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9권 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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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9권 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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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7-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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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伯林遠征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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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孫基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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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회고·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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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53개국의 청년 건아를 물리치고 올림픽의 榮冠을 밧은 孫군-그 일홈은
너무도 놉고 그 공로는 너무도 크다. 그러컨만 겸손한 그는 불멸의 자기의 그 일홈을 사회에 드러 내노키를 즐겨하지 안햇슬뿐더러 또한 여러 가지
사정이 둘러싸여 잇서 伯林 遠征의 그 수기조차여 發表됨이 없었다. 이제 半歲를 지낸 오늘에야 그 심경과 紀行을 하는 이 一文 또한 史的 기록의
草一片이 될진저 반세의 침묵을 께트린 이 수기.
「삼천리」의 친애하는 여러분 앞에, 벌서부터 말슴드릴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금일까지 침묵을 직혀 오옵다가 이제 작년 올림픽으로 伯林까지 征還하든 때의 여행기나마 草하여 드릴가 함니다. 다른 날 所懷를
말슴키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기억에 남아있는 객지 기행을 그것도 간단하게 적사옴을 양해하여 주옵소서.
한양아 잘 잇거라 - 滿洲里의
국경 풍경
그것이 6월 4일이엇다. 나는 그 날 오후 3시 여러 선생과 사회 인사 다수의 성대한 餞別을 밧으면서 먼 먼 伯林行의
길에 올낫다. 京城 출발시에 내 胸裡에 오르내리는 감회와 눈물 겨운 감격 밧은 일이 한 두가지 아니었으나 압흘 재촉하는 記述인지라, 뒷날
쓰기로 略하고 그저 「북으로 북으로 심장을 고동시키며 떠낫노라」하고저 한다. 그날 밤 열 한 시 가로수에 早夏의 금음 달빗이 어리우는 것을
보면서 내 고향 新義州에 당도햇다. 기차 관계상 나는 그냥 安東縣까지 가서 차에 내리니 거기서 정거장까지 餞送으로 나온 가족과 동무들을 맛나고
그 이듬날 아츰 奉天에 하차하여 市街와 北陵 등을 구경한 뒤 다시 合爾賓으로 향하엿다. 도중 新京에서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 이리하야 각지의
환영은 여행의 피로를 닛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오직 우리들은 책임이 중한 것을 통절히 늣기엇다. 合爾賓서
1박하고, 연습을 조곰 하고 난 뒤 다시 滿洲里에 향하엿다. 沿線에는 점점을 찍은 듯한 조고만 산들이 보이고 사막도 處處에 보이고 있었다.
기차가 滿洲里에 갓가워 감에 따라 국경 기분이 차츰 농후하여왓다. 기차에는 수비병이 동승하고 밤에는 카-덴을 모다 내리엿다. 滿洲里에 도착하기는
9일 아츰이엇다. 여관에 少憩한 뒤 우리들은 시외에 나가서 연습을 하엿는데 그 때 감상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겨우 數?를 隔하여 滿蘇 양국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늣김을 주더라. 더욱 白系 露人들은 고국을 목전에 보면서 도라가지 못하는 터이라 한다.
婦人 노동자가
다수-철로 수선하는 西伯利亞
9일 밤 滿洲里에서 국경을 너머서 西伯利亞에 드러갓다. 露西亞의 기차는 滿洲里까지 오기로 되었으나.
국경 세관의 검사는 실로 엄중하엿다. 이로부터 5일간 西伯利亞 평원을 횡단하는 단조스러운 여행이 계속되는데 茫漠한 평원이 한없이 계속되고
있는 삼림은 오직 놀날 밧게 도리가 없었다. 處處에 있는 대도시의 외에는 沿線에는 그리 많이 민가가 보이지 안으나 풀밧헤는 도처에 소, 말,
양떼들이 있었다. 철도는 조선 것보다 몹시 廣軌로, 규모도 컷스나 시간을 잘 직혀주지 안는데는 긔막혓다. 엇든 데서는 30분도 정차하는 까닭에
플랫트홈에 내려 연습할 수 있었다. 냉수를 먹을 수 없음으로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되기를 기다려 큰 병에다가 茶 물 가질너 가든 모양은 몹시
珍妙하엿섯다. 이러케 시간을 잘 직힐 수 없었음은 선로가 납어서 생각대로 속력을 낼 수 없었든 관계라고 한다. 또 西伯利亞 철도에는 객차는
적고 일반으로 화물차가 많었다. 「옴스크」를 지낸 것은 12일 오후 두 시었다. 역시 가도 가도 大西伯利亞의 無人地境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京釜, 京義線가치 산이라고 불야랴 볼 수 없었다. 철도 沿線에는 다수한 노동자가 일하는 것이 보엿는데 그중에도 부녀자가 철로 레-루
수선을 하고 있는 모양에는 오직 놀낫다.
