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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을 화나게 하는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

이강기 2015. 9. 11. 16:35

외국인들을 화나게 하는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
(The Economist, 98. 12. 12-18)
 

"유럽문화의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유럽의 중앙에 버티고 있는)프랑스의 지리적인 위치다. 프랑스는 사상의 자유로운 순환을 방해하는 장해물이 되어왔다."



이같은 촉바른 주장은 곧잘 혐불(嫌佛)주의(Francophobe)를 보여온 영국의 언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페인의 한 풍자조의 험담 팜플렛 "Contra los Franceses"에서 나온 것이다. 이 팜플렛에 의하면, 프랑스 문화는 기만과 순환 억제 및 표절을 포함한 결점 투성이라고 못박고 있다. 이 풍자조의 험담을 쓴 Manuel Arroyo Stephens는 마드리드에서 살고 있는 작가이며 출판업자인데, 그는,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이웃나라들로부터 사상이나 아이디어를 부지런히 훔쳐서는 마치 프랑스산 천재들의 오리지널인 것처럼 "온 세계에다 팔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꼬르네이유(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그는 16세기의 어떤 스페인 드라마에서 줄거리를 따온 표절자다. 볼테르? 그의 저서 'Lettres philosophiques'는 그 당시 유행했던 영국의 사상을 대부분 재탕한 기회주의자다."



아로요씨의 이러한 유별난 공격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단순성은 그의 한 풍자조의 팜플렛에 나와 있다. 그의 글은, 세관원들의 원산지 증명에 대한 선입견을 제외하고는 설사 왜곡됐다 하더라도, 프랑스 예술과 사상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외교적인 면에서 약간 찔렸는지, 아로요씨는 마지막에 가서 그 자신을 "un afrancesado" 즉 모든 것을 프랑스식으로 개조한 사람이 라고 부름으로써 약간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식으로 사는 것은 한 때 배신자와 같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로요씨는 그 자신을 애국주의와는 떼어놓으려 하고 있다. 그가 이코노미스트지 기자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몇 년 전 프랑스인들도 섞여 있는 "그의 친구들을 위한 농담거리"로서 이 짤막한 팸플릿 글을 썼다.



그의 진짜 의도가 어떠했든, 아로요씨와 그의 풍자조의 이야기는 합스부르그 왕가와 발로아 왕가 사이에 다시 전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조그마한 책은 예민한 곳을 건드리고 있고 흥미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선망하는 사람들, 경멸하는 사람들 혹은 실망스런 사랑들에 의해 자극을 받든 않든 간에 프랑스 문화에는 외국인들을 실질적으로 분노케 하는 어떤 것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잘난 체 한다. 프랑스인들은 천박하다. 프랑스인들은 융통성 없이 까다롭다. 그들은 예절이 없으며, 시시한 말을 지껄여대며, 혼잡해지면, 그들은 항상 비록 서로 간에도 돼지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철학은 변덕스러운 것이며 그들의 포도주는 과대평가 되고 있고, 그들의 소설은 읽을거리가 못되며, 그림을 말할라치면 Matisse나 피카소(그도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 이래 이렇다 할  화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 대해 무지와 편견을 토로하며 얼굴을 붉히는 세상 사람들이, 경솔하게도 프랑스만은 즐겨 예외로 취급하려는 것 같다. 덴마크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씻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연구서를 읽은 사람들이, 더운물을 아끼는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올 가을에 나온 어떤 리포트를 게재한 외국신문을 꼭 같이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프랑스 혹평(frog-bashing)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Jonathan Fenby의 여러 작품 가운데, on the Brink: The Trouble with  France"은, 죠지 3세가 이튼스쿨 학생들로 하여금 프랑스를 증오하도록 부추겼다든지, 마가렛 대처의 보좌관이 특히 선거 때만 되면 "프랑스 상놈들, 유럽 상놈들"이라고 부르짖게 하여 항상 성과를 거뒀다든지 하는, 프랑스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점을 흐리게 한, 편견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파고들고 있다.



