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이젠 <氣살리기 史觀>, <族譜史觀>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이강기 2015. 9. 9. 11:42

 

 

이젠 <살리기 史觀>, <族譜史觀>에서 벗어나야 할 때

 

 

200251일 에머지

 

 

-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적인 산문으로 기록돼야지 頌德文이나 獻辭가 되어서는 안 된다. 史家는 반역자여서도 안 되지만 우국지사여서도 안 된다. 史家는 오직 史家일 뿐이어야 한다. -

 

 

1. 서론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일부 신문에 <이 달의 소설()>이란 난이 있었습니다. 좀 이름께나 있는 문학평론가가 원고지 7,8매 분량의 소설()평을 쓰는 것인데, 그 달에 발표된 작품 중 소위 문제작이란 것들을 편 당 길어야 대여섯 줄 정도로 척척 평을 해나가곤 했습니다. 다행이 호평을 받았으면 모르되 악평이라도 들은 작가로서는 그렇게 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몇 날 아니 몇 달을 노심초사하여 써놨더니, 창작의 고통을 필경 알리 없는 평론가란 녀석이 단 두어 마디로 욕만 실컷 해댔으니 말입니다.

 

조사연님의, 열정과 진지성이 담긴 길고 긴 글을 읽으면서 문득 그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답을 해야하나?>. 잘 못 하다간 문제의 그 문학평론가 꼴이 날 것 같아 망설여졌습니다. 16세기 조선에 대한 조사연님의 해석을 수긍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조사연님의 글은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직설적인 방법으로 <훼손>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님에게 드린 저의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님(아카데미즘)과 저(저널리즘)의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 특히 저의 쪽에서 잘 못 어프로치를 하면 모처럼의 좋은 마당을 훼방놓는 꼴이 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마침 백면서생이란 아이디를 쓰시는 분이 조사연님의 글에 대한 평(그 글에 상당히 동감합니다)을 올린 것도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사연님에게 드리는 글>의 형식으로 하되 저의 주장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저의 평소의 소신이었으며, 언젠가 쓰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조사연님이 그 계기(쓰고싶은 열정이 일어나게끔)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사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원전참고나 인용도 없이 그냥 느낀 대로 속성으로 줄줄 쓰는 글이어서 간혹 논리적 모순이나 경망함 혹은 과격성이 엿보여도 널리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조사연님은 다른 분에게 드리는 어떤 글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없이 우리 역사(특히 조선시대)에 대한 자학과 비하가 일상화 된 우리 지성의 풍토......>, <그러므로 조선시대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지적수준부터 먼저 돌아보아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자학과 비하라는 말씀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조사연님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보고자 하는 것이지 자부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듯이, 조사연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 역시 자학과 비하가 아닌 것입니다. 자학이나 비하, 자부나 찬양 같은 이런 감정들은 모두 사학의 금기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서만 보아야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잠시 님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사를 비교사학적인 면으로도 검토해 보심이 어떨까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 우선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쓴 책들, 예컨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특히 서론 부분)>,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리고 구한말 선교사나 외교관들이 쓴 여러 기행문들을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다만 부루스 커밍스의 책들은 제외합니다.

 

 

