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조선경제는 19세기 중반에 내재적 파탄" -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강기 2015. 9. 6. 22:49
"조선경제는 19세기 중반에 내재적 파탄" -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조선경제는 19세기 중반에 내재적 파탄"

서울대 이영훈 교수, 내재적 발전론 부정

"주지하듯이 1970년대까지 초기의 경제사 연구자들을 사로잡은 문제의식은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이었다. 그들은 식민지기에 일제에 의해 부식된 '조선사회정체성론'을 타파하기 위한 민족적 사명감에서 17-19세기 전통사회에서 비록 느린 속도와 제한된 범위였지만 자본주의를 향한 맹아적인 경제형태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 농업에서도 16-18세기 영국에서의 자본가적 차지농(借地農)과 유사한 존재가 성립하고 성장하였다는, 한동안 의심의 여지없이 수용되고 커다란 권위를 누렸던, 유명한 학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추진중인 '한국의 장기통계' 3개년 사업중 첫 성과물로 나온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서울대출판부刊)에서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165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각종 통계수치는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내재적 발전론으로 대표되는 학계 통념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에 수록된 연구성과를 총평한 글 '총설:조선후기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과 과제'에서 이 교수는 조선후기 경제는 18세기 안정기 혹은 발전기를 거쳐 19세기 중반, 특히 1860년 무렵에는 이미 국가권력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대위기'에 봉착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자본주의적 맹아는커녕 당시 조선 농촌사회에서는 비(非)시장경제가 대단히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19세기 중반기부터는 초유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조선경제는 헤어날 수 없는 불황으로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족보를 분석한 결과 이 기간에 뚜렷한 인구감소 현상이 감지됐으며, 그 원인으로는 특히 1850년대 이후 두드러진 물가폭등과 농촌 및 도시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현상이 관찰됐다.

경상도 예천박씨 양반가 일기를 분석한 결과, 이 양반가에 고용된 노동자는 임금이 1880-82년을 100으로 할 때 1853년은 150이었으나 1905년에는 50으로까지 떨어졌다. 덩달아 산림마저 극심하게 황폐화됐다.

논값 또한 18세기에는 안정적이었으나 1810년 이후 19세기말까지는 거의 절반으로 폭락했다. 경제침체는 장시(시장)의 숫자 변화에서도 감지됐다. 1830년 충청.전라.경상도 장시는 614곳이었으나 1872년에는 511곳으로 감소했다.

이 교수는 이같은 결과가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대하기에는 이르다고 전제하면서도, 분석 여하에 따라서는 조선왕조는 그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이미 모든 체력을 고갈한 채 파탄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사정이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조선후기는 '내재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재적 파탄' 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교수는 이런 연구성과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게 된다면, 외부적 요인으로만 설명해온 19세기의 각종 민란과 개항, 동학혁명, 갑오개혁 등 한국근대사 주요 사건의 역사적 의미도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19세기 조선경제는 붕괴직전 상황”
 
이영훈교수, 사학계의 ‘자본주의 맹아론’ 부정으로 논란 일듯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ycchoi@munhwa.com  
 
“근년에 새롭게 알려진 여러 경제지표는 역사란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심지어는 후퇴할 수도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들어 조선의 경제는 심각한 정체와 위기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조선사회정체론’이 그 정당성을 회복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 객관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긴 역사에서 경제체제의 실패로 정체와 위기의 국면이 조성될 수 있음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역사의 상태(常態)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오늘날 한국의 경제사 연구자들은 어떠한 정치적 주의나 도덕적 명분도 역사의 객관적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장애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최근 엮어 펴낸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서울대출판부·사진)의 결론격인 ‘총설 :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과 과제’에서 밝힌 근래 경제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해방 이후 ‘조선사회정체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한국사학계가 주장했던 ‘자본주의맹아론’을 근저에서 부정하고 있다.

‘수량경제사로…’는 이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2002년 8월부터 3년간 수행중인 공동연구 ‘한국의 장기경제통계’ 중 조선후기를 대상으로 한 1차 연도의 성과를 묶은 것이다. 이 교수의 총설과 이를 뒷받침하는 족보와 의궤, 각 지방의 족계(族契)와 동계(洞契) 등의 자료를 이용해 조선후기 인구변동과 노동자 임금, 이자율, 각종 재화의 물가를 분석한 이 책에 실린 논문 8편은 지난해 2월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주관한 심포지엄에서 공개된 바 있다. 지난 1987년 안병직 당시 서울대 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를 중심으로 설립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한국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이 20세기 식민지 시기부터 시작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람이다.