莫斯科 구경-그로부터 戰地伯林으로
14일 밤 莫斯科에 도착, 車室에서
1박하고 翌朝 대사관을 차저 안내를 청하여 시가 구경을 하엿다. 모스코는 쏘비엣 露西亞의 수도이니만치 여러 가지의 근대적 설비가 훌륭이 되어
있었다. 대건축과 도로의 완비에는 더욱 놀나게 하엿다. 구레무린 궁전, 각종의 사원 소문에 듯든 赤廣場 등 모다 장대한 것이엇다. 공원에
草花로써 이 나라 정치가의 얼골을 만들고 있는 것은 더욱 눈에 걸니더라. 오후 11시에 莫斯科를 출발하여 波蘭으로 향하엿다. 蘇波 국경은 翌
16일 정오에 통과하엿는데 역시 엄중한 검사를 하엿다. 波蘭의 首府 「왈소-」에 도착하기는 그날 오후 8시엇다. 약 2시간 자동차를 타고 대강
구경을 끗마친 뒤 정작 戰地인 伯林으로 향하야 우리들은 긴장하여지는 가슴을 안은 채로 떠낫다.
대통령에 대한 숭배열-수만 군중이
如狂如醉
波蘭과 독일의 국경을 꿈 속에 지내고 이듬날 날이 밝으니 17일 아츰 아홉 시 끗끗내 伯林에 도착<18>
대사관의 안내로 곳 여관에 드러갓다. 코-스의 실지 답사, 시가 구경 등으로 수일을 지내고, 6월 21일에 아조 올림픽촌에 드러가기로 작정이
되엿다. 목적지에 도착하여보니까 대회에 대한 일말의 불안의 念이 더 커가며 조곰치도 안정이 되지 안어서 시가 구경도 잘 하여낼 수 없었다.
올림픽촌은 실로 유쾌한 곳이었다. 연습장(4백 米)를 위시하여 키네마? 목욕장 등이 완비되어 있고 외국 선수와의 쾌활한 교제 등으로 모다 유쾌한
일 뿐이엇다. 더구나 숙사는 뒷날 병영용으로서 이번에 신축한 것인 모양으로 매우 편리하엿다. 이리하야 올림픽촌의 유쾌한 생활에 습관되어나서
이제는 조곰씩 연습을 행하는 것이 일과가 되엿다. 伯林으로부터 올림픽촌까지 뻐스로 40분이 걸린다. 거기에서 伯林까지 와서 當分 緣을 끈코
이 촌에 드려 잠기어 다만 대회를 기다리기로 하엿다. 8월 1일 개회식, 9일 마라손, 16일 폐회식 등과 대회 푸로그람은 순조로 진행되었으나
대회에 대하여는 이미 신문 영화 등에 의하야 상세히 보도되었을 것임으로 여기서는 略한다. 마라손이 다 끗난 뒤 겨우 重荷를 버서버리고 난
듯한 기분이 나서 伯林 시가로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국가 통제의 하에 마치 한 개의 기계가 움지기듯 움지기고 있는 것은 아마
독일의 일대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설비도 이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시가지 곳곳마다 너르고 대규모의 공원이 설시되어 있고 도로의
설비는 가장 규칙이 정확하여서 모다 보행차, 말탄 이, 자동차, 마차, 전차가 모다 各異한 길을 것고 잇는 것은 실로 이상적이엇다. 또 오후
7시가 되면 모든 상점이 모다 문을 다치고 휴업하는 것도 他處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독일의 특색으로 더 한 가지 헤려하는 것은 국민간에
히틀러 총통의 숭배열이 왕성한 것이라. 개인간의 인사에도 「하일 히틀러」을 부름은 물론, 스타지암에 히틀러가 한 번 나타나면 실로
굉장하다. 장내를 덥고 있는 수만의 군중이 오른편 손을 놉히 들어 콘 소리로 「하일, 힛틀러-」를 부르는 것은 실로
장관이엇다.
