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人이 본 韓國人의 反日感情(3) - 批判받는 日本 歷史교과서 | ||
日本 歷史敎科書와 日本 政治人의 妄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하는
'悲哀'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 과 '일본 정치인들의 妄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마치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을 "용용 죽겠지"하고 약을 살살 올려가며 '가지고 논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잊을 만 하면 불거져 나오고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면 사과 몇 마디하며 쑥 들어가고, 이젠 안 그러겠지 하고 마음놓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 약 좀 나 볼래?" 하듯이 아픈 데를 콕콕 찌르고, 정말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고... 또 그러고는 사과하고, .... 또 그러고는 사과하고..... 가히 '파동'과 '망언'의 시리즈라고 해야할지, 연속극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정도다. 왜 이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을까? 아니 한.일간에 왜 이런 구도가 진작부터 생겨났을까? 일본이 저네들 교과서에 무어라고 기록하든, 과거사에 대해 무어라고 떠들든, "못난 놈들, 웃기고 자빠졌네!" 하며 아예 싹 무시해버릴 수 있는 세상은 왜 안 오는 것일까? 가령 일본이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재기.부흥하지 못하고 동남아 일부 국가들처럼 3류 국가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래도 과연 그런 행태를 보였을까? 또 설사 그렇게 나왔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반응이 지금과 같았을까? 파동 및 망언에 대해 우리 쪽의 강력한 항의로 얻어내는 謝過나 陳謝가 외교적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것은 한.일간 역사에 대해 웬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사과하는 쪽도 마음속에서 울어 나 하는 것이 아니고, 받는 쪽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짐짓 받아들이고 하는 짓을 정말로 지겹도록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것에 대한 그들 일본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이토록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할까? 잔잔하게 스며드는 비애를 느끼며 이 章을 번역했다. 이 비애는 우리들이 저네들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이 되었을 때야 없어질 것이다. <><><><> 제 3장 批判받는 日本의 歷史 敎科書 <> 교과서 문제란 무엇인가? 1982년 6월 25일, 그 이듬해부터 사용될 교과서에 대한 일본 文部省의 검정이 끝났다.
아사히신문은 6월 26일, [文部省, 高校 社會敎科書 중심으로 檢定强化, '侵略' 표현 회석 되다.]로 크게 보도했으며, 한국의 동아일보는 6월
26일, [日本, 교과서 檢定强化, 古代의 天皇에 敬語, 侵略이란 용어를 억제]로 간단하게 보도했을 뿐이었다. [일본교육당국이 어떠한 내용의 교과서를 만들어 어떻게 가르치느냐하는 것은 우리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교과서에서 과거 한반도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통치를 정당한 것으로 미화한다면, 과거 日帝 虐政下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왔던 우리들로서는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만약 역사교육에서 침략주의의 미화 또는 합리화 경향이 자민당정권의 군비강화 내지 개헌의 의도와 그 궤를 같이한다면, 역사교육개편의 목적이 또 한번 호전적인 국민들을 만들어 가는 길이 될 것이다. 교과서 문제는 우리들이 무엇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며, 이 문제에서는 남북대립을 초월한 민족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싶다.](中央日報 7월 23일자). 이러한 情勢에 놀란 일본정부는 7월 30일, 한국정부에 [문제해결에 노력하겠다.]고 통보했다.
그기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본이 是正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수습되지 않았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일본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은 교과서문제에 대한 한국 및 중국정부의 항의는
몸소 일본의 조선통치나 중국침략의 非道를 체험했던 사람들의 노여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문보도를 촉매로하여 타올랐으며, 각국정부를
외교상의 대응으로 나오게 했던 것이다.(중략) 이것은 교과서문제로 촉발되어 폭발한 [反日感情]의 의미를 정확히 짚은 사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6일, 일본정부는 미야자와(宮澤喜一) 官房長官 담화라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政府見解]를 발표하여 사태수습을 시도했다. [우리 나라는, 한국에 대해서는 昭和 40년(1965년)의 한.일 공동성명 속에서 <과거의 관계는 유감이었으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하는 인식을 나타냈으며, 지금도 이러한 인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한국, 중국 등의 비판에 충분히 귀를 기울려 정부의 책임으로 교과서 記述을 시정한다. 그것을 위해 앞으로의 교과서검정에 대해서는 敎科用 圖書檢定 調査審議會議를 거쳐 검정기준을 새로 고친다.] 이에 대해 와다(和田春樹) 東京大學 조교수 등에 의해 결성된 [敎科書 문제로 文部省에 항의하는 시민 시위 實行委員會]는 ['政府見解'에 관한 시민의 의견]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로 비판하였다. [<李(東元) 한국 외무부장관은 과거의 어떤 기간에 양국민에게 불행한 관계가 있어 생겨난 한국민들의 대일감정에 관해 설명했다. 시이나(椎命悅三郞) 외무대신은 李 외무장관의 발언에 유의하여 이와 같은 과거의 관계는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술회했다.>고 하는 [한.일공동성명]에서의 [과거의 불행한 관계]라고 하는 말은 누가 무엇을 하여 일으킨 사태인가를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이며, [유감]이라고 하는 표현은 가장 가벼운 예의를 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의 추태는 확실히 검정제도의 결함을 노정한 것이며, 당연히 근본적인 재검토를 제도자체의 存否도 포함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번에도 정부의 책임으로 교과서의 기술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고, 집필자와 편집자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는 조건의 정비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시이나(椎名) 외상에 대해 말한다면, 1963년에 출판된 [童話와 政治]라고 하는 책에서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렇게 강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독아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에 五族共和(協和)의 꿈을 걸었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라고 술회했던 인물이다. 그가
