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글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

이강기 2015. 9. 11. 16:48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

 

<>이 논문의 작자인 나오끼 고우지로우(直木孝次郞)는 1919년 고베에서 출생하여 京都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大阪시립대 교수를 거쳐 현재 相愛대학 교수로 재직 중임. 주요저서에 "일본 고대국가의 구조", "壬申의 亂" "일본 고대 씨족과 천황" 등 다수가 있음 -  이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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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메노히보꼬 傳承
2. 秦(하타)氏 씨족과 大藏(省)
3. 難波 및 住吉과 渡來人 - 港口의 발전과 管理에 관련하여
   - 住吉津과 渡來人들
   - 難波津과 渡來人들
   - 難波와 秦氏 씨족
4. 吉備(키비)의 渡來人들과 豪族
   - 吉備와 渡來人들
   - 備前과 渡來人들
   - 鐵생산과 秦氏, 漢氏
   - 야마도 정권과 秦氏, 漢氏
   - 吉備의 反亂에 대한 傳承
   - 6세기의 吉備氏와 韓半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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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메노히보꼬 傳承

 

아메노히보꼬, 日本書紀는 天日槍으로, 古事記는 天之日矛로 부르고 있다. 두 역사서 모두 그를 신라왕자로 전하고 있는데, 日本書紀에서는 垂仁천황 3년에, 古事記에서는 應神천황 등극 수년 전에 일본에 건너왔다고 쓰고 있으며, 兩書 모두, 그후 그는 일본 각지를 편력하다가 但馬(타지마)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筑前國 風土記의 逸文에서는「高麗國의 憙呂山에 天降한 日모」라고 전하고 있지만, 紀.記(日本書紀와 古事記) 쪽이 더 古傳일 것이다. 옛날부터 이름나 있던 但馬 出石神社의 祭神은 이 아메노히보꼬이다.

고대로부터 널리 信仰되어 온 名神大社들 가운데 祭神이 외국에서 渡來한 것으로 전해져 오는 神社는 이 出石神社 외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봐도 伊勢神宮의 天照大神을 비롯하여 大神神社의 大物主神, 住吉神社의 筒男三神, 山城賀茂神社의 別雷命과 建角身命, 出雲大社의 大國主神 등등,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최소한 紀.記에서는 異國의 神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出石神社의 아메노히보꼬 만이 신라왕자라고 古典에 명기돼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을 아메노히보꼬 전승의 첫 번째 의문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점은, 아메노히보꼬는 신라왕자였으며 神이 아니었는데도 出石神社의 祭神이 되었다는 점이다. 현실의 인간을 신으로 모셔 제사지내는 것은 일본의 원시신앙은 아니다. 앞서 열거한 각 神社의 祭神들은 처음부터 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나 또는 신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들이다. 씨족의 조상을 씨족신으로 모셔 제사를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도 그 씨족조상은 전설상의 인물이지 현실에 생존했던 인간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메노히보꼬 역시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필시 아메노히보꼬는 현실의 인간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으로 제사를 올리는 신의 이름이며, 아메노히보꼬가 渡來했다고 하는 것은 그 신을 제사지내는 집단의 渡來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 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집단이 사용하는 중요한 祭器가 아메노히보꼬로 불려지는 槍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신의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신앙집단이 신라로부터 건너왔기 때문에 첫 번째 의문점이라고 했던 傳承이 생겨난 것이다. 신라왕자라고 하는 것은 신앙집단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作爲였을 것이며 신라왕자가 실제로 이 집단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아메노히보꼬는 분명히 일본어이며 신라왕자의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세 번째 의문점이랄 수 있는 것은, 아메노히보꼬라는 이름에서 상상되는 신앙의 내용이다. 앞에서, 신을 제사지내는 데 쓰이는 祭器로부터 온 이름이 아닐까 라고 했는데, 아마노히(하늘에 빛나는 태양)를 수식어로 하는 호꼬(鐵製武器)라는 것은 자못 위압적이다. 개천이나 江의 신을 祭神으로 하여 제사를 올리는 水稻 農業사회 - 일본 - 의 신들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륙의 냉엄한 자연과 계급지배 사회로 발전한 곳의 신을 생각케 하는 이름이다. 신라로부터의 渡來라고 하는 傳承에 적합하다.

神話學의 大家인 미시나 아끼히대(三品彰英)씨는, 야요이시대의 祭器인 銅鐸이 땅 속에 매장돼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銅鐸은 地靈, 穀靈의 표상이었으며, 그 宗儀가 地的 宗儀였다고 생각되며, 그 다음 시대에는 북방 아시아로부터 하늘을 숭상하는 天的 宗儀가 전해져 왔다고 論하고 있는데, 아메노히보꼬에 대한 제사는 바로 이 天的 宗儀로의 흐름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아무튼 이것만으로도 아메노히보꼬 집단의 宗儀 내지 신앙이 재래의 일본의 그것과는 이질적이었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아메노히보꼬 전승의 다음과 같은 특색이 필시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특색은 또한 네 번째의 의문점이 되고 있는데, 즉 일본에 건너온 아메노히보꼬는 많은 사례의 渡來人 傳承과는 달리 간단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古事記를 보면, 히보꼬는 자기 곁에서 도망간 妻의 뒤를 쫓아 일본으로 건너와 難波(나니와: 大阪의 옛 이름)로 상륙하려고 했으나, 그 곳 나루터 神에게 저지 당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다 但馬(타지마)로 가서 머물렀다고 한다. 日本書紀에서는 히보꼬에 대한 본문기사는 간단하지만「하나의 이야기」로서 전하는 상세한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히보꼬가 播磨國 X栗郡(시쇼우)에 왔을 때 天皇이 使者를 보내어 신원을 묻자, 히보꼬는 8가지의 神寶를 바친 후 宇治川을 거슬러 올라가 近江과 若狹을 지나 但馬國에 가 거기서 머물렀다고 한다.

히보꼬의 渡來에 대해 일본측에선 일종의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현지세력과의 대립이 아주 심했다는 것을 播磨國風土記가 전해주고 있다. 예컨대 揖保郡 揖保里의 粒丘 條에서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히보꼬가 土地의 神인 葦原志擧乎에게 하룻밤 묵어 갈 것을 청했는데, 志擧乎는 상륙을 허가하지 않고 해상에서 자도록 했다. 히보꼬는 칼로 海中을 휘저어서 잠자리를 만들어 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日本書紀와 古事記의 신화에 있는 出雲國 讓與의 장면을 생각케 한다. 거기서는, 다까마가하라(高天原)로부터 내려 온 다께미가즈찌노오노가미(建御雷之男神)등이 칼을 물마루에 세우고 그 위에 앉아서 토지의 신인 大國主 - 一名 아찌하라찌꼬오 - 와 나라를 양여하는 문제를 담판한다. 播磨國의 志擧乎도 새로 온 神인 히보꼬가 혹시 나라를 점령하려 온 것이 아닌가 하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播磨國風土記의 X禾郡(X栗郡과 동일) 比治里, 栢野里, 雲箇里, 御方里와 神崎郡 多駝里의 諸 條에는 히보꼬가 토지의 신과 나라의 점유를 두고 싸우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전승은 새로운 신앙을 받들고 있는 渡來人 집단이 종래의 신을 제사지내는 토지에는 정착하기 싫어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특히 播磨 서부의 X栗郡과 揖保郡에 많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 지방에 신라계 도래인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라계로 생각되는 秦(하타)씨족과 동일한 씨족전설을 가진 巨智(고찌) 씨족이 西播지방에 많이 분포돼 있다는 것이 고대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으며, 播磨國風土記에는 飾磨郡 牧野里에 신라인들이 도래했기 때문에 이 땅을 新羅訓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래인들은 당초 현지인들과 약간의 마찰을 일으켰지만 점점 융화하여 이 지방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현지인들도 도래인들이 전해주는 새로운 종교를 새로운 문화와 함께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메노히보꼬가 但馬에 정착하여 出石(이즈시)에서 제사를 받게 된 것도 이 지방에서 새로운 祭儀를 쉽게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동해를 흐르는 對馬해류를 타고 신라방면의 사람들이 일찍부터 但馬지방에 건너와 살았기 때문에 히보꼬 집단을 모시는 天的 祭儀가 이미 행하여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히보꼬 집단을 한 차례 건너온 특정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同種의 집단이 여러 번 이 지방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토착인들도 이들의 새로운 宗敎와 宗儀에 위화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但馬에 온 신라계 도래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문헌사료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아메노히보꼬 전승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던 시대의 韓.日交涉史를 아는 데 귀중한 사료이다. 지금 出石神社가 있는 出石町(이즈시마찌)은 산간의 분지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분지를 관류하는 出石川은 아래쪽 8km 정도에서 圓山川에 합류되며, 圓山川은 아래로 약 15km 지점에서 동해로 나간다. 이 강줄기는 주로 한반도 신라인들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루트였을 것이다.


2. 秦(하타)氏 씨족과 大藏(省)

 

秦氏 씨족과 大藏(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平野邦雄씨의 논문「秦氏에 관한 연구」(史學잡지 17편 3.4호)에서 상세한 고찰이 있었으며, 그 태반은 同氏의 저서「大化 前代 社會組織의 연구」(1969년, 吉川弘文館)에 수록되어 있다. 이제 새삼 이에 대해 논의해야할 정도로 새로운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秦氏 씨족이 왜 內藏(省)보다 大藏(省)과 더 많은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한 마디 언급해야겠다.

