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을사조약 100주년을 맞이하여 잘못된 日本觀을 본다

이강기 2015. 9. 11. 12:36
을사조약 100주년을 맞이하여 잘못된 日本觀을 본다

 출처: 시대정신 2005년 가을,겨울 (통권 30호)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Ⅰ. 어떻게 볼 것인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5년간 일제의 보호국으로 있다가 1910년 8월에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 5년간에도 대한제국은 형식상 체통을 유지하였고, 또 엄밀히 말해 식민지화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아주 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과를 두고 볼 때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7일에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강의실에서 아예 그 날부터 일제 하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역사관을 가져야 옳은가라는 주제로 쓰고 있다. 그 주제를 100년 전 대한제국이 멸망한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가도록 하자.
 
 우선 그 사건을 대하는 현대 한국인들의 올바른 자세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2∼3년 전부터 나는 2005년이 되면 한국의 역사학계와 사회과학계가 그 사건의 경위와 그 역사적 의의를 두고 매우 활발한 학술적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고 마침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5년을 거의 다 보낸 지금 돌아보니 나의 짐작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정치권과 그에 협조하는 일부 역사가들이 중심이 되어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리는 매우 높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 사건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라는 성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원래 중·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에서부터 그러하다. 국사교과서를 보면 1904년 러일전쟁까지의 역사가 이야기되다가 갑자기 역사의 무대가 바뀌어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언제 어떻게 나라가 망하였는지에 관한 서술이 없다. 그러니까 아직도 한국의 공식 역사학계에서는 그 부끄럽고 슬픈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정면으로 들려줄 용기를 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체면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언젠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에 사인을 하면서 ‘臣 아무개’라고 적은 문서가 그 가운데 있었다. 내 앞에서 이전 정부의 고위 관직을 지낸 어떤 분이 “저 신(臣) 자를 좀 가리지 그냥 두냐”고 역정 비슷한 소리를 하는 것을 뒤따라가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떳떳치 못한 역사는 가려져야 한다는 체면주의는 개인이나 가문과 같은 私의 역사라면 몰라도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은 천하 公의 역사에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 곧 조선왕조가 망한 이야기에 기분이 좋을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당시 나의 증조부는 40대의 장년이었다. 그 얼굴이 가물가물한 나의 할아버지는 1885년생이시니 정확히 20세의 청년이었다. 그 분들은 조선왕조의 충직한 백성이었다. 철 따라 그 분들의 묘소를 살피고 또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나도 아직은 조선왕조의 백성인지 모른다. 가끔은 그런 백성의식의 발로에서인지 나는 우리에게도 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일본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인이 예절 바르고 사회가 질서정연한 것은 천황의 존재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천황의 나라에 살고 있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조용하게 예절 바르게 살다갈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발달된 민주주의를 보면 턱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가끔 한국의 소란스런 사회와 정치에 기분이 상할 때면 그런 백성의식이 발동하여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심정은 조금 나이든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만큼 조선왕조의 멸망은 현대 한국인들에겐 아직도 동시대의 사건으로서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인이면 누구든 주먹을 불끈 쥐고 조선왕조를 침입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한다. 북한은 아직도 일본을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不俱戴天) 원수라고 한다. 무엇보다 고약한 자는 일제에 협조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이다. 그들에게 덮어씌워진 ‘매국노’란 지상최대의 불명예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그렇게 그 사건을 두고 한국인들이 보이는 더 없이 격렬한 집단적이며 감정적인 대응의 저변에는 조금 전에 지적한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이 가로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를 낳아 주신 할아버지가 그 시대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의 주인인 왕조의 체면은 결국 나의 체면이라는 논리이다. 그렇지만 한국사회가 선진적인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으로부터 과감히 해방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조선왕조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선왕조 시대에 국가의 주인은 왕이었다. 하늘이 왕을 낳았고 그 왕이 다시 백성을 낳았다. 왕은 백성의 부모요, 백성은 왕의 발가벗은 아기이다. 이것이 조선왕조를 떠받친 정치철학이었으며, 왕조가 망할 때까지 그에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와 조부는 그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은 조정에 참여하는 양반의 특권을 보호하고 지지하였다. 백성을 다스린 것은 그 양반이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그 왕과 양반의 지배공동체가 정치를 잘못하고 외교를 그르쳤기 때문이지 뭍 백성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는 시민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공이다. 국가는 사회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민을 갈 수도 있다. 건국 후 지금까지 그렇게 이민 간 사람이 한국인구의 1/10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남아 있는 친척과 친지를 따지면 한국인의 1/3이 탈국가 시대에 세계인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런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에서 자유롭고 자립적인 문명인이다. 역사라는 주민의 집단기억을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으로 짠 것이 전근대의 역사학이다. 현대의 문명인은 일체 그러한 전근대의 집단기억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여러 인간집단을 하나의 안정적인 질서체로 통합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결국 국가는 그가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문명 수준을 대변하고 상징한다. 이에 국가가 망한다는 것은 한 시대의 문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1905년 조선왕조의 패망도 결국은 마찬가지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어찌 그 막중한 역사적 의의를 간악한 일본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라든가 소수의 매국노가 준동을 부린 탓으로 왜소화해 버리고 말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1905년 조선왕조의 패망은 그 왕조에 정치적으로 통합된 인간집단이, 특별히 정치적 선택의 책임을 졌던 지도계층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면 국가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가를 그들의 후손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다시 말하여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자립적인 현대 문명인으로서 그 시대의 그 사건을 냉정히 객관화하고, 그로부터 선진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교훈을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도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Ⅱ. 도덕적 세계관, 잘못된 일본관
 
