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記事를 읽는 재미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 2007. 10. 25

이강기 2015. 9. 8. 17:56
(미처 적어두지 않아  아래 글을 어느 잡지(월간조선? 아니면 신동아?)에서 퍼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역사는 살아있다]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2007-10-25에 퍼 옴 


러시아군이 철벽의 방어태세를 구축한 뤼순(), 동계관산(?)의 요새= 사진 : 사쿠라이(?)
도고(東鄕)가 이겼다! 아시아에 아주 잠시 꿈을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구 만주)로의 지배를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점 지배를 노리고, 대 러시아 전쟁을 준비했다. 세계에서도 유수한 군사 대국을 이긴 일본. 그 승리는 동아시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오랜만에 온 일본인데, 어디에 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으로, 금년 77세가 되는 군일 출신의 한국인 이 씨가 불쑥 도쿄로 찾아 온 것은, 올해 6월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자라 전후에 한국군에 들어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는 육군 소위로서 전선에서 싸웠다. 원래 나는 취재를 통해서 이 씨의 아들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씨와도 친해졌다.

◆러일 전쟁

1904~05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중국 동북부(만주 지역)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측 사망자는 약 8만 4천명으로、청일 전쟁 시(약 1만3천명)의 6?5배나 된다. 러시아 측은 약 5만 명이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1898년 청으로부터 뤼순(), 다롄()을 조차하여 철도 부설을 진행하였다. 모스크바 대학의 아이라페트프 조교수에 의하면, 러시아 대외 정책의 기본은 대양 진출이라는 해양 전략으로, 황제 니코라이 2세는 이 전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고 한다.

1900년, 러시아는 의화단과의 일전을 위해 청나라로 출병하여, 진압 후에도 만주에 눌러 앉았다. 일본은 러시아와 교섭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교섭은 결렬되었고, 1904년 2월, 일본군은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 개시하였고, 현재 한국의 인천에도 상륙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2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뤼순항()이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를 점령하였고, 다음 해 1월에는 뤼순()의 요새를 함락하였다. 일본의 연합 함대가 5월,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해전에서 발틱 함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 미국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강화를 알선하였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 운동이 확산되어 혼란에 빠져있었고, 일본도 전쟁 비용 조달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때이어서 강화에 응했다.

가이드북을 읽은 이 씨가 고른 곳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영웅이 된 도고 헤이하치로(??)를 모시는 도쿄() 하라주쿠(宿)의 도고(?) 신사였다. “일본의 전술은 많은 참고가 된다. 도고(?) 원수를 존경 한다”

경내에 장식된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 해전의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주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전 외무성 직원으로 메이지 시대의 외교를 연구하고 있는 마쓰무라 마사요시() 러일 전쟁 연구회 회장은 “아시아의 신흥국이 유럽의 일대 강국에 도전한 전쟁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대 사건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외국 기자로부터 종군 취재를 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1905년 5월, 도고(?)가 지휘하는 연합 함대는 대마도에서 가까운 일본해에서 발틱 함대와 싸워 대 승리를 거두었다.


뉴욕 타임즈는 ‘도고(?), 러시아 함대를 격멸’(사진)이라고 1면 톱기사 취급으로 보도를 했으며, 그 뉴스는 1면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했다. 영국의 타임즈도 “발틱 함대, 사실상 전멸이라는 도쿄 발 정보에 전 세계가 놀랐다”라고 썼다.

승리에 흥분한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후에 인도 초대의 수상이 되는 네루는 1930년대에 옥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 시절, 그 일에 얼마나 감격했었던가를 너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오오야마 사토시 (?) 번역,『아버지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세계 역사』, 미스즈서방(みすず)

중국의 혁명가 쑨원()은,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뿐만이 아니라 이집트와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의 독립 운동에 자극을 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구미 대국에 억압받는 유색 인종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지식인들도 ‘노란 사람들’의 활약을 기렸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한 인물을 떠올렸다.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을 이끌고 있던 판 보이 쩌우()=사진은 초상화=(1867~1940)다. 쩌우는 러일 전쟁 소식을 들은 후, 1905년 봄,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본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일까. 베트남을 방문했다.



‘동문동종()’인데… / 베트남 격렬한 분노

 

하노이의 사회과학원 역사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 쩌우를 연구해 온 츄온 타우 교수(72)가 쩌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응접실에서 맞이해 주었다.

“일본은 일찍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진행시키고, 입헌주의를 도입해 대국 러시아를 이겼다. ‘동문동종()’인 일본의 모습은,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베트남인들이 일본을 주시했습니다.” 동문이라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 동종이라는 것은 황색 인종을 의미한다.


일본에 도착한 쩌우는 요코하마에 망명 중이던 중국의 입헌 사상가 량치차오()=사진=를 방문했다. 량치차오는 청조 말기, 국정 개혁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탈출했다. 쩌우는 베트남에서 량치차오의 저작을 읽고, 책 말미에 적혀 있던 주소만을 의지하여 방문했던 것이었다.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중국 고전을 즐겨 읽은 쩌우는 중국인, 일본인과 한자로 필담을 나눌 수가 있었다.

쩌우의 일본 방문 목적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병력 등의 원조를 얻는 것이었다. 쩌우는 량치차오의 소개로 당시 유력한 정치가였던 오쿠마 시게노부(?), 이누카이 쓰요시() 등을 만난다. 그러나 오쿠마 등은 군사 원조가 일본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하고, 우선은 인재육성에 힘을 쓰도록 설득한다.