秦氏 씨족과 大藏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사료와 설화를, 平野씨의 연구를 참조하여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秦大藏(하타 오오꾸라))라는 姓을 가진 사람들이, 秦大藏造万里(日本書紀, 齊明4년6월), 秦大藏連 智(大日本古文書, 2-314)를 위시하여 사료에 몇 사람들이 보임.
(2) 新撰姓氏錄의 山城國 諸蕃 條에 秦公酒를 大藏省 長官으로 삼은 것이 보임.
(3) 欽明 즉위 前期에 秦大津父가 大藏官에 임명된 것이 보임(日本書紀).
(4) 欽明원년 8월 條에 秦伴造를 大藏  (아전)으로 하고 있는 것이 보임.(日本書紀)
(5)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條에서, 秦忌村은「融通王(弓月王)의 四世孫인 大藏 秦公志勝의 후예」로 나옴.

그 외에 秦씨족들이 律令제도 아래서 大藏省의 官人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도 적지 않다.
(6) 秦永岑 大藏省 史生(平安遺文 卷一, 180쪽)
(7) 秦雪持 大藏省 大主鎰(平安遺文 卷一, 199쪽)
(8) 秦忠雄 大藏省 大典鎰(平安遺文 卷二, 588쪽)
(9) 秦奧世 大藏省掌(平安遺文 卷一, 216쪽)
(1) 秦前廣橋 大藏少錄(大日本古文書 卷二, 420쪽)
(11) 太秦連雅 大藏大錄(平安遺文 卷二, 588쪽)

물론 이 외에 內藏 寮藏人이 된 秦貞世(平安遺文 卷一, 216쪽)등도 있는데, 상기 (1)부터 (11)까지의 史料를 통람하면, 秦氏 씨족들은 고대국가의 재정상의 二大 機關인 內藏과 大藏 가운데 大藏 쪽에 보다 깊이 관여했던 씨족으로 생각된다. 平野氏는 (6) 이하의 사료에 입각하여
「大藏.內藏의 하급관직들이 秦氏 씨족들에게는 굉장히 보편적인 자리였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秦氏 씨족들이 內藏보다는 大藏 쪽의 직책들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內藏은 어땠는가 하면,

(12) 처음 藏職을 만들고, 그 후 藏部로 하기로 함(履中紀6년 正月條)
(13) 이에 天皇이 阿知直을 첫 藏官에 임명하고 급료로 토지를 지급함(古事記 履中段)

으로 되어 있는 것이 주의를 끈다. 여기서 말하는 藏은 大藏, 內藏이 분리되기 이전의 재정기관을 지칭하는 것이며, 藏官에 임명된 阿知直은 古事紀 履中但에서「倭漢直 之祖 阿知直」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履中朝에서 실제로 藏官이 존재했는지 어떤지는 물론 의심스럽지만, 倭漢直이 藏官과 관계가 깊은 관직이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古語拾遺에서 보이는 유명한 三藏傳說에서는,「磐余稚樓朝」즉 履中朝에 이르러「다시 한번 內藏을 설립하고 官物을 分收했다. 그리고 阿知使主와 百濟博士 王人을 데려와 그 출납을 기록케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姓氏錄에 의하면 阿知使主는 後漢 靈帝의 三世孫으로 倭漢直, 檜前忌村, 韋屋漢人, 藏人 등등의 선조라고 한다. 博士 王人은 말할 것도 없이 西文首의 조상이다. 倭漢氏와 함께 西文氏도 內藏에 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日本書紀와 古事記에 나오는「藏」과 古語拾遺에 보이는「內藏」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도 문제가 되는데,「大藏」이 보통 오오쿠라로 訓讀되는 데 비해「內藏」은 쿠라로 훈독되고 있으며, 內藏寮는 쿠라노찌카사, 內藏助는 쿠라노스케로 훈독된다.

그것은 內藏이 본래「藏(倉. )」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古語拾遺에 나오는 전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야마도 정권의 재정기관은, 기구가 복잡해지기 이전에는 단지「藏」으로 불려지고 있었으며, 복잡해지는 단계에「大藏」이 따로 설립되고, 이전부터 존재했던 기관을 大藏과 구별하기 위해「內藏」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본래 부분이기 때문에 종래의 호칭에 따라 쿠라로 불려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다만 財政이 복잡화돼도 古語拾遺에서 얘기하는 齋藏, 內藏, 大藏의 삼권분립 전승 가운데서 齋藏의 성립은 인정할 수 없다. 古語拾遺의 저자인 齋部廣成등이 齋部氏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조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渡來系 씨족들 가운데서도 일찍부터 야마도정권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倭漢氏와 西文氏가 우선 조정의 재정에 관여하여 藏의 관리 내지 출납에 종사하였고, 다소 늦게 야마도정권에 참여하였던 秦氏가 그 후에 설립된 大藏에 관계하였던 것 같다. 앞서 사료 (1)(5)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秦大藏氏가 있는 한편으로 內藏氏는 姓氏錄 右京 諸蕃條에서,

(14) 內藏宿  坂上大宿 同祖라고 한 것처럼 坂上系 즉 倭漢氏의 계통인 것도 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內藏=倭漢.西文, 大藏=秦으로 확연히 나눠진 것은 아니다. 古語拾遺에「이러한 까닭으로 漢氏 姓을 하사하여 內藏과 大藏에 임명했다」고 한 것은 신빙성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며, 大藏氏에도 倭漢氏와 同系 씨족이 있었다는 것은 다음 史料에도 나타나 있다.

(15) 大初位上大藏伊美吉廣勝, 姓 宿 를 下賜. 後漢 孝靈帝의 四代孫, 阿知使主의 후예, 坂上大宿 와 同祖가 된다.(三代實錄, 貞觀4년3월 朔條)

文筆과 計數에 밝았던 渡來系 사람들은 律令制 아래서는 大藏省 內藏寮의 구별 없이 財政官司에 근무했으며, 平安朝 초기에는 당시 유력했던 坂上氏와 동족이라고 칭하는 사례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본래는 상술한 것처럼 倭漢氏와 西文氏가 內藏에, 秦氏가 大藏에 배치됐다고 하는 것이 대세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어느 때 大藏이 藏에서 분리하여 秦氏들이 그 官人으로서 궁정에 진출했던 것일까?

古語拾遺는 그 시기를 雄略朝라고 하고 있는데,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다. 필자는 그것을 다음 3가지 이유로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두 - 欽明, 推古朝 - 로 추정하고싶다.

첫째, 상기 史料 (3)(4)에서 나타난 것처럼, 欽明朝에 秦氏가 大藏省 관직에 임명된 것이 日本書紀에 나와 있는데, 欽明朝가 일본 고대국가 성립史에서 점하는 지위를 생각하면 이 기사는 전혀 무시하고싶다.

둘째, 그러한 欽明朝였는데, 이 전후에 규슈로부터 關東지방에 이르는 각지에 屯倉(미야께)이 설치되었으며, 또한 屯倉制도 欽明朝에 설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白猪屯倉, 兒嶋屯倉의 경우는 꽤 정비가 잘 돼 있어, 이 지방의 屯倉에 대한 중앙의 藏制도 欽明朝에 정비된 것으로 생각된다. 古語拾遺에서 말하는「諸國의 貢調, 해마다 차고 넘쳐, 다시 大藏을 설립했다」고 하는 상황은 欽明朝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셋째, 전에 필자가 낸 拙稿「人制의 硏究」(일본고대국가의 구조, 1958년 靑木書店)에서 논한 바 있는데, 6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하여 倉人이라 불리는 재정관계 하급관직이 조정에 설치되었으며, 그 직에 근무하는 하급관인들이 다수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둘째 이유로 내세운 재정의 정비와 상응하는 현상으로, 大藏의 성립을 촉구하면서 아울러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 3가지 이유에서 大藏의 성립이 欽明朝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설한 大藏官人에 秦氏들이 임용되었다는 것은, 당시 재정관료에 임명해도 손색이 없었을 유능한 倭漢氏 및 西文氏를 장악하여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蘇我氏에 대항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싶다.

그렇다면 누가 그처럼 蘇我에 대항하는 정책을 추진했을까가 문제인데, 필자는 6세기 후반, 宣化천황의 딸인 石姬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 蘇我氏의 혈통과는 관계가 없는 箭田珠勝大兄 皇子나, 敏達천황(두 사람 모두 父는 欽明)이거나, 아니면 7세기 초두, 蘇我氏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飛鳥(아스카)를 떠나 斑鳩(이끼루가)에 머무르고 있던 聖德太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箭田珠勝大兄이나 敏達천황이 秦氏를 등용 내지 신임했다는 사료는 없지만, 聖德太子가 秦氏를 신임하여 중용한 것은 지금은 通說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 논거를 두 서너 가지 든다면, 秦河勝이 大夫로서 太子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태자로부터 佛像을 하사 받아 蜂岡寺를 세운 것(日本書紀 推古11년11월條), 또한 秦河勝이 用明천황 2년의 守屋 合戰 때 軍政人으로서 병사들을 인솔하여 聖德太子를 수호했던 일(聖德太子傳補闕記), 태자의 장남은 山背大兄이라는 이름이었는데, 山背盆地는 秦氏의 세력이 미치고 있던 땅으로 이 이름에서도 태자와 秦氏의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것, 태자 死後에 만들어진 天壽國曼茶羅繡帳의 銘文 가운데「令者 部秦久麻」라는 구절이 있는데, 秦久麻라는 인물이 태자 또는 太子妃의 측근으로 봉사했음에 틀림없는 것 등이다. 秦河勝의 이야기 등은 전설적인 요소가 있어 의심할 점도 있지만 태자가 秦氏를 등용했던 사실은 인정된다.