한.일공동성명에서 [과거의 관계는 유감이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술회한 것은 제스츄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상세한 것은
拙著 [<妄言의 原型> 참조]. [새로운 검정기준 채택은 앞으로의 교과서검정 수속이나 기준을 만든 것일 뿐, 구체적 내지 실질적인 왜곡의 시정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검정기준 개정은 역사왜곡 시정작업의 완료가 아니라 시작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작업이 진실로 중요한 것이다.]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에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반일감정]의 와중에 한국신문지상에서
일본의 [양심세력]이 소개된 것이다. [일반 시민들 가운데는 政權層의 복고사상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反<戰前>기운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사실, 최근의 일본의 여론이나 논조에, 또한 문필가나 학자, 나아가서는 문제가 되었던 해당 교과서 집필자들까지도 정권층의 사실왜곡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것이야말로 戰前에는 질식되어있던 일본의 양심의 후예라고 생각하며, 皇道主義나 좌익편향을 배제하고 지금부터의 일본을 민주주의로 향하게 하려는 일본의 중심적인 양심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9월 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동경특파원 李道衍의 기사 [일본시민들이 보내온 양심의 편지]는 앞서 소개했던 ['정부견해'에 관한 市民들의 意見]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市民들의 意見'은 일본이라고 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正論을 발견한 느낌을 주고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일본에 이러한 의견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한.일관계를 위한 서광이 될 것이며 한국인으로서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자료이며, 중요한 착안점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一句一節이 심금에 와 닿는 일본인의 양심과 양식이 포함돼 있다. 그 정도로까지 타인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파악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큰 희망이다.] 한국사람들은 결코 [反日感情] 일색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83년 6월 9일부터 10일에 걸쳐 한국에서는 중앙일보가 [일본 교과서,
是正부족], 조선일보가 [日本, 교과서검정 妄動재발] 등으로 일본의 교과서 검정을 다시 비판했다.
그런 가운데 1986년에 [제 2차 교과서왜곡사건]으로도 불리는 [新編 日本史]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직후 이른바 1986년 7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후지오(藤尾正行) 문부상이 [新編
日本史]와 관련하여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세계사 가운데서 사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닐까?]고 말했다. 당연히 큰 문제가 되었다.
한국 외무부는 주일한국대사관에 대해 후지오 발언의 내용, 배경, 진의 등을 조사.보고 하도록 긴급 훈령하고 일본 외무성에 대해서는 발언내용의
해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후지오 망언]으로부터 약 2년이 지난 1988년 4월 22일, 오꾸노(奧野誠亮) 국토청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아직도 점령군의 망령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 도무지 참을 수 없다.]고 술회, 각료의 야스꾸니(靖國)신사 참배를 문제시하는 것을
비판했다. 또한 [교과서에서 신화와 전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衆議院 토지문제특별위원회에서 문제가 되자, 이번에는
[아시아 전체가 백색인종의 식민지로 되었던 것이 대동아전쟁 결과 독립을 이룩했다. 일본만이 침략국의 낙인을 찍혔던 것은 분한 일이다.]고
답변했다. 또한 5월 9일,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다시 문제가 되자, [나는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혐오스럽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일본에는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 [東京裁判은 승자가 패자에 가했던 징벌이다.] 등의 말을 했다. 오꾸노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 史實을 부인했던 것이다.
1990년 5월 24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 때 가이후(海部俊樹)
수상이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지 지배에 관해 사죄했던 것과 관련하여 어떤 신문기자가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학교교육에도 반영시켜볼 생각이
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가이후 수상은 [현장 선생님들에게도 그러한 인식을 심어줍시다.]고 답했다. 1. 학교에서는 우리 나라와 한반도와의 근.현대사를 취급함에 있어 국제이해와 국제협조의 견지에 서서
그 우호친선을 일층 증진시키기 위해 지도하고 있다. [견해]를 발표한 이유에 대해 문부성은, [교과서의 記述내용은 현재 별 문제가 없으며 수업에서
철저하게 하도록 하는 자세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논의가 교과서에 미치지 않도록 선수를 친 것과
진배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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