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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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우리들에게 어떤 나라인가? 한때 우리 나라에서 좀 앞서간다는 지식인들(특히 사상, 문화 예술계 인사들) 치고
프랑스 지식인들의 언설 몇 마디쯤 인용 안 하면 아예 말이 되지를 못하고 글이 되지를 못한 때가 있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언행은 그대로 공자님
언행이었고 타산지석으로 삼을 원본이었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프랑스 아무개가 그것과는 다르게 말했노라며 몇 마디 인용을 해
오면 그만 오금을 못 펴고 쑥 들어가 버릴 정도였다.
지금은 그러한 기운이 미국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한가지 특이한
것은 진보파 지식인들은 아직도 예의 그 프랑스 언설을 전과 다름없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모 진보계 신문에는 아예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언설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고정 칼럼까지 있다. 그 칼럼은 무슨 신기한 계시나 되는 것처럼 열심히 프랑스 좌파의 동정을 전하고
있던데, 글쎄, 지식인 사회에서 그 반응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 같이 뒤처져 있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객쩍은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오래 전에 번역해 두었던 이 글을 이 곳에 올리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어쩌면 그 칼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쌍팔년도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나 싶은 생각이 간혹 그 칼럼을 읽으며 굴뚝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자동차로 두어 시간만
가면 프랑스 국경에 닿는, 프랑스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곳에서 몇 년간을 보내며 프랑스를 '내 집처럼' 드나든 적이 있다. 걸핏하면 전국
트럭조합 노동자들 등이 프랑스의 중요 고속도로를 다 막아버리며 시위를 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해 애를 먹은 적도 많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길을 막고 시위를 하지 않나, 합법적인 통관을 거쳐 프랑스로 들어가는 이태리산 포도주 수만 리터를 실은 자동차 행렬을 프랑스
포도재배 농민들이 강제로 세워서는 길에다 모두 쏟아버리지 않나, 그런 불법에도 중앙정부는 속수무책이지 않나...... 역시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이 충분히 일어날 만한 혁명의 나라구나 싶어 솔직히 정나미가 떨어진 기억이 있다. 이러한 기억들 역시 이 글을 이 곳에 올리는 데 일조를
한 것 같다.
이 글은 Foreign Affairs지 98년 5/6월호에 게재된 Dominique Moisi의 논문, The
trouble with France를 완역한 것이다. Dominique Moisi는 98년 현재 프랑스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이며,
Politique Etrangere지 주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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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고민
미국
사람들은 프랑스라고 하면, 아름다운 나라, 가장 우아한 도시 빠리, 프랑스말의 매혹적 억양, 그리고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떠올리는데, 그렇게
매력적인 나라가 어떻게 자기들의 동맹국(미국)을 그토록 짜증나게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저런 문제를 두고, 설사 그것이 국제 외교적인 범주에 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미국이 하는 일이라면 항상 반대부터 하고 나오는 것처럼 비친다.
프랑스의 조심스런 말로 된 외교적 성명서의 행간에서도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연 하는 자세에 대한 뚜렷한 불쾌감이 베어 나오고 있으며, 문화에 관한
문제에서도 프랑스는 항상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첫 번 째 나라에 들어간다.
최근에는 페르시아만에서 프랑스-미국의
불화가 거의 눈에 띄게 표면화되고 있는데, 그곳에선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 - 이락과 아란에서의 - 가 미국의 안보적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이처럼 가시가 숭숭하여 다루기 힘든 프랑스의 자세를, 골리즘(Gaullism)의 유산 탓으로 치부하고
있는데, 골리즘이라면, 프랑스가 20세기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는 드골이 상속한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자산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선,
미국에 대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외에 아무도 골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조차 모르고 있다.
