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1) -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모색

이강기 2015. 9. 16. 09:52
    
 

2000년 역사문제연구소 심포지엄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일시 : 2000년 11월 4일 오후 1시~6시

장소 : 성균관대학교 경영관 계단강의실

역사문제연구소



   세부일정                   



□ 1부  남한 민중의 전쟁경험 □


총론 :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모색

  1  : 마을에서의 전쟁 경험 - 경기도 지역의 마을사례를 중심으로 (이용기, 서울대)

  2  : 민중의 전쟁인식과 ‘인민의용군’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사회 : 임대식(서울대)

토론 : 김귀옥(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정해구(성공회대)



□ 2부  북한 민중의 전쟁경험 □


  3  : ‘반동‘ 이데올로기와 민중의 선택 -‘치안대‘와 그 이후 (김재용, 원광대)

  4  : 전쟁피해와 북조선사회의 변화 (이신철, 성균관대)

사회 : 임대식

토론 : 김성보(충북대), 김연철(삼성경제연구소)



□ 3부  종합토론 □


사회 : 임대식

토론 : 김동춘(성공회대), 발표 토론자 전원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모색



역사문제연구소 ?전쟁과 민중? 연구반



1.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그 동안 우리는 수도 없이 ‘6?25’ 에 대해서 들어왔지만, 정작 이런 당연한 질문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50년을 지내왔다.

오랫동안 국가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독점하고서 ‘북한공산괴뢰집단의 불법적 기습남침’과 ‘북괴군의 잔악한 양민학살’만을 말할 수 있게 했고, 이 때문에 오랜 동안 한국전쟁에 관한 진지한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6?25’라는 개전 문제만이 중시되었고, 거기에는 이미 ‘반공’의 잣대로 걸러진 뻔한 대답이 내려져 있었다. 이러한 한국전쟁 연구는 체제정당화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연구는 1980년대에 민중적?민족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소장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기존의 보수반공 일변도의 연구경향을 비판하면서 ‘변혁적’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전쟁을 해방 직후 분출된 민중의 혁명적 열기와 관련시켜 ‘해방8년사’라는 일관된 맥락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라는 문제를 넘어서 전쟁의 기원과 전개,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한 이해로까지 나아갔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접근법을 고수했는데, 이 점은 냉전질서가 강고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에 관계없이 공유했던 시대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1990년대의 세계사적 전환과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했고,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는 ‘제3의 시각’이 제창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도 그 내용적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주제 면에서 전쟁의 기원, 개전, 점령정책 등에 제약되었고, 관점에서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라는 모토에 상응하지 못한 감이 있다.

이상과 같은 한국전쟁 연구의 흐름 속에서 민중은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 80년대 이후로 한정해서 보더라도, 민중은 변혁주체로 당연시되어버리거나 국가권력의 정책집행 대상으로 위치 지워져 왔다. 일부 ‘전쟁의 사회사’라는 차원에서 연구가 진척되기도 했지만, 역시 거시적 구조변동의 해명에 제약되어 민중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에 들어서 인권, 평화 등의 문제가 크게 대두하면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전쟁기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민중의 비극성을 밝히는 연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전쟁 체험 당사자인 민중에 주목하고 그들이 당한 비극과 고통을 정면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민중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수동적 존재로만 파악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2. 


본 심포지엄은 한국전쟁을 거대한 구조변동이나 권력 담당층의 의도에 제한되지 않고 체험 당사자이자 능동적 행위자인 민중의 경험과 인식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려는 취지에서 준비되었다. 이를 위해 이번 발표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일상적 삶을 살아가던 민중이 전쟁을 어떻게 맞이하고, 인식하고, 경험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의 삶의 공간인 마을 단위의 움직임과 청년층 대다수가 생존의 문제로 겪었던 ‘인민의용군’ 문제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시적 생활공간인 마을 단위의 분석을 통해서 추상적인 민중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들의 전쟁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동안 침묵을 강요당해 온 인민의용군 문제를 통해 당시 청년층의 전쟁 인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간의 자기정당화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단초를 제공해 줄 것이다.

둘째, 전쟁 과정에서 북한 민중은 어떻게 국가와 대면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는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자발성과 강제성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민중이 국가와 동일시되거나 국가의 착취대상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결국 북한 사회에도 당연히 존재하는 국가와 민중간의 결합과 균열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본 심포지엄에서는 전쟁피해를 매개로 국가와 대다수 민중의 결합이 강화되는 이면에 ‘민중의 국가’에서 ‘국가의 민중’으로 역전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음에 주목한다. 또한 치안대와 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반동 이데올로기’로 구조화되어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을 살펴 본다.


3.


민중의 경험을 중심에 놓고 한국전쟁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동안 전쟁에 대한 기억을 독점해온 국가의 공식적인 설명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분명 민중은 국가가 규정해 놓은 방식으로만 한국전쟁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에 대한 답변이 한마디로 정리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것은 민중의 전쟁 경험 자체가 한 마디로 규정될 수 없는 복잡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이것을 주목하는 연구가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양한 민중의 복잡한 경험을 인식한다는 것은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민중을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식한다면, 힘들지만 가야할 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번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고민했고 앞으로의 과제로 남겼던 점 몇 가지를 제기해본다.