丁抹서 대항경기하다-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을 날아
8월 19일 오전 10시 伯林 비행기장으로 가서 5,
6명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丁抹로 향하엿다. 하늘 공중 놉히 구름 속을 지나서 미지의 나라로 가는 것은 실로 壯快하엿다. 약 2시간 공중을 나른
뒤 정오경 首府 코벤하-겐에 착륙하엿다. 同地는 섬 한쪽 편에 싸허진 항구로 모든 것이 째이어진 아름다운 도회엇다. 丁抹이 모범 농업국이라 함은
이미 드러온 일이나 조합이나 농장, 학교 등을 실지로 보고 다시 조직적인 방법에 놀낫다. 8월 21일에 丁抹과의 대항, 경기가 있었고 翌 22일
오전 11시반 코-벤하-겐의 비행장을 출발하여 우리는 파리로 향하엿다.
사치업는 「파리」-다시 도-바 해협 건너 倫敦에
코벤,하-겐을 출발한 뒤 중도에 漢堡에서 잠시 휴게하고, 동일 오후 5시반 파리에 도착하엿다. 파리서도 대사관의 안내로 시가의
중요한 곳을 구경하엿는데 놀나운 것은 전부터 드러오든 거와 몹시 그 정취가 달나진 것이다. 파리는 그저 사치를 몹시 한 화려한 도시라고만
생각하엿더니 실상은 그러치 안코 오히려 침착스러운 곳이엇다. 前後 2차나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대개 일홈있는 명소는 모다 구경하엿는데
그중에도 엡펠탑, 개선문의 장대함에는 오직 놀낫섯다. 파리서 23일 日佛 대항 경기를 끗내고, 翌朝 7시, 파리를 출발, 一路 倫敦으로
향하엿다. 불란서의 카레港까지 기차로<19> 5시간. 도-바 해협은 기선으로 두 시간이 걸리엇다. 英吉利의 도-바항에 상륙하여 기차로
약 한 시간 가면 倫敦에 도착된다. 우리들은 오후 3시 倫敦에 하차하여 그날 시가 구경을 끈마추고 翌朝 9시에 倫敦을 출발하엿다. 倫敦은
그야말로 세계 최대도시의 하나인만치 그 규모의 큰 것에는 오직 감격할 박게 없었다. 0스河, 倫敦탑, 국회의사당, 웨드민니스타 사원, 박물관 등
유력한 곳은 모다 대개 구경하엿다. 倫敦의 특색은 歐羅巴의 다른 도시가 우측통행을 하는데 조선모양으로 좌측통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도시계획도 우수하여 歐洲의 대개의 도회가 모다 그러하지만 倫敦만은 그 중에도 청결이 잘 되어 있었다. 예정과 가치 倫敦을 출발하여 도-바카레과의
往路를 고처 그날 오후 5시에 다시 우리들은 파리로 귀착하엿다.
그리운 녯 문명이여-大羅馬시대의 역력한 자최
8월
27일 아츰 6시 파리발의 기차로 이태리에 향하엿다. 佛利 국경을 넘은 것은 그날 오후 6시 반경 이 부근 일대는 알푸스 산맥에 막히여 국경은
기차로 약 20분이 걸리는 턴넬이 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8시경 토리노-에 도착, 直是 호텔에 드러갓다. 9월 1일 츰아 10시
토리노-발 기차로 首府 「羅馬」로 향하엿다. 동일 오후 목적지인 「로 -마」에 도착하여 그 이듬날 대사관의 안내로 시가구경을 시작하엿다. 시중
도처에 녯날 大羅馬시대의 웅대한 건축물이 보이며 또 천주교의 사원이 만흔 것은 羅馬의 일대 특색을 짓고 있었다. 더욱 「유-롭」의 장대한 품은
羅馬의 문명이 어떠케나 찬란하든 것을 이약이하고 있었다. 9월 3일 아츰 열 시 羅馬를 출발하여 오후에 나포리 항구에 도착하여 少憩하고
오후 3시 자동차로 봄페이에 향하엿다. 폼페이는 부근 화산의 폭발에 의하여 기원 1세기경에 매몰되엿든 도시로 근래는 거지반 모다 발굴되어 舊態를
남기고 잇서, 당시의 문화를 목전에 이약이하고 있었다. 당시에 쓰이고 있든 수도가 그대로 남기여 있는 것도 희한한 것이엇다. 도시의 저쪽에는
아직도 화산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약 2시간의 뽐페이 구경을 내끈고 자동차로 「나포리」에 도라온 것은 오후
7시경이엇다.