실제로 빠리로부터 나오고 있는,
곧잘 남의 속을 확 뒤집어 놓곤 하는 행동은, 프랑스가 단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 자신의 지위와 위상에 확신이 서지 않아 대단히 기분이 나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근사한 설명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프랑스가 자신감이 점점 더 없어질수록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새벽이 열리는 시점에서 프랑스는 네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이 프랑스 특유의 멜랑꼬리와 혼합돼
프랑스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글로벌리제이션이다. 프랑스사람들은 곧잘 이것이 프랑스문화를 부식시키고, 고율의 실업을 양산해
내고 있는 불유쾌한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지난 해 빠리의 가장 유명한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는 "경제적 공포 - 글로벌리제이션 병에 대한 격렬한
공격 연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둘째는 국제 시스텀의 단극적(單極的) 성격이다. 이 시스텀 안에서는 미국이 리더이고 한때
의기양양하던 프랑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셋째는 유럽 통합이다. 이 통합은 프랑스의 목소리를
잦아들게 할 위험이 있다.
넷째는,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한데, 프랑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전이다.
프랑스가 이러한, 그리고 또 다른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결점들부터 극복해야 한다. 장 마레 러팽의 우익 국가전선(National Front)당의 상승이 프랑스의 국내적인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프랑스는 본질적으로 그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 중간에 머물기가 쉽지
않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는 사이즈가 문제가 된다.
만약 작은 것이 아름다워 좋다면, 큰 것은 강력해서 좋다. 그러나 중간 것은 이도 저도 아니고 어중간하기만 해서 처치곤란이다. 인터넷,
정보기술, 그리고 글로벌 이코노미라는 또 다른 장식물들이 미국의 구심점을 강화시켜줄 수 있고, 싱가폴 같은 조그마한 도시국가의 강점을 증가시켜줄
수 있지만, 프랑스 같은 중간 사이즈의 국가들에겐 때때로 낭패감을 주고 있다.
프랑스의 특별한 강점은 그의 문화와 유산인데, 이러한
것들은 지금은 닳아 해지고 있고, 미국을 색다르게 보이게 하는 "세계문화(Univeral Culture)"로 대체되고 있다. 만약 프랑스가
신흥국가여서 그의 틀이 덜 굳어 있고, 과거로부터 온 오랜 전통이나 이미지의 무게에 짓눌려 있지 않다면, 차라리 프랑스는 잘 적응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는 일종의 고대 국가이다. 오랜 역사를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으며, 그것을 현대세계의 요소와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들 위에 그것을 단지 얹어만 놓았을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잡동사니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프랑스의 가장 인기 있는 컴퓨터 게임은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기한 하이테크가 아니며, 루이 14세의 궁전의 장관을 보여주는
"베르사이유"라 불리는 드릴러물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미국은 크고 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개방돼 있다.
프랑스 사회는 폐쇄돼 있고 굳어있어 - 다른 나라들로부터 가장 좋은 기술을 끌어오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자기도 모르는 새 프랑스의 기술이
미국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에이즈 바이러스의 공동 발견자인 Luc Montagnier 박사는 지금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미국으로 간 것은 프랑스에서 그가 근무하던 파스테르 연구소에서 정년으로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본질적인 메시지와 프랑스 영화가 고집하고 있는 고전적인 전형을 비교해 보라. 프랑스영화는 항상 A가 C를 사랑하는 B를 사랑하고, B는 D를
사랑하는 C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비극으로 끝난다는 식이다.
미국의 유연성은,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 온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용광로 역할의 성공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노래는 본질적으로 아프리칸-아메리칸 타입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탤리언-아메리칸 핏자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먹고, 온 세계의 어린이들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동유럽출생 미국 유대인이 만든 영화를 즐기고 있다.
미국
액센트의 영어가 세계언어로서 우리들이 가장 가까이 두고 잘 활용해야 할 언어가 되었으며, 한편 프랑스어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늘려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로 뭉쳐진 세계를 꿈꾸며 언어학적인 보호장벽을 치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는
대신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지금 보존하기 위해 찾아야 할 것은 - 일단 언어싸움에서의 패배를
인정한다면 - 자기 메시지의 내용과 독창성이지 어중간한 중간 매개물이 아니다.