먼저, 민중의 한국전쟁 경험은 일제말기 전시총동원체제의 경험과 함께 이해되어져야 한다. 두 전쟁은 성격에서 많은 차이를 갖지만, 한편으로는 근대적 총력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이 대부분 동일 세대이다. 따라서 두 전쟁의 경험을 비교함으로써 한국전쟁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과 근대 전쟁의 일반성을 동시에 시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한국전쟁 연구가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이 강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작업은 필요하다. 또한 전시체제기의 민중 경험이 어떻게 한국전쟁에 이어지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한국전쟁이 한국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다음으로, 전쟁의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연구에서도 지금까지 소외되어 왔던 ‘소수자’의 전쟁 경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인 여성의 전쟁 경험은 특히 시급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전쟁은 극한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며, 이럴수록 남성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의 일차적인 피해자는 여성이 된다. 전쟁기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국가폭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자 지금까지도 강하게 살아있는 남성중심적 위계질서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할 것이다. 또 최근에야 사회적으로 그 존재가 의식될 정도로 묻혀왔던 월북자?‘부역자’?의용군 가족, 그리고 귀환포로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 역시 시급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민족화해와 통일이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나아가 함께 공유할 인식의 기반을 넓혀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면,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를 좁혀 가는 작업도 힘들지만 중요할 것이다. 아직 남북간에 전쟁에 대한 호칭조차 이데올로기적이고 어느 한 측의 시각만이 투영된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잠정적으로 사용해 온 ‘한국전쟁’ 역시 ‘대한민국’의 입장만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 있어 용어 문제는 비단 전쟁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남한, 북한, 남조선, 북조선 등 서로에 대한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호칭을 비롯한 많은 영역에 걸쳐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계의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마을에서의 전쟁 경험

- 경기도 지역의 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



이 용 기

서울대, 한국사


1. 들어가며 : 문제의식과 방법론

2. 전쟁 전의 마을

3. 두 마을의 전쟁 경험

4. 전후 새로운 질서의 모색

5. 나오며 : 함의와 전망

 

1. 들어가며 : 문제의식과 방법론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민중은 끊임없는 투쟁의 필연적 귀결로 전쟁을 맞이했고, 그 패배로 인해 ‘변혁역량의 궤멸’을 경험했는가? 아니면 전쟁은 느닷없이 닥쳐와서 민중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고 이들을 ‘피해대중’으로 만들었는가? 양측 모두 진실의 한 면을 보여주지만, 전자가 ?전쟁=계급투쟁, 민중=변혁주체?로, 후자가 ?전쟁=국가폭력, 민중=희생자?로 단순화시킨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필자는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민중의 일상적 삶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민중에게 한국전쟁은 한바탕의 비극적인 해방굿일 수도, 끔찍한 공포의 기억일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것은 일상적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민중의 일상성과 한국전쟁이라는 극적인 사건의 맞물림을 보기 위해,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인 ‘마을’로 들어간다.1) 마을에 초점을 맞춘다면, 거기에는 마을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질서와 관계가 펼쳐져 있고, 내부의 중층적인 위계 및 권력관계가 존재하며, 국가권력과 마을의 결합 방식이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마을 내의 복잡한 인적 관계망과 일종의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한 격심한 사회변동 역시 이러한 마을의 내적인 결을 타고 작동한다.

민중/농민들의 한국전쟁 경험 역시 일차적으로는 ‘마을’이라는 장을 매개로 형성된다. 민중은 이전부터 살아오던 일상적 삶의 공간 속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하고 경험했으며, 그것이 아무리 파국적이었다 할지라도 민중에게는 새로운 조건에서 살아가야 할 일상적 삶의 공간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마을에서의 전쟁 경험’을 살펴보되,2) 다음의 두 가지 점에 집중하겠다. 첫째, 민중의 전쟁 경험을 가급적 생생하게 드러내되, 전쟁과 마을 내부의 인적 관계망과 권력관계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즉 전쟁은 어떻게 기존의 마을질서3)를 타고 작동하며, 그 마을질서는 사회적 격동을 경과하면서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를 해명한다. 둘째, ‘사건사로서의 한국전쟁’ 경험을 넘어서 일제말기에서 한국전쟁 직후에 이르는 ‘사회사적 시간대’를 설정한다. 이는 일상과 전쟁의 맞물림을 살펴보기 위한 것인 동시에, 전시체제기 이후 본격화되는 국가와 민중?농민의 제도적 결합관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조사대상은 경기도 강천군의 두 마을이다.4) 이번 발표문의 조사대상이 된 오두리와 반포리 두 마을은 강천군의 일반적인 특성5)을 공유하면서도, 마을의 성격과 전쟁 경험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반포리가 장씨 집성촌이며 부촌으로 불리던 마을이라면, 오두리는 각성받이 빈촌 마을이다. 그리고 반포리가 전쟁의 피해를 비교적 덜 받은 데 비해, ‘강천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오두리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이 두 마을을 선택한 것은 엄밀한 비교분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본 발표에서는 가능하면 다양한 유형의 전쟁경험을 소개하여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모색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전형성’에 대한 선험적 전제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서기 위해서,6) 두 마을을 함께 다루겠다.