太子와 大藏과의 관계는 밝혀진 것은 없지만, 姓氏錄에는 태자가 大貞連이라고 하는 사람을 大 官에 임명했다는 傳承을 기재하고 있다.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사료지만, 태자가 大藏에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 지위로 봐서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담한 억측이 되겠지만, 蘇我氏가 倭漢氏와 西文氏를 配下로 하여 藏(內藏)의 실권을 장악한 것에 대해 태자는 秦氏를 이용하여 大藏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싶다.

이렇게 보면, 秦氏가 大藏에 관여했던 것은 고대 정치사의 조류와 무관한 것이 아니고 그 전개에 얼마간 영양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검토를 앞으로의 과제로 하고 여기서는 이쯤 해두어야겠다.


3. 難波 및 住吉과 渡來人 - 港口의 발전과 管理에 관련하여

 

<> 머릿글

고대 難波의 渡來人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행해져 왔다. 특히 戰後에는 金井啓一씨가 그의 저서「歸化人」에서 총체적으로 고찰했으며, 그 후에는 吉田晶씨의 논문「地域史에서 본 古代 難波」에서 더욱 상세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論考들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남은 문제 한 두개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개진코자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難波지구에 渡來人들이 많았던 것에 反해 住吉지구에는 도래인들이 왜 적었을까 하는 점, 또 하나는 難波지구의 도래인들과 難波津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일견 서로 관련이 없는 문제 같지만, 私見으로는 양자 모두 難波의 발전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 住吉津과 渡來人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의 오오사카 즉 難波의 땅에는 韓半島系 도래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 이유를 주로 畿內(오사카.교토 지방) 굴지의 良港인 難波津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들하고 있는데, 難波津과 나란히 중요한 항구였던 住吉津이 있는 住吉지역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도래인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료가 적다. 그리고 도래인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田邊史(다나베노요비토)씨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이 田邊史 씨족에 관한 것부터 알아보자.

住吉지역에 거주한 田邊史씨족에 관해서는 吉田晶씨의 앞서 얘기한 논문에 田邊史廣X(調?)와 田邊史眞立의 두 사례가 설명되고 있다. 전자는 平城宮에서 출토된 木簡으로 보이며, 「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409쪽에

(表面) 无位田邊史廣X(調?)進續勞錢俉百文
(裏面) 攝津國住吉郡 神龜五年九月五日 勘錦織/秋津

로 되어 있다. 후자는 正倉院 文書의 天平 五年「右京計帳」에 기록돼 있는 것인데, 戶主物部連族五百의 戶에 소속된 노비 3명에 대해,

右, 件奴婢, 帳後 攝津國 住吉郡 田邊鄕 戶主 正七位 上 田邊史 眞立 戶來附

라고 쓰고 있다(大日本古文書 卷一 484쪽). 필시 前者의 田邊史廣(調)도 田邊鄕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田邊史에 대해서는 新撰姓氏錄 중 左京皇別의 上毛野朝臣 條에 孝謙황제 天平勝寶 2년에 다시 上毛野公이라는 氏姓을 하사하였으며, 弘仁 원년에 朝臣들의 姓을 하사했다고 하며, 右京皇別 條에는

田邊史. 豊城入彦命四世孫, 大荒田別命之後也.

로 하여, 皇別氏族으로 있었는데, 이것은 上毛野朝臣의 氏姓을 得함으로써, 이른바「祖變」이 된 것인데, 본래는 右京諸蕃條에

田邊史. 出自漢王之後知 也.

로 되어 있음으로 知 의 後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渡來系 씨족인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이 씨족의 住吉郡 거주자 상황은 상기 2명으로 알려져 있을 뿐인데, 田邊鄕이라는 동리 이름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이 지역에 田邊史 일족이 꽤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田邊鄕의 田邊史氏族을 住吉郡과 연결시키는 것에는 다음 2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田邊史 씨족의 본래 거주지는 住吉郡이 아니고 河內國의 安宿郡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근거는, 주지하다시피 河內國 飛鳥戶郡에 田邊史 伯孫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다고 日本書紀 雄略 9년7월 條에서 전하고 있다. 현재 大阪府 柏原市 國分의 春日神社 境內에 있는 白鳳期 寺院 터는 田邊史 氏族이 세운 사원 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田邊史 氏族의 氏寺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시대가 다소 바뀌어 田邊史가 住吉區 지역에 거주한 것이 된다.

다른 하나는 田邊鄕이라는 이름이「倭名抄」國郡部의 住吉郡 鄕名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田邊鄕에 살던 田邊史 씨족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일견 생각할 수 있겠는데, 奈良시대 중기인 天平 9년부터 12년 사이에 신설된 百濟郡에 포함된 것이며, 그 때에 鄕의 편성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에 田邊鄕이라는 이름이 사라졌을 것이다. 百濟郡의 郡域에 대해서는 吉田東伍 이래 天坊幸彦, 大越勝秋, 今井啓一, 服部昌之, 藤澤一夫 등 제씨들의 학설이 있는데, 지금 그것들에 대치하는 私見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住吉郡의 동북부와 東成郡의 동남부를 떼어내 설치한 것이며, 개략적인 범위는, 難波宮中軸線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難波大道를 서쪽 한계선으로 하고, 南은 阿倍野區田邊, 北은 生野區와 東成區의 경계선, 東은 현재의 東大阪市와 大阪市의 경계선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服部昌之씨가 복원한 원안에 가까운 것인데,「倭名抄」에 의하면 住吉郡에 杭全鄕이 있었기 때문에 住吉郡은 百濟郡의 남쪽에도 동서로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百濟郡의 郡域은 결국 百濟郡의 신설로 인해 田邊鄕이 住吉郡에서 떨어져 나와 百濟郡에 편입되었다는 것이 통설일 것이다.「倭名抄」에서는 百濟郡은 동부 남부 서부의 三鄕으로 되어 있는데 田邊鄕이 그 중 어디에 해당되었는지가 문제가 되지만, 그것이 南部鄕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 吉田東伍씨의 說(大日本地名辭書)을 따르고싶다. 角川書店에서 나온 「日本地名大辭典.大阪府」는 田部(邊)鄕을 분할하여 동 남 서를 일컬어 東田部 南田部 西田部로 하고, 이것을 두 字로 약칭하여 東部 南部 西部로 했다고 하는데, 田邊鄕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三鄕으로 분리될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그렇게 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鄕名에 部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百濟의 五方五部制를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百濟郡의 郡域과 鄕名에 관한 얘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필자는, 田邊鄕이 住吉郡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百濟郡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田邊史(타나베노후히또) 씨족이 살던 지역과 住吉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 住吉國이라는 말도 있다 - 과의 관계가 꼭 밀접한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을 말하고싶다. 즉 住吉津과 田邊史와의 관계가 엷었다는 것, 더욱이 한 걸음 나아가 田邊史는 文筆에 밝은 渡來人이며 住吉郡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필자는 田邊史가 推古朝 전후에 安宿郡 지역으로부터 住吉郡 지역으로 이주하여 온 씨족일 것이라고 했는데, 그 추정은 이 씨족이 住吉津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앞서의 추측과도 일치한다. 또한 住吉郡에는 田邊史를 제외하면 渡來 씨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住吉津은 神別氏族인 津守連(그 가운데서 津守宿 )을 중심으로 하는 神別 내지 皇別 씨족이 운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難波津과 渡來人들

住吉津주변에 渡來人이 적었다는 것은 이곳이 難波津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難波지역과 관계가 깊은 중요 도래씨족으로는 다음과 같은 씨족들로 알려져 있다.(氏族名, 役職, 史料의 年次, 出典順으로 기록돼 있음).

東生(成)郡
難波忌寸 浜勝 擬大領 天平寶字五年 正倉院文書(大日本古文書 卷四 452쪽)
日下部忌寸 主守 擬少領 天平寶字五年 正倉院文書(上同 卷四 452쪽)
難波忌寸 擬大領 神護景雲二年 正倉院文書(上同 卷六 702쪽)
日下部忌寸 人繩 擬少領 神護景雲三年 正倉院文書(上同 卷六702쪽)
日下部忌寸 諸前 副擬少領 神護景雲三年 正倉院文書(大日本古文書 卷六 702쪽)

西生(成)郡
吉士船人 擬大領 天平寶字五年 正倉院文書(大日本古文書 卷四 452쪽)
三宅忌寸 廣種 擬少領 天平寶字五年 正倉院文書(上同 卷四 452쪽)

이 외에 續日本紀 景雲 3년10월 壬午(12일) 條에는, 文武천황이 9월15일부터 難波行幸에서 돌아 올 때 攝津國의 造凡河內忌寸 石麻呂와 山背國의 造山背忌寸 品遲 두 사람과 함께 從八位 上인 難波忌寸 浜足과 從七位 下인 三宅忌寸 大目이 한 등급 승차를 하고 있다. 앞서의 東成, 西成 兩郡의 郡領 성명과 비교하면, 이 두 이름 모두 각각 東成郡 西成郡의 郡領으로 생각된다.