 1904년의 일이다. 스웨덴의 아손 크렙스트라는 신문기자가 서울을 방문하여 몇 달간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조선의 형벌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여 오늘날 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종로1가의 전옥서(典獄署)를 찾아 갔다. 그를 맞은 전옥서의 책임자는 크렙스트의 몸에 뿔이 없음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까다롭게 진행하였다.(김상열 역, 『코레아코레아』, 미완, 1986, 224-225면). 당시 전옥서의 책임자라면 오늘날 서울형무소의 소장에 해당하니 중앙부처의 국장급이다. 그런 고위 관료가 1904년 그 때까지 서양인의 몸에 뿔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 사례는 당시까지 조선왕조의 지성계가 세계 실정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의 왕과 지배집단이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대외관계를 그르쳤다는 비판은 실은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레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무슨 대외관계를 어떻게 그르쳤는가라고 따지면 연구자들의 의견은 크게 갈라진다. 예컨대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에 대해 주로 국사학계의 연구자들은 김옥균 등이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이유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주로 외교학계의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옥균 등의 거사는 거의 불가피했다고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876년 이전 조선왕조는 조공과 책봉으로 상징되는 중화제국의 제후국으로서 존속하였다. 중국의 집권자들은 그러한 제후국도 넓은 의미의 중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국제질서에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이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문에는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라는 일본의 입장과 그러한 일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조선의 입장이 모두 담겨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순응한 것은 예전부터 일본과의 관계에서 자주국으로 대등한 외교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약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자주 상국(上國)이라 불렀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주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제후국이란 이중의 국체 의식을 별 어려움 없이 그대로 보유하였다. 그에 대해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선 내에서도 중국과의 외교를 대등한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이 제기되어 무언가 바람직한 변화가 모색될 참이었다.
 
 그렇지만 1882년에 우연히 발생한 임오군란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중국이 난당을 진압하고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다음,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가 국제사회에 하루아침에 폭로되고 말았다. 중국이 임오군란의 소식을 맞아 신속히 군대를 파견한 것은 실은 그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79년 일본이 중국의 조공국인 오키나와를 병합해 버린 사건은 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을 중심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할 필요성이 중국정부 내에서 거론되고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그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중국이 3천의 군대를 서울에 파견할 때 사전에 주권자 고종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후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이 중국의 번방(藩邦)임을 명시한 중국 측이 제시한 조약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후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멜렌도르프가 외교권을 장악하고 일본과의 조약개정과 미국·영국과의 조약체결을 주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번방임을 조약 서문에 명기하고자 하였지만 미국이 거절하였다. 이에 중국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에게 동일 내용의 외교 조회를 보내게 하였지만 미국은 그 문서를 묵살하였다. 미국이 그렇게 한 것은 중국의 번방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는 자국의 체면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악성의 불평등조약은 국내에서 외국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 영국과의 조약에서 맺어졌다. 그렇게 될 일도 아니었는데, 멜렌도르프라는 외교권을 장악한 중국의 대리인이 그렇게 처리하고 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당시 열국쟁패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왕조를 반식민지적 종속상태로 내 몬 주범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중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불리한 여건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고 평가한다. 김옥균이 실패하자 일본은 중국과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후 1945년까지 이어진 동아시아의 비극은 원래 그 진원이 서울에 있었다.
 