조사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심층면접에 의한 구술사 방법에 의존하였다. 주지하듯이 구술(사)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때로는 일관성이 결여되거나 부정확하기 때문에 이른바 ‘객관성’을 의심받아왔다.7) 특히 아직도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한국전쟁과 같은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사실’―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실―을 듣겠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최대한 구술자와의 긴밀한 신뢰관계를 확보하고 구술내용을 교차검토함으로써 ‘기억의 진정성’에 접근하고자 했지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기록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서 출발해야 한다.8) 이럴 때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제한적이고 험난하더라도 경험 당사자들의 기억과 진지하게 부딪치는 구술사적 방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아직도 문헌사료 중심의 연구에 익숙한/긴박된 역사학계의 일원으로서, 필자가 과연 이번 작업에서 얼마나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제대로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 단편적인 기억들을 얼마나 의미있게 재구성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필자가 조사하고 재구성해본 ‘마을에서의 전쟁 경험’을 이 자리에 내놓음으로써, 민중의 정쟁 경험을 생생하게 추체험하고,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기획과 그것의 실천방법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2. 전쟁 전의 마을


① 일제말기 : ‘위임된 공간’ 내의 위계질서


전시총동원체제가 강화되던 1940년경에 두 마을은 區長을 정점으로 그 아래는 10여호씩을 묶어 만든 애국반(10개, 5개)으로 구성된 일사분란한 동원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시체제는 여전히 최하위 말단기구인 마을(부락연맹)에 대해서는 일정한 내적 자율권을 보장해주고 있었다. 식민권력은 행정력의 한계상 개인 혹은 개별 戶를 직접 통제하기보다는 마을의 유력자인 구장을 매개로 부락을 통제했다. 이 때문에 전시체제기에는 구장의 역할과 권한이 강화됨과 동시에 총동원 임무는 마을 자체적으로 추진?해결하도록 위임되어 있었다.9) 따라서 마을은 식민권력으로부터 일정하게 ‘위임된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그 정점에 서있는 구장의 권력행사 방식은 마을의 특수한 내부구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각성받이 빈촌 마을인 오두리는 구장 ‘이준한의 독권’이 두드러진다. 이준한은 마을 땅의 대부분을 소유한 서울 지주들의 마름으로 마을 사람 대다수인 소작농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했으며, 경신중학 출신으로서의 명성과 방앗간 소유자로서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독권을 행사했다. 마을에 공출?징용?보국단 등이 할당되면, 구장은 호별?개인별 책임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마을 사람들은 행여 소작권을 떼일까봐 그에게 “꼼짝을 못했”고, 이 때문에 “없는 사람들은 만날 있는 사람들 노예니까, 이리 끌면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면 저리 끌려가고”하는 분위기였다. “있는 사람에게는 악착같이 싸우면서도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던 정철희라는 걸출한 인물이 이준한의 독권을 견제하였지만,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것을 무너뜨린다거나 혹은 자신이 마을권력을 장악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 때는 그런 실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반포리는 비교적 중농층이 존재하는 계급구조와 집성촌이라는 특성상 오두리와 같은 ‘독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포리도 지주?마름과 구장의 권한은 상당했지만, 그 권력은 ‘집안’이라는 완충장치를 거쳐서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반포리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다수파에 의한 소수파의 차별과 배제이다. 반포리는 장씨가 혈연적?신분적 관계를 통해 다수파이자 양반으로 군림하고 이들과 인척관계에 있는 집들이 여기에 협조하여 타성≒머슴?‘중인’들을 지배하는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은 모두 굽실굽실”해야 했고, 그것이 싫으면 떠나야 했다. 반포리에서는 전시동원이 떨어지면 반별회의를 하는 ‘민주성’을 보였지만, 부담은 마을질서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중되었고, 심지어 다수파의 담합으로 인해 토박이에게 떨어진 징용을 대신해 타처에서 들어온 ‘뜨내기’가 나간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두 마을에서 강력한 위계질서―‘독권적’이거나 ‘완충적’인 차이는 있지만―가 가능했던 것은 혈연?신분을 중시하는 봉건적 인간관계의 유제도 역할을 했지만, 핵심적으로는 농민을 인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와 구장을 매개로 한 강력한 관의 지원 때문이었다. 특히 전시체제기에 구장에게 ‘위임’된 권한은 마을자율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을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장치였다.


