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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동학유족에 진심 사과" - 2006.12.10 조선일보

이강기 2015. 9. 8. 17:38
  • 조기숙 전 홍보수석 "동학유족에 진심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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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풀릴 때까지 108배 할 것”
    “부모님 모시듯 따뜻하게 모시고 싶어”
  • 조선닷컴 internews@chosun.com
    입력 : 2006.12.10 02:11 / 수정 : 2006.12.10 13:21
    • 유족에게 사과하는 조기숙 전 수석 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한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있다./연합 <SCRIPT language=javascript> </SCRIPT>
    • 전북 고부군수를 지낸 조병갑(趙秉甲)의 증손녀란 사실이 드러난 조기숙(趙己淑)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9일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해 조상을 대신해 유족에게 사과했다.

      조 전 수석은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명 앞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면서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군민들을 탄압해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인물이다.

      조 수석은 “(조병갑의 증손녀란)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살려고 했지만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영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생긴 이후 공개적으로 사과할 생각을 했다”며 “신문이 보도하기 전 공개 사과하려 했다, 죄송하다”고 말했다.
       

    • 큰 절하는 조기숙 전 수석 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서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사과의 뜻으로 큰 절을 하고 있다./연합 <SCRIPT language=javascript> </SCRIPT>
    • 그녀는 또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할아버지가 일제 때 매일신문에서 일한 친일파였으나 8.15 해방 이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무위도식하다 돌아가셨다”며 “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인지 부채의식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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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조 전 수석과의 일문일답

      --지금 심정은.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랐는데 사과를 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 가볍다.

      --농학농민혁명군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9월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재직할 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 ’제가 조병갑의 증손녀’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유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적절한 시기에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좋다고 보고 미뤄오다 오늘 기회를 갖게 됐다.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동안 (제가 조병갑의 증손녀란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살려고 했다. 하지만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해원(解寃)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했다.

      신문에 보도되기 전 이 사실을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진작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

      -- ’월간조선’이 가계사 폭로 이후 조 전 수석이 일부 언론사 정치부 기자에게 보낸 해명 이메일의 일부 내용에 대해 참여연대 한 회원이 기고를 통해 강하게 비판했는데.

      ▲월간조선이 저의 가계사를 폭로한 이후 정신이 없었고 정리가 잘  안돼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실수한 것이다.

      하지만 참여연대 회원이 내가 말하고자 했던 의도와는 다른 글을 써 솔직히  섭섭했다.

      --해명성 이메일에서 ’동학혁명의 의미를 정당화할 주체가 있어야 하고 우리 증조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나쁠 것도 없다’는 말은 것도 논란이 소지가 있는데.

      ▲이는 당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본질이 아니다. 희생양이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군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는데 사전에 친정 아버지와 상의했나.

      ▲상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저와 함께 참언모(참언론을 위한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상의하지 않았어도 심정적으로 저를 믿고 도와줄 것으로 생각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정말 없나.

      ▲할아버지는 일제 때 매일신문에서 일한 친일파였으나 8.15 해방 이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무위도식하다 돌아가셨다. 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부채의식이 없다.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도 집에서 돈 한푼 갖고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 유족들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 만난 날이다 보니 많은 유족에게 얘기를 못해 죄송하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분을 부모님 모시듯이 따뜻하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

     

     

    "탐관오리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보다"

     

    2006-11-04 11:57:01, 세계일보

     

    참여연대가 발간하는 월간지 ‘참여사회’에 조기숙(사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조 전 수석은 그의 증조부가 조선 말기의 대표적 탐관오리인 조병갑 고부군수란 사실이 모 월간지의 폭로로 알려진 뒤 기자들에게 해명 이메일을 보내는 등 다양한 경로로 대응한 바 있다.

    참여연대 회원인 박상표(38·수의사)씨는 참여사회 11월호에 ‘탐관오리 조병갑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보다’란 글을 기고했다. 박씨가 문제삼은 것은 조 전 수석의 해명 이메일 중 “조병갑 군수가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게 아니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부분. 그는 “조 전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있는 과거사 청산 대상자 후손의 논리와 너무 똑같다”고 비판했다.