2. 민족주의 사학(살리기 사학, 族譜사학))에 신들린 사람들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역사는 항상 수세적인 역사가 되게끔 돼 있었습니다. 고구려시대에 한 때 공세를 취한 적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장래의 수세를 방비하기 위한 공세였지 진정한 공세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총 931(?)의 외침을 받았다고 돼 있습디다. 이런 와중에서 용케도 강토와 민족을 보존해 왔으니 조상님들의 슬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슬기란 다름 아닌 <죽은 척 하고 엎드려 있는 것>(특히 조선시대 들어와)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것이 부러지기 쉽다고, 한 때 중원을 석권했던 북방 민족들의 말로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나 말이 쉽지 <......엎드려 있는 것>은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중국 사신의 눈에 띄어 조공이란 이름으로 수탈 당할 가봐 사치도 말라 금붙이도 패용 말라고 엄명이 내려져 있었음을 열하일기에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중국 눈치를 보느라 표류자들이 안 할 고생을 훨씬 더 많이 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또 부서진 선박, 물자, 표류자들로부터 새로운 선진 문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필경 당시로는 최신 건조기술로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표류선박은 불태워져 쇠붙이 얻기에 바빴습니다(앞서 표류한 월터브레<박연>는 대포를 만들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하멜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 어떻게 하든 중국에서 말썽이 안 나게 쉬쉬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려는데만 정신을 쏟는 바람에 다른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정황이 그 책 군데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부가 일본으로 달아나 나가사키 奉行한테서 심문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의 심문방법, 심문내용을 보면, 당시의 조선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본래 사람이란 억눌리면 한이 많이 쌓이는 법입니다. 한이 쌓이면 공상이 많아집니다. 자기를 억누르는 사람이나 국가에 대해 통쾌한 복수를 하고 기개를 마음껏 펴는 것이 줄거립니다. 민간에 흘러 다니는, 좁쌀 두 되로 군사를 만들어 역성혁명에 성공한다는 얘기는 가렴주구에 한이 쌓인 민초들의 공상에서 나온 것이고, 일본에 건너가 통쾌하게 왜인들을 골탕 먹이는 사명당 얘기는 임진란으로 철천지한이 맺힌 당시 백성들의 심정을 대변한 공상이었을 것입니다. 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 얘기(필경 민간에 전승돼 오던 얘기)를 집어넣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공상이든 설화든 그것이 개인이나 백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을 테니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콤플렉스(상전이나 관리 및 대국에 대한)와 카타르시스가 백성들과 지배엘리트들은 물론 한국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크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를 만들어야 할 돈이나 쇠붙이로 팔만대장경이나 불상을 만들어 부처님의 자비하신 도움을 청한 것도, 따지고 보면 어찌할 방도가 없이 수세에 몰린 백성이나 나라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옛 시대의 민족주의는 이런 콤플렉스와 카타르시스에서 생긴 것입니다.

 

한편 정부나 지배 엘리트들은 외침에, 자기들의 가렴주구에 항상 억눌려서만 지내던 백성들의 기를 다른 방법으로 살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단군설화나 선조들에 대한 칭송으로, 그리고 한족을 제외한 북방민족과 일본인들을 오랑캐라 하여 천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중국 다음으로 훌륭한 나라, 훌륭한 조상들의 자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살리기 사학, 족보사학이 탄생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이 탄생되면서 이것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한국사>가 아닌 <국사>(과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국사> 혹은 <국사학과>라는 말을 쓰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가 독점적으로 발간되어 <위대한 선현들과 5000년의 금빛 찬란한 문화>가 일시에 되살아납니다. 일부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사실상 강단사학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었지만(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학분야도 일본치하에서 교육받은 그들 외에 달리 인재가 없었으니까), 항상 식민지사관 혹은 황국사관이란 비판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해 자못 사라질 번했던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건국초기 일정한 기간 동안 기살리기 사학 내지 족보사학이 강조된 것은 이해가 갑니다. 솔직히 말해 이것은 정치의 한 부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史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판인데 그것이 대수겠습니까? 문제는 계속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벌써 건국한지 50년이 넘었고 이젠 자세를 좀 바로잡을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요 몇 년 들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재야사학자들>은 한 술 더 뜹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대 일본 영토가 한반도의 식민지가 되는가 하면 고대강토가 중국 북경근방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KBS가 토요일 저녁 8시마다 방영하는 <역사 스페셜>은 벌써 <세계 최고>를 아마 10개도 더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구 조선총독부건물이 <동맹보다는 민족이 앞선다>는 어느 <위대한> 대통령에 의해 철거된 후 한국에서 적어도 건물로는 일제의 잔재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강점에서 벗어난 지 50여 년만에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지시대 건물들을 철거한 예는 아마도 세계에 그 유래가 없을 것입니다. 이만하면 정말 <잘난 민족> 아닙니까?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콤플렉스와 카타르시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요즘(실제로는 70년대부터)은 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민족주의 사관을 진보좌파주의가 열심히 이용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민족주의라면 우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되는데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진보좌파들의 유연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북한이 역사를 김일성 일가 족보로 개조한 지는 이미 오래 전 일이었지만, 그래서 그들의 역사서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하나도 아까울 게 없게 되었지만, 남한의 일부 좌파진보주의자들이 북한 역사서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6.25를 남침이 아닌 북침으로 몰아가려는 자세라든지, 일본과 미국에 대해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라든지 가 그러합니다. 이른바 <친북주의>를 민족주의 사관으로 감싸려는 것입니다.