② 해방과 농지개혁 : 위계질서의 동요


두 마을에도 어김없이 해방은 찾아왔다. 마을 밖에서는 강천군 인민위원회와 읍면 단위 치안대와 농민조합이 결성되는 등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움직임이 분출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서도 몇몇 뜻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의 격랑에 뛰어들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은 마을 밖 움직임을 “농사짓기 바쁜데 그런 델 어떻게”라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해방은 단지 추상적인 신국가건설이 아니라 ‘여운형씨가 주도한 3?7제’10)로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혁”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이 때부터 먹고살게” 되었고, 농민들에 대한 토지지배의 힘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을 사람 대부분이 소작빈농이던 오두리의 경우에는 이러한 해방의 의미가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오두리가 속한 갈산면에서는 “기가맥힌” “훌륭한 사회주의자” 박창환, 정철희, 이성운 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삶을 위한 투쟁을 벌여가고 있었다.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살자”는 좌익측의 주장에 오두리 사람들은 공명했고, “정철희 같이 훌륭한 사람이 이게 옳다고 말하니 우리 농민들은 따라”갔다. 그럴수록 오두리와 갈산면은 ‘빨갱이 동네’로 찍혀갔고, 급기야 1947년 봄 공식적으로는 ‘갈산면 폭동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독청난리’11)로 불리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지만, 그 후과는 간단치 않았다. 이 사건은 갈산면 사람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주고 좌우 역관계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을 안에까지 좌와 우를 구분해주는 계기도 되었다. ‘폭동’에 참가했다가 죽도록 두들겨 맞은 사람들은 좌익=빨갱이로, 그 곳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익=“경찰의 앞잽이”로,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마을 내 좌우의 명확한 구분―정치적 구분이기에 앞서 신체에 각인된 구분―은 갈산면 특히 이성리의 끔찍한 전쟁 경험의 전주곡이었다.12)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사건’보다는 그 이면에서 이루어지던 마을질서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위계질서의 기반 붕괴와 오두리의 권력 이동이 그것이다. 3?7제로 위축되었던 지주들은 농지개혁 소문을 듣고 서둘러 싼값에 농지를 팔려 했다. 그마저 살 여력이 없었던 오두리와는 달리 반포리에서는 적잖은 농지가 사전방매되었다. 그리고 “단기 83년” “전쟁 전에”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명의이전과 같은 불법행위가 있기도 했지만, 평생 남의 땅을 부쳐먹고 지주와 마름의 눈치를 보며 살던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작지만 자기 땅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위계적 마을질서를 떠받치던 지주소작관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오두리는 이러한 변화를 더 구체적으로 경험했다. 이전부터 “권세가 있어도 정철희에게 ‘말빤치’로 못 당하”던 이준한은 권력의 원천이 붕괴되어 갔던 반면에 정철희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오두리를 ‘강천의 모스크바’로 만들어갔다. 이준한은 “정철희씨에게 눌렸”고, “자식들이 먼저 좌익으로 돌아가고, 이준한씨도 결국 그리 돌아가고 말았”다. 비록 오두리는 빨갱이 동네로 탄압을 받았고 정철희는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독권’에서 해방되어 정철희가 말하는 “못사는 사람이 잘사는” 길을 함께 걸었던 경험은 전쟁기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

두 마을에서 때로는 미미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나타났던 새로운 삶과 질서를 향한 움직임은, 마을의 범위를 넘어서는 ‘해방공간’의 격렬한 소용돌이를 경과한 뒤 현상적으로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내의 위계적 지배질서는 근저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고, 급기야 한국전쟁을 맞이한다.


3. 두 마을의 전쟁 경험


① 인민위원회 구성


인공 지배 아래 떨어진 두 마을은 인민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인 전쟁 경험이 시작된다. 그런데 인민위원회 결성과정에서부터 벌써 두 마을의 전쟁 경험은 어느 정도 운명지워졌는지도 모른다.

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출옥해 온 반포리의 김철환은 장씨 집안의 핵심 인물 장대용에게 ‘왜정 때 죄과를 씻으라’며 인민위원회 결성을 촉구하고, 마을에서 일할만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책임을 맡긴다. 반포리에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주변부에서의 압력에 의한 중심부=장씨 위주의 인민위 결성이었다. 김철환은 일제시기부터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고 마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13) 마을 외곽인 3區에 사는 가난한 獨姓 인물로서 마을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인물이다. 그는 인민위원회 결성을 사실상 주도했지만, 그 간부를 모두 장씨에게 맡겼다. 타성, 빈농, 머슴, 중인 등 마을질서 주변부의 힘을 동원하여 기성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식을 회피하고, 마을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다수파 장씨들을 앞장세우는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책임자들의 면면을 볼 때, 반포리 인민위원회는 출발부터 ‘혁명’을 추진하기에는 걸맞지 않는 조직이었다.

반면 오두리는 ‘강천의 모스크바’답게 빈농과 머슴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철희는 강천군 인민위원장이 되어 마을을 떠났지만, 그를 따르던 인맥이 면?리 인민위원회에 포진하면서, 오두리의 마을질서는 해방공간으로 ‘복구’되었다. 특히 이장 집 머슴이 인민위원장을 맡은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세상이 뒤집혀졌음을 실감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마을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결성한 것이 아니라, 마을 안팎 좌익 활동가들의 지명으로 조직되었다. ‘모스크바’에도 활동가라 할만한 사람은 별반 없었고, 그나마 개전 직후 보도연맹 학살로 희생되거나 군?면 단위 활동에 많이 나섰기 때문에, 오두리 인민위원회는 상급기관의 지도를 받으며 제반 정책을 처리하는 수준의 활동을 했다고 보인다. 마을 노인들이 인민군 점령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매우 꺼리기 때문에 구체적인 활동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의용군 모집과 토지개혁에 관한 파편적인 진술을 통해 윤곽을 그려볼 수는 있다.