이들 郡領들은 이른바 難波지역의 유력 씨족인데, 그 氏姓을 정리하면,

東成郡 = 難波忌寸, 日下部忌寸
西成郡 = 吉士, 三宅忌寸

이 되며 이들 모두 渡來系 씨족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難波忌寸과 日下部忌寸은 원래 草香部(草壁) 吉士(기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日本書紀 天武 10년 정월條(이하 天武紀 十年으로 기록)에 草香部의 吉士인 大形(오오가타)에게 難波連이라는 姓을 하사하려고 했으며, 이어서 同 14년 6월條에 難波連에게 忌寸이라는 姓을 하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草香部 吉士 -> 難波連 -> 難波忌寸), 또한 天武紀 12년 10월條에는 草壁 吉士에게 連이라는 姓을 하사했으며, 이어서 同 13년 12월에 草壁連에게 忌寸이라는 姓을 하사했다는 기사는 日本書紀나 續日本紀에는 보이지 않지만, 忌寸이라는 姓이 渡來系 씨족에게 많고 또한 連보다 한 단계 높은 姓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日本書紀 등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難波連이 忌村이라는 姓을 획득한 것처럼, 草壁連도 忌寸이라는 姓을 하사받아 草壁忌寸(日下部忌寸)이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큰 것으로 생각된다.

西成郡에 보이는 吉士는 姓氏錄 攝津皇別條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吉士. 難波忌寸同祖, 大彦命之後也.

이 기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吉士는 諸蕃 즉 渡來系에는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吉士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던 바 古代 朝鮮語에서 首長을 의미하는 말로 유래하고 있고, 新羅의 官位 17등급 중 제14위를 칭하는데도 쓰였으며, 일본에서는 6세기 이후 일반적으로 渡來系 씨족의 카바네(天武천황 때 제정했던 씨족의 尊卑를 구분하는 칭호)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吉士는 원래 카바네였던 것을 씨족의 姓으로 사용한 것이며, 본래는 難波吉士 또는 日下部吉士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吉士를 카바네로 하는 씨족이 6-7세기 대에 항해나 외교계에서 활동했던 것은 三浦圭一씨의 연구가 나온 이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역사상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難波吉士인데, 日下部(草壁) 吉士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원래 吉士를 카바네로 하는 씨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難波忌寸吉士, 日下部忌寸吉士의 각 씨족들은 難波津의 경영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郡領의 지위에 있었던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吉士系 씨족과 나란히 주목받고 있는 것이 三宅忌寸씨족이다. 이 씨족은 전술한 바 와 같이 天平寶字 五年의 正倉院 文書에 西成郡 擬少領인 三宅忌寸廣種이 보이는 외에 역시 前述한 日本書紀 景雲 3년 10월條에 같은 西成郡의 郡領으로 추정되는 三宅忌寸大目이 보인다. 아마도 이 씨족은 6세기 전반에 존재한 安閑천황 원년에 설치된 것으로 전해지는 難波屯倉의 관리에 종사한 씨족일 것이다.

이 三宅忌寸과 관련된 씨족에 三宅連이 있다. 姓氏錄의 攝津國 諸蕃條에「三宅連. 新羅國王天日X命之後也」로 보이는 것이 그것인데, 日本書紀와 古事記는 모두 天日槍(天之日矛)의 후예인 田道間守(多遲摩毛理)를 三宅連의 조상으로 하고 있다. 三宅忌寸과 三宅連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서술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天武條 때 八色의 姓을 제정할 때 忌寸이라는 성을 하사 받은 連姓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참고하면, 三宅忌寸과 三宅連은 다 같이 新羅의 天日槍을 조상으로 하는 傳承을 가진 동족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難波屯倉이 다른 일반 屯倉과는 달리 難波津의 운영과 관리에 관계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新羅系 渡來人으로 생각되는 三宅忌寸과 三宅連은 難波津과 관계를 가진 씨족으로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三宅連의 직계조상인 田道間守가 멀리 常世國에 심부름으로 가서 철이 지나 구하기 힘든 향기로운 과실을 구해서 되돌아 왔다는 傳承으로부터도 뒷받침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難波津 지역에는 住吉津 지역과는 달리 항해기능과 屯倉관리를 하는 港津과 관계가 깊은 渡來系 씨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즉 住吉津은 일본으로 오는 渡來人들이 증가하여 조정과 관계를 가지기 이전부터 번성했던 항구이며, 難波津의 번영은 住吉津보다 늦고 특히 항해와 港津에 관계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에 도래하면서부터 번영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難波津에 관계했던 渡來人들은 주로 東成과 西成 兩郡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 三宅忌寸과 三宅連이 신라계라는 것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다. 吉士系 씨족의 모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의 官位에 吉士라는 명칭이 있는 점, 日本書紀에서 難波吉士들이 항해한 행선지에 신라가 가장 많았던 점(雄略 八年紀 이후 齊明 2년까지 사이에 신라에 6회, 任那에 4회, 벡제에 2회), 등으로 보아 그들이 신라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은 百濟郡의 도래인들이 주로 백제계였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百濟郡의 도래인들은 東成 西成 兩郡 지역에 살고 있는 신라계 도래인들에 의해 難波津 운영이 실행된 이후에 來住한 사람들이 많으며 따라서 郡의 형성도 늦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가령 연대순으로 나열한다면, 住吉津이 번성했던 것은 4-5세기, 難波津도 5세기에는 항구로서 번성했을 것이지만, 住吉津을 압도하여 번영한 것은 6세기 이후로, 이 시기에 항구에 관계하는 도래인들이 정주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증가한 것은 7세기 후반, 白村江 전투 이후로 생각된다.


<> 難波와 秦氏 씨족

難波지역의 도래인들이 다시 한번 주의를 끄는 것은 도래 씨족 중 雄族 秦氏의 존재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續日本紀 神護景雲 3년5월 己丑(22일) 條에,「西成郡人外從八位下秦神嶋, 正六位上奏人廣立等九人」에게 秦忌寸이라는 성을 하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은 秦(하타), 다른 사람은 秦人(하타히또)을 姓으로 하고 있는데, 광의의 秦氏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 다 位를 가지고 있고, 忌寸이라고 하는 秦氏로서는 宿 에 다음가는 상위의 카바네(씨족 尊卑를 구분하는 칭호)를 획득했기 때문에 難波에서는 유서 깊고 힘을 가진 유력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秦氏 씨족의 분포는 일본 각지에 널리 흩어져 있는데, 가장 유력한 씨족은 京都 분지의 서북부 山背國 葛野郡에 있었던 秦造(하타노미야쯔꼬)(그 중의 秦連, 秦忌寸도 같은 씨족임)이다. 그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推古천황 11년條와 同 18년 條 등에 보이는 秦造河勝(하타노미야쯔꼬 가와가쯔)에 관한 傳承 등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또한 京都분지의 동남부에 있었던 紀伊郡에도 유력한 秦氏가 있었다는 것은, 欽明 前紀에서 보이는 秦大津父(하타 오오쯔찌)와 山城國風土記 逸文에서 보이는 秦公伊呂具(하타기미이로꾸)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씨족은 養蠶, 機織, 開拓, 銅鐵鑄造등의 기술에 밝았으며, 殖産興業에 관계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서도 주목받는 것이 治水에 관한 傳承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史料이지만「政事要略」所引의「秦氏本系帳」에,

造葛野大堰, 於天下誰有比 , 是秦氏率催種類, 所造構之, 昔秦昭王, 塞堰洪河通溝澮, 開田萬頃, 秦富數倍, 所謂鄭伯之沃衣食之源者也, 今大井堰樣, 則習彼所造.

로 되어 있어, 秦氏가 葛野川(保津川.大井川)에 堰堤(하구언 제방)를 만들어 水利시설을 계획했던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大阪 평야의 개척에 관해서도 古事記 仁德段에 秦人이 茨田堤와 恣田三宅의 造營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秦氏들에 의한 茨田堤와 茨田三宅 조영의 傳承에 대응한 것이「倭名抄」에 보이는 河內國 茨田郡 幡多鄕의 존재이다. 幡多鄕 지역은 지금은 寢屋川市에 속하지만, 근세의 秦村, 太秦村(우즈마사)을 포함하여 고대에 秦氏들이 살면서 淀川의 治水에 관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攝津國 豊嶋郡에도 秦上鄕, 秦下鄕이 있었다는 사실이「倭名抄」에 보여, 이 지역에도 秦氏들이 거주했음을 알게된다. 그 鄕域은 현재의 池田市 중부에 해당되는데, 원래의 秦野村과 그 주변으로 比定된다. 治水에 관한 전승은 존재하지 않지만 猪名川 治水에 종사한 것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게 되면, 續日本紀에 의해 西成郡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秦, 秦人씨족들은, 다소 대담한 억측을 한다면, 難波堀江의 준설에 관여했던 秦氏의 후예들이 아닐까 한다. 前述한 恣田堤의 조영에 종사한 秦人들이 거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恣田郡 幡多鄕과 西成郡과의 거리는 십 수 킬로미터이다. 토목공사에 숙달했던 秦人들이 幡多鄕 지역에서부터 西成郡 지역으로 이주하여 難波堀江 공사에 종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할 것이다. 강조하건대 恣田에 살던 秦人들이 제방의 축조뿐 아니라 恣田三宅의 설치에도 관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難波堀江에 관계했던 秦氏 사람들이 難波屯倉의 조영에도 관계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관해, 難波堀江의 준설은 仁德朝인 5세기, 難波屯倉의 설치는 安閑朝인 6세기이기 때문에 시대간격이 너무 멀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日本書紀와 續日本紀에 나오는 각 연대 기록에 크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堀江의 준설이라고 하는 대 사업이 실제 행해진 연대는 5세기가 아니고 6세기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착공은 5세기였다해도 한번 공사로 완공된 것이 아니고, 修復과 확장을 포함한 공사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몇 번이나 실행됐을 가능성도 크다.