 

본래 史學에 무슨 <主義>가 들어가면 이미 사학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자못 그 <主義>의 해설서 내지 참고서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민족주의에 신들린 사람들이 한국사를 제 맘대로 쓰고(혹은 뒤에서 조장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역사인식 수준이 외국의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아무리 외쳐대도 믿어줄 외국인들이 한 사람도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인들이 쓴 역사서를 못 믿는데, 역사적 사정임이 분명한 독도영유권 문제에 어찌 한국 편을 들 수 있겠습니까?

 

 

3. 문민지상주의에 멍든 역사

 

노일전쟁 때 일본 연합삼대 사령관으로서 러시아의 볼트함대를 현해탄서 궤멸시킨 도고우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원수는 戰捷축하연 석상에서 본인이 넬슨 제독과 이순신 장군에 빗대어 賞讚되는 것에 대해, 불초 도고우가 넬슨이라면 몰라도 이순신이라면 그분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합니다. 일본 강점기에 진해에 주둔하던 일본군 요새 사령부는 해마다 이순신 장군의 진혼제를 올렸다고도 합니다. 노일전쟁을 주제로 한 일본의 어떤 소설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변하긴 했지만, 자기나라 해군함대를 궤멸시킨 적장인데도 그들은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순신이 만약 일본의 장군으로서 그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면 그의 생전에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적어도 더러운 모함을 받아, 화급한 전시 중의 최 일선에서 득달같이 잡혀가 주리를 트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집트원정에서 돌아온 시저만큼은 못돼도 그에 버금가는 환영을 받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그의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왠지 그가 먼 고도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몹시도 외로워 보여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죽어서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린들, 영의정을 제수 한들 그게 본인에게 무슨 대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을 땐 갖은 모함을 하며 못살게 굴다가 죽고 나서야, 말하자면 이젠 더 이상 반역할 염려도 없고 라이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머 어마한 벼슬을 내려주며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치하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 조선시대의 인걸대접 방법이었으니 말입니다.

 

저가 왜 서두에 이순신 장군 얘기부터 꺼내느냐 하면, 조선시대가 이런 걸출한 장군하나 간수하고 포용할 나라가 못됐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좀 뛰어나고 앞서간다 싶으면 온갖 음모를 꾸며 역적으로 몰아서는 죽이거나 귀양을 보냄으로서 미래의 라이벌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굳이 이름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분명 국가의 동량이 되고도 남을 인재들이 얼마나 많이 비명에 갔습니까? 특히 16세기 이후엔 마치 똑똑한 사람들은 죄다 쫓아내거나 죽여버리고 못난이들끼리만 남아서 나라를 다스렸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엔 왕도 마찬가집니다. 영조, 정조 정도를 빼고는 왕다운 왕이 있었습니까? 좀 괜찮다 싶은 왕(광해군)은 쿠데타로, 제법 총명하다 싶은 왕세자(소현세자)는 이상한 방법으로 제거해버렸습니다.

 