조선후기 농업에서 임노동에 기초한 경영형 부농(자본가적 차지농)의 등장을 강조한 한국사학계의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 1990년 대 가족노동에 기초한 소농경제가 오히려 17~19세기에 걸쳐 성숙·발전해나갔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주력해왔던 이 교수는 이 책에서 최근의 경제사학계가 재확인하거나 새롭게 밝혀낸 사실로 ▲농촌사회에서 자급경제·재배분경제 등 비시장경제의 강고한 존속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조선경제의 완만한 성장과 안정 ▲19세기 인구와 시장의 정체 내지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 등 3가지를 들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조의 각종 조세가 완전히 금납화(金納化)되기 이전에 전 조세의 대략 3분의 2가 쌀과 포목의 현물로 수취된 점이나 임금수준에서 보통 모군(募軍)이라 불리는 비숙련노동자의 임금이 장인(匠人)이라 불리는 숙련노동자의 그것보다 높았다는 사실, 18세기 중엽 무려 1000만석에 달했던 환곡의 규모에서 나타나는 세계사의 다른 나라에서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운 거대 규모의 국가적 재분배체제에 토대를 둔 도덕경제 등이 비시장경제의 강고한 존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교수는 무엇보다 조선왕조가 18세기의 사회경제적 안정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구의 감소와 노동자 실질임금의 하락, 논의 실질가격 하락, 농촌 장시의 감소, 미가의 상승, 환곡의 해체 등으로 심각한 위기국면에 봉착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일본과의 무역이 닫히고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가 심화돼 나간 상황이나 산림의 남벌로 생태계가 위기에 처했음에도 아무런 대책이나 제도를 창출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무능이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 교수는 “1860년대부터 본격화한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며 “이 새로운 19세기 역사상은 그들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입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온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학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한국사학계를 상대로 포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조사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조선후기 생산과 물가 등의 경제통계를 개인의 일기나 촌락의 계책(契冊) 등에서 뽑아낸 자료를 통해 마치 프랑스 아날학파의 작업을 연상시키듯 조선후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의 특징.

조선후기 사회경제사를 일반화시킬 정도로 자료분석이 축적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가 제시한 새로운 조선후기 역사상은 최근 고종시대의 해석을 둘러싼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와 김재호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의 논쟁과 맞물려 한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의 논쟁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kr

 

 

 

 

 

"자본주의 맹아는 없었다"

 

"자본주의 맹아는 없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연합뉴스 2003-02-28 10:27]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정 국사교과서를 비롯해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사 연구성과는 거의 예외없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한국(조선)은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씨앗(萌芽)을 내재적 힘에 의해 키우고 있었으나 일본과 서구제국주의 침략을 고비로 이 맹아가 아예 잘려버리고 왜곡되고 강요된 근대화의 길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학문적으로 얼마나 타당하며 설득력이 있을까?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 수년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7세기 이래 20세기 초반에 걸친 각종 경제학적 수치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는 종래 한국근현대사 통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 연구소가 '한국의 장기통계 : 17-20세기'라는 주제로 28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는 인구.물가.임금.토지가격 등 숫자로 표시된 여러 경제지표에 토대를 둔 수량경제사(數量經濟史) 관점에서 한국사 접근을 시도했다.

이같은 연구방법에 의한 1차 연구성과는 지난 2001년에 「맛질의 농민」(일조각)이란 공동연구서로 선보였다. 맛질은 지명이다.

이를 발판으로 이번 대회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양반가문 족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출생률과 사망률 추이를 살핌으로써 인구변동을 추산했다. 아울러 서울지역의 숙련.미숙련 노동자 임금.화폐가격 변동.농촌이자율.논가격 변동상황을 조사했다.

이러한 방대한 통계학적 조사결과를 통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잠정 결론들을 도출했다.

