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갓쓰고 러시아에 갓든 이야기 - 尹致昊

이강기 2015. 9. 5. 12:08
   
 
 
잡지명 별건곤 제6호
호수 제6호
발행년월일 1927-04-01
기사제목 只今으로 三十一年前 露西亞에 大使갓든이약이, 솔닙상투에 갓쓴 大使一行 그러나 國賓의 待遇는 隆盛
필자 尹致昊
기사형태 회고·수기

當時 東洋의 時局
몃 천년 몃 백년이나 關門을 구지닷고 鎖國主義를 써 오던 우리 朝鮮! 외국이라면 다만 中原이 잇슴을 알 뿐이요. 日本이면 島夷, 서양이면 洋夷라고 멸시하고 잇섯다. 그러나 밀녀오는 세계의 대세는 다만 우리나라 하나만을 處女國으로 대우하랴고 하지는 아니하야 이 나라가 드러와 건드려 보고 저 나라가 드러와 침노해 보고 하는 바람에 아모리 오래 직혀오던 주의라도 變節치 아니 할 수가 업서 英米를 위시하야 佛蘭西, 獨逸 이러케 차차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關門을 열어 외교의 길을 트게 되얏던 것이다.
그러나 朝鮮이 외국에 차차 알니게 되면서부터 제일 주목을 하고 춤을 발너보랴고 애를 타는 것은 국경이 가장 갓가운 支那, 日本, 露西亞의 삼국이엇다. 支那에서는 在來의 관계상, 朝鮮을 依然히 자기의 속국으로 認證하며 외교에 교활한 袁世凱가 다년 京城에 來住하야 事大黨을 籠絡하야 가지고 자국의 세력을 유지하기에 애를 쓰고 日本은 明治維新 후, 신세력을 부식코저 開化黨과 연락을 취하야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잇섯스나 甲申政變에
金玉均 일파가 좌절한 후, 늘- 세력을 엇지 못하고 支那와 서로 반복케 되다가 필경은 日淸戰爭을 연출하고 마럿다. 그리하야 支那의 패전으로 馬關條約을 맺고 거긔에는 朝鮮의 독립을〈9〉 승인한다는 것이 첫 조건이엇섯다. 그러나 支那와 日本 새이에 틈을 타서 남하 정책을 쓰랴던 露西亞도 적이 朝鮮에 손을 뻣치랴고 암암리에 활약한 지가 오래여서 朝鮮의 반도에는 이 삼국이 宛然히 鼎足의 세로 서로서로 기회를 보고 이권을 닷호던 판이엇고 국내에도 事大黨(親支派), 親日派, 親露派가 난위여 잇던 것도 사실이다.

韓俄의 關係와 國情
서력 1896년(建陽元年 丙申) 朝鮮에는 甲午의 東學亂을 치르고 乙未의 OO사건을 지난 바로 12년의 후이라 시국은 亂麻와 가티 식그러운 끗치엇다. (3행 삭제-원문)
露西亞와 통상조약을 매진 후 12년이요. 露西亞 公使로 웻쎌이라는 이가 京城에 주재하던 때이다.
그때 露西亞는 帝政 極盛의 時代로서 신흥의 세력이 팽창하고 남하의 정책이 노골화하야 日淸戰爭의 승리로 영유하엿던 遼東半島를 獨佛 양국과 연합하야 일본으로부터 支那에 還付케 하고 무력을 南滿地方에 확장함으로 日本과 支那의 우려도 또한 심상치 아니하엿고 露國駐在公使로 하야서는 당시 양국 외교계의 第一花形의 인물이라고도 할 만한 일본의 山縣有朋과 支那의 李鴻章이엇섯다.
그리자 그 해 5월에는 맛침 露西亞 황제 니코라이 2세의 대관식이 잇슴으로 그를 축하키 위하야 우리 朝鮮에서도 大使를 특파게 된 바 역시 當年 외교계에서는 小壯 政治家로 聲譽가 놉고 지금까지 우리 耳目에 인상이 깁흔
閔泳煥씨가 임명된얏던 것이다.

威風이 堂堂한 大使一行 솔닙상투에 갓은 썻슬 망정
京城을 떠나 露都를 향하기는 建陽 元年 3월, 大使로는
閔泳煥씨, 書記로 金得鍊씨, 通譯官으로 金道一씨요. 나는 隨員이라는 명의를 가젓고 그 외에 閔씨의 隨從으로 하야 孫某라는 청년 一人! 일행은 다하야 5명이엇스나 일행은 똑가티 30내외이 소장 청년이요. 金道一씨는 海蔘威에서 生長하다 십히하야 露語의 능통은 물론, 露國의 풍속 관습까지 정밀히 알고 잇섯고 나도 여긔가긔 전에 米國 留學의 경험이 잇서 英語를 解得하고 외국에 대한 상식이 과히 素昧치 안키 때문에 안심하고 떠날 수는 잇섯스나 시대가 시대라 공사 일행은 모다 순 조선식 의복을 닙고 상투 튼 그대로 갓을 쓰고 떠난 중에도 金道一씨와 나는 그 전 외국에서 깍것던 머리를 다시 길너가지고 솔닙상투짯던 것이다. 그리고 모다 가죽신을 신은 중에도 나 혼자만이 구두를 신은 듯 십다. 지금으로 안저보면 우습기 한이 업지만 그때야말로 그러케 안코는 행세를 할 수가 업는 데야 엇지하랴.