문민지상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다이너미즘, 즉 역동성을 억제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회에 역동성이 없어지면 이미 그 사회는 그저 숨만 붙어 있을 뿐 假死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지배 엘리트들은 주자학 이데올로기에 의한 공리공론을 주제로 당쟁에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고 있고, 백성들 역시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제도 속에 옥죄어 있었으니 역동성이 생겨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인 상공업경시, 국방경시(천시), 개발의지 결여 등은 사회의 가사상태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앞서 저가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는 것>이란 표현을 했습니다만, 중국에 대해서만 그런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백성들도, 지배엘리트들도 그런 심리상태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지배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사회의 역동성을 억제한 면도 많습니다. 백성들의 기를 살려 활력을 키워 놓으면 반역을 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기득권을 뺏길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샛말로 시민운동 비슷한 낌세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반란집단으로 몰아 제압해버렸습니다. 조선말기에 일어났던 몇몇 民亂, 요즘처럼 시민운동의 주장을 수용하는 식으로 처결했다면 민란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를 멀리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똑똑한 사람에게 무기까지 들여놓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문과급제자 수에 비해 무과급제자가 10배 이상 많았지만(예컨대 영조에서 순조에 이르는 110년간의 총 과거 급제자 중 문과가 3,950명이었던데 반해 무과는 41,752), 후자는 주로 문과시험에 응시할 실력이 안되면서 궁술 등 무예를 좀 익혀 응시한 사람들이나 서울 세도가의 건달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인조때의 李廓(이확)처럼 무과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도 없진 않았으나 그것은 회귀한 사례였고, 일반적으로 무과출신들은 문과출신들의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李廓만 하더라도 조선과 後金(뒤에 )과의 관계가 아주 미묘하던 때 서로 가기를 꺼려하던 春信使란 이름의 사절로 심양에 들어가 갖은 봉변을 당했고, 뒷날 龍骨大馬夫大란 두 장수가 왔을 때도 서로 맡기를 꺼려하던 접빈사로 뽑힘으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것을 보면 문과출신들로부터 단단히 괄시를 받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다 같이 를 멸시하고 을 숭상했는데도 고려는 왜 조선보다 역동성이 있는 사회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영향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찰은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백성들의 안식처요 집회장소가 되었으며, 흉년엔 구호기관이 되기도 했고, 전시엔 승병을 일으킴으로서 전선사령부가 되기도 했고, 또 그 지역개발의 주관부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찰의 과다한 토지보유, 고리채 등의 악폐가 고려멸망의 한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고려사회는 불교라는 개방된 기관 덕택에 그나마도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억불숭유정책을 폄으로써 백성들이 활력을 찾을 이 마지막 보루까지 없애버렸습니다. 서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양반들의 전용 활동무대였을 뿐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아니 서원은 오히려 당쟁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조사연님의 글에서 훈구파와 사림파 얘기를 하면서 사림파에 매우 후한 점수를 주시는 것 같던데, 저는 생각을 좀 달리 합니다. 물론 사림파의 진보적이고 참신한 기백이 도덕적 결점을 갖고 있는 훈구파의 보수적이고 기득권수호적인 자세에 충격을 줘 새바람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되자 그들이 黨爭의 주역이 돼 정부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려 역대정부를 무능에 빠뜨린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득세를 막고자 한 것이 士禍였다면, 당쟁은 바로 그들 자신이 조성한 악폐였습니다. 그들이 三司에 진을 치고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정부가 되기도 하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연산군 때의 재상이었던 盧思愼의 유명한 사직서 내용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사직서 내용 하나 만으로도 조선 士林派의 문제점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정권은 단 하루라 할지라도 朝廷에 있지 아니하면 안 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지 않으면 臺閣에 있기 마련이요 대각에 있지 아니하면 宮中에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조정에 있을 때는 국정이 잘 다스려지고, 대각에 있으면 국정이 어지러워지며 궁중에 있으면 나라가 망한다. 국가의 治亂興亡이 모두 여기에서 원유되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士林의 풍조가 날로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 이제는 남의 죄상을 파헤쳐 고발하는 것은 마치 곧은 행동인양 생각하고 윗사람에 대하여 감히 항거하고 비난하는 것을 마치 고고한 행동인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의 輕重이나 大小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말만이 성현의 말씀이라는 자세로 끝내 그 주장을 굽히지 않고, 심지어는 임금님과 맞서 버티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이고 몇 십일이고 계속하여 소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罪行을 문제삼아 그 처벌을 啓請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으레 그 사람의 지난날의 죄상을 사소한 것까지라도 찾아내어 기필코 몰아내고야 맙니다...... 이와 같은 위험스런 풍조가 성하여짐에 따라 충직하고 순후한 기풍이 날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臺諫이 어떤 문제를 들고일어나 말을 하면, 弘文館이 반드시 뒤를 따르고, 홍문관이 말을 하면 이번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또 나서서 말을 합니다. 이 외치면 이 덩달아 나서서 따라 외치는 이러한 못된 풍조가 이제는 아주 습성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없는 허물을 찾아내고 터무니없는 죄목을 날조합니다. 그러다가 혹 어떤 사람이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당장 헐뜯고 나서며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래서 공경대신들도 저들의 입이 무서워 감히 가타부타 말하지 못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풍조가 그대로 지속되어 정권이 대각에 넘어가고 대신들이 입을 봉하게 된다면 나라 일이 참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와 같은 폐풍은, 신하들의 힘으로 그것을 일시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오직 현명하신 주상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고 행동을 취하셔야만 비로소 없앨 수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 뜻이 주상께서 저들 대간을 위협으로 누르고 그들의 언론활동을 봉쇄하여 국사를 의 맘대로 행할 수 있게 하여주십사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오라 저들의 경박하고 일의 대체를 모르는 무리들로 하여금 조심할 줄 알게 하자는 데 있습니다. 지금 論者들은 이런 뜻으로 드리는 의 말씀을 오히려 亡國至言이라 하고 신을 가리켜 大奸이라고 지목하며 나라를 그르친 역대왕조의 간신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악이 모두 의 일신에 집합돼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하략(이상 E.W. 와그너의 "士禍 - 조선초기의 정치 투쟁(The Literati Purges: P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에서 인용)