프랑스의 글로벌리제이션과의 싸움은 국민들의 높은
생활의 질 때문에 복잡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프랑스사람들은 자기들 나라의 아늑한 공간과 아름다운 풍경, 그들의 음식과 포도주의 질을 떠올리고
그리고 전통에 대한 존경심을 들먹이며 글로벌리제이션으로부터는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느끼고 있다. 글로벌 세계에서 불확실한 경쟁을
하기 위해 왜 이런 독특한 즐거움을 빼앗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을 크게 유혹하고 있는 것은 즐거운
생활의 보호막 속으로 은퇴하는 것이다.
<> 자이언트를 넘어뜨려야
냉전의 종식은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질시를 강화시켰을 뿐이다. 그들은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이 되고 워싱턴이 국제 공동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으시대는 꼴이 못내 눈꼴이 사나운
것이다. 실용주의적인 영국이나 역사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독일인들과는 달리, 프랑스인들은 그들 자신이 미국과 같이 유니버설 메시지를
전달할 사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과 같이 프랑스도 "인간의 권리",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에
대한 개념의 근원지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프랑스사람들의 좌절감은 미국이 프랑스에게 보이고 있는 친절한 무시, 무관심, 가벼운 짜증의
결합으로 악화되고 있다. 구 소련이 보였던 단합된 위협이 사라짐으로써, 프랑스-미국의 긴장은 서로 이해관계를 나눔으로써만이 풀어질 수 있다.
단기간으로는 프랑스의 미국에 대한 시샘은, 프랑스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다른 맴버들을 가진 통합 유럽이 프랑스에게 줄 정치적 압박으로 인한
거북스러움을 경험해봐야 어느 정도 풀릴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의 비밀스런 꿈 - 미국에 도전할 하나의 유럽 건설 - 이
그들의 대륙 파트너들로선 악몽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중동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더 자주 공개적인 의견 차를
벌림으로써 빠리는, EU의 나머지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런던과 본으로부터의 고립을 오히려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프랑스가
유럽을 미국에 대항하게 만드는 데는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프랑스가 홀로 이락을 지원한다면, 나머지 유럽국가들은
이란쪽을 지원하면서 미국에 대항할 것이다.
안보문제에서 빠리와 워싱턴은 동맹국이며 동시에 경쟁국이다. 비록 워싱턴이 공식적으로
환영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유럽식 외교안보정책을 창조하려는 빠리의 야망이 세계를 리드하려고 하는 위싱턴의 성향과 충돌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국의
장기적인 야망을 위해서는 나토에 다시 가입하고 일부 특별한 위치를 가지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프랑스는 내일의 유럽을
더 강하게 하는 것은 오늘의 나토를 더 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고있다. 이것은, 나토회원국이 늘어날수록 안보에 대한 미국의
독점력이 더 강화되기 때문에 프랑스로선 입에 쓴 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이 홀로 그렇게 큰 공약을 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결여하고 있는 이상 다른 대안은 없다. 실제로 프랑스사람들은, 미국이 안보분야에서 유럽 어떤 나라의 간섭도 본질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EU와의
폭넓은 의논도 없이 나토를 확대하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고 있는 것이다.