大洋에도 驛頭에도 朝鮮의 旗ㅅ발 飮食은 純全한 西洋式으로〈10〉

바로 西伯利亞를 경유하야 露都에 드러간다면 路程은 갓가울넌지 모르지만 그래도 못처럼 떠나는 大使의 일행이 歷路의 산천과 歐米의 국경을 것흐로라도 보기 兼하야 上海로부터 北米를 경유하야 西歐로부터 露都에 드러가기로 길을 取하게 되엿다. 4천년來 갓쳐 잇던 朝鮮의 旗ㅅ발이 太平洋 萬里滄海에 흔날니고 加奈陀, 合衆國에 흔날니고 大西洋을 건너 英國의 首府를 지나 獨逸의 국경을 횡단하고 露西亞의 관문에 드러서게 될 제 과연 역사의 변천과 世波의 추이에 今昔懸殊의 感이 업슬 수 업섯다.
그러나 녜나 이제나 할 것 업시 외국에 가랴면 음식이 일대 문제라. 요세도 우리 유학생들은 日本만 가랴도 김치짠지를 못니저 야단이요. 고초장 단지를 끄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각금 듯고 日本만 해도 德川幕府時代부터 明治初年까지 외국 사절을 갈 때에는 미소(된장)통, 닥구왕(짠지)통을 끌고 단엿다는 니약이ㅅ거리가 만치만 우리가 露西亞에 갈 때만 하야도 세상이 꽤 열닌 판이라 구런 수선스러운 일은 업시 船中車中에서나 그곳에 가서도 순전한 서양식 요리로 배ㅅ병업시 무사 통과하엿다.

첫눈에 빗친 露西亞의 國境
우리 일행은 3개월이라는 시일을 거의 허비하야 太平大西의 兩洋을 횡단한 후 英國과 獨逸을 지나 가지고 그 해 5월로 露西亞의 국경에 드러가게 되얏스나 철도 선로 하나를 隔하야 가지고 잇는 獨逸과 露西亞의 모든 것이 금으로 그은 듯 懸殊한 점이 잇는데 놀나지 아니 할 수 업섯다. 獨逸의 쪽은 가튼 鄕村갓튼 僻地窮巷이라도 도로가 청결하고 가옥이 조밀하야 어느 곳이나 물 부어 샐 틈 업슬 듯 밤을 굴녀도 몬지 하나 아니 무들드시 정리되야 규모에 째여 잇고 길가에도 의복을 풀어 헛드리거나 발을 벗고 다니는 아녀자 하나 볼 수가 업스나 露西亞 편을 보면 모든 것이 것츨고 蕭條하며 주민이 생활 상태가 퍽이나 빈한해뵈야 길가에서도 발벗고 다니는 여자를 흔히 볼 수가 잇스며 도시의 시설로는 별로 다른 나라에 비하야 손색 잇슬 것이 업섯스나 하여간 모든 것이 宏傑雄大하기만 하고 규모에 째이지 못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알 수가 잇섯스며 도시의 화려한 것으로는 그때 朝鮮으로는 감히 비교도 못해 볼 지경이엇지만 촌락 주민의 생활은 오히려 朝鮮의 촌락보다도 低劣한 곳이 얼마이고 잇섯다.

窮極奢侈한 戴冠式과 隆盛한 露人의 待遇
露都 聖彼得堡에 우리 일행이 도착한 지 未幾에 굉장한 니코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은 열니엿섯다. 그대 露西亞에서는 한창 軍國主義가 팽창하야 황실의 위엄을 뵈이기 兼 무력을 시위하기 兼 歐洲 諸國에서도 보기 어려울 만큼 굉장한 의식을 거행하고 더구나 정도가 幼穉한 촌민은 이 稀世의〈11〉 의식을 참관키 위하야 서울로 서울로 하고 밀녀왓다가 극히 복잡 혼란하고 질서 업는 식장에서 2천명의 생명이 좁은 틈에서 무참히 압사를 당햇다는 말까지 잇는 것으로 보면 얼마나 그 式이 사치하고 굉장하엿던 것도 알 수가 잇스며 인민의 정도가 몽매하고 질서가 정연치 못한 것은 짐작할 수가 잇는가 한다.
그러나 그때 露西亞에서는 남하 정책을 실현코저 하는 야심이 잇서서 될 수 잇는 대로 조선의 환심을 사랴고 하던 판임으로 우리 일행에게 대하야도 그 복잡 분주한 중에 款待가 極至하얏고 接賓使로 하야는 젊은 大將 1인과 군관 1인이 임명되야 잇섯다.