쩌우는 일본의 유지들에게 자금도 얻었으며 유학 처도 소개를 받아, 베트남의 젊은이를 부르는 돈즈()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학생은 한때 200명이나 되었지만, ‘안주의 땅’ 일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7년 6월, 인도차이나와 조선의 지배를 사실상 서로 인정한 일불 협약을 맺는다. 프랑스 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것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단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 식민지 정권과 결탁해, 베트남 유학생을 비롯하여 판 보이 쩌우까지도 추방했다. 동유()운동은 분쇄되었다.” 하노이에서 구입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쩌우는 1909년 3월, 4년 동안 살아온 일본에서 쫓겨났다. 도쿄의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고무라 주타로(??) 외상 앞으로 보내온 쩌우의 직필 편지가 남아있다. 쩌우는 외상이 “아시아의 황색 인종을 얕잡아 보고,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쫓아내고 있다”며, 일본이 구미 열강과 손잡은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B4용지 크기의 종이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얇은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쓰여 진 편지를 손에 들자, 그의 격렬한 분노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일본을 배우는 청나라 학생 /단속 규칙으로 경계, 반감

 

당시, 일본에는 청나라에서 온 유학생이 더 많이 있었다. 청나라는 청일 전쟁 직후인 1896년에 유학생 파견을 시작하여 1905년에는 그 수가 약 1만 명에 달했다.

청 말기 유학생의 사정을 잘 아는 리시스오() 난카이()대학 교수를 만나러 중국 텐진()을 방문했다. 리 교수는 “청일 전쟁에서 왜 일본에게 졌는가. 그 이유를 알고자 일본으로의 유학과 시찰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구미에서 근대 사상과 제도를 처음부터 배우기보다는, 일본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구미보다 가까워 비용도 적게 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이 새로운 공부의 장으로 여겨진 것도 큰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에서는 ‘전제’ 러시아에 대한 ‘입헌’ 일본의 승리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며, 일본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중국 출신으로 야마나시 ()학원대학의 슝타윈() 교수는 “일본의 승리는 중국 국민의 눈을 뜨게 하여, 입헌제 도입 움직임을 앞당겼다”고 보고 있다. 1906년,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나마 입헌정치의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던 중, 유학생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1905년 11월, ‘청나라 유학생 단속 규칙’을 공포했다. 유학생들이 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 한 청의 정부가 일본 정부에 단속을 의뢰했던 것이다. 유학생들은 이 조치에 대해, 수업을 보이콧하며 반발하였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이를 ‘청국인의 방종 비열’이라 비판하였고, 그것을 읽은 유학생이자 혁명파 활동가였던 첸티엔화()=사진=는 항의하여 도쿄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아시아의 강국인 일본에서 배우긴 했지만, 조선과 중국 동북부의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반감. 유학생의 마음은 모순으로 고민스러웠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지금, 일본의 헌법 개정 움직임이나 역사 문제 등, 중국 측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도 있다. 이 교수의 제자인 대학원생 리시스와(?) 씨(25)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계감. 일본을 보는 눈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국 ‘피해를 준 침략’ / 일본 ‘식민지에 꿈을’

한편, 현재 중국에서는 러일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격전의 땅인 뤼순()을 찾았다.

뤼순항()은 지금도 중국 해군의 중요한 거점으로, 일부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닐 수 없다. “뤼순(), 다롄()은 러일 쟁탈전의 장소였다. 일본의 승리는 중국 침략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다.” 뤼순()의 국방 교육 기지 “러일 전쟁 진열관”에서 본 중국어판 비디오다.

203 고지 기슭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한신유앙() 씨(82)는, 어린 시절 뤼순()에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한다. 유창한 일본어로 전쟁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중국에 있어서 러일 전쟁이란” 질문을 했다. “피해를 준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내쫓아 중국을 도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생각입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고도 눌러 앉아 뤼순()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이윽고, 중국 전 국토로 쳐들어 왔습니다.” 온화하게 설득하는 듯 한 말솜씨였다.

그럼, 일본에서는 어떨까.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의 유취관()을 방문했다. 러일 전쟁 코너에서는 군함 행진곡이 크게 울려 퍼지며, 일본의 승리를 전하는 영상이 흐르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동양의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이겼을 때, 러시아와 유럽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큰 꿈과 희망을 품게 하였던 것이었다.” 자랑스러워하는 내레이션이었다.

그것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국 등 일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꿈과 희망’이 퇴색하는 스피드가 빠르지는 않았던가.

오에 시노부() 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쟁 직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여, 아시아인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승리는 희망도 주었지만, 곧바로 실망도 안겨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쿠라이 이즈미 ?)

◆포츠머스 강화 조약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전권(외상)과 러시아의 위테 전권(전 재정부 장관) 등이 조인했다. ①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감독권을 인정한다. ②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취득한 뤼순(), 다롄()의 조차권 양도, 창춘() 이남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③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한다. ④연해주와 캄차카에서 일본의 어업권을 인정한다, 는 등의 내용이다. 거액의 배상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 민중은, 강화 내용에 반발하여 도쿄에서 대 폭동을 일으켰다.