빠리에서는 페르시아만에서의 가장 최근의
위기에 대한 평화적 해결이 미국의 투쟁성을 누른 프랑스외교의 승리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이 열강의 외교적 화해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미국의 폭격에 대한 그의 두려움 때문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표면적인 승리에 불과했다. 미국과 프랑스가 1970년대에 중동에서 누렸던
멋진 세력 분할은 - 프랑스가 바그다드에서, 미국이 테헤란에서 -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락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의 정책은 대조적이다 -
프랑스는 군사적 방법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고, 미국은 외교적 노력에 대해 별 신뢰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사담 후세인이 다음에 다시 모험을 감행할 때 되살아날 수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라는 위치를
활용하고 있는 프랑스는 제 3세계 국가들에게 제 3의 서방측 목소리로 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선 벤야민 네타냐후의
총리당선과 평화회담의 시간 벌기 작전이 유럽국가들에게 새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했으며, 특히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한 정직한 브로커로서
프랑스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이 이끈 단순히 돈만 뿌리고 다니는 평화회담에 불만을 갖고 있는 프랑스는, 미국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는 선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싶어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단순히 친 아랍적이 되어서는 미국의
친 이스라엘적인 자세와 균형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자국이 평화에 대해 아주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확실한 이득이 생길 것이다. 즉 미국과는 달리, 프랑스는 외교정치의 포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빠리가 평화를 구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촉진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이 프랑스의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경험과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때리기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프리카는 프랑스에서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인구당 계산으로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아프리카에 무상원조를 많이 하는 나라며, 원조면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돈은 아프리카 인민들에게보다는 정부나 지도자들에게 더 많이 간다. 아프리카 경제활동에서의 라이벌인 미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필요한 지정학적 파트너들이다. 미국은 아프리카에 아무런 비밀스런 과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아프리카의 헌병이 될 야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프랑스에게 확신시키고싶어 한다. 실제로 프랑스는 이 대륙의 미래에 대한 관점이 미국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두 나라
모두 전에 자이레인 새로운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역적인 불안을 걱정하고 있다.
<> 다수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
비록 "유럽"(통합된 유럽)이 아직 안보와 외교적인 통합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지만, 경제적 상업적 부문에선 아주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으며, 유럽 단일통화가 실현되면 힘과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다. 이것은 유럽이 미국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데, 통화부문에서만 유독 새로운 극성이 예상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유럽이며 유럽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빠리는 자국의 독립성을 상당부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독일에게 유럽통합은, 어두운 과거의
불쾌한 유산을 지우기 위해, 그들의 나치 과거와의 인연을 단절하는 방법인 나토에의 참여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태리인들에게는 외교적 안정과
그들의 열등감을 잠재우고 자부심을 키우는 데 있어 항상 통합유럽이 그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들 국가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주고 정통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있어 통합유럽 - 여러 가지 모델의 유럽, 이른바 드골이 선호한 연맹 모델에서 프랑시스
미테랑이 추구한 연방형태에 이르기까지 - 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증가시킴으로서 프랑스로 하여금 과거의 영광과 힘을 되찾을 수있는 길, 즉 프랑스
국수주의자들이 갖고있는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이다. 프랑스가 프랑스로 남기 위해서는 유럽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때 권자에 있었던 좌우익
지도자들은 엄격하게 유럽적 신조를 고집했다.
프랑스의 유럽통합에 대한열성은 지금 단일통화의 성취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공통의
유러피언 아이덴티티 창조를 위해, 세계에서 유럽의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경제 파워를 벼려내기 위한 유일한 해답이 바로
유로(유럽 단일통화)인 것이다.
그러나 유럽적 이상을 향한 프랑스의 집착에 대해, 사람들은 불안을 떨어버리지 않고 있다. 어떤
것에는 너무 지나치게 참견하다가 또 다른 것에는 지나치게 무기력한 면을 보이는, 관료적 괴물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한 우려를 넘어, 프랑스사람들은
이 새롭고 거대한 통합유럽 안에서 그들 나라의 장래 위상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마스트리트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 논쟁은 실제로는 독일에 대한 논쟁이었다. 마스트리트조약이, 재통일을 이뤄 강력해진 독일의 잠재적인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보장을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독일을 유럽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주는 것인지? 경제적으로 활력이 붙은 영국과 전에 없이 훨씬 강력해진 독일
사이에서 프랑스가 찌부러질 위험은 없는지?