첫째, 18세기는 인구와 시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그 배경으로는 개방적인 경제체제가 주목됐다. 예컨대 조선은 이 시기 일본과 중국간 무역을 중계함으로써 많은 양의 은을 벌어들었다. 둘째, 반면 19세기는 인구와 시장이 위축되는 가운데 경제가 정체를 거듭하고 결국에는 위기에 빠졌음이 각종 통계수치로 증명된다. 이영훈 교수는 "조선경제는 개항(1876) 이후 외래자본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자신의 체제모순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으로 대일본 무역중단과 대중국 무역적자 심화 등을 들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삼림황폐화 문제도 주목했다. 연구성과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19세기에 전국 도처에서 산야가 헐벗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농업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교수는 이번 공동 연구성과를 총괄하면서 "19세기 후반에 빈발한 민란이나 농민전쟁은 이같은 정치.경제.사회의 혼란이며 조선왕조가 자기조절적 통합원리를 상실한 역사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이런 움직임을 근대화를 위한 신흥 부농(富農)과 상공업자의 정치적 투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맹아'는 존재하지 않은 허상이었음을 선언한 셈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앞으로 1945-1999년 시기 연구에 주력할 방침이다.

"조선후기 자생적 자본주의 싹 없었다" 논쟁  
"조선후기 자생적 자본주의 싹 없었다"
낙성대경제硏 주축 "개화전까지 정체 심각"
인구감소·산림 황폐화등 실증적 지표 제시
기존 '내제적 발전론' 정설뒤집어 논쟁일듯

조선 후기 사회가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국사ㆍ경제사학계에 대 논쟁이 일 전망이다.
경제사학 연구 모임인 낙성대 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한국의 장기 통계:17~20세기’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조선후기 사회가 내재적 발전의 계기를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를 비롯한 차명수(영남대) 이헌창(고려대) 박이택(성균관대) 교수, 김재호(전남대) 전임강사 등은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인구 물가 임금 지가 등 경제 지표의 변화를 분석했다. 1

9세기 초부터 사망률 증가로 인구가 감소했으며 갑오개혁 이전까지 숙련 노동자에 대한 임금 인센티브 체계를 결여했다고 추정했다. 또 논의 실질 가격 상승은 대부분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농업 투자와 농업기술 발전에 따라 이뤄졌다고 밝혔다.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이우연씨는 논문 ‘18ㆍ19세기 산림 황폐화와 농업생산성’에서 18세기 후반부터 남벌로 산이 헐벗기 시작했으나 조선 왕조는 직할 영지에 한해 벌목을 금지하는 소극적 정책을 펴는 데 그쳐 70% 이상의 산림 황폐화를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의 개항ㆍ개화 이전까지 조선 사회가 심각한 정체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이다. 이영훈 교수는 총론에서 ‘17~19세기 초 인구 압력에 봉착해 실질 임금= 생활 수준의 하락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세계적으로 영국 벨기에 덴마크, 일본 정도로 제한됐다’며 ‘근년의 수량경제사 연구로 그 동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져 왜곡된 당시의 실상이 보다 분명히 드러났다’고 정리했다.

실증적 연구에 근거한 이 같은 주장은 그 동안 정설로 여겨져 온 ‘내재적 발전론’의 설 자리를 크게 좁힐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식민지 시기 이전의 조선 후기 사회에 자생적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다는 이 이론은 1960년대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가 조선 후기 ‘경영형 부농’ 출현을 확인한 후 식민사관 극복 바람과 맞물려 학계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접근 틀은 다르지만 경제학자인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가 ‘민족경제론’으로 이에 동조했고, 강만길 상지대 총장, 고 송찬식 국민대 교수 등이 조선 후기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를 밝히는 논문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국사학계의 주류 이론이 됐다.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 등이다. 안 교수는 80년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 90년대 ‘식민지 근대화론’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계기를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자본주의 이식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일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부분 긍정론으로 비치면서 주류학계의 반일민족주의 성향에 일방적으로 떠밀려야 했다.

두 교수가 주축이 돼 87년 설립한 낙성대경제연구소가 내재적 발전론 비판의 선두에 선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80년대 후반 이후의 꾸준한 사회 민주화 결과 학계에 싹트기 시작한 탈 이념 흐름을 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류 사학계의 반론과 그에 따른 논쟁의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