필자는 秦氏들이 참여한 堀江의 준설공사는 6세기에 이르러 거의 완성하고, 難波津을 통과한 배가 그대로 掘江을 거슬러 올라가 大和川과 淀川으로 들어갈 수 있어, 難波津이 항구로서의 가치가 이전과 비교하여 매우 커졌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住吉津에 대한 難波津의 우위가 확립되고 항해에 밝은 吉士계통의 도래인들도 많이 難波津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屯倉도 만들어져 三宅連등 屯倉관리를 맡고 있던 씨족들이 왕래하였고 朝廷의 항구로서의 難波津 운영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秦氏 씨족들의 母國도 명확치는 않지만, 신라로부터의 渡來人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설을 취한다면, 難波津과 가장 관계가 깊은 西成, 東成 兩郡 지역에는 秦, 三宅, 吉士 등 신라계 도래인들이 많고, 그 동남 백제군 지역에는 주로 백제계 씨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 남쪽인 住吉郡 지역에는 도래인들이 적었다고 하는 지역차를 지적할 수 있다.

이상이 도래인들의 존재상태를 통해 본 住吉津과 難波津의 관계 내지 難波津의 발전과정이다. 적은 사료를 추측으로 보완한 논의이다. 꾸짖어 바로잡아 주시면 감사하겠다.


4. 吉備(키비)의 渡來人들과 豪族

 

<> 머릿글

고대 일본의 문화와 경제발전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끼친 공적은 매우 크다. 특히 畿內地方의 도래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꽤 상세하게 그 자취를 더듬어 조사하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 지역에 대해서는 정리된 자료들이 적어 고고학적으로 유적과 유물에 의존하는 이외에는 연구에 곤란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비교적 사료가 풍부한 것은 吉備지역이다. 이 논고에서는 주로 鐵생산 문제를 중심으로 5, 6세기에 吉備지방의 도래인들의 상황을 고찰하고 그것을 단서로 하여 吉備세력과 야마도 정권과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 吉備와 渡來人들

正倉院 문서인「備中國大稅負死亡人帳」에 戶主, 戶, 口로서 氏名들이 기록돼 있는 것은 都宇郡 15인, 窪(와)屋郡 24인, 賀夜郡 33인, 계 72인이다. 그 가운데 한반도계 渡來人들에게 주어진 氏姓으로 칭하는 것은 表1에세 보이는 것처럼 13인이다.(渡來系가 아닌 인명에는 괄호를 했다).

渡來系 氏姓을 가진 사람 수와, 死亡人帳에서 보이는 전체 사람 수와의 비율을 비교한 表2를 통해 보면, 窪屋郡처럼 渡來系 氏姓이 보이지 않는 郡도 있으며, 都宇, 賀夜의 두 郡은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우선 都宇郡의 경우인데,「和名抄」의 都宇郡 訓注에「津」으로 기록돼 있듯이, 원래는 津郡(津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今昔物語集」卷十七 第四話에 보이는 備中國 津郡에 있었을 것이다. 이 大稅負死亡人帳의 都宇郡 河面鄕에 戶主 津臣益麻呂, 同郡 沈井鄕에 戶 津臣弟嶋, 戶口 津臣酒見賣가 보이는 것도 이것을 방증한다. 일찍부터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足守川의 川 입구에 良港이 있어 郡名이 되었을 것이다. 都宇郡에 渡來系의 氏姓, 따라서 渡來系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주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表1 大稅負死亡人帳의 渡來系 氏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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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 鄕 里 戶主 또는 房戶主 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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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宇 建部 岡本 (丸部得麻呂) 西漢人志卑賣
都宇 河面 辛人 秦人部稻麻呂 秦人部弟嶋
都宇 撫川 鳥羽 (上道臣意穗) 服部首八千石
都宇 撫川 鳥羽 史戶置場 史戶玉賣
賀夜 庭瀨 三宅 忍海漢部眞麻呂
賀夜 庭瀨 山埼 忍海漢部得嶋 忍海漢部麻呂
賀夜 大井 栗井 東漢人部刀良手
賀夜 阿蘇 宗部 西漢人部麻呂
賀夜 阿蘇 磐原 史戶阿遲麻佐 西漢人部事元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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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窪屋郡 美和鄕에 보이는「氷人」이라는 氏姓은, 혹시 渡來系인지 모르지만, 氷連은 物部連(石上朝臣)과 같은 조상이라는 傳承을 갖고 있기 때문에(姓氏錄), 위의 표에서는 제외했다. 史料(大稅負死亡人帳)에「戶」로 되어 있는 것은 房戶主로 판단했다.


表2 渡來系 氏姓의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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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 全人員數(A) 渡來系(B) B/A
都宇 15 6 0.40
窪屋 24 0 0.00
賀夜 33 7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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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2 13 0.18

賀夜郡은「和名抄」도 賀夜郡(단지 高山寺本에는 賀陽郡으로 돼 있다)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加夜, 賀陽, 香屋, 蚊屋 등 각종 표기가 있다(池邊 「和名類聚抄郡鄕里驛名考證」참조). 이 가야라는 지명은 한반도 남부의 伽耶(加羅, 駕洛이라고도 함)에서 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 확증된 것은 아니지만,「和名抄」에 의하면, 가야라는 지명은 備中의 賀夜郡 외에 但馬國 氣多郡의 賀陽郡, 筑前國 志麻郡의 加夜鄕이 있으며, 正倉院 문서인 天平11년의「出雲國大稅賑給歷名帳」에 出雲國 神門君 朝山鄕 加夜里가 있다. 또한 但馬國 氣多郡에 인접한 出石郡은 신라 왕자 天日槍을 제사지내는 出石神社의 鎭座지역으로 유명하며, 出雲國 神門郡은 八束水臣인 津野命이 新羅國의 일부를 끌고 온 밧줄이 그 郡의 소노노나까하마(X의 長浜)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어(出雲國風土記 意宇郡條), 아무튼 신라와 관계가 깊다. 또한 筑前國 志麻郡의 隣邦인 怡土郡은 高麗國의 意呂山에 天降했던 히보꼬(日槍)의 후예 50명이 渡來한 지역으로 전해진다(筑前國風土記 逸文).

伽耶로부터 渡來人들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기록은 없지만, 일본에서 가야라 이름 붙은 어떤 지역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渡來人들과 관계가 깊은 지역과 인접하고 있다. 立地를 보아도 東海와 대한해협에 면하는 해안에 가까워 한반도 거주자들이 도래하기 쉬운 지역이다. 備中의 賀夜郡을 포함하여 이러한 "가야"지역이 한반도 伽耶 사람들의 渡來에 의해 생겼다고 하는 說은 굳이 부정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유래로 인해 備中의 都宇, 賀夜 2개 郡에 도래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六國史에서는 이 兩郡에 도래인들이 거주했던 것을 나타내는 기사는 없지만, 그것은 兩郡에 거주한 도래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表1에 보이는 것처럼 그 대부분은 部姓이다), 역사상에 모습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단지「三大實錄」貞觀 5년 정월 20일條의 滋善宿 宗人의 卒傳에「宗人者左京人, 本姓西漢人, 備中國下道郡之所貫也」라고 되어 있어, 下道郡에 西漢人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下道郡은 賀夜郡의 서쪽에 인접한 郡이다. 賀夜郡으로부터 下道郡에 걸쳐 西漢人(카와찌노아야히또) 등 渡來系 사람들이 널리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備前과 渡來人

備前國에 관한 것을 보면 六國史, 平城宮跡出土木簡, 勘籍에, 表3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渡來系의 氏姓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續日本紀 天平 15년5월 丙寅(28일)條에,

備前國言, 邑久郡新羅邑久浦, 漂着大魚五十二隻

이란 말이 있는데, 邑久郡에 新羅邑이라고 하는 지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和名抄」에는 邑久郡 邑久鄕이라고 하는 鄕名이 있다. 그 부근에 신라의 渡來人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채택할 수 있는 史料는 唐招提寺文書인「備前國 津高郡 津高鄕 陸田券」4통이다. 이에 따르면, 이 鄕에는 表4처럼 渡來系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表3 備前國의 渡來系 氏姓(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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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 香 姓 名 出 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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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野 忍海部與志 續日本紀(神護景雲三年六月)
邑久 舊井 秦勝小國 平城木簡槪報,15
邑久 積梨 (戶主)秦造國足 寶龜五年三月勘籍
(戶口)秦部國人
上道 揭勢 秦部犬養, 秦部得万呂 平城木簡槪報, 6
上道 秦春貞 (白丁) 三代實錄(仁和元年十二月)
兒島 賀茂 三家連乙公 平城木簡, 1-323
(不明) 韓部廣公 續後記(天長十年八月)
(直講博士正六位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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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4 備前國의 渡來系 氏姓(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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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 名 出 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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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部阿古麻呂 阿古麻呂解, 收稅解 B
書直麻呂(稅長) 阿古麻呂解, 人夫解
漢部古比麻呂(徵部) 阿古麻呂解, 收稅解A
 作部千세 人夫解, 收稅解A
漢部眞長 人夫解, 收稅解A
漢部大楯 收稅解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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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考) 寶久 5년11월23일付「津高郡 漢部阿古麻呂解」, 寶久7년 12월11일付「津高郡 收稅解」를「人夫解」, 同年同月同日「津高郡 收稅解」를 「收稅解A」, 寶久 8년 正月18일付「津高郡收稅解」를「收稅解B」로 각각 略稱했다.