런던은 별안간 에너지와 활기가 넘쳐흘러, 옛날의 금융강국의 면모를 되찾았다. 한 때
갈라져 있던 베를린은 곧 새 독일의 수도가 될 뿐만 아니라, 새 통합유럽의 수도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빠리는, 일부 프랑스사람들이
우려하듯, 상쾌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프랑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박물관 구실밖에 하지 못하는 하나의 새로운 로마가 될 위험이
있다.
현재로선 프랑스의 최선의 선택은 통합유럽에 대해 립 서비스를 계속하고 유로화를 촉진시키는 한편으로, 통합 유럽의 외교적,
군사적 미비점을 보완한다는 핑계로 독립된 프랑스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교활하고 잔꾀를 부리는 일종의 야누스적 행동이며
그것은 통합 유럽의 장래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 예를 들면, 만약 독일이 프랑스를 흉내내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강력한 독일을 중앙에 두고 있는 확대된 유럽에서 프랑스가 그들의 영향력 행사를 망설이기라도 한다면, 프랑스의
국가중앙집권적인 모델을 새로운 유럽에 적용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한 나오고 있다. 마가렛 대처에 의해 시작돼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영국의 자유방임주의적 경제 모델과 독일의 지방분권적 정부모델은 프랑스의 구식 국가통제주의 모델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라는데
대한 프랑스의 잔걱정도 있고 - 역동적인 경제권에서 직업을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고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는데 대한 우려도
있다. 한 때 프랑스의 자존심이던 국가라는 것이 지금은 조정과 변화에 대한 주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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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곧 프랑스다
프랑스사람들이 그들의 국가에 대해서 하는 행동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부모에 대해서 하는 행동과 같이 반항과 복종이
뒤섞여 있다. 그들은 프랑스의 우둔성과 비 효율성을 비난하면서 아울러 당당한 태도와 자기보호를 이해하고 있다. 사회당에게 권력을 안겨준
1997년 봄의 의회선거는 이러한 상호 모순적인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다. 사회당 지도자인 라이오넬 죠스팽의 승리는, 프랑스 국민들의 대다수가
도덕적 및 정치적 수준에서 덜 부패하고 더 많이 책임을 지는 정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동시에 그 선거는, 국가가 사회의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시장의 영향을 규제하기를 원하고 있는 유권자들의 바램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주간 최고 노동시간을,
많은 기업가들의 바램과는 달리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이려는 죠스팽의 계획은 무딘 경제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르나, 장기간의
노동시간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고 있는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의 감정과 일치되는 것이다. 시장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임의로
직장을 더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시대에 뒤진 것이든 아니든 그들에게는 알 바가 아닌 것이다. 프랑스는 보수적인 국가이며 - 국민들의
과반수는 현상유지에 매달리고 있다.
프랑스사람들의 국가지향성은 사회경직성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노동자들은
영국노동자들보다 기동성이 확실히 떨어진다. 신도시나 마을로 나가 직장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실업상태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가족의 안정성이나 사회생활의 하모니에 기여할지도 모르지만 - 즉 프랑스의 가족들이 일요일에는 항상 할머니의 집에 가서 점심을 하는 유의
안정성 말이다 - 그러나 경제적 다이나미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국가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것의 핵심이 되고 있는 상류층
사람들에게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명문교이지만, 그러나 딱딱한 순종자 공무원들을 길러내는 것으로 유명한 국립행정학교에, 행정 및 정치계급에 대한
대부분의 불만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장기간 권력의 회랑을 독점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공무원들이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도,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것으로 기대하는 진정한 민주적 사회를 영위하는 방법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공격은 앙샹레짐 말기에 그들의 조상들이 그 당시의 귀족들에게 도전한 역사를 그를듯하게 상기시켜준다. 만약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최고위 상류층 사람들이 실업과 사회정의에 대한 회답을 발견할 수 없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왜 이러한 관리들이 책무도 지지
않으면서 특전을 누리고 있는지 물을 것이다.