 

이 글은 현대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 글로 내놔도 하나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연산군이 대간의 입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목적을 두었던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타협과 양보를 모르는 외골쑤를 그들은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주자학적 명분론을 주류로 했던 <水戶學派>란 것이 있었고 幕末志士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나 막상 유신 후의 明治정부 요직에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문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일본의 정치풍토상 그들이 발붙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조선의 한정된 관직도 정치를 당쟁이라는 이전투구로 몰아 넣는데 기여했던 것으로 봅니다. 어느 외국학자가 계산해 논 것을 보니까 조선의 文官職820, 武官職이 약 4천 개 정도 됐고, 조선 500년 동안 文科科擧 及第者 수가 약 14,600명이었다고 합니다. 관직의 숫자는 500년 동안 거의 제자리걸음인데, 자격을 가진 적채자 수는 계속 늘어나니 쟁탈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약 30년간 계속된 군사정권 아래서 소위 <군사정치문화>에 진저리를 치면서 어서 빨리 문민정부가 들어서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문민정부 8년째에 들어선 지금 소위 <문민정치문화>에도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당히 경직성을 요구하는 주자학 이데올로기 속에서 500년 내내 문민지상주의를 강조했으니 그 폐해가 이만저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상무정신의 퇴조와 에 대한 멸시는 2차례에 걸친 전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비극이다 못해 <희극>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때의 조정의 척화파와 주자파 간의 논란과 對淸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읽다보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장수란 자가 의 신형 대포소리에 놀라 줄행랑을 치지 않나, 전선사령관직을 모조리 문관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전투에 대한 기본수칙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고, 각 부대간 연락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적병이 가까이 왔습니다>고 전하는 척후병을 민심을 어지럽힌다며 목부터 베어버리는 사령관이 있는가 하면, 수만명의 적을 앞에다 놓고도 "제게 군사 3천만 주시면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하는 삼국지식 허풍에다, 걸핏하면 先斬後啓를 해버리는 바람에 아까운 장수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임진란때 都元帥 金命元은 한강싸움에서 패한 후 副元帥 申恪이 자기를 따라 개성쪽으로 후퇴하지 않고 양주로 이양원을 따라갔다 하여 명령거역죄로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고, 임금 선조는 전후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선전관을 보내 그를 참형에 처했습니다. 실제로 신각은 양주에서 임진란 발발 이래 첫 승리로 기록된 전과를 올렸고 그를 참소한 김명원은 연전연패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신각은 이미 선전관의 손에 죽임을 당한 후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도원수 金自點은 국경수비를 한답시고 군의 주력을 끌고 가서는 평안도 어느 에 처박혀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서울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군졸의 급조와 무기는 더욱 문제였습니다. 군역명부에 오른 사람들의 대부분은 평시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소집되는데, 훈련도 제대로 안돼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지급 받은 무기조차 칼은 녹슬어 칼집에서 빠지지도 않고, 활은 좀이 먹어 한번 당기기만 하면 뚝 부러지는 형편이었습니다. 군역명부란 것도 엉터리가 많아서 중앙에 집계된 수십만의 대군이 실제로는 그 몇 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건국 후 200년간의 문민지상주의의 평화시대를 거치면서 국토방위에 대한 무관심과 태만이 이 꼴로 만들어 놨습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왕조가 유일사상, 즉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져버리면, 마치 녹은 엿가락을 늘일 때 처음 굵은 가닥이 점점 가늘어져 나중엔 훅 불기만 하여도 끊어져버리듯이 쇠잔해버린다는 사실을 조선 500년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유일사상체제는 이제 겨우 50여년이 지났는데도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데 하물며 500년이겠습니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