그 외 근년에 平城宮터에서 출토된 木簡에 의하면. 備前國 上道郡 播多鄕에 秦老人, 秦忍이 거주하였으며, 秦大丸이라고 하는 인물도 備前國 上道郡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備前國에 거주 내지 所貫하는 渡來系 사람들의 氏姓을 郡別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例數).

藤野郡 忍海部(1)
邑久郡 秦勝(1), 秦造(1), 秦部(1)(地名으로 新羅邑久浦)
上道郡 秦部(2), 秦(4)
兒島郡 三家連(1)
津高郡  作部(1), 漢部(4), 書直(1)
郡不明 韓部(1)

 

이것을 보며 주의해야할 것은, 備前國에서는 바다를 끼고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邑久, 上道 兩郡에 秦氏系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秦氏는 姓氏錄 등에서는 秦始皇帝의 후예로 칭하고 있지만 신라계 종족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藤野郡의 忍海部는, 日本書紀 神功 5년條의 傳承에 따르면, 신라계일 가능성이 크다(신라인 포로들이라고 했다). 兒島郡의 三家連도 古事記 垂仁天皇段에, 三宅連이 天日槍(신라왕자)의 자손인 多遲摩毛理(田道間守)를 조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신라계로 생각된다. 이렇게 되면 備前國은 가장 서쪽에 붙은 津高郡을 제외하고는 秦氏系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계 도래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이 아닐까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和銅 6년4월에 備前國으로부터 분리한 美作國에도 秦氏들이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三代實錄」貞觀 7년11월3일條에, 美作國 久米郡 사람 秦豊永이 孝行으로 포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備前國의 동쪽에 인접한 播磨國 서부에도 秦氏의 분포가 다음과 같이 알려지고 있다.

揖保郡 少宅鄕 (戶口) 秦田村君有X「大日本古文書」(卷24, 257쪽)
揖保郡 少宅鄕 少宅秦公「播磨國風土記」
赤穗郡 (大領) 秦造內麻呂「三代實錄」(貞觀六年八月二十七日)
賀茂郡 山田鄕 (戶主) 秦人水間「大日本古文書」(권25, 130쪽)

平安時代로 내려오면, 11세기 후반에 秦爲辰이라는 유력자가 赤穗郡에 살았으며(東寺文書), 11세기 전반에 赤穗郡 有年莊에 있던 사람 41명 중 秦氏가 11명이었다.(「朝野群載」所收長和四年 播磨國符)

여기에 비하면 備中國은 秦系의 秦人部도 있으며, 西漢人, 西漢人部, 東漢人部 등 漢氏계통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씨족들의 출신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漢을 칭하는 씨족 중 가장 유력한 東漢氏와 적지 않은 관계를 가졌다. 東漢氏의 출신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西文氏 즉 書首(후미로오비또)의 조상인 王仁(와니)가 應神천황 때 백제로부터 도래했다고 하는 전승(日本書紀, 古事記)이 있으며, 東漢氏(倭漢直=야마도노아야노아타이)의 조상도 역시 應神朝에(日本書紀에서는 조상인 阿知使主가 應神 20년에) 渡來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에, 東漢氏를 백제계 도래인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姓氏錄에서는 東漢氏 계통인 坂上宿 (사까노우에노스꾸네)등은 後漢의 靈帝로부터 나온 자손이라고 칭하고, 坂上刈田麻呂(사까노우에가리타마로)가 延曆4년6월에 제출한 上奏文에도 자기의 선조를 後漢 靈帝로 하고 있는데, 傳承에 지나지 않는다. 姓氏錄에는 右京諸蕃條에「漢人 百濟國人多夜加之後也」라고 하고 있어 漢人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백제출신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앞글에서 보이는「多夜加」가「多加夜」의 오류라고 한다면, 백제계 大伽耶 출신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따로 傍證이 없기 때문에 誤寫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漢氏系 사람들 대부분이 백제 혹은 伽倻로부터 온 도래인들이 아니었던가 싶다.(忍海漢部는 신라계일 것이다).

실제출신지는 여하간에 備前과 備中의 도래인 분포를 대략 살펴보면, 備前은 秦氏계가 많았고 備中은 漢氏계가 많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備中國 都宇郡 撫川鄕과 同國 賀夜郡 阿蘇鄕의 史戶(表1)도, 姓氏錄 攝津國 諸蕃條에「漢城 사람 韓氏 鄧德의 후손」으로 되어 있어 漢氏와의 관계가 깊어 보인다. 또한 備前國에 보이는 漢部도 그 거주지는 備中國 賀夜郡에 인접하는 津高郡이기 때문에 漢氏系 도래인들이 備中에 많이 살았다고 말해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같은 縣이라고 하는 성명이 보여주듯이 書直은 漢氏의 일족이다.

그런데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분포의 차이가 우연에 의한 것이었는지, 무언가의 역사적인 사정에 의한 것이었는지 하는 점이다. 이하 이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 鐵생산과 秦氏, 漢氏

앞서 말한 것처럼 秦氏系 渡來人들의 분포는 備前, 美作 뿐만이 아니고, 播磨 서부에 걸쳐 있다. 그리고 이 지방은 고대로부터 鐵의 産地이이서 秦氏들은 製鐵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분포상태는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秦氏들과 鐵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平野邦雄씨의 상세한 연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재론하는 것은 생략하겠지만, 8세기 史料에서,

造東大寺司鑄工 秦上(伊美吉) 大吉
造東大寺司鑄工 秦(伊美吉) 船人
造東大寺司銅工 秦物集(伊美吉) 廣立
造石山院所鑄工 秦乙万呂
造石山院所鑄工 秦仲國

을 들 수 있다. 平野씨는 그 외 많은 史料들을 수집하여, 鍛冶, 鐵工에는 漢氏계에서 才氣가 많고, 鑄工에는 秦氏계에서 재주꾼들이 많았다고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 鍛冶와 鑄工의 차이는 鍊鐵을 만드느냐 銑鐵을 만드느냐의 차이로서, 中國에서 銑鐵을 만드는 기술이 맨 먼저 일본에 전해져「倭鍛冶」가 되었으며, 그 가운데서 銑鐵을 鍛鍊하여 鍊鐵을 만드는 기술로 전해져「韓鍛冶」가 되었다고 하는 石川桓太郞씨의 說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鑄工의 기술을 가진 秦氏系가 倭鍛冶를, 鍛冶工의 기술을 가진 漢氏系가 韓鍛冶를 담당하였으며, 전자는 5세기 초 경에 신라로부터 건너왔고, 후자는 5세기 후반에 백제로부터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說 가운데서 渡來 연대는 최근의 渡來人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면 改訂의 여지가 있을 것(원주8)으로 생각되지만, 이 說은 대체적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하더라도 本州 서부에 있어서 製鐵은 우선 備前, 西播 지역에서 시작하였으며, 이 지역에 秦氏계의 기술자들이 분포돼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추정에는 곧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鐵의 産地는 앞서 말한 지역에 만 한정되지 않았을 것인데, 왜 備中, 備後 지역에 秦氏들의 분포가 적었을까 하는 반론이다.

분명 중대한 의문이다. 平城宮터에서 출토된 木簡에도,

備前國 赤坂郡 周 鄕 調 十口 天平十七年十月二十日 (平城木簡 1-311)
(備前國)
上道郡 浮浪人調鐵一連(平城木簡 2-2834)
備中國賀夜郡口口口口鐵一連(平城木簡槪報 4-20쪽)
(表) 大井 十口
(裏) 九月十日 (平城木簡 312)
(主) 備中國 賀夜郡에 大井鄕 있음
(備後國)
三上郡 信敷鄕 調 十口(平城木簡 1-313)
備後國 三上郡 調 壹拾口 天平十八年(平城木簡 1-314)

등으로 되어 있는데, 備前과 함께 備中, 備後로부터도 鐵을 산출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日本後紀」延曆 15년11월 庚子(13일)條에

勅, 納工之本, 任於土宜. 物非所出, 民以爲患. 今備前國, 本無 鐵. 每至貢調, 常買比國. 自今以後, 宜停貢鐵, 非絹則絲, 隨便令輸.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 중에 備前國은「본래부터  鐵이 없다」고 한다. 원래 備前國에 속해 있던 美作國의 英多郡에 官에서 관리하는 鐵山이 있었다고 전하는「日本靈異記」下卷 十三話의 기사로부터도, 또한 앞서 말한 木簡 기타 史料로부터도, 본래 備前에 鐵이 생산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日本後紀」의 勅(미꼬도노리)은 間壁忠彦, 間壁X子 두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同書 延曆 24년12월 壬寅(7일) 條의

備後國神石 . 奴可 . 三上 . 惠蘇 . 甲努 . 世羅 . 三谿 . 三次等八郡調絲, 相換 鐵.

이라고 하는 奏議와 대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平安 초기에는 備前에서는  鐵생산을 폐하고 絹, 絲 생산으로 전환했고, 備後에서는 거꾸로 絹, 絲 생산을 폐하고  鐵 생산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또 하나 이와 관련하여 주의를 요하는 것은, 神龜 5년4월에 美作國이 주청하여 部內의 大庭, 眞嶋 2郡에서 庸米를 綿과 鐵로 바꾸고싶으니 허가해 달라고 하고 있다.(續日本紀).

