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3)
‘반동’ 이데올로기와 민중의 선택
- ‘치안대‘와 그 이후 -
김 재 용
원광대, 국문학
1. ‘반동’ 이데올로기의 냉전적 기반 2. 치안대와 반동이데올로기의 생성 및 혼란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
1. ‘반동’ 이데올로기의 냉전적 기반
냉전적 분단구조하의 남쪽 사회에서 ‘빨갱이’ 이데올로기가 끼친 폭력의 실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층 더 분명해지고 있다. 대전에서의 학살을 비롯하여 전쟁 기간에 발생한 폭력의 숨겨진 진실이 최근에 와서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한반도에 불고 있는 탈냉전의 바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전 이남 지역에서는 과거 보도연맹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여 미리 처단하였을 정도로 그 폭력은 이성을 잃은 광기였다.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 벌어진 ‘부역자’에 대한 학살 역시 이러한 흐름에 잇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폭력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빨갱이’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이러한 폭력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남쪽 사회의 모든 민주주의적 노력은 이 ‘빨갱이'이데올로기와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냉전적 분단구조의 해체의 노력으로 하여 다소 덜하여졌지만 국가보안법의 존속이 말해 주듯이 그 힘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남쪽 사회에서 ‘빨갱이’ 이데올로기로 드러났던 이 냉전적 적대감과 그에 기반한 냉전 의식이 과연 북쪽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북쪽 사회 역시 냉전체제에 편입된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쪽과는 다른 형태의 냉전의식이 자리잡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른바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북쪽 사회의 냉전 의식이 북쪽 사회에서 민중들에게 혼란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치안대 문제이다. 해방직후 토지개혁 때 북쪽 사회에서 ‘반동’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민중들은 그렇게 큰 혼란을 겪지 않았던 반면, 전쟁 중에 벌어진 이 치안대 문제는 민중들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촌마을은 토지개혁을 거친 이후에는 내부적으로 갈등이 없었지만, 전쟁 중의 치안대와 그 후의 치안대가담자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내부에 심한 반목이 뒤따랐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쪽 사회의 냉전적 의식인 ‘반동’ 이데올로기의 생성과 그 작동구조를 궁구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한반도에는 탈냉전의 기운이 한층 두터워지고 있다. 남북의 화해와 북미의 협상은 한반도에서 냉전적 분단구조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지속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탈냉전적 분단구조로 넘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펼쳐야 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지난 시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냉전적 적대감과 이로 인하여 깊게 뿌리 내렸던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이 기반을 해체하는 작업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남쪽 사회의 냉전 이데올로기인 ‘빨갱이’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북쪽 사회의 냉전 이데올로기였던 ‘반동’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는 이유인 것이다.
2. 치안대와 반동이데올로기의 생성 및 혼란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한 후 치안대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피학살자 가족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월남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렀고 따라서 피학살자 가족을 비롯한 일반 민중들의 보복은 전 지역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사적인 보복이 일반화되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시각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12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3차회의에서는 치안대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 지침을 내렸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적인 복수가 아닌 공개적 심판을 통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악질분자’와 ‘비악질분자’를 구분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는 당시 사적인 복수의 형태로 보복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에 대해 이를 금하는 것이며 둘째는 치안대 가담자들 중에서 죄행이 무거운 사람과 가벼운 사람을 구분해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의 일시적 점령지대에서 적들과 합류하여 소위 치안대, 멸공단 및 기타 반동단체에 가맹하였던 자에 대한 문제입니다. 적들은 인민을 기만하며 공갈하며 점령지대에 많은 반동단체들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반동단체의 악질분자들은 적들과 합류하여 온갖 폭행과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해방된 지역의 피해 인민들이 이러한 악질 반동에 대하여 복수하려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무들 우리는 여기에 있어서 심중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반동단체에 참가하였다하여 아무러한 법적 수속이나 심사도 없이 되는대로 숙청한다면 이는 심중한 과오입니다. 우리는 인민을 사랑하며 아껴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적들의 위협과 공갈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반동단체에 참가하여 적극적 악질 행위를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관대히 용서하여 주고 그들을 재교양하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악질분자라 하더라도 세밀한 법적 절차를 거쳐 처리하며 인민들의 의견과 여론에 기초하여 악질분자들을 인민 자체로 심판하는 사업을 조직하여야 하겠습니다.1)