② 의용군 모집


오두리에서 의용군에 나간 인원은 대략 15명 안쪽으로 보이는데, 여기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처음에는 국민학교에서 열린 궐기대회에 참가했던 청년들 중 몇 명이 자원했다. 다음에는 마을 큰 마당에서 의용군 모집이 있을 때, 몇 명이 자원해 나갔다. 그런데 이 때 나간 사람들은 ‘김일성대학을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서 자원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마을별 할당이 내려왔는데, 리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외아들을 제외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비밀투표를 해서 몇 명을 뽑아보냈다. 마지막으로는 핵심 활동가들이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가면서 의용군에 입대했다 한다.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용군’인지 좀 더 확인해야될 부분인데, 마을권력을 장악한 인민위원회 활동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 유형이 주목된다. 즉 인민위원회는 마을 청년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문제를 일종의 ‘공동책임’ 방식으로 풀어갔으며, 선정된 청년들도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따랐다.

반포리도 궐기대회장에서 의용군에 자원한 청년이 세 명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청년들은 의용군 모집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인민위원회를 장악한 장씨들이 “다 집안간인데” “누굴 내보내”냐며 적극적으로 집안 청년들을 빼돌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철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못”했다. 결국에는 의용군 모집을 책임진 민청위원장이 실적 부진을 이유로 의용군에 끌려갈 정도였다. 이런 광경을 일제말기와 비교해보면 마을질서의 변화를 간취할 수 있다. 즉 장씨들은 인민위원회를 장악했지만, 집안 청년이 의용군에 끌려가는 것을 감수할지언정, 예전처럼 장씨 대신 타성, 머슴, 중인 등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장씨만이 아니라 반포리 청년들은 모두 도망다닌 것이다. 인민군 점령으로 인한 정세의 역전은 반포리의 기성 질서를 전면적으로 전복?역전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심부=다수파=장씨에 의한 노골적인 주변부=소수파 차별?배제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③ 토지개혁


두 마을에서는 모두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실시(추진)되었다. 마을 노인들이 기억하는 당시 분위기는 “땅 있는 사람들은 못살게 됐다고 울고불고”했지만, 가난했던 농민들은 “대개(가) 없는 사람들 돕는다 하니까, 그 사람들 호응”했고, 특히 ‘농지개혁’에서 배제되었던 “머슴들은 좋아서 세상 만났”다는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빈농?머슴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점령기간이 짧아서 토지개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점과 이미 실시된 농지개혁의 효과를 고려한다면, 토지개혁으로 인한 민중의 지지 획득은 과장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토지개혁의 실상은 이미 시행된 농지개혁 시의 분배농지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고, 다만 “악질사음과 대지주”(오두리) 혹은 머슴을 둔 “주인”(반포리) 땅을 ‘극빈농’에게 분배한 것으로 보인다.14) 농지개혁으로 이미 자작농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부치던 땅을 그대로 분배받고, 다만 상환을 안 내는” 대신 농업현물세를 냈기 때문에, 토지개혁의 극적인 수혜자는 주로 머슴들로 제한되었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김빼기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토지개혁의 효과에 대해서는 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토지개혁의 마을단위 실행기관인 ‘농촌위원회’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주목해보자.

토지개혁은 좌익측에게는 민중의 지지를 획득할 핵심 사안이었고, 농민에게는 먹고사는 문제이자 마을 사람들간에 몰수?분배가 이루어지는 문제였기 때문에, 양측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대응했다. 점령당국은 마을단위까지 지도원을 파견하고 마을별로 이를 실행할 ‘농촌위원회’를 특별기구로 조직토록 했다.15) 오두리 농촌위원회는 지명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와는 달리 마을 사람들이 직접 7~8명의 위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농촌위원 선출기준과 활동원칙은 바로 ‘공정성’이었다고 한다. 또한 실무과정은 농촌위원회가 담당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호별로 한 명씩 참가하는 마을회의를 통해서 내려졌다. 일제시기에 공출의 전과정을 구장이 독권적으로 처리하던 것에 비춰본다면, 마을 사람들이 토지개혁 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했던 경험은―혹 그것이 형식적이었을지라도―적잖은 의미가 있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사건이 오두리 농촌위원회 활동에서 발견된다. 어느날 유재흠씨는 농촌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면인민위원회로 소환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동분자를 포섭”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인 즉, 유재흠씨는 땅 없는 한 천주교도에게도 토지를 분배하자고 주장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면인민위원회에서는 ‘반동분자를 싸고도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유재흠씨는 자신을 소환한 면치안대장―둘은 동네 친구지간이다―에게 “반동 분자라면 하늘로 올라갈래, 땅으로 들어가느냐? 다 같이 사는 사람이면, 다 같이 토지를 분배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고, 결국 면인민위원회에서도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 하나로 일반화시켜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시사를 받는다. 하나는 공식적 국가기구(의 최말단)인 면 단위와 농민들의 일차적 삶의 공간인 마을=리 단위의 어긋남이다. 면인위에서는 원칙적인 혹은 좌편향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봤다면, 리인위=마을에서는 ‘다 같이 사는 사람이면 다 같이’라는 일종의 대동공동체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마을 단위의 자율성 혹은 공동체성을 공식적인 면 단위에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재흠씨 말에 의하면, 리농촌위원 간에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상급기관의 간섭 없이 자체적으로 해결했고, 이 경우가 특별한 케이스였다고 한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도 결과는 리단위의 입장이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 ‘수복’과 국민병