이렇게 한 이유는 필시 中國山脈의 철 생산은, 우선 吉備 동부(備前)와 播磨 서부지역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점점 北과 西로 이동하여 美作에서 備中으로 철 생산이 번창하였으며, 그 다음에 備後의 철 생산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생산을 시작한 吉備 동부의 제철산업은 8세기에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美作은 그 정도는 아니고), 8세기말에는 備前은 貢納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絹과 絲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前述한「日本靈異記」설화에서는, 阿倍(孝謙)천황 代에 鐵山의 鐵血(갱도)이 붕괴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서는 奈良시대 후기에 美作지방의 철광채굴도 곤란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吉備 동부의 철생산 쇠퇴의 원인은, 鑛石, 砂鐵등의 철 자원을 채굴하는 것 외에 製鐵에 필요한 연료가 되는 수목의 남벌에 의한 연료결핍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備前과 美作 지방에 秦氏계 도래인들이 많았고, 보다 선진화 된 鍛冶기술을 가진 漢氏계도래인들이 備中지방에 많이 살았으며, 그리고 備後지방에는 도래인들의 거주를 나타내주는 사료가 적다고 하는 사실은 앞서의 추측과 일치한다. 吉備지방의 製鐵에 한해서만 말한다면, 우선 이른 시기에 秦氏계 사람들에 의해 備前, 美作 지역에서 製鐵산업이 시작되었으며, 제2의 시기에는 漢氏계를 주력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備中지방의 제철산업이 시작되었고, 제3의 시기에는 律令政府의 자본과 기술의 傳習이 행해져 秦氏, 漢氏계 사람들 뿐 아니라도 제철이 가능하게 되어, 그런 사람들의 손으로 備後지방의 제철산업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平野邦雄씨가 작성한 大寶令 이후의 金屬工人 일람표는 渡來系로는 생각되지 않는 氏姓의 사람들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사실도 참고가 될 것이다.

凡海宿 추鎌(冶金工), 家部宮道(獲金人), 磯部君牛麻呂(鍛師), 野家葦人(鐵工), 丈部大麻呂(獲金人), 山下黑麻呂(銅鐵工), 石村宿奈麻呂(鑄工), 守小衰(鐵工), 海弓張(鐵工), 物部根麻呂(鐵工), 日置足X(鑄工), 宗形石麻呂(銅工)

그런데 앞서 얘기한「이른 시기」(備前, 美作),「제2의 시기」(備中),「제 3의 시기」(備後)의 구체적인 연대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엄밀히는 고고학 내지 冶金공학계 등이 결정해야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학문도 역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부득이 종래의 문헌지식에 따라서 대체적인 시기를 얘기한다면, 이른 시기는 5세기 代(후반), 제 2의 시기는 6세기, 제 3의 시기는 7세기경이 아닐까 한다.


<> 야마도 정권과 秦氏, 漢氏

備前, 美作 지방의 秦氏계 도래인들에 대한 여러 사정은 대체로 앞 절에서 이야기를 한 셈인데, 備中지역의 도래인들에 대해서는 製鐵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앞서의 表1에서 나타난 것처럼 備中에는 東漢人部, 西漢人部, 忍海漢部 등의 漢氏계와 秦氏계의 秦人部 외에, 史戶(요히또베), 服部首(하또리노오비또)가 있었으며, 備中지역에 인접한 備前國 津高郡에는 漢氏계이면서도 製鐵, 鍛冶와는 관계가 적은 書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씨족의 분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철기술 이외의 원인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래 秦氏씨족과 漢氏씨족과의 차이는 제철기술에 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畿內 지역에서 양 씨족의 분포를 보면, 秦氏는 山背지방인 葛野郡과 紀伊郡 - 山城盆地인 서북부와 동남부 - 에 많고, 漢氏 즉 東漢氏(倭漢氏)는 大和지방인 高市郡 - 大和盆地의 동남부 - 를 중심으로 大和盆地의 남부에 많다. 忍海漢部(오시누미노아야베)의 本貫이 그 지역일 것이다(西漢人部의 本貫은 河內로 생각된다).

말할 것도 없이 大和남부는 6세기에 大王의 宮이 있었던 곳이며, 특히 東漢氏가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高市郡에는 6세기 전반의 繼 代부터 7세기 중엽의 皇極代까지의 한 두개의 사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大王들이 거처를 이곳에 두었다. 河內도 難波津을 外港으로 함으로써 야마도정권에게는 교통, 군사상 요지였다. 당연히 東漢氏들은 정치와의 관계가 깊어, 東漢直  (아타이쯔카)이 雄略천황 朝에 봉사하였으며, 東漢氏계의 身狹村主 靑(아오), 檜隅民使 博德(하까도코)이 특히 雄略천황의 총애를 받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은 또한 야마도정권의 유력자인 大連大伴 室屋(무로야)과 관계가 깊었던 것이 日本書紀 淸寧前紀에 나오며, 欽明朝 이후에도 東漢直 糠子(누가꼬)와 東漢坂上直 子麻呂(고마로)가 官人으로서 활동했다는 것이 日本書紀 欽明 31년 4월, 同 7월, 敏達 원년 6월 條 등에 보인다. 大臣 蘇我稻目(소가노이나누)와 馬子(우마꼬)가 東漢氏를 이용했던 사실은 재언할 필요가 없겠다.

이에 비해 秦氏들이 본거지로 했던 山背지역은 東山道, 北陸道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이긴 하지만 정치상의 중요성은 南大和에 비해 한 두 단계 낮다. 이로 인해 秦氏들과 정치와의 관계도 깊지 않다. 6세기 代에서는 紀異郡 深草 사람 秦大津父가 欽明朝에 大藏省에 出仕했다고 日本書紀 欽明 前紀가 전하고 있는 것 등이 유난히 눈에 띈다 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되다가 推古朝에 葛野郡의 秦造河勝이 聖德太子를 측근에서 보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日本書紀 추고11년 11월 條).

秦氏들이 일찍부터 大藏업무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8, 9세기의 史料에 秦氏들이 大藏省 官人이 되어있는 사례가 종종 보이고 있는 점과, 秦大藏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 등 때문에 인정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또한 秦氏들이 본거지인 山背지역에서 水利事業(葛野大堰의 築造 등)을 실시하여 농지개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현지 유력자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핵심에 관여할 수 있는 지위로부터는 멀었으며, 東漢氏들이「7가지 不可를 犯하여」朝廷으로부터 경계를 받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비정치적인 씨족이었다. 殖産的인 씨족들이었다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국 秦氏 氏族의 성격론으로 옮아가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본론으로 되돌리면 東漢氏들이 야마도정권과 관계가 깊은 대단히 정치적인 씨족이었다는 것이다. 그 계통 사람들이 備中지역과 그 인접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을 제철기술 쪽으로만 설명해서는 충분치 못하며, 거기에 그들이 분포하기에 이른 정치적인 사정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備中지역과 야마도 정권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 양자를 결부시킴으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備中의 豪族인 下道(시모쯔미찌)氏들이다. 吉備 지역의 유력 씨족은 日本書紀 應神 22년 9월 條의 祖先系譜 기사에 의하면, 下道, 上道(카미쯔미찌), 香屋(가야), 三野(미노), 笠(카사), 苑(소노)의 여섯 씨족(모두 臣姓)들이 있었는데, 古事記 孝靈段에서는,

故, 此大吉備津日子命者 "吉備上道臣之祖也". 次, 若日子建吉備津日子命者 "吉備下道臣, 笠臣祖".

로 되어 있어, 上道, 下道, 笠의 세 氏姓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필시 古事記가 편찬된 天武 - 元明朝(7세기 말-8세기초)에서는, 吉備 지역의 여러 씨족들 중 이 세 씨족이 우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天武 13년 11월에 朝臣들에 대한 姓氏 下賜에 끼이게 된 52 氏姓(그 가운데 臣姓 씨족은 39氏姓) 가운데 下道臣, 笠臣 두 氏姓은 보이지만, 上道臣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사된 52개 姓氏의 서열을 보면, 下道氏는 40위, 笠氏는 52위이다. 이것을 새겨보면, 天武朝에서의 상기 3씨족의 세력순위는,「下道臣, 笠臣, 上道臣」이 된다.

奈良시대에는 朝臣姓을 得한 笠氏가 활동해 下道朝臣 眞備가 등장할 때까지는 下道氏를 압도할 정도의 활약상을 보였지만, 上道氏는 天平寶字 원년에 朝臣姓을 得할 때까지는 臣으로 머물러, 역사상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원주18) 전에 備前지방의 유력 호족이었던 上道氏가 備中의 유력 호족인 下道氏와 笠氏의 전철을 밟지 않았던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덧붙여 말하면, 上道氏와 下道氏가 각각 備前지방과 備中지방의 유력씨족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備前에 上道郡, 備中에 下道郡이 있었다는 데 있다. 笠氏들의 본거지에 관해서는 확증이 없지만, 備中國 小田郡에 笠岡이라는 지역이 있는 것과, 日本書紀 仁德 67년 條에, 吉備中國에 笠臣의 조상 縣守라고 하는 용감한 인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備中의 호족으로 생각된다.


<> 吉備의 反亂에 대한 傳承

上道, 下道, 笠의 3 씨족 가운데 上道와 下道에 대해서는 유명한 反亂傳承이 있다. 새삼 그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할 것까지는 없지만, 上道臣에 관한 것은 日本書紀 雄略 7년 是歲 條와 淸寧卽位 前記에 보인다. 그에 따르면 雄略천황은 吉備의 上道臣인 田狹의 처 稚媛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는 田狹을 任那의 國宰로 임명하고는 稚媛을 寵幸했다. 田狹은 任那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신라에 원조를 청했다. 천황은 田狹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 直赤尾에게 신라를 토벌할 것을 명했는데, 두 사람은 우선 백제로 건너가서 거기에 체류했다. 田狹은 사람을 弟君에게 보내「너는 백제에 웅거하며 일본에 대항하라, 나는 任那에서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고 했다. 弟君의 처 樟媛은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는데 이 얘기를 듣고 남편의 모반을 증오하여 그를 살해했다.