이러한 지침이 내려가자 첫째 문제 즉 사적인 복수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처리되었다. 물론 아주 예외적으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두 번째 즉 ‘악질분자’와 ‘비악질분자’를 구분하여 처벌하는 문제이다. 위의 지침에서는 ‘악질분자’는 고립시켜 처벌하고 ‘비악질분자’는 포용하여 관대하게 처리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당시 당 지도부의 생각처럼 현실에서 명료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치안대 가담자들 중에는 과거 빈농민이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두 출신성분에 있어 과거 지주나 부농 출신이라고 하였다면 이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은 지방에서 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빈농민 출신들이 예외없이 소극적으로 가담하였다면 상황은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분류하여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선 지방에서 이 지침의 수행을 둘러싸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층의 지시와 현실의 괴리로 인하여 지방 차원에서는 일을 빨리 그리고 명확하게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지도부는 이의 신속한 처리를 지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얼마전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는 반동단체 가담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여 하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지방들에서는 반동단체 가담자들을 정확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군사위원회에서 반동단체 가담자들을 정확히 처리하는 데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를 다시 강조하려고 합니다. 반동 단체 가담자들을 일률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주동분자와 피동분자를 갈라 처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일부 지방 단체들에서는 반동단체 가담자라고 하면 그들을 덮어 놓고 숙청해야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동단체에 가담했던 자들이라고 하여 그들이 반동단체에 가담한 동기와 목적, 저지른 죄행이 같지 않습니다.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보지 않고 그들을 일률적으로 처리하면 결국 우리의 혁명대오를 강화하는데 지장을 주게 됩니다. 반동단체 가담자들 중에서 악질적인 주동분자는 극소수이며 절대다수는 적들의 위협과 모략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반동단체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피동적으로 반동단체에 가담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본계급출신들입니다. (중략-인용자) 악질적인 만행을 감행한 반동분자들을 적발숙청하기 위한 사업을 진공적으로 하여야 하겠습니다. 반동단체 가담자들과의 투쟁에서 발로되고 있는 결함은 악질적인 만행을 한 극소수의 반동분자들을 고립시키고 엄격히 처벌하는 사업을 매우 굼뜨게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2)
당 중앙의 지시가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내려진 위의 결정은 당시 이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동분자와 피동분자를 나누는 기준에 덧붙여져진 것은 그 출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기본계급 출신들은 피동분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동분자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피동분자는 교양을 통하여 포섭하고 일부 극소수의 주동분자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게 실행되기 어려운 요소를 갖고 있는데 위의 결정문 중에서 “피동적으로 반동단체에 가담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본계급출신입니다”라는 대목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기본계급출신과 피동분자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적으로 그 기준을 정하는 것도 결코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지에서는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일이 처리되었기 때문에 일을 시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혼란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처벌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는 기준의 혼란과 더불어 냉전적 적대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피학살자 가족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공식적인 처리와 관계없이 이들 가담자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대하였으며 치안대 가담자 가족들은 이를 항상 의식하면서 주눅이 들어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정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근영의 ??첫수확??(1956)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상진은 자기 아내와 가족을 죽인 치안대 가담자들이 살고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당의 결정으로 이곳에 배치 받았고 또한 농장의 관리위원장으로 일한다. 책임적인 직위를 맡았기 때문에 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박병일과 같은 치안대 가담자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농장일을 수행해 나간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된 일남이 어머니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당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행동한다. 박병일을 만나기만 하면 죽일 듯이 대할 뿐만 아니라 그를 비난하면서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치안대 가담자인 박병일은 국가의 정책으로 하여 처벌을 받지 않고 생활하고 있지만 실제 이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끝없이 눈치를 보면서 생활하여야 한다. 특히 일남이 어머니의 경우처럼 치안대 가담자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고 남몰래 훼방을 놓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을은 불필요한 소동을 겪어야 했고 박병일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국가의 처리방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당원이면서 간부였던 성진의 행동을 통하여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방침과 민중들의 실감 사이에 생겨나는 괴리 역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일남 어머니와 박병일 사이의 갈등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작가 이근영은 전후 농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치안대 가담자와 피학살자 가족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빚어진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냉전적 적대감이 사라져야 한다는 강한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지향은 미래의 일이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갈등과 적대감이 팽팽하게 존재하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고 국가적으로 사회적 안착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고한 공동체를 유지하던 농촌 마을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공장을 비롯한 도시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동분자와 피동분자로 나누어 주동분자는 배제하고 피동분자는 포섭하는 정책은 지도부의 머리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삶의 현실에서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방향으로 일이 처리되었기 때문에 이후 북한 사회에서 ‘주동분자’라 분류된 사람들의 경우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후 문제가 되는 것은 ‘피동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정착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만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주동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포섭되었다고 간주되었던 피동분자마저 항상 ‘반동’ 이데올로기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의 정책은 이들에게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지만 실제 사회 내에서 지배하고 있는 냉전적 기류로 말미암아 이들 ‘피동분자’들이 이 치안대로 인하여 발생한 ‘반동 ’이데올로기로부터 쉽게 벗어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항상 외톨이로 자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이 북한 사회의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이는 더 이상 묵과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북한의 지도부는 심각성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1960년 4월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결정이다. 각계각층의 군중을 당의 테두리에 결속시키는 문제 특히 치안대 가담자와 같이 복잡한 환경을 거쳐온 사람들이 어떻게 동요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이 결정의 요지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 이 문제가 심각한 문제였음을 이 결정이 나온 직후에 한 김일성의 다음 연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강선제강소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강선제강소는 로동자들의 구성이 복잡한 기업소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소의 전 당위원장은 가정주위환경과 사회정치생활 경위가 복잡한 사람들과의 사업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강소에 있는 귀환병들은 귀환병이라고 하여 다 믿지 못하겠다고 하고 ‘치안대’에 들었던 사람들은 ‘치안대’가담자라고 하여 다 나쁘다고 하였습니다. 기업소 당위원장이 이렇게 가정주위환경이나 사회정치생활 경위만 따지다보니 가정주위환경이나 사회정치생활경위가 좀 복잡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대부분 동요하거나 우울해하면서 일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중앙위원회 중공업부 부부장으로 일하던 동무를 강선제강소 당위원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강선제강소에 내려가 당의 방침을 받들고 일을 하였습니다. 결과 이 제강소에 떠돌던 우울한 분위기는 다 없으졌으며 생산도 올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3)
치안대 가담자를 비롯하여 사회정치적 생활경위가 복잡한 사람들을 포섭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북한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반동 이데올로기의 위력으로 하여 일반 민중들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 정책을 즉각 시행해야 할 이들 간부들이 이런 상태이니 북한 사회에 존재하는 반동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주동분자’나 ‘악질분자’가 아니어서 이미 재교양을 통하여 포섭할 것을 지시한 이들에 대해서도 이럴 정도였으니 그 정황이 어떠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4)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상태로 북한 사회가 나아가서는 사회적 통합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이는 생산력의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반동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잘 엿보게 하는 작품이 이정숙의 ??산새들??(1962)이다. 이 작품에서는 치안대 가담자의 가족인 봉숙이 북한 사회에 존재하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분위기 속에서 우울하게 지내면서 생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여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앞선 이근영의 ??첫수확??과 다르게 이 치안대 가족의 내면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일제하에 부모를 잃은 봉숙은 큰아버지 집에서 컸는데 그 큰아버지가 치안대에 가담하였다가 도망가는 통에 전쟁고아로 자처하여 초급학원과 중학을 마쳤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같이 학교를 다녔고 현재 이 방직공장에 같이 일하고 있는 동무인 금녀에게도 이 사실을 한번도 사실대로 말한 적이 없다. 금녀는 피학살자 가족으로 있기에 더욱 미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숙은 직장일을 하면서도 항상 이 문제로 하여 고민하게 되게 남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대면서 안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산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전 작업반장 명자 대신에 들어온 정애의 도움으로 봉숙은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이 직장에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정숙의 ??산새들??을 읽으면 당시 북한의 지도부가 왜 이 치안대 가담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지시했는가와 그 배경에는 바로 사회적 통합과 생산력의 문제가 걸려 있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이것이 이러한 언명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이 반동 이데올로기를 떨쳐내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계기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 치안대 가담자 중에서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부터 포옹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이 이번에는 당이 진짜 이들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려고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진짜 그런 것인가 혹은 짐짓 그렇게 해보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여전히 의심하면서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만큼 냉전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까 원래 북한의 지도부가 행했던 원칙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빚어내는 모순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 중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당중앙에서 지난날에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의 죄과를 벗겨주고 더욱 대담하게 포옹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려보냈더니 황해남도내 당조직들에서는 하루에 몇천명씩 망탕 벗겨주었으며 그것도 죄가 엄중한 놈부터 벗겨주어야 가벼운 사람들이 마음을 놓는다 하여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적대분자들의 죄과부터 벗겨주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당조직들이 혁명사업을 간단히 행정식으로 처리하려고 한데서 범한 정치적 오유입니다. 우리가 벗겨주라고 한 것은 악질적인 만행을 감행한 착취계급성분의 적대분자들인 것이 아니라 근로성분으로서 한때 착오를 범하였다가 그후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를 따라 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벗겨주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잘못을 벗겨주어야만 그들이 동요와 우울한 정서를 버리고 더욱 굳은 신념과 높은 열성을 가지고 우리를 따라오게 되며 전체 인민이 더욱 명랑하고 화목하게 단결할 수 있습니다.5)
