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완장부대, 머리띠부대

이강기 2015. 9. 9. 10:59

 

 

완장부대, 머리띠부대

 

 

(20001126)

 

완장 찬 사람이나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을 보면 왠지 섬뜩해진다. 단지 <.....위원회>, <....청년회>라는 단체의 이름이나 <반공>, <멸공> 혹은 <..... 하라>, <... 달라> 같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나 주장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구호가 담겨져 있을 뿐인데도 그렇다. 완장을 차거나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은 배경에 일사불란한 조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며 자기가 추종하는 단체나 주장 혹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생결단을 한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때로는 그러한 것에 반대하거나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인신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공갈협박과 테러 같은 폭력도 불사한다는 위협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후한(後漢)의 멸망을 앞당긴 황건적이나 고려말 개경까지 짓밟은 중국의 홍두적이 누른 띠나 붉은 띠를 머리에 둘렀던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뭐니 뭐니해도 완장부대나 머리띠부대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독일 국수주의자들이 국민들을 닥달하여 전시동원체제로 이끌어가기 위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었고, 그것을 정치 후진국이었던 중국이나 한국이 본받았음직하다.

 

 

해방 후 혼란기를 되돌아보면 가히 완장부대 혹은 머리띠부대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완장을 차거나 머리띠를 두르고 설쳐대는 바람에 사회가 살벌해졌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 일반 국민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여운형의 인민공화국 아래서 <인민위원회>라는 완장을 찬 흰 셔츠의 청년들이 잠시 세도를 부리더니 곧이어 <....청년단> 혹은 <....위원회>라는 흰 완장을 찬 청년들이 득세하여 진짜 빨갱이는 물론 말께나 하면서 자기들 편에 서지 않은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몰아 폭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했다. 전쟁이 나고 인민군들이 내려오자 이번엔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길길이 날뛰면서 과거 우익정치활동을 했거나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까지 우익으로 몰아 테러를 가하거나 처형하거나 했다. 인민군들이 물러가자 다시 그 정반대현상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다.

 

 

군사정권시절에 숙지근하던 완장부대, 머리띠부대가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반공이니 용공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일부 좌경학생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님비현상에서 오는 이해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뀐 것과 그리고 완장에서 머리띠로 바뀐 것일 뿐, 목적달성을 위해 사생결단을 하거나 남의 이해관계는 전혀 생각지 않는 철저한 이기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삭발을 하고(몽고족은 일반적으로 각이 진 얼굴이기 때문에 삭발을 하면 야만스러워 보이는 구석이 있다) 섬뜩한 구호가 담긴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을 보면 과거와 다름없이 무시무시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선 후부터 이런 머리띠부대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엔 삭발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사생결단을 하며 구호를 외치면 득을 보는 사회풍조, 정치풍조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님비현상이란 말을 했지만, 정부도 자기들의 정권유지에 위해가 되지 않는 웬만한 것들은 쉽게쉽게 양보를 해버리는 이른바 변형 님비현상이 이런 머리띠부대의 등장을 부추기고 있지 않나 싶다. 농민단체가 고속도로를 점거한지 하루만에 여당은 연체이자 탕감 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서는 세상이다. 농민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나서야 부랴부랴 나서는 꼴은 명색이 집권당이 어느 여늬 민간단체만도 못한 것 같다. 앞으로 걸핏하면 또 얼마나 많은 격렬시위가 벌어질 것인가?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또 비록 완장을 차거나 머리띠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들 못지 않게 강렬한 구호를 외치면 서 일방적으로 정부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부대도 새 정부 들어선 후부터 생겨났다. 전례 없던 일이다. 이들은 평소의 친구들이나 동료들간의 대화에서는 물론, 왼 사이버 토론장을 휘젓고 다니며 누가 DJ나 현정부의 정책을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눈을 부릅뜨며 반격을 가하고,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신문이고 유명인사고 가릴 것 없이 베고 찍고 후려치는 게 가히 적토마 탄 조자룡이 헌 칼 쓰는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정부가 하는 짓은 다 옳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극우, 수구, 반통일분자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간혹 중립적인 입장에서 야당이 하는 짓을 비판하고 정부가 하는 일을 칭찬해주고 싶어도(물론 잘하는 일도 많다), 이들이 설쳐대는 꼴이 보기 싫어 돌아서는 사람들도 많을 줄 안다. 새 정부 들어선 후 이상하게 사회의 지적인심이 각박해지고 마치 칼날이 부딪히는 것처럼 날카로워 진 게 마치 해방 직후 이데올로기 싸움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흐르면 생기는 일종의 병리현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