◆제 0차 세계대전

최근에 역사학자들이 러일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전쟁 종결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05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회의가 열렸고, 이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서 재평가하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회의 관계자인 요코테 신지(??) 게이오 대학 교수에 따르면, 제 1차 세계대전(1914~18)의 중요한 특징들을 러일 전쟁이 많은 점들에서 먼저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나는, 러일 전쟁이 당시 국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구미 열강을 끌어들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그림 참조.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각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어서,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중국 동북부 점령을 반대하고 있던 관계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총력전’이다. 무기가 발달하고 전쟁 규모가 확대되어, 모든 국력을 전쟁 수행에 쏟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총력전’이라는 사고는 제 1차 대전 중에 확산되었지만, 러일 전쟁에서 이미 그러한 경향이 현저했다는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대학의 올레그 아이라페트프 조교수는 “러일 전쟁은 육지와 바다의 총력전이었다.”라고 한다. 육군과 해군의 효과적인 연계 작전을 펼치지 못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국제화됨에 따라, 외국 여론을 아군에 유리하게 하는 ‘선전전’도 중요해 졌다. 일본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귀족원 의원인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파견해, 일본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고자, 강연과 기자 회견을 통해 러일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였다. 러시아도 일본이 선전포고 전에 러시아 군함을 공격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 등을 구미 여론에 호소했다.

◆연표 / 당시의 동아시아

1895 조선의 명성황후, 일본군 등에 의해 살해당함

1896 조선 국왕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피난 : 아관파천()

1897 조선국,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개칭

1898 러시아, 청나라로부터 대련, 뤼순의 조차권과 남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

1900 북경에서 의화단 사건(의화단의 난)이 일어남

1902 영일 동맹 조인

1904 러일 전쟁이 시작됨. 제 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한 재정 및 외교 고문을 받아들임.

1905 포츠머스 강화 조약 조인. 제 2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으로 만듦.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

1907 제 3차 한일 협약으로, 조선의 내정도 지배하에 놓임. 이 때의 각서로 군대가 해산 당함

1910 “한국 합방에 관한 조약”을 체결

▷▷오키나와의 체험에서 보이는 것…히야네 데루오 교수 인터뷰

▷▷러일전쟁, 각국의 역사를 비교하다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히야네 데루오 교수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5)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오키나와의 체험에서 보이는 것-히야네 데루오() 류큐대 명예교수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를 축으로 ‘10대 사건’을 골랐다. 억압을 받았던 오키나와의 체험에는 동아시아와 공통점이 많다. 여기에서 근현대사의 중요한 논점이 부각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있어서 오키나와전은, 이러한 시점의 원점이 된다. 오키나와전은 일본 국내의 지상전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군의 지상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낸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주민을 보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민을 회색분자로 간주하여 학살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도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이 있었다. 그 연장선에 오키나와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오키나와전쟁 후,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떨어져 나가 미군 통치 하로 넘어갔다. 미국은 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1950년대에 ‘총검과 불도저’로 형용되는 토지 접수를 강행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하였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오키나와전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날카로운 의문이 제기되었다. 오키나와를 팔아버린 일본의 정책과 미국의 강경 정책이 밝혀져, 근대사의 재검토로 이어졌다.

오키나와에는 류큐 왕국의 독자적인 역사가 있었고, 일본에 편입될 때까지 아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는 책봉체제 안에서 다양한 예능 방면과 문학이 꽃을 피웠다. 이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 류큐 처분이었다.

단절과 동시에 일본으로의 동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근대의 입구에서 ‘탈아(??)’와 ‘동화()’가 함께 전개된 것이다. 나는 이를 “탈아동화”라 부르고 있다. 동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아시아와의 관계를 잘라 버리게 된다.

청일 전쟁은 그 전기가 되었다. 청은 류큐 문제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귀속 문제는 대국적으로 결착되었다. 그 후 “탈아동화”의 흐름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자, 오키나와의 문화는 열등, 야만,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아시아관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20 세기 초두가 되면 이하 후유()와 같은 학자가 나타나, ‘오키나와인’의 역사 체험을 기반으로 한 오키나와 연구를 제창했다. 그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타파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를 전후로, 아시아에서는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호세 리살, 베트남의 판 보이 쩌우, 중국의 루쉰() 등이다. 열강의 지배를 벗어나, 민족의 존엄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이것이 동아시아에서는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일어났다. 거기에서는 오키나와 연구와의 사상적인 계보를 찾아 볼 수 있다.

제 2차 대전 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운동은, 당초에는 소박한 내셔널리즘이었다. 그러던 것이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

가데나() 기지에서 B52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인근 주민의 불안이 높아졌을 뿐만이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52가 베트남 북부에 가한 폭격으로 무고한 베트남인이 살해당하고 있는 실상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복귀 운동은 ‘피해자로서의 오키나와’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오키나와가 베트남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는 ‘가해자’ 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반전 복귀 운동’에 나섰다. 이것이 그 후의 기지 반대 운동으로 이어져 갔다.

전후, 오키나와와 아시아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해자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자 오키나와에서 아시아와의 공감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진정한 아시아 이해의 열쇠를 잡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인터뷰: 요시자와 다쓰히코 ?)