일선에서 치안대 가담자와 그 가족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중앙의 지시를 어겨가면서 ‘용서할 수 없는 적대분자’들의 죄과를 벗겨주려고 했던 것은 그들에 대한 관대함보다는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만이 일반 피동분자들이 안심하고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으로 당시 북한 사회 내에서 치안대와 관련하여 냉전적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기본계급 성분의 주동분자와 기본계급 성분의 피동분자를 구별지으면서 후자는 포섭하고 전자는 배제하는 원칙을 지키는 일과, 전 사회적으로 퍼져 있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탓으로 하여 빚어진 사회적 통합의 불안정성과 생산력의 저하를 막기 위한 분위기 쇄신의 노력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한 사회 전체가 냉전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이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어떠한 정책을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결코 민중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 의식을 지워낼 수는 없는 것임을 오히려 더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피동분자와 주동분자를 나누고 주동분자를 배제하는 원칙을 택하였지만 이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분명하다. 또 피동분자를 끌어안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지만 북한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이것 역시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들은 과거의 ‘반동’이데올로기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고 계속하여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다른 해결 방법은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당 지도부로 하여금 치안대 자료 자체에 대한 무시를 요구할 정도로 나아간다. 1969년에 행했던 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치안대 자료를 무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의 가정형편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평가하는데 참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사람들을 놓고 말한다면 그가 조국해방전쟁 때에는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것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을 받을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후퇴 때 ‘치안대’에 들었다고 해도 그 기간이 10년이나 20년이 되는 것도 아니고 40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40일 동안에 아버지가 ‘치안대’에서 활동한 것이 그 때 어려서 멋모르던 아들에게 무슨 큰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중략-인용자) 먼저 ‘치안대’에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자료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영향관계를 참고하는 자료로서 큰 의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료는 무시해버려야 합니다.6)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민중들 내부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사고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김삼복의 ??향토??(1986)는 이를 잘 증좌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명호는 바로 치안대 문제가 북한 사회에서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명호네는 일제시대 빈농으로 해방 후 토지를 분여받은 이른바 기본계급 성분이다. 그런데 전쟁 중에 과거 지주의 강요에 의하여 명호의 형이 이 마을 치안대장직을 맡는다. 그러나 그는 기본계급 성분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이 마을에서 계속 살게 된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고 살 수가 없어 산간 지대로 가 그곳에서 양을 키우는 일을 도맡아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이들에 대한 불신은 매우 강한 것이라 쉽게 그 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명호가 이 마을에서 착실하게 공부하여 트랙터 운전수로 추천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치안대 가족이 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가 하면서 적극 반대한다. 그리하여 그 동안 이 마을에서 묻어 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돋아나는 것이다. 그 결말의 해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현재까지도 이 반동 이데올로기가 북한 사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중들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고 있는 이 의식은 북한 국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에서 조금씩 묽어질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냉전적 적대감으로 하여 이러한 과거의 상처가 결정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계기를 아직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들 피동분자들을 포용한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철폐되지 않는 한 일반 민중들은 쉽게 이를 머리 속에서 지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과거 냉전적 분단구조 하에서 빚어진 냉전적 적대감이 남북간의 화해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면 이는 남한 사회는 물론이고 북한 사회에서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극대화된 냉전적 적대감이 해소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간의 화해로 하여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 이데올로기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처럼, 북한 사회에서도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그 기반을 잃게 되면 북한 사회 내에서 특히 민중들 머리 속에 침전되어 있던 냉전적 적대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처리가 기본적으로 미군의 개입과 이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최근 북미 사이에 오고가는 적대 관계의 청산과 새로운 관계 정립은 북한 사회 내에서 이러한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화해가 이 북미 관계의 호전을 초래하였던 중요한 계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남북화해의 가속화는 한층 더 절실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또한 남북의 민중들의 나은 삶을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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