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신해혁명과 (소)중화주의의 동향![]() [이영훈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Ⅰ. 들어가는 말
1911년 10월 10월, 중국 무창에서 한족(漢族)이 무장봉기하여 만주족의 청 왕조를 타도하였다(신해혁명). 이로써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이 등극한 이래 2천년 이상을 존속해 온 중국의 황제지배체제가 소멸하였다. 신해혁명 그 자체는 중국의 역사이지만 그 역사적 영향과 의의는 중국사만의 것이 아니다. 신해혁명은 중국의 황제지배체제에 포섭되어 온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왕조는 1392년의 개창(開創) 이래 중국의 황제지배체제에 깊숙이 포섭되어 왔다. 그 이전의 왕조들도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평화를 구하기 위한 군사외교적 성격이 강한 관계였다. 신라와 고려의 왕들은 국내 정치에서 스스로 칭제(稱帝)하거나 천제(天祭)를 거행함으로써 세계의 주인임을 자처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 이 같은 주인의 의식과 의례는 소멸하였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황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그에 충실하였다. 제후국으로서의 자아의식은 조선왕조의 정치ㆍ외교ㆍ군사제도뿐아니라 역사의식을 포함한 정신문화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확고한 질서를 이루었다. 그 질서가 신해혁명을 맞아 전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Ⅱ.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소중화주의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조선왕조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부정되었다. 이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쇠퇴한 1897년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으로 변신하였다. 조선의 국왕은 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서울 교외에서 조선의 국왕이 청의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이 헐어지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이 건립되었다. 1899년에 제정된 일종의 헌법(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에서 대한제국은 스스로를 만국이 공인하는 자주독립국이라고 선언하였다. 조정의 관료들이 그들의 왕을 황제로 추대한 대의명분은 만국공법의 자주독립만이 아니었다. 보다 큰 세력을 이룬 대의명분은 전래의 역사ㆍ문화의식에서 구해졌다. 즉 우리 동방은 요순(堯舜) 이래 성인의 법과 제도를 잇는 소중화(小中華)의 나라이며, 이에 스스로 칭제(稱帝)하고 건원(建元)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소중화로 간주하는 역사의식은 조선왕조 초기부터의 일인데, 17세기전반의 명청교체(明淸交替)를 맞아 더욱 강화되었다.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중화의 적통(嫡統)이 중원에서 사라지고 조선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소중화주의는 17세기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공통으로 관찰되는 바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조선의 양상은 독특한 바가 있었다. 곧 스스로를 중국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분리하여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귀속 내지 몰입하는 방식의 자존이었다. 이 같은 귀속 내지 몰입의 소중화주의는 1705년 대보단(大報壇)의 건립으로 제도화하고 신성의 권위를 획득하였다. 16세기말 일본이 침입하였을 때 명의 황제는 대군을 파송하여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고 왕조를 재조(再造)케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대보단은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 조선의 국왕이 해마다 명의 세 황제의 기일을 맞아 백관을 거느리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대보단에서의 제례는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폐지되었다. 1897년 조선의 국왕이 황제로 등극할 때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천제(天祭)를 거행하였다. 1462년 세조가 천제를 행한 뒤 실로 435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조정과 시중의 여론은 환구단이 1894년까지의 대보단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1898년 황제는 어느 호사가가 『황명실록(皇明實錄)』을 수보(修補)하자 서문을 짓는 역(役)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삼대 이래의 성헌(成憲)이 담겨 있다고 책이라고 칭송하였다. 요컨대 대한제국은 만국공법 하의 자주독립국임을 자처하였지만, 그 역사적 정체성에서는 중국사의 적통으로 자신을 귀속시키는 방식의 소중화주의를 답습하였다. 앞서 한국사에 드리워진 중국의 황제지배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것은 1911년 신해혁명부터라고 한 것은 이상과 같은 연유에서이다. 다시 말해 1910년 일제에 병합되기까지 대한제국은 중국의 황제지배체제를 정당화하고 그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역사의식에 충실하였다.