▼히야네 데루오() 류큐대 명예교수 약력

1939 년생. 근대 오키나와와 일본, 아시아 관계사를 연구. 현대 정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히야네 데루오 교수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①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오키나와전

② 일본으로부터의 오키나와 분리와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 개시

③ 류큐 왕국의 폐절과 류큐 처분

④ 류큐 문제를 둘러싼 청일간의 분쟁

⑤ 청일 전쟁과 류큐 문제

⑥ 메이지 정부의 동화 정책과 오키나와 연구의 대두

⑦ 대만?조선 문제와 오키나와

⑧ 일본 복귀 운동의 고양

⑨ 베트남 전쟁의 격화와 반전 복귀 운동으로의 전환

⑩ ‘대리 서명’ 거부 투쟁과 기지 반대 운동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메이지 일본이 운명을 건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를 크게 바꾼 식민지 지배.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아시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를 살펴본다.》

 

■일본-강해지는 우월감 / 10년 전부터 기술

 

도쿄()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청일 전쟁에 이은 항목으로, 러일 전쟁을 양면 2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개전까지의 경위에 관해서는, 열강 각국의 국제 관계에 대한 설명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문에서는 러시아가 의화단 사건 후에도 군대를 만주에 주둔 시킨 것에 대해,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대항했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프랑스가 러시아를 원조하고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관계 그림도 싣고 있다.


러일 전쟁으로 점령한 뤼순항()을 바라보는 일본군인들.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 착색 사진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이 얻은 권익이 적다며 불만을 가진 국민이 정부를 공격하여 폭동까지 일어난 사실과, 계속되는 군비 확장으로 국민의 부담이 줄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이어진다.

《일본의 승리는,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자극을 주어, 일본을 모방한 근대화와 민족 독립의 움직임이 높아졌습니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 일본이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는 대국 의식이 생겨나,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져 갔습니다.》

이 기술의 후반 부분은 1997년에 발행된 교과서부터 포함되었다. “전쟁의 영향력에 대해서, 가능한 한 다방면에서 설명하기 위해 유의했다”며, 도쿄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 사회 편집부장은 말한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약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러일 전쟁 후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선사 수업을 금지하고, 일본사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왕궁 안에 조선 총독부가 세워진 사진과 일본어로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사진을 게재해, 당시의 모습을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

 

■중국-나라 안이 전쟁터였음에도 다루지 않고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에서는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 한편,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의화단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8개국 연합군에 의한 중국 침략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4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1900년 봄, 의화단 운동은 징진() 지역에까지 퍼져 갔다. 투쟁 방향은 직접,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 향하였다. (중략)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 곳곳에 방화와 살해, 약탈을 감행하는 등, 그 악행이 끝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의화단의 난’ 또는 ‘의화단 사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반제 애국 운동’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학계 일부에서 이러한 위치 설정에 대한 반론이 나오고 있지만, 교과서의 기술을 재검토하려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뤼순(), 랴오양(), 봉천(현재의 심양) 등, 중국의 중요한 장소가 전쟁터였음에도 자국사의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의 교과서를 잘 아는 게이오 대학의 또완뤼총(?) 준 교수는 “교전의 주체는 일본과 러시아다. 중국 측의 인식으로서는, 두 제국에 의한 전쟁으로 보기 때문에, 자국사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등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인민 교육 출판사의 『세계 근대 현대사』)에 등장한다. “제국주의로 향하는 주요 자본주의국“이라는 테마로, 러일 전쟁의 원인 등은 언급하지 않고, 조선의 식민지화에 중점을 두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순풍을 타며 미국의 지지를 얻은 후, 조선을 식민지로 손에 넣었다. 1910년, 일본은 조선 정부에 “한일 합병 조약”(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의 체결을 강요해, 조선을 정식으로 병탄했다.》

(사토 가즈오 )

 

■한국- 지배와 수탈 51 페이지에 걸쳐

 

한국에서는 러일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과 함께,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국사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먼저 러일 전쟁에 대해 전쟁에 이르는 경위를 포함하여 5줄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제 2차 한일 협약) ▽군대가 해산된 후의 ‘의병 전쟁’의 확대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교육, 언론 활동 ▽물자와 인적자원의 수탈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51페이지에 달한다. 을사조약에 관한 부분은 이렇게 쓰여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1910년의 합방 조약에 대해서는, ‘국권 침탈’이라는 항목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매국 내각과 이른바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노예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한국인의 ‘항일 민족 운동’에도 중점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에 대해서는 “민족 독립의 의사를 분명히 보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한일 간에 영유권 분쟁이 일고 있는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문제도, 이러한 ‘일제 침략’의 하나로 간주해,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라고 쓰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 사료 조사실장은 “일본에 의한 침략의 서막이므로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사쿠라이 이즈미 ?)

 

■대만-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에 중점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대만의 교과서는 극히 간단한 기술이지만, 중국사와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다. 『국민 중학?사회』(남일서국())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청조 말기의 입헌 운동 항목에서 5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러일 양국은 중국 동북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 영내에서 개전하였다. 이듬해 러시아의 패전으로 일본의 세력이 동북부로 들어갔다. 일부의 지식분자는 일본과 같은 조그만 나라가 대국을 누르고 의외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의 입헌 군주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보고 입헌 요구를 해왔다.》

1983년 “역사 과정 표준”에 의거한 교과서에서도, ‘러시아군의 동북부 강탈과 러일 전쟁’의 항목에서, 러일 전쟁 전후의 양국과 청나라의 중국 동북부를 둘러싼 마찰을 설명했다. 계속 해서 “러일 전쟁이 끝나자, 지식인들은 입헌이 전제를 이겼다며, 조야에서 끊임없이 입헌을 요구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구 교과서 모두 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일 전쟁 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던 것에 대해 중국사 부분에서는 언급이 없고, 세계사 부분의 ‘아시아의 민족 부흥 운동’ 항목에서, 항일운동에 중점을 두며 단4줄만을 할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1910년 일본에 병합된 후, 끊임없이 항일운동이 제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항일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항일운동은 계속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다.》