雄略 7년條는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田狹의 그 후의 동정은 不明하지만, 7년條의 分註에 인용한 一書가 이렇게 전하고 있다.

田狹臣婦名毛媛者, 葛城襲津彦子, 玉田宿 之女也. 天皇聞 貌閑麗, 殺夫自幸焉.

田狹은 雄略에게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다.

淸寧前紀의 기사는 말하자면 그 후일담이다. 雄略이 죽고 淸寧이 그 뒤를 이을 때, 稚媛이 雄略의 妃가 되어 출산한 星天皇子가 반란을 일으켜 大藏官을 탈취했다. 이 소식을 들은 吉備 上道臣은 星天황자를 구하려고 船師 40척을 이끌고 大和로 향했는데, 星天황자가 大連大伴 室屋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기 때문에 도중에서 배를 돌렸다. 淸寧은 사자를 보내 上道臣을 문책하고 그가 다스리는 山部지역을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사건의 개략이다.

備中의 下道臣 사건은 반란과 모반 이전에「천황」에 대한 불경죄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日本書紀 雄略 7년 條에 보이는 吉備 下道臣 前津屋(分註所引의 "或本"에서는 國造吉備臣山으로 나옴)이 小女를 천황이, 大女를 자신이 골라 서로 싸우는데, 小女가 이기는 것을 보고 그녀를 살해하고, 작은 수탉을 천황의 닭으로 하고, 큰 수탉을 자신의 닭으로 하여 싸움을 붙였는데, 작은 수탉이 이기는 것으로 보고 역시 그것을 죽였다. 천황은 이것을 알고 物部 병사 30명을 보내 前津屋과 그 씨족 70명을 주살했다고 한다.

이런 전승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심되는 점이 많다. 특히 前津屋의 이야기는 物語風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備中國大稅負死亡人帳」에 의하면, 備中國 都宇郡 美和鄕에 物部藥이, 同郡 白髮部鄕에 物部赤猪과 物部田人이, 同國 賀夜郡 葦守鄕에 物部大海이, 그리고 同郡 多氣鄕에 物部得安과 物部阿曇이 거주했으며 또한 賀夜郡 多氣鄕에 物部里가 있었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이 지방에 物部가 파견 혹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下道臣이 있었던 시기에 야마도 정권에 의해 제압된 것은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上道氏에 대해서는, 田狹이 葛城襲津彦의 손녀를 아내로 삼고싶다고 쓴 편지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왜냐하면「和名抄」에는 備前國 赤坂郡에 葛木鄕이 있었다고 하는데다가, 平城跡에서 출토된 木簡에,

(表) 須惠鄕調 三斗
(裏) 葛木마小黑

으로 되어있는데, 須惠鄕은 備前國 邑久郡으로 추정되며, 備前과 葛城氏와는 전혀 無緣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연대는 내려오지만, 延喜8년에 周防國 玖珂郡 玖珂鄕 호적에 葛木有町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正倉院에 소장돼 있는 調X墨書 중 하나에,

伊子國 越智郡 石井鄕 戶主 葛木部龍調X "六丈" 天平十八年九月

로 되어 있고, 平城宮跡에서 出土된 木簡 하나에는,

(表) X岐(讚力)國 山田郡 海鄕.......
(裏) 葛木部 龍麻呂ㅁㅁㅁㅁ斗

로 되어 있다. 이런 史料를 즉시 葛城氏와 연결시켜도 좋은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겠지만, 葛城部를 仁德황후 磐之媛을 위해 설치한 部라고 하는 日本書紀와 古事記의 전승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葛城氏가 應神 . 仁德에서 시작하여 이른바 河內정권으로 자라 瀨戶內海 일대에 세력을 확대했다고 하는 추정은 꽤 개연성이 높으며, 이런 점에서 나는 上道氏와 葛城氏와의 결합을 인정하고싶은 것이다.

吉備지역의 製鐵이 上道氏의 본거지인 備前지역에서 시작하였다고 하는 前述한 추측에 따르면, 上道氏는 鐵을 배경으로 하여 下道氏 보다 더 빨리 有力化 했을 것이다. 5세기 代에 瀨戶 內에 진출해 온 葛城氏가 上道氏와의 결합을 획책했다는 추정에 모순은 없다. 그러나 葛城氏와의 연합은 上道氏의 세력을 한층 더 높였을 테지만, 葛城氏의 몰락 - 「記.紀」에 따르면 雄略朝 初年 - 은 上道氏의 쇠퇴를 불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日本書紀에 기록돼 있는 上道氏 반란의 내용에는 의문점도 있지만, 葛城氏의 몰락과 함께 上道氏도 세력을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 6세기의 吉備氏와 韓半島

吉備지역의 上道, 下道 양 씨족의 반란 傳承을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吉備 豪族의 성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한다.

5세기 말경에 上道氏가 葛城氏의 뒤를 이어 세력을 잃게 된 후 下道氏가 備中지역의 철생산을 배경으로 대두했다. 야마도정권에서는 5세기 말경부터 大伴, 物部 두 씨족이 大連(오오무라지)으로서 세력을 잡게 된다. 이 두 씨족 가운데 物部氏가 葛城氏 대신 瀨戶內海에 세력을 떨치고 前述한 바와 같이 新興의 下道氏를 제압했을 것이다. 吉田晶씨가 작성한 吉備 지역의 部의 분포표를 보아도, 6세기 代 야마도정권의 유력 호족과 관계가 있는 部는 物部 이외에는 거의 없고 大伴部는 한 건도 없다.

그러나 下道氏는 6세기에 세력이 소멸한 것이 아니고, 物部氏의 세력하에 들어가 야마도 정권에 종속하였으며, 그들의 유력한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下道, 上道를 포함하여 吉備지역의 제 씨족들이 畿外의 호족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직접 君의 카바네(天武천황때 제정된 씨족의 尊卑를 구분한 칭호)로서가 아니고 臣의 카바네를 가졌던 것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6세기 이후 필경 下道臣氏는 上道臣 이하 吉備 지역 제 씨족들의 중심적인 지위를 점했을 것이다. 아래와 같이 繼 朝와 欽明朝에 吉備氏가 任那에 왕래했던 것을 말하는 기사가 日本書紀에 이따금씩 보이는데, 그 대부분이 下道氏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繼 24년9월 吉備韓子那多利 . 斯布利
欽明2년4월 吉備臣(任那 日本府)
欽明5년3월 吉備弟君
欽明5년11월 吉備臣(日本府臣)

이렇게 보게 되면, 앞서 문제가 됐던 上道氏가 下道氏의 하위에 들어가게 된 사정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오히려 7세기에 下道氏가 上道氏보다 유력해졌다고 하는 사실은 양 씨족의 隆替에 관한 上記의 추정을 보증하는 것이다.

笠臣에 대한 史料는 적지만, 이 씨족은 원래는 備中지역의 하나의 小호족인데, 岩本次郞씨의 설명에 따르면, 大和改新 후 笠臣 垂가 吉野山中에 은거해 있던 古人大兄황자의 모반을 고발한 바람에 출세기회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垂는 그 후 大錦下라는 고위직에 올랐으며, 功田 20町을 하사 받았다고 續日本紀 天平寶字元年 12월 條에 보인다. 이리하여 笠氏는 吉備지역 제 씨족들 중 下道氏 다음가는 지위를 획득하고, 賜姓 52씨족의 최하위에 들어가, 朝臣인 카바네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것 뿐이었다면, 上道氏 보다 하위의 지방 호족으로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下道氏를 주체로 하는 吉備씨의 任那 진출이 있었는데, 같은 繼 , 欽明朝에 백제, 任那에 왕래했던 씨족은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物部氏
物部至至連(繼 9년2월), 物部伊勢連(繼 23년3월), 物部施德麻奇牟(欽明4년9월), 物部奈率用奇多(欽明5년2월, 11월, 同6년5월)

河內氏
河內直 . 加不至費直(欽明2년7월), 河內直(欽明5년2월), 河內部阿斯比多(欽明13년5월, 同14년 정월)

紀臣
紀臣奈率 麻沙(欽明2년7월, 同4년4월, 同5년2월, 3월, 11월)

的臣
的臣 . 烏胡跛臣(欽明5년3월, 同14년8월)

이상이 吉備臣과 거의 같은 시기에 任那와 백제에 체류 또는 왕복했던 주요 씨족들인데, 이 외에 津守連, 膳臣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야마도 정권을 구성하는 이른바 중앙씨족이다. 吉備臣은 任那에서 그 곳 씨족들과 거의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했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지만, 吉備臣이 야마도 정권과 관계를 가지고 한반도 남부와 交通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6세기의 下道氏는 야마도 정권과 꽤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漢氏계 도래인들이 야마도 정권과의 관계가 깊어진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史戶氏는 漢氏계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姓氏으로 보아 야마도 정권과의 관계가 깊은 씨족이다. 이러한 漢氏계를 주로 하는 渡來系 여러 씨족들이 備中지역과 거기에 인접한 備前 津高郡 많았던 것도 중요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이 備前, 備中 지역에서의 도래인들의 분포의 특성에 관한 나의 견해의 大要이다. 6세기 이후 備中지여에 많이 거주한 漢氏계 도래인들이, 製鐵 이외에 下道氏 등 備中지역의 호족세력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에 관한 논의는 별도의 기회를 봐야 할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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