印度洋상의 6일-歐洲선 가을이 여기는 여름
나포리에서 하로밤을 밝힌 뒤 9월 4일 오후 3시, 아조
나포리 출범의 이태리 기선 곤데로-스호를 타고 귀국의 길에 올럿다. 그로부터 3일간의 지중해 항행을 끈마추고 7일 夜 埃及의 뽀-드, 사이드에
寄港, 1박하고 翌朝 다시 출범, 스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8일 夜 스에즈항에 도착하엿다. 스에즈 운하는 全長 161?라 하는데 수심이 엿기
까닭에 십분 속력을 낼 수 없고 통과에 17시간을 요한다고 한다. 스에즈에 1박하고 9일 朝 同港을 출범, 13일 夜 紅海의 입구 아덴에 寄港,
다시 6일간의 인도양 항행을 마친 뒤, 9월 17일 아츰, 인도 孟買항에 입항하엿다. 중도의 여행은 사면이 모다 망망한 대양으로 실로 단조를
極하엿든 것이나 특히 記코저 하는 것은 아마 紅海 及 印度洋의 더위일 줄 생각한다. 이런 더위는 나는 나서 처음 경험이엇다. 歐羅巴를 출발할
때에 이미 가을가타엿는데 여기서는 아조 盛夏 白晝에는 103도까지 올나가고 있었다. 적은 선실에 4개의 선풍기를 노코도 땀이 작고 흘럿다.
갑판에 나와서 더운 열풍이 바다로 부러오는 것이 무에라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웟다.
砲台많은 香港 풍경-인도문화를 두루두루 본 뒤
孟買에선 기선의 고장 때문에 1주간 체류하기로 되어 하로라도 속히 고국에 도라가려하는 우리들에게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으나 그 대신
孟買의 구경은 거지반 완전히 끈내엇다. 인도는 大體에 있어 조선보다도 문화정도가 나즌 듯이 보엿다. 거리거리에는 비교적 큰 건축도 있었으나 상점
등은 대개 빠락식이엇다. 도시설비는 영국인의 경영이니만치 매우 진보된 듯 하엿다. 여기서는 더위 때문에 극장 등은 오후 10시경부터 오전 2,
3시까지의 사이에 開演한다고 한다. 약 1주일 체재후 기선의 고장도 다 수선되었음으로, 9월 24일 아츰, 孟買를 출범하여, 중도 코롬보에
寄港하여 27일 오후 8시 싱가폴에 입항하엿다. 거기에서 간단한 시가구경과 환영회에 임한 뒤 오후 12시 다시 新乫坡를 출발하여 香港으로
향하엿다. 香港에 도착된 것은 10월 1일 아츰 早朝, 여기서도 환영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도처에 포대가 나열하여 있고,
또 만흔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上海서 마즈막 1박-서울에는 비행기로 도라오다
香港을 그날 오후 3시 출발
3일 오후 2시 上海에 상륙하여 하로밤 자고 4일 오후 11시 카나다 기선을 타고 6일 아츰 長崎에 상륙하엿다. 거기에서 환영회에 갓다가 오후
5시 長崎發 7일 夜 6시 神戶 입항. 8일 오전 9시, 아조 東京에 도착, 解團式은 그날 있었다. 나는 16일 東京을 떠나 비행기로서
17일 오후 2시 그리운 京城으로 도라왓다. 이것으로 나의 4개월에 미치는 여행을 대강 기록햇는데 다른 기회 보아 좀 더 자세히 쓰고저
하노라. <2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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