이 교과서의 편집 지도 위원 초호웨민(?) 정치 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조선 병합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1902년의 영일 동맹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일 동맹이 없었다면 러일 전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시간 관계로 많이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다무라 히로쓰구 )


 




▲ (윗 사진)경의선의 한국 측 최북단 역인 도라산. 5년 전에 만들어져 아직 새롭다=한국 파주시에서 (사진 나카노)

(아래 사진)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일본군이 처형하는 장면을 재현한 전시다. 한국 어린이가 가만히 보고 있다=한국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사진 나카노)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몰려 왔다

 

넓은 홈에 내려서면, “서울까지 56km, 평양까지 205km”라는 안내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도라산 역이다.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북한의 신의주와 한국의 수도 서울을 연결하는 경의선으로, 한국 측의 최북단 역이다. 한국군이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지역에 역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는 열차는 하루에 3번뿐이다. 신분증명서를 보이고 헌병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으면 승객이 될 수 없다.

이 주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뢰밭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경의선의 일부를 복원하기로 해, 이 역도 5년 전에 새롭게 태어났다. 금년 5월에는 휴전선을 넘어 시험 운행이 있었다. 56년 만에 열차가 남북을 왕래했다. 북으로 이어지는 철로는, 민족 화해의 장을 여는 새로운 무대이다.

홍수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이 10 월 초로 연기되었지만,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8월 28일, 이 경의선 철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평양에 갈 예정이었다. 남북한 교류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일본이 언제, 어떻게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조사하는 동안, 철도가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의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식민지 지배의 그늘과 남북 분단, 그리고 융화. 지배의 시작을 찾는 여행의 스타트 지점으로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상징적 장소를 봐 두고 싶었다

.

지배를 확대하는 도구 / 분쟁의 불씨로

 

서울에서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라는 저서를 쓴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를 만났다. “철도가 생겨서 편리하게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지자, 정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쳐들어왔고, 수탈과 억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상의 생명선이라 생각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 철도를 깔았다. 또한, 러일 전쟁은 철도를 둘러싼 전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 교수의 설명은 계속 된다.

열강들에게 있어서, 군과 물자를 대량으로 운반하는 철도는, 지배 지역을 넓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의 철도를 둘러싸고 싸운 것이 일본과 러시아였다. 교섭으로는 결론이 나질 않았고, 전쟁을 부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인접하는 동청철도와 하얼빈으로부터 뤼순()까지를 연결하는 남만주(?) 지선의 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손에 넣는 등, 스스로 철도망을 넓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본도, 서울과 반도 남단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두 노선으로 한반도 종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경부선은 청일 전쟁 후에 부설권을 따내서 1901년에 기공했다.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공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시켰다. 경의선은 대한제국 정부가 조선 민족의 자력으로 건설하려 하고 있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공문서에서 일본 정부의 의도를 분명히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902년,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가쓰라 다로(?) 수상에게 제출한,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문서에는 이러한 취지가 쓰여 있다.

“경의철도를 우리 손으로 부설해, 경부선과 연락시키면 한국을 관통하는 간선철도는 모두 제국의 것이 되며, 이는 한국을 우리의 세력 범위에 두는 것과 같다.”

이듬해, 러시아와의 교섭 방침을 둘러싼 내각회의에서는 “향후 한국 철도의 만주 남부로의 확장”에 대해, 러시아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른바, 한반도에서 더 나아가, 중국 동북부로 선로를 늘려 세력권을 확대시키자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시작된다.

개전 전, 대한제국은 전쟁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2일 전에 인천에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후발 부대를 포함해 전체 1만여 명의 병력이 수도와 그 주변에 몰려들었다. 점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쟁이 시작된 약 2주 후에는 “한일의정서”를 체결, 일본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인정하게 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군이 “이 토지는 필요하다.”라고 간주하면, 일본군의 것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안이었던 경의선에 대해서,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군용 철도”로서 만드는 것으로 통고하고, 철도 대대가 공사에 착수했다.

 

식민지 지배의 시작 / 러일 전쟁으로부터

 

철도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겹치는 장소를 방문하고, 서울시내의 용산구로 향했다.

용산구에서 용산 역 동쪽 부근은 한국 지도에서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거대한 주한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로 가에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돌로 쌓은 벽이 계속 된다.

이 일대는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이 토지를 수용해 군사시설을 만든 곳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민중이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군은 왜, 용산을 선택했을까?

서울대에서, 김백영() 연구원이 낡은 지도를 보여 주며 가르쳐 주었다.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용산 역은 당시, 한반도 철도의 매듭 역할을 담당하여, 경의선 등도 여기에서부터 이어졌다. 왕궁에도 위압을 보일 수 있는 위치였다. “왕을 위압해서, 철도로 한반도 각지로 이동하기 쉬운 곳에 일본군은 거대한 군사 거점을 쌓아 올렸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노선인 경부선은 1905년 1월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 운항도 시작되었다. 다음 해 4월에는 경의선도 전선이 개통되었다.