3개월도 안 되는 ‘인공 치하’는 짧았지만, 그로 인한 후과는 컸다. 이제 ‘부역자’들이 처단을 받을 차례였다. 반포리는 인민위원회 책임자들이 일단 모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고, 이 중 자위대와 농촌위원회 책임자들만 강천경찰서로 넘어가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왔다. 반포리에서 인명손실이 크지 않았던 것은 인민위 활동이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과 더불어 마을 및 집안 사람들의 구명운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좌익 핵심인 김철환은 자수하면 선처를 부탁하겠다는 인민위원장의 제안을 “한번 빨갱이를 했으면 깨끗하게 죽겠다”라고 거절하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체포?처형되었다.

반면 ‘강천의 모스크바’로 소문난 오두리의 ‘수복’ 광경은 처참했다. 60여호의 작은 마을을 완전포위한 군경은 ‘모두 손을 들고 나오라’며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 성인남자 대부분이라 할만한 86명을 지서로 연행했다. 이들은 “똥이 나오도록 두들겨 패는” 혹독한 조사를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이 중 10명 가량은 학살되었다. ‘부역’에 대한 대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핵심적인 ‘부역자’와 월북자 가족들은 모진 핍박을 당했고, 적잖은 수가 마을을 떠나야 했다.16)

반복되는 점령을 경험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국가’의 실체를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전시동원을 통해 그 구성원들을 국가에 긴박시키지만, 특히 경쟁하는 두 국가의 점령이 반복되면서 민중은 ‘줄서기’와 충성을 강요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망각한 사람들, 즉 부역자들은 “사람취급을 못 받았”다. 또 한가지 마을 사람들이 ‘국가’를 체험하게 되는 계기는 제2국민병(국민방위군)이었다.

필자가 현지조사한 마을은 어김없이 성인남자들이 국민병에 동원되어, 강천에서 밀양까지 10~15일 정도를 걸어 내려갔다가 이듬해 4월경에 대부분 귀향했다. 필자는 이러한 조직적인 대규모 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고자 마을 노인들에게 ‘왜 도망가지 않고 그 고생을 했는지’를 물었다. 이유는 대체로 중공군이 쳐내려오니 내려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선전과 개인별로 소집영장이 나왔고 마을에서 다 가는데 빠질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자가 단순한 ‘피난’의 성격을 말해준다면, 후자는 국가와 민중의 관계를 시사한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국가로부터 개인별로 그리고 일괄적으로 호명을 받았다. 일제시기의 보국단?징용?징병만 해도 마을별로 일정한 자율적인 선정이 이루어졌고, 일정 연령대가 일괄적으로 소집된 경험은 미미했다. 그리고 기피와 도피가 적잖게 발생했다. 물론 국민병도 기피자가 있었을 테고 앞에서 봤듯이 ‘피난’간다는 기분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말기에 비해 결코 강력한 행정력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1950년 12월의 대한민국이 20~30대 성인남자를 일시에 대거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재흠씨의 처절한 경험은 이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유재흠씨는 부역자 심판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 국민병 소집영장을 받았다. 그는 일제말기에 징용장을 받고서 도망을 갔던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도, 또 그래서 행군대열에서 홀로 낙오가 되었으면서도, 기어코 밀양까지 내려갔다. 유재흠씨는 “빨갱이다 뭐다 탄압을 많이 받으니까, 겁이 나고, 같은 동족인데도 방위소위니 뭐니 그 놈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했기 때문에 ‘미련하게’ 따라갔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이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민군과 국군의 반복되는 점령에 의해 생겨난 국가에 대한 ‘공포의 충성서약’ 장면을 본다.17) 3달간의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한 편에는 분명 ‘공포의 국가’가 서있었다.