 이후 1892년 중국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기까지 근 10년간 고종과 집권세력이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주 외교와 국방을 추구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조선정부는 중국의 후견과 보호에 기대어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외교 전략을 택하였다. 그러한 전략이 합리적이었다고 평가되기 위해선 중국의 후견이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과 일본은 도저히 중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양국의 군사력에 대한 판단이 모두 옳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양국의 군사력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판명되었다. 중국의 후견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는 뒤늦게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밝혀진다. 당시 2천 년의 왕정을 폐지한 중국의 혁명군은 주변의 여러 복속 왕조를 폐하고 그 지역을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과 집권세력의 두 가지 잘못된 전략적 판단은 그 배경을 이룬 세계관이랄까 국제사회에 대한 질서감각의 문제까지 파고들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종과 집권세력이 보유했던 전통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은 중화제국이고 조선은 그 도통을 이어받고 있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 도덕주의적 세계관에서 일본은 바다 가운데 조그만 섬의 오랑캐였다. 나는 청일전쟁의 결과가 판명될 때까지 고종은 일본이 자신의 왕조보다 연간 국민소득이 10배나 많고 중앙재정은 무려 20배나 큰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다 가운데 오랑캐가 무례하게 천황을 칭하면서 나타나니 고종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였겠는가? 1894년 이후 고종에게는 13년간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 기간 그가 어떻게 최악의 선택을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선 너무 장황하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
 
 만약 고종이 중국과의 관계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일본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반도를 통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요, 동아시아의 20세기 역사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종의 맹목적인 반일 외교 전략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였다. 나는 무어라 해도 고종을 이해하거나 좋게 평가할 생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 자초지종을 두고 역사의 신 클리오가 주재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치자. 제일 먼저 소환당할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집권자 고종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부 역사가들이 고종을 계명군주로까지 칭송하고 있으니 참으로 엉뚱한 일도 다 있다는 느낌이다.
 
 
 Ⅲ. 궁핍한 도덕경제
 
 조선왕조가 망하게 된 수많은 이유 가운데 위의 것 이외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라면, 필자의 전공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19세기에 걸친 조선 경제의 침체를 들고 싶다. 결국 나라가 너무 가난해져 외적이 침입해 왔지만 신식 병기로 잘 무장된 군대를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구한말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는 서울 주변에 배치된 약 2천 명의 소총 부대가 전부였다. 쓸 만한 대포나 군함은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과 중국군이 서울 드나들기를 제집 마당처럼 하였다.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형편없이 가난해지고 말았던가?
 
 지난 몇 년간 이에 관한 연구성과가 이전에 비해 제법 많이 쌓였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수집된 다수의 사례에 의하면, 일정 면적의 논에서 나온 소작료가 19세기 내내 조금씩 감소하여 1880년대가 되면 19세기 초에 비해 거의 1/3 수준으로 낮아졌다. 논농사의 생산성이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밭농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 쌀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지방의 물가기록에서 다른 곡물가격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이 상승하는 추세였음을 통해 잘 증명되고 있다.
 
 시장도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우선 대외무역이 그러하였다. 1810년대 이후가 되면 일본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두절되고 그에 따라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벌어진 양국 상인들의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서해와 남해를 오가던 상선의 수도 확실히 줄기 시작하였다. 장시와 장시를 오고가던 행상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각 장시의 물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전까지 그런대로 잘 통합되었던 농촌시장이 서로 갈라져 단위 시장의 규모가 작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시장이 축소되자 생산에 대한 자극도 둔해져 결국 총생산이 정체하거나 감소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재정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적자재정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농민에 대한 조세 수탈이 강화되고, 그에 맞서 농민들의 난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란(民亂)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 같은 문명사의 비극이 초래되었던가? 왜 비극은 그 조짐의 단계에서 봉쇄되지 못했던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로써 필자는 삼림의 황폐를 들고 싶다. 한반도에서 삼림이 황폐해지는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이다. 이후 1911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접수한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산지 가운데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32%만이 임야를 이루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산지는 문자 그대로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거나(26%) 나무가 좀 있다고 하나 1헥타르의 나무를 다 잘라 쌓아도 10㎥ 이하에 불과한 거의 헐벗은 상태였다(42%). 그렇게 산에 나무가 없으니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흘러 내려 수로를 막고 논밭을 뒤덮어 농사를 망쳤다. 마치 오늘날의 북한 농업과 똑같은 상황이 19세기 조선의 농업이었다.
 