러일 전쟁을 포함한 불과 몇 년 안 되는 동안,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해 중국 동북부를 잇는 약 950km의 간선철도를 만들어 냈다. 일본의 신간선으로 치면, 도쿄 역(?)에서 신야마구치 역(?) 부근에까지 해당하는 거리다. 육로로는 말 등을 이용해 무기와 식량을 옮겼던 것을, 대륙 입구까지 대량 수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군과 물자를 옮기는 동맥을 만들어 낸 것만이 아니다. 일본군은, 전선으로의 물자 수송과 철도 연선의 경비 등을 구실로 주둔군을 편성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수도의 경찰권도 빼앗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도, 일본군대는 철수는 커녕, 2개 사단 규모의 약 3만 명의 육군 부대가 눌러 앉았다. 또한, 대구, 부산 등 연선을 중심으로 광대한 토지를 차례차례로 수용해,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서울 사무소에서 만난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서민교(?) 전문위원은 “러일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국은 사실상,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위원회가 조사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일제 강점”(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기간도, 1904년 2월 러일 전쟁 개전에서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로 정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의 시작을 1910년 한일합방 조약 체결부터가 아니라, 러일 전쟁에서부터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농민이 힘든 노동을 / 저항 운동의 대상으로

 

조선 민중의 눈에 철도 건설은 어떻게 비쳤을까?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2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독립기념관(천안시)을 7 월 초에 찾아갔다. 광장에는 총을 겨냥한 일본병사와 기둥에 묶여 처형당하는 민중의 등신대 인형이 서 있었다. 설명 판을 보니, 8월 말까지 하는 기념 전시로서 “일제가 한국 침략을 위해서 깐 철도를 파괴하여, 1904년에 순국한 애국지사의 처형 모습을 재현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수도 경의선 부근에서 공개 총살된 3명은 지금, 일본의 식민지화에 저항한‘의병’이라 기리어, 처형 장면의 기록 사진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철도는 민중으로부터 농지를 빼앗은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 군인과 업자는 주로 감독 역을 하고, 현장에서의 힘든 노동은 억지로 모으다시피 한 농민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민중의 반발과 미움을 불러와, 일본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애를 먹은 일본군은 철도를 부순 사람과 그들을 숨겨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군령도 내렸고, 실제로 처형했다.

경부선이 통과하는 서울 교외의 안양시.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 서 있는 비석에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비문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이토()가 경부선 열차로 안양을 통과한다는 것을 안, 마을 출신의 원태우가 열차에 돌을 던져 이토()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비석은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 불우한 생애를 보낸 ‘지사’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현지 주민들이 15년 전에 세운 것이다.

전 수상 이토()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강탈하고 보호국으로 삼는 제2차 한일 협약(을미 조약) 조인을 강요하기 위해 특사로 와 있었다.

그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된 것은 10개월 후인 1910년 8월 22일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합병 조약 체결을 승인했다. 지금은 세계 유산이 된‘창덕궁’한 쪽에 회의 장소였던 곳이 있는데, 설명 판에는 “한일 합병을 결정한 비운의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듬해,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압록강의 가교 공사가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중국 동북부까지가 레일로 연결되었다. 일본은 대륙 침략으로 뻗어 나갔다.

(나카노 아키라 )

 

▼다케시마(한국명:독도) 문제 민족의 존엄성과 관련▼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에 떠있는 바위투성이의 고도이지만, 그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은 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역사 문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일본 패전 후인 1946년, 연합국 군총사령부(GHQ)는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하는 지역에 다케시마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1951년에 서명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는,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독도는 명기되지 않았다.

이 때문이었는지, 1952년 조약 발효 전,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공해 상에 ‘이() 라인’ (한국에서는 ‘평화선’)을 설정하고, 독도를 한국 쪽으로 넣었다.

그 당시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는 독도 문제가 최대 난관의 하나가 되었으며, 결국 영유권 문제는 보류한 채로 국교를 맺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은 영유권 분쟁이라고 단순히 인식하지만, 한국에서는 민족의 존엄성이 얽힌 역사 문제인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을 언명한 1905년의 내각회의 결정과 현(?) 공시였다. 때는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던 해로, 5년 후의 병합으로 치달려 간다.

이 때문에 한국은 독도를 ‘강탈 피해 제1호’로 간주하고 있다. 2005년 시마네현(?) 의회가 ‘편입 100주년’을 기해 “독도의 날”조례를 가결한 것에 대해, 한국 측이 격렬하게 반발한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고스케 고이치 )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

과거사의 재검토를 진행하는 노무현 정부 아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자와 그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법에 의해 2005년 5월 발족했다. 위원은 학자나 변호사 등 11명이다. 조사 스태프도 있다. 임기는 4년이나 연장도 가능하다. 이 위원회와는 별도로, ‘일제에게 협력한 대가’로 손에 넣은 재산을 조사하여, 그 자손들로부터 몰수하여 나라의 것으로 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가 있다.

