례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중국 정부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담겨져 있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친중(親中)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계산된 포석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외교 관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해 가는 것은 옳지 않다. 내부의 문제는 내부의 균형을 통해 개선해가야 한다. 이런 방식은 엄청난 대가를 수반하게 된다. 현재 한반도에는 북핵 문제라는 커다란 난제(難題)가 주어져 있다. 북한의 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중국과 선린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자 무한한 시장이다. 통일 이후에도 중국의 중요성은 절대 감소되지 않는다. 현실 가능성도 없는 간도 영유권 주장에 매달려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간도 영유권 주장은 허구에 매달려 큰 것을 잃어버리는 허탐대실(虛貪大失)의 전형이다. (시대정신 29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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