 삼림이 그토록 황폐해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해 식량과 연료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1917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끝냈을 때 한반도의 논밭 경지면적은 487만 헥타르였다. 그런데 1870년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경지면적이 484만 헥타르였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 가량이다. 그런데도 19세기의 경지면적은 조선과 일본이 같았다. 이 사실은 19세기의 조선이 얼마나 산지를 활발히 개간하였는가를 생생히 이야기하고 있다. 산지를 논밭으로 일구면 개간자는 개인적으로 득을 볼지 모르지만 기존의 농지에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미 18세기부터 산지의 개간을 엄금하고 그 대신 기존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식량의 증산을 추구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선은 산지를 개간하는 방식으로 식량 수요에 대처하였다.
 
 이에 따라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를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후반 조정은 산지의 개간을 금지하는 명령을 자주 발동하였다. 그렇지만 하등의 실효가 없었다. 명령만 내려갔지 실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챙기지 않았다. 19세기가 되면 그런 명령조차 내려가질 않았다. 가난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인데 어찌 그것을 몰인정하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도덕적 명분론에서였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는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균(均)의 상태를 이상으로 하였다. 공자가 『논어』에서 이야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 한다”(有國有家者 不患貧而患不均)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것, 그러한 집단적 생존윤리에 충실한 경제를 가리켜 인류학자들은 도덕경제(moral economy)라고 부른다. 세계의 모든 전근대 사회가 그러한 도덕경제에 속하였다. 반면에 근대의 시장경제(market economy)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도덕경제를 대신하여 개인의 영리추구를 정당화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윤리가 성립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에서는 영국이 제일 먼저 그러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8세기경 그러한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근대의 경제윤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도덕경제의 집단적 생존윤리가 여전히 강고한 가운데 인구증가와 환경파괴라는 미증유의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는 합리적인 대응에 실패하고 말았다.
 
 
 Ⅳ. 마무리
 
 이 글에서 나는 우선 한국의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자립적인 문명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한 사회의 문명적 통합체로서 국가가 실패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지금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조선왕조의 멸망이란 역사적 사건에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연후에 당시의 고종과 집권세력이 취한 맹목적인 반일 외교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대 재난을 초래하였으며, 그 바탕에는 세계문명의 중심을 중국과 조선에 둔 도덕주의적 세계관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선 경제체제의 장기변동이란 관점에서 조선의 경제는 집단적 생존윤리에 바탕을 둔 도덕경제이며, 그 경제윤리의 지나친 완고함이 인구증가에 따른 환경파괴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요컨대 도덕적 세계관과 도덕적 경제윤리의 ‘도덕’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도덕’, 그것이 조선왕조의 외교와 경제를 실패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람의 정신이 흐릿해진 것도, 문화가 침체한 것도, 비도덕적으로 다투기만 했던 것도, 바로 그 ‘도덕’ 때문이었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도덕적인 동물이다. 근대의 문명인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에도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타고 났다는 최고 수준의 보편적인 도덕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근대적 도덕에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를 실패하게 만든 ‘도덕’은 그러한 근대적 도덕이 아니다. 그 ‘도덕’은 ‘우리’가 문명의 중심이며, 조금 가난하더라도 ‘우리’ 모두 골고루 잘 사는 것이 문명이라는 폐쇄적이며 집단적인 생존윤리의 전근대 도덕이었다.
 
 몇 년 전부터,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서서부터, ‘우리’ 또는 ‘우리끼리’라는 턱도 없는 집단윤리가 정치에서 또 남북관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명사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러한 집단윤리가 얼마나 불길한 조짐인가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다시 반복한다. 지금부터 백 년 전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은 바로 그 ‘우리’라는 집단적 생존윤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