◆식민지

어떤 민족과 국민의 일부가 다른 토지로 이주하여, 새롭게 만든 도시와 마을을 의미하였으나, 15 세기‘신대륙’발견 이후, 본국 외에 그 지배하에 있는 지역도 가리키게 되었다. 19 세기 후반 이후, 구미 열강은 원료를 손에 넣으며 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본국과 먼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에서 식민지 획득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처럼, 고대부터 교류가 있는 이웃나라를 식민지 지배한 예는 보기 드물다.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명성황후를 알고 있습니까





기억을 만드는 것 - 명성황후를 알고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중국에서는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 일본에서는……. 이번 연재에서는 일본 정부 관계자 등에 의해 살해된 조선의 왕비에 대해서 알아본다.》

 

식민지 사관으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그리다

 

살해된 왕비의 이름은 명성황후(). 일본인에서는 민비()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쉬울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은 러일 전쟁으로 향하는 서곡이 되었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경계하여 조선에 접근했다. 당시 조선의 권력자가 반일파인 민비였다.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 공사를 수모자로 하는 집단이 왕궁으로 난입해,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민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명성황후란 사후에 주어진 칭호이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대원군, 남편인 국왕 고종을 제쳐 두고 권력을 잡은 모습은, 유교 사상이 강한 한국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왔다고 한다.

사건으로부터 100년이란 세월이 흐른 1995년. 그러한 이미지를 뒤집은 한국산 뮤지컬 “명성황후”가 등장했다.

기획 제작을 담당한 연출가 윤호진(?) 씨는 “(최근) 다양한 외국 사료를 접하면서, 떠오른 그녀의 모습은 국제 감각에 뛰어나고, 조선의 미래에 확고한 이상을 그리는 모습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무대는 화제가 되어, 금년 3월에는 한국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작품이, 국내에서의 호칭이 민비에서 존칭인 명성황후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라며 윤 씨는 자랑스러워했다.


뮤지컬에 자극을 받아 한국방송공사(KBS)는 2001년부터 02년에 걸쳐, 드라마 “명성황후”를 방영했다. 인기 여배우 이미연(?)이, 향학심이 넘치는 총명한 황후 상을 연기하여 대히트를 쳤다. 명성황후라 하면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KBS의 윤창범() 프로듀서는 “종래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식민지 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명성황후 상을 그려내는 것이 큰 목적이었다.”라고 말했다. 방송도 월드컵 축구 한일 공동개최에 맞추었다. “한일 양국이 지금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양보하기를 기대하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명성황후의 재평가 움직임은 왜 일어났을까.

명지대의 홍순민() 부교수(한국사)는 “역사학계의 근대사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라고 본다. “단지, 역사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술 작품화 되어, 과도하게 미화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드라마로 중국에도 침투

 

명성황후를 둘러싼 뮤지컬, 드라마는 해외에도 진출했다. 특히 드라마는 아시아를 석권 한 “한류”인기를 타고, 대만, 중국에서도 대히트를 했다.

“중국에서도 민비가 일반적이었고, 당초 명성황후라 하면, 누구냐고 묻는 상황이었다.”라고 고마자와(?) 대학의 전임 강사(미디어론)인 가오 유웬() 씨는 말한다. 그랬던 상황이, 일본에서의 “겨울 연가”처럼, 대 반향을 불러일으켜, 명성황후란 호칭은 단번에 침투했다.

“근대사에 있어서, 일본과 대적한다는 의미로, 한국과 중국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또한,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이야기로서도 많은 여성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청나라를 묘사한 방법 등을 둘러싸고 논의도 일어났다고 한다.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일본에서는 어떠할까. 오쓰마() 여자대학 전임 강사(근대 일본어 문학)인 나이토 지즈코(?) 씨는, 명성황후는 당시의 일본 신문에 의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날조된 사실을 저서인 『제국과 암살』에서 밝히고 있다.

“그 후, 일본에서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제로에 가까웠다. 거기에 존재하고, 알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한일 역사 속에 가로 놓여 있다. 명성황후는 그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는 지금의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그린 드라마, 뮤지컬을 둘러싸고는 현재, 방영, 상연의 움직임은 없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을, 가해자 측인 일본에서는 그런 사건이 있던 것조차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그런 놀라움을 계기로 작가인 쓰노다 후사코() 씨는 논픽션『민비 암살』을 집필했다. “각오는 했지만, 예상을 훨씬 넘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라며, 약 20년 전의 출판 당시를 되돌아본다. 그러나『민비 암살』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일본의 역사 교과서 기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겨우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만, 나에게는 큰 한 걸음이었습니다.”

(사쿠라이 이즈미 ?, 니시 마사유키 西)

 

일본해 해전과 “미카사()” 전승의 상징으로 매년 10만 명 방문

 

러일 전쟁이라고 하면, 많은 일본인이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 해전이 아닐까. 해전이 벌어졌던 5월 27일은 “해군 기념일”이었다. 육군이 봉천()(현 중국의 심양())을 점령한 3월 10일은 “육군 기념일”로 지정되어, 쇼와()의 패전까지 전승의 기억으로 화제가 되었다.


▲ 1968년에는 쇼와() 천황과 황후가 기념군함 “미카사()”을 방문했다.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이 승선한 기함 “미카사()”는 현재, 기념함으로 복원되어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해변 공원에 있다=사진. 군함의 앞부분은 황궁 쪽을 향하고 있다. 기념함을 운영하는 “미카사 보존회”에 의하면, 방문객 수는 2005년의 ”동해 해전 100주년”을 계기로 2년 연속 10만 명을 넘었다. 가족 동반과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전 해상 자위관인 다카하시 세이치() 홍보 계장은 “선조의 노력으로 일본의 안전과 독립이 지켜진 것을 아이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올해도 5월 27일 ”일본해 해전 기념식”이 열렸다. 내빈인 아라카와 교이치() 해상 자위대 요코스카 지방 총감은 “동해 해전은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일본과 아시아를 구하고, 대항해 시대로부터 이어진 서양의 세계 제패 역사에 파문을 일으켰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러일 전쟁이라고 하면, 시바 료타로(?)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시바() 씨는 “언덕 위의 구름”의 맺음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승리를 절대화 하고, 일본군의 신비적인 강력함을 신앙하게 되어, 그 부분에 있어서 민족적으로 치매화 되었다. 러일 전쟁을 전환점으로 일본인의 국민적 이성이 크게 후퇴해 광란의 쇼와()기로 접어든다.”