알렉시스 토크빌 시대이래 프랑스는 개혁이 불가능해 국가를 혁명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돼 왔다. 비록 오늘날의 프랑스에 반항적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는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의 결여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것의 큰 부분이 National Front와 같은 극우파 그룹들의 성공으로 설명되고 있다.
프랑스경제는 실제로 실업자
수가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 즉 산업은 경쟁력이 붙고 있으며, 무역균형도 긍정적이고, 인플레이션도 줄어들고 프랑화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시무룩하다. 그들의 나라는 자체 수입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복지형 국가에서 현대형
국가로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변모하고 있다. 프랑스는 목표지점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있다.
<>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자원과 경제, 통화 및 정치기관들을 준 연방국가 속으로 통합함으로써
동족상잔적분쟁을 초월하려는 유럽의 시도는 지구화시대에 아주 걸맞은 것이 될 것이다. 지방분권주의는 글로벌리제이션의 도전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소국들이 모여 더 큰 국가를 만들고, 더 큰 것은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리제이션은 분열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오늘날 지구세계에서 자기 나라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싶어하는 것은, 일부 국민국가들 사이의 지독한 아이덴티티 추구와 대외강경론적 긴장,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의 피비린내나는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야 말로 이러한 아이덴티티 딜레머에 빠진 국가의 한 완벽한
사례이다. 수십 년간 프랑스사람들은 그들의 우월주의(exceoptionalism)정책과 그에 반하는 정책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오늘날
프랑스는 현대적인 보통의 국가가 되려는 바램과, 프랑스는 결코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믿음에 매달리려는 반대생각 사이에서 전에 없이 괴로워하고
있다. 전자는 개방과 유연성 및 위험 없는 자신의 아이덴티티 추구를 선택한다. 글로벌리제이션에 반대하고 있는 후자는, 점점 더 통합돼 가고 있는
유럽을 우려하고 안티 아메리카니즘을 선호한다. 그러나 후자의 선택은 결코 선택이 아니다. 보호주의는 프랑스를 고립과 쇠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도 더 정치적으로 병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러팽의
National Front에 지지표를 던져, 지방의회에서 높은 의석을 차지하게 한 것은, 프랑스의 인민들이 그들의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들 나라의 높은 실업률과 세계에서 자기 나라의 중요성이 점점 퇴색되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불쾌해진 그들은, 프랑스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소망스럽지만 위험한 시도로 우월주의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도우파는 러팽처럼 대중들에게
영합하는 메시지를 만드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권력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연립정부의
취약성과 싸우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다. 부패 - 그리고 폭로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들 양편 정치가들의 머리 위에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매달려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프랑스의 정치생활을 거칠게 하고 나라를 더욱 불황 속으로 빠뜨리는데 한 몫하고 있다.
이러한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프랑스를 위해 희망은 있다. 우월주의자들이 이득을 볼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한동안 그들은 소수당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National Party는 중앙 의회에서의 유일한 의석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프랑스의 국내문제, 특히 실업이 더욱 성공적으로 처리되고, 러팽과
같은 사람들이 곧잘 이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불만을 줄여가야 할 것이다.
프랑스는 신뢰에 대한 현재의 위기보다도 더 고약한 위기들을
극복해 왔다. 프랑스의 긴 역사는 결국 이 나라의 안정을 보장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나라는, 국민들이 그들의 상상 속의 왕국이 가져올
절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왕국에게 그 모든 것을 곧 양도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빠리 거리에서 대부분 두려워하는 고민거리인
글로벌리제이션이, 프랑스의 쇠망이 아니라 기술을 연마하고 프랑스의 메시지를 일신하는 힘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더 단합된
하나의 유럽은 프랑스를 질식시키지 않고, 프랑스가 혼자서 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훌륭하게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명을 줄 것이다. 의기소침은 사라지고 마침내 프랑스는 번성하게 될 것이다.(끝)
(2001년 5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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