4. 전후 새로운 질서의 모색


전쟁의 화마가 지나간 뒤 반포리는 평상을 되찾았지만, 오두리에서는 ‘천주교의 독권’ 시대가 열렸다. 천주교 두 집안이 이장직과 방앗간을 독점하고 마치 일제시기 ‘이준한의 독권’을 연상시킬 만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천주교도들은 ‘빨갱이 동네’로 소문난 오두리에서 유일하게 ‘官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 말 한 마디 하면 다 붙들어 가는”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제일 무서워해서, 다 근신하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쟁 전에는 불과 3~4호에 지나지 않던 천주교 신도수가 전후 몇 년 사이에 20여 호를 넘어섰다. “그 수하로 들어가면 편하”기 때문에 “그 때 뭐 한 사람은 죄 빨려들어갔”다. 이준한이 그 나마 남은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천주교에 남은 재산을 헌납한 것은 ‘천주교 독권’ 시대의 상징적 일면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역코스 현상에도 불구하고, 마을 안을 미세하게 들여다본다면, 거기에는 이미 ‘넘어설 수 없는 강’을 건넌 새로운 질서와 작동원리가 있고, 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후 마을질서는 위계적 지배질서가 붕괴된 조건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주소작관계가 해체되어 토지를 통한 인격적 지배?서열화는 그 물적 기반을 상실했다. 오두리의 경우, ‘이준한의 독권’이 소작농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마름과 전시체제기에 강화된 구장의 역할에서 비롯되었다면, ‘천주교의 독권’은 물적 재생산 기반이 없이 순전히 “官의 신임”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었다. 반포리 역시 지주나 마름으로서 마을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던 세력의 물적 기반과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특히 장씨 집성촌인 반포리는 고향에 근거를 두고 서울에 진출해 있던 집안 유지들과의 결속이 약해지면서, 타성에 대한 힘의 우위가 약화되는 면을 보였다.18) 바로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반포리에서도 ‘장씨 독주’ 시대가 끝나고 1950년대에는 타성들과 외지에서 갓 들어온 장씨가 마을을 주도한다.19) 그런데 이 보다 더 주목할 부분은 오두리의 ‘제대군인동지회’이다.

전쟁통에 군대생활을 했던 마을 젊은이들은 제대 후 고향에 돌아와, “‘그 동네는 이사도 가지마라, 혼인도 하지마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동네가 쑥밭이” 돼서 “뭘 해본다던가 그런 게 없”는 것을 보고는 ‘제대군인동지회’를 결성한다. 이들 12명은 군대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단체생활의 규율을 익히고, 진취적인 생활을 해봤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제대동지회는 마을내의 독권을 타파하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아 ‘통통방아’를 들여와 천주교 집안의 큰 방아기와 경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조직된 힘과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관권을 동원하는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에게 “압력을 넣어 마을 방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6년에 오두리는 처음으로 이장 선거를 실시해서 제대동지회 초대회장을 이장에 당선시켰다. 이로써 15년간 계속되던 ‘천주교 독권’ 시대는 막을 내린다.

오두리의 사례는 극적이지만,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20) 아직 1950년대 농촌 마을을 충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필자는 ‘방아기 경쟁’으로 상징되는 마을질서의 재편과정을 여러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특징은 다양한 연대를 통한 경쟁과 마을정미소로의 전환이었다. 반포리의 방아기 경쟁에서 장씨들은 집안끼리 결속하지 않았고, 능력 있는 타처출신자가 이끄는 방아기가 뒤늦게 출발했지만 점차 경쟁력을 가져가다가, 결국에는 이들 주도로 마을정미소로 통합되었다. 이제 마을질서는 예전처럼 독권적이거나 폐쇄적인 방식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역동적인 연대?경쟁?갈등을 겪으며, ‘마을정미소’로 상징되는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그렇지만 일견 낭만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마을질서의 재편이 ‘국가-(마을)-농민’ 관계의 재편과 맞물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점을 다시 제대동지회에서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지도력으로 등장한 이들은 ‘30년 전후생’으로, 일제말기에 초등교육이 본격적으로 확장?제도화될 때 ‘국민학교’를 졸업한 첫 ‘세대’이며, 대한민국 국군이 ‘국민군’으로 제도화될 때 입대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은 근대(국민)국가에 의해 근대적인 제도를 통해 형성된 진정한 1세대 ‘국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미 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에 대한 ‘공포의 충성서약’을 강제당한 마을 사람들 혹은 민중 역시 전후 행정?교육?군대 등 여러 가지 국가제도가 강화되면서 명실공히 ‘국민’이 되었다. 결국 전후 새롭게 만들어지던 마을질서는 근대적 교육?군대를 첫 세대로 경험한 사람들의 지도력과 그것을 받쳐주는 ‘국민형성’이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대동지회에서 상징적으로 보인 ‘민중의 역동성’과 ‘근대국민국가의 제도화’라는 두 가지 계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맞물리거나 어긋날 수 있을 텐데, 박정권의 국가주의적 동원에 농민층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던 새마을운동의 핵심 추진력이 바로 이 ‘30년 전후생’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5. 나오며 : 함의와 전망


맺음말을 대신하여, 앞으로의 연구방향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점을 짚어보겠다.