大官들의 놀나운 語學才操 그러나 敎育의 差가 激甚
그리고 외국에 가서 제일 불편을 늣기는 것은 어학 그것인 바 우리 일행 중에는 앗가도 말현 通譯®?
金道一씨가 露國 生長이기 때문에 조금도 불편의 곤란이 업슬 뿐 아니라 露國의 소위 대관이라는 이들은 대개 英, 獨, 佛, 삼국어는 능통하야 엇더한 외국 손님이라도 그 세나라 말 중에 한 나라 말만 통하면 조금도 불편이 업시 의사를 통할 수가 잇슴에는 놀나지 아니 할 수가 업섯스며 내가 거긔서 떠나 佛蘭西를 향해 가서 佛語를 배우고저 한 것도 역시 그네들에게서 衝動을 바든 까닭이엿다.
그러나 그와 가티 소위 상류계급에는 교육이 過度히 발달하엿다고 할 만콤 지식 정도가 고등한 반면에 일반 하류계급에는 교육이 보급되지 못하야 지식 정도가 심히 低劣하고 문맹이 最多하며 米國이나 英獨人 중에는 市街路中에서도 醉酒의 人이 다니는 것을 볼 수 업스나 露都에서는 醉人이 아츰ㅅ절에 左往右往하는 것만 보아서도 그의 정도를 알 수 잇섯다. 그리고 그때만 하여도 大工場 가튼 것은 대개 獨逸 사람이나 英國 사람의 경영이 만헛섯다. 그러나 순전한 勞?政府가 된 오늘에는 문맹의 퇴치와 농공의 발전에 가장 주력하는 중이라 하면 아마 그때보다는 괄목상대의 一新의 面目을 드러내고 잇슬는지도 알 수가 업다.

異常한 服色, 색다른 謀形에 아이들의 求景은 예제가 一般
露都에 잇슨 지 3개월 간에
金道一씨의 露國通譯官이 잇섯고 나 역시 英語를 알어 語學에 爛熟한 露國大官들과 의사 소통에 불편이 업섯고 또는 체류하는 동안에 대개가 官僚輩의 연회 초대요. 접촉하는 인물이 또한 官憲界에 잇는 사람들뿐이엇슴으로 本國에서부터 외국 사람과 교제가 만튼 閔씨도 외인 교제에 조금도 생소치 아니하야 하등의 失態도 업섯지만 크-다란 冠服에 갓쓰고 가죽신 신고 그 중에도 상투 튼 것이 서양 아이들의 눈에는 이상하고 우습게 뵈야 의례 支那 사람은 쥐를 잡어 먹는다고 머리 꼬리 느리고〈12〉 다니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야 예제를 勿論하고 다 그럿치만 그것이 米國에서 유독 심하고 露都에 잇슬 때에도 물론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일은 잇섯지만 米國과 가티 그러케 심히 굴지는 아니햇스며 그 때만 해도 支那 사람과 朝鮮 사람은 구별하지 못하고 의례 朝鮮 사람보고도 支那 사람으로 알엇스며 朝鮮 사람의 상투 튼 것을 보고는 쥐 잡어 가지고 다닌다고 조롱을 하엿스나 역시 支那人으로 보는 것은 일반이엇다.

무서운 그때의 軍國主義 그도 破壞되는 날이 잇섯다
우리가 그 해 3월에 고국을 떠나 5월에 露都 聖彼得堡에 도착해 가지고 3개월 간 체류하다가 동년 8월에 閔씨 일행은 임시 특사의 임무를 맛치고 바로 露都에서 西伯利亞 철도를 경유하야 귀국케 되고 나 혼자 私行으로 佛語를 학습할 목적을 가지고 佛蘭西를 향하야 떠나게 되엿섯다.
그러나 3개월 동안 그네에게서 깁흔 인상을 어든 것은 무엇보다도 鐵石 가튼 軍國主義의 現狀이 滿都大官들의 두뇌에 박힌 그것이엇다. 우리 일행을 접대하던 대장 1인이 어느 연회 끗헤 음식을 맛치고 하는 말이 『나로 하야금 露國의 정권을 잡게 한다면 외교관이고 무엇이고 다 업세고 무관만 쓰겟다.』고 絶叫한 것으로 보아도 그때 露國이 얼마나 무단정치를 숭상하엿던지 알 수가 잇다. 그때로 보아서는 그 주의와 그 정신이 꺽겨질 날이 업슬 듯하엿것만 20년이 될낙 말낙한 1917년에 와서 그것이 근저로부터 전복되고 오늘의 露西亞가 되얏다는 것만이 한 기적과 갓치 생각난다. (談·文責任記者) 〈13〉
〈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