Ⅲ. 조선 유림의 신해혁명에 대한 기대와 좌절
17-19세기 조선의 정치ㆍ역사ㆍ문화에서 소중화주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후반 근기(近畿)를 중심으로 성립한 북학파는 청의 문물이 조선보다 우수하여 배울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중국과 구분되는 조선 독자의 역사와 지리와 문화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사조도 성립하였다. 그렇지만 조정과 재야에 있어서 조선의 정체성을 규정한 정치ㆍ역사ㆍ문화의식은 압도적으로 소중화주의 그것이었다.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전승되었다는 자존의식은 한족에 의한 중화의 재건이 중원에서 이루어지길 대망하는 역설을 내포하였다. 조선의 소중화주의가 안고 있는 이 같은 치명적인 약점은 1911년의 신해혁명을 맞이하여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던 유인석(柳麟錫)은 조선의 소중화주의를 이어온 주류학파의 계승자였다. 그가 신해혁명의 소식을 듣고 환호한 것은 한족이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의 적통을 중원에서 재건할 것을 기대해서였다. 그의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의 세계관에서 중국은 종가(宗家)요 조선과 일본은 지가(支家)였다. 중국에서 어진 황제가 출현하여 성인의 도를 회복하여 종가를 바로 세우면 지가인 조선과 일본이 중국에 귀의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서양 이적(夷狄)의 침입도 물리칠 수 있다고 그는 기대하였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만주로 유망한 이승희(李承熙)도 조선의 유림을 대표하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 역시 신해혁명의 소식을 접하고 중국에서 중화가 재건되리라는 기대에서 극도로 고무되었다. 그의 기대는 혁명의 결과 황제체제가 폐기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학교에서 공자 제사를 금하자 더없는 실망으로 변하였다. 이후 그는 강유위(康有爲)가 창설한 공교회(孔敎會)에 참여하여 그의 좌절된 꿈을 추구해 갔다. 그가 국민당 정부의 관료 이문치(李文治)와 주고받은 신해혁명을 둘러싼 논쟁은 (소)중화세계의 전통적 지식인으로서 그가 보유한 국제감각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문치는 약육강식의 현실세계에서 국가를 떠나서 성인의 도를 이야기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한국인은 민족의식부터 일깨워 국가를 되찾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그에 대해 이승희는 성인의 도는 국가를 초월해 있으며, 모든 국가가 민족의식으로 대립하면 천하는 더욱 소란스러워질 뿐이라고 반론하였다. 유인석과 이승희에서 보듯이 조선의 소중화주의는 유교의 동양평화주의(東洋平和主義)로 열국이 격렬하게 부딪혔던 제국주의시대에 대처하였다. 그들의 이념은 더 없이 고상하였지만, 현실과의 깊은 괴리는 어쩔 수 없었다. 조선의 소중화주의는 왕조가 패망한 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성인의 출현을 고대하면서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세기에 걸친 격동의 한국사, 곧 일제의 지배, 독립운동, 해방, 분단, 건국, 전쟁, 두 차례의 혁명(4ㆍ19와 5ㆍ16)에 대해 전통 성리학은 줄곧 침묵하였다.
Ⅳ. 중화주의에 대한 근ㆍ현대 중국의 집착
조선왕조가 패망한 뒤에도 소중화주의가 길게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국제감각을 규정한 관계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문(孫文)의 혁명파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고 하였다(驅除撻虜 恢復中華). 그것은 만주족에 대한 한족만의 민족주의혁명을 의미하였다. 다른 민족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문의 혁명파는 황제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성립시켰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황제지배체제에 포섭되어 온 5족(한족ㆍ만주족ㆍ몽고족ㆍ회족ㆍ티베트족)의 공화를 의미하였다. 구체적 현실에서 ‘오족공화(五族共和)’는 한족의 다른 사족에 대한 지배체제를 의미하였다. 손문은 주변 민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를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려는 의도로 간주하고 그에 반대하였다. 손문은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주의에 충실하였다. 그는 중국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이며 주변의 약소국에 덕교(德敎)를 베푸는 상전(上典)의 나라였다는 인식을 보유하였다. 그리하여 주변의 약소국들은 상전의 나라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조공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그 약소국 가운데는 30년 이전에 중국에서 분리된 월남과 조선도 포함되었다. 1924년 2월의 어느 강연에서 손문은 “중국이 만약 다시 강성해진다면 월남과 조선도 중국에 복속시켜달라고 요구해 올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손문은 중국이 다시 강대해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손문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였으며, 1919년 상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독립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손문과 혁명파의 간부들은 자주 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시도하는 몽고를 ‘제2의 조선’으로 간주하였다. 몽고의 독립을 지원하는 러시아를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일본과 같은 나라라고도 하였다. 그들의 이 같은 언급의 저변에는 1894년 이전까지 조선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중화주의의 영토관념이 깔려 있었다. 손문의 후계자인 국민정부의 장개석(蔣介石) 역시 이 같은 역사의식과 영토관념을 보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미․영․중의 세 영수가 회동하였다. 거기서 장개석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이 패망한 뒤 만주는 물론 한반도에까지 자신의 군대를 진주시킬 야심을 토로하였다. 미국은 만주가 다시 중국에 귀속될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한국은 그와 별개로 다루어질 것임을 ‘카이로 선언’에서 명확히 하였다. 장개석의 꿈은 대일참전을 선포한 소련이 한반도 북부에 신속히 군대를 진주시킴에 따라 실현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반도에서 성립할 국제적 신탁통치에 중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이 지원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새 정부를 세우고, 자신의 관리가 새 정부의 외교와 재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렇지만 장개석의 그러한 기대는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패배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는 서로 다른 이념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한국전쟁(1950-1953)은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이 남한의 동족을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통치자 모택동(毛澤東)은 그 전쟁의 기획에서부터 개입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후 한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북한으로 진출하자 그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를 내세워 대규모 참전을 감행하였다. ‘순망치한’은 19세기후반 제국주의시대에 중국의 지배층이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두고 즐겨 사용한 표현이었다. 1880년 중국의 일본 출사대신(出使大臣) 하여장(何如璋)은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할 것을 본국정부에 건의하면서 조선은 아시아의 요충으로서 중국의 왼팔과 같아 그것이 잘려나가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로서 입술이거나 팔이었다. 그러한 정치적 내지 군사적 관계를 정당화한 중화주의는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 정치의 국제감각으로 남아서 20세기 한국사를 깊숙하게 규정하였다. (시대정신, 2012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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