“언덕 위의 구름”은 NHK가 드라마로 만들어, 2009년부터 3년에 걸쳐서 방송된다.

(나카노 아키라 )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미사변)



조선 왕조의 실권을 잡고, 배일?친러 정책을 취하던 명성황후에 대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의 정적인 대원군을 옹립하여 친일 정권을 만들려는 획책을 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이른 아침, 일본군 수비대, 경찰관 등을 포함한 일련의 집단이 왕궁인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참살했다. 친일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궁정 내에 있던 미국인, 러시아인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목격하였기에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 등 관계자를 귀국시켜 재판에 회부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석방되었다. 친일 정권은 민중의 반일 의병 투쟁으로 무너지고, 다음 해인 1996년에 친로파 내각이 탄생했다.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첸 카이게 영화감독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6)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 나에게는 수수께끼-첸 카이게( ) 영화감독

 

구미 열강이 새로운 세계 시장을 만들기 위해 일으킨 것이 아편 전쟁으로, 아시아 최대의 시장으로서 중국이 선택되었다. 중국은 화이질서 안에서 외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교만한 나라로, 열강이 들어 왔을 때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이지만, 실패의 원인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 국가로서 국토 침범을 받지 않았던 일본에게 있어, 페리의 내항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편 전쟁의 영향을 받아, 일본은 내정 개혁과 대외 개방, 서양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수수께끼인 것은, 다른 나라라면 200~300년 걸릴 변화가, 페리 내항으로부터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간에 일본에서 일어난 것이다.

메이지의 통일 국가 형성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청조가 “중체서용(西)” 등 전통을 둘러싼 논쟁을 하고 있었을 때, 일본은 급속히 근대화를 완성시켰다. 문화적인 요인이 있었는가. 나는 이 큰 변화의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 민족의 특징은 실패에서 배우는 점이라 생각한다. 백촌강()의 전투(663년)에서는 당나라에게 배웠고, 페리 내항에서는 서양에게, 제2차 대전의 패전으로 미국에게 배웠다.

대국 중국의 무술변법(?)), 캉유웨이(?) 등의 입헌 군주제 시도는 실패했다. 동 시대의 중일 양국에서 일어난 일은 정반대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후, 부국강병을 실현한 일본은 약자인 중국에게 전쟁을 도발했다. 중국에서는 “몸에 흉기를 지니면 반드시 살심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양국의 전쟁은 동북아시아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사건이다. 천년이나 지속된 힘의 관계를 부수어 버렸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가 미군에 의한 일본의 점령이다. 미국에서는 1850년대부터 태평양을 내해(?)로 한다는 구상이 있었지만, 이는 약 100년 후의 점령에 의해 완성되었다.

여기까지의 사건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이 어떻게 외래문화와 영향에 대처했는가. 중국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문명과 역사와 전통을 판단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아편 전쟁 이후의 중국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부패한 전통 문화뿐 만이 아니라, 중국이 세계의 흐름에 한 발 늦었기 때문이다. 150년에 걸쳐 대를 이어 비극이 전해져, 자신감을 잃고 천명에 맡길 뿐이었다.

중소와 미일의 동맹 관계는 겉보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가 서구와의 동맹 없이 스스로의 안전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인가, 퇴보인가.

어린 시절에 읽은 독일 철학에는 “악이 역사의 진보를 재촉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문화대혁명으로 괴로움과 번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문화혁명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에 적극적인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화혁명의 격렬한 충돌과 모순이 없었다면, 그 후의 큰 변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은 중국인에게 수백 년간 찾아오지 않았던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왔다. 경제와 정신, 양면의 변화와 중국인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 당연히, 중국의 뿌리 깊은 “천조 사상”(왕조 의식)도 나왔다. 하지만, 중국의 발전은 초보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의 국민적 자질을 높여 가야만 한다.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 공동체의 실현은 어렵겠지만, 한중일의 역사적 혼돈 속에 축적된 문화의 힘이 분출할 것이다. 유교 문화권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 다무라 히로쓰구 )

▼첸 카이게 영화감독 약력

1952 년생. 문화혁명으로 지방의 계몽운동에 투입되어, 군대 경험도 있다. 1984년의 “황토지()”가 데뷔작이다. 경극의 명 여배우를 그린 “메이란팡()”을 제작 중.

▼첸 카이게 영화감독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① 아편 전쟁

② 페리 내항과 일본의 개국

③ 일본의 막부 종말과 통일 국가의 형성

④ 무술변법과 실패

⑤ 중일 전쟁

⑥ 미군의 일본 점령

⑦ 중?소, 일?미의 동맹 관계

⑧ 문화대혁명

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⑩ 원자바오(??) 수상, 아베 신조() 수상의 상호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