    박씨에 따르면 조병갑은 무죄 선고를 받은 게 아니다. ‘승정원일기’에는 1894년 조병갑이 혐의를 부인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홍집·서광범 등 조정 대신들이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가볍다”며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이듬해 유배지에서 서울로 도로 압송돼왔다.

    문제는 그가 서울로 끌려온 다음부터. 당시 일본, 러시아 등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암투가 치열하고 곳곳에서 변란이 끊이지 않아 정국은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조병갑의 재판 역시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는 1895년 7월 사면령을 내려 조병갑을 석방했다. 이때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선생은 “죄인들이 모두 처벌을 면했건만 아무도 항의하지 못한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박씨는 “조병갑에 대한 조정의 대처는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관보’ 등 기본적 사료만 들춰봐도 바로 확인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조 전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얕잡아봐도 한참 얕잡아본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조 전 수석 개인으로서야 이번 일이 억울하겠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는 교훈까지 잊어선 안될 것”이란 경고로 글을 끝맺었다.

    세계일보 인터넷뉴스부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조기숙 `조병갑은 증조부…왜 문제가 되나`

    조기숙(趙己淑 사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19일 자신이 조선말 전북 고부(古阜) 군수를 지낸 조병갑(趙秉甲)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증조부의 학정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는 일반적 통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 전 수석은 이날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조상에 대해 감출 것도 없고, 감춘 적도 없다"며 조병갑이 자신의 증조부라는 월간조선 보도내용을 시인했다.

    그는 그러면서 "이미 학계에서는 증조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고 소개하고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며 조병갑이 동학혁명을 유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오류 가능성을 거론했다.

    월간조선은 11월호에서 국어대사전(이홍직 편저)을 인용, 조병갑에 대해 "조선 고종 때의 탐관오리로 고부 군수로서 저수지를 축조할 때 군민을 강제로 동원하고, 터무니없이 세금을 징수해 700여 섬을 횡령 착복하고, 주민들에게 억지로 죄명을 씌워 불법 착복하였으며, 이러한 학정(虐政)에 대한 반발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조 전 수석은 "(증조부는) 고부에 부임하기 직전 김해부사를 지냈고 그 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마을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면서 "최근까지도 부사의 선정이 구전으로 전해져 이를 기억하는 주민들이 15년 전쯤 아버지를 불러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부사는 군수보다 높은 직위인데 왜 (증조부가) 군수로 좌천이 되었는지 다른 곳에 발령받은 지 2개월 만에 민란이 있는 전라도에 급파가 되었는지, 어머니상(喪)을 당해 관직을 떠나있다 3년 후에 돌아오면서 곧 동학군을 만나게 된 군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야하는 것이 기자의 자세가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군수는 재판을 받고 귀향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으며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군수의 인물됨에 반해 사돈을 맺었다"며 새로운 사실도 제기했다.

    조 전 수석은 "한 때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 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는 그 이유로 "동학혁명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혁명의 의미를 정당화할 학정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서 "증조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우리 가족에게는 억울한 일이 될지 몰라도 누가 학정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비본질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오류 가능성을 더 이상 캐지 않은 것도 당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며 "가족이 억울함을 벗는다고 희생자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에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밝혔다.

    조 전 수석은 그러면서 "억울하지만 가족사를 왜곡한 적도 숨기려 한 적도 없는데 이것이 왜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관련 보도 배경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신문도 장사라지만 아무리 경우가 없는 장사라도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키는 법이다.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갈취하는 협박꾼이 떠오른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러나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다수 생길 때까지 저도 때를 기다리겠다"며 해당 언론에 법적 대응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조 전 수석은 지난 2월 홍보수석을 사퇴한 뒤 미국에서 연구교수로 지냈고, 지난 7월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복직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