첫째, 한국전쟁은 단순한 계급투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이 아니라 복잡한 요소로 구성된 기성 질서를 타면서 전개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전세의 역전(인민군 점령)이 가져다준 효과를 과장해왔다고 본다.21) 이 시기 기성 마을질서는 전면적으로 역전되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반포리, 삼성리), 계급투쟁이 활발했던 곳이라도 기존의 마을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세력에 의해 주도되기보다는 마을질서의 중심부에 있던 세력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역전’이 가능했다(오두리, 일성리, 이성리). 따라서 ‘계급투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은 제한적으로 봐야하며, 오히려 한국전쟁은―예를 들어 군대 경험과 같은―다양한 요인들과 더불어서 그 의미와 영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일제말기에서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이르는 ‘사회사적 시간대’를 근대국민(국가)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검토할 필요성을 느낀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을 국민국가형성 과정의 전쟁이라고 파악했는데, 국민국가형성 문제를 한국전쟁기에 제한할 것이 아니라 일제말기 전시체제 무렵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마을’을 보았을 때, 일제 식민권력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에서부터 마을단위까지 장악하려 했지만, 특히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는 그것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총동원체제의 최말단 단위인 마을을 매개로 국가에 편입될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 혹은 2등국민으로 다루어졌다. 이 시기는 폭력과 착취가 강화되는 시기임에 틀림없지만, 식민권력은, ‘국민학교’가 상징하듯이, 조선인을 ‘2등’이나마 ‘국민’으로 편제/형성시키고자 했다고 보인다. 일제말기 전시체제와 한국전쟁기의 전시체제는 일관된 맥락에서 파악할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구술사’의 방법과 의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번 작업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구술사는 단지 문헌사료를 대신할 ‘객관적’ 구술사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구술을 통해서는 영원히 ‘객관적 사실’에 도달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면, 우리는 권력에 의해 억눌리고 굴절된 민중의 기억을 드러내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쩌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기억을 ‘객관적’으로만 다루려는 우리의 관성이 그들과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오두리에는 정철희에 관한 ‘신화’가 많다. 그것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신화에 담긴, 과거 ‘모스크바’ 시절에 품었던 오두리 노인들의 염원과 그것 때문에 겪었던 고통, 그리고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망각에 맞서 온 그들의 역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 표 1 : 조사대상 마을 기초사항 】


 

오두리

반포리

일성리

이성리

삼성리

호수

60

120

 

 

 

혈연

각성

1+α

1+α

2+α

3+α

공간

대(각)+소(각)

대(장)+대(장)+소(α)

대(1)+소(α)

대(2)+소(α)

대(2)+소(1)

지주

서울 대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소지주

O씨 대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중소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

경제력

빈촌

부촌

부촌

보통

보통

신분질서

중인 하대안함

중인 하대함

중인 하대?

?

반상차별 약함?

일제시기

구장 독권

다수파의 소수파 차별?배제

다수파의 소수파 차별?배제?

A씨 우위의 경쟁구조

a씨 중심 단결

해방공간

핵심부 좌경화 -> 마을 좌경화

미미

집안내 갈등

두 집안간 갈등

미미

인민위 구성

핵심부 주도

주변인 주도 -> 장씨 책임

O씨 주도 -> 주변인 지지

B씨 주도 -> A씨 타격

외부 주도? -> 주변인 책임

인민위활동력

왕성?

사보타지

왕성?

왕성?

미미

수복후 피해

심각

미미

심각

심각

미미

 

【 표 2 : 두 마을 인민위원회 책임자 및 주요 인물 인적사항 】


 

오  두  리

반  포  리

계급

학력

생년

비고

계급

학력

생년

비고

인민위원장

머슴

무학?

?

수복후 도피

중농

한학

11년

일제말기 구장

서기장

머슴

무학?

?

 

부농

중졸

18년

대청 중대장

민청위원장

빈농

국졸

28년

수복후 처형

부농

국졸?

 

의용군 강제입대

중농

고등과

29년

대청 훈련부장

자위대장

 

 

 

 

중농

간이

20년?

 

중농

간이

21년

대청 훈련부장

여맹위원장

머슴?

무학

 

보도연맹 피학살자 모친. 수복후 처형

 

 

 

 

농촌위원회

빈농

무학

21년

최연소 위원.

지주

 

 

장씨 최고 부자 아들

 

군인민위장

부농

한학

00년

정철희. 폭사. “사흘군수”

면자위대장

부농

국졸

20년

이준한 장남. 월북

면총무계장?

머슴

무학

?

면인위 물자징발 담당. 이준한집 머슴. 행불?

면자위대?

빈농?

무학?

?

강경파. 아들 의용군 자원입대(장교?). 조카 민청위원장. 행불

면인민위

중농?

무학

00년?

이장 처남. 도피후 검거 복역

보도연맹

부농

국졸

21년

이준한 차남

보도연맹

머슴?

국졸

28년

전쟁전 월북. 남파 유격대원. 전향후 정철희家 수발.

모친 리->면여맹장. 동생 의용군 자원.

보도연맹

중농?

한학

많음

“5호대장” 중 한 명.

읍인위 副長

빈농

한학

17년

김철환. 수복후 도피 중 체포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