영국인들에겐 프랑스인들을 화제로 하여 즐기는 습관이 배어있으며 때때로 그것이 Fenby씨 같은 사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가까이 연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홍콩에서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의 편집인으로 있는, 잘 알려진 영국 저널리스트인 Fenby씨는 프랑스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하며( 그 중 일부는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으로) 살았으며, 그의 아내는 프랑스인이다. 그의 책은 조급하게 쓴 팸플릿이 아니다. 비사(秘史)와 지엽적인 사실들로 엮어진 이 책은 그간 프랑스인들의 부덕으로 알려진 것, 즉 사회적 분열, 만연된 부정, 떨어지고 있는 학교의 도덕적 규범 및 오만에 빠진 국가 등에 대해 사려 깊고 강력한 느낌으로 쓴 연구서다. 그의 비판 중 많은 것이 과녁을 맞히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독자들이, 프랑스는 프랑스이며 어떤 다른 나라의 규범에 맞춰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불평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현대 프랑스인들의 문화와 사상에 대해 광범위하게 쓴 바 있는 뉴욕대학의 학자인 Tony Judt씨는, 외국인들이 프랑스에 대해 글을 쓸 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한 가지 바람직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지방주의를 배제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로야씨의 팜플렛은 예술과 음식, 아름다운 시골풍경 및 수많은 작품들을 가진 프랑스의 부유함을 바로 이웃에서 바라보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열등감과 시샘에서 나온 풍자로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훨씬 더 복잡한 경우를, 프랑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고 Judt씨는 말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한편으로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 정치 강국이며, 프랑스보다 더 현대화돼 있고, 덜 중앙집권화 돼 있으며, 일을 하는데 있어 덜 규율에 얽매여 있다는데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미국인들은 "프랑스야말로 자기들이 유럽에 대해 좋아하는 모든 것, 불안해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다."는 그들의 깊은 감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다른 정신적인 악덕에 대해 공격하고있는 영문판 "Fashio-nable Nonsense"라는 책을 쓴 두 사람의 물리학자인 Alan Sokal과 Jean Bricmont는 각각 미국인과 벨지움인인데, 그들은 이 책  초판에서 주로 프랑스 작가들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즉  프랑스 작가들은 과학적인 상상력을 겉치레로 오용하고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탐구자의 선입견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배경을 강조함으로써 과학의 특권적 지위를 미심쩍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주장이 절대로 반 프랑스적인 의향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국수주의적 성향의 부인은, 파리에서는 대체적으로 먹혀들지 않았다. "Impotures Intellectuelles( 상기 책의 프랑스어 판 제목)은 파리에서 여러 측면으로 벌어지고 있는 프랑스 문화에 반대하는 미국 캠패인의 일환으로 몇몇 비평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벨지움인인 Bricmont씨는 벨지움이 부분적으로 프랑스어 사용 국가이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서 나온 매국행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부인되고 무시됐다.). 파리의 한 관측자는 이들 두 사람을 그들의 "엄격한 결벽증"과 그들의 "증오의 교화"라는 면에서 미국의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을 맡은 독립검사인 Kenneth Starr씨에 비유했다. Baudoin Jurdant의 에세이 모음집인 "Impostures Scientifiques"와 Yves Jeanneret 의 연구서인 "L'Affaire Sokal ou la querelle  des impostures"의 두 책은 모두 600 페이지에서 Sokal-Bricmont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할애하고 있다.



프랑스에 대해 쓴 모든 외국 저서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 줄어드는 것처럼, 여러분들은 때때로 Sokal씨와 Bricmont씨의 시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고 억측하여 횡설수설함으로써 모든 프랑스 지식인들을 한 묶음으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Burden  of Responsibility"에서 Judt씨는 독자들이 레옹 블룸, 알베르 까뮤 및 레이몽 아론을 재발견하도록 충고하고 있다. 이들 프랑스 지식인들은 한 가지 예상할 수 있는 노선에 치우치지 않음으로서 우파와 좌파로부터의 적개심을 동시에 받은 사람들이다. Judt씨의 책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작품의 오류에 대해 필요한 경고를 하고 있다.



프랑스의 예술과 사상이 간단하게 요약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을 요약할 필요가 있다. 비록 "좌익"이냐 "우익"이냐  하는 딱지표가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우익인 Marc Fumaroli와 좌익인 Jacques Julliard는 그 대상이 어느 나라든 가리지  않고 문화적인 통제정책, 모든 종류의 인기주의와 지적 편협에 대해 공격해 왔다. 이러한 것은 프랑스 비판자들이 곧잘 무시하는 일종의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이며, 여러분들은 어느 주(週)에 나오는 프랑스 신문이나 잡지 및 책을 봐도 이러한 예들을 수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고, 그리고 곧 잘 속아넘어가는 미국의 인문계학생들을 오도하고 있는 유행에 속박된 지성주의의 서투른 모방이 더 좋은 복사판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도 가장 안전한 결론은, 여러분들이 "프랑스 문화"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들은 붉은 연필을 잡기 위해 빨리 손을 뻗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