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2)
민중의 전쟁 인식과 ‘인민의용군’
배경식
성균관대, 한국사
1. 의용군 문제의 중요성 2. 동원의 논리 3. 모집방식과 지원동기 4. 민중의 전쟁인식 5. 경험의 역사화 - 조작과 은폐 6. 맺음말에 대신하여 |
1. 의용군 문제의 중요성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 중에 군대경험이 있다. 군대시절의 고생담과 무용담은 베트남전의 경험을 거슬러서 50년 전의 한국전쟁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웠던 군대경험 중에서도 아직도 자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험이 있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 ‘인민의용군’ 문제가 있다. 인민의용군은 한국전쟁기에 북한의 남한점령지역에서 인민군에 징집된 전투보충병을 말한다. 그러나 의용군은 10만,1) 15만,2) 20만,3) 40만4)으로 다양하게 추산할 정도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2-3개월의 짧은 기간 안에 동원된 많은 숫자의 의용군은 자발성과 강제성의 논거로 활용되면서 전쟁의 성격까지 규정하고 있다.5)
이처럼 의용군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다. 그러나 분단의 역사는 의용군 경험 자체의 객관화를 어렵게 했다. 북한은 남한민중의 지지와 전쟁의 정당성을 위한 핵심적인 논거로, 남한은 북한의 침략성과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의용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양한 민중의 의용군 경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획일화되었다.
의용군문제는 기존 연구에서 독자적인 연구 주제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남한점령정책을 언급할 때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6) 기존연구에서는 북한의 남한점령정책의 핵심으로 인민위원회 선거와 토지개혁을 중요시 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입장에서는 전쟁이라는 초비상체제가 강요하는 일상화된 인적, 물적 동원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의용군 문제는 실증적 해명이 간과된 채 과도한 이데올로기적인 논거만이 지배하고 있다. 기존의 진보적 시각에서 나온 연구서들은 북한측의 공식문헌을 비판없이 주자료로 활용하면서 성급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최근의 주목할만한 연구성과들도 아직도 자발성과 강제성의 이분법적 냉전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전쟁과 의용군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계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의용군 문제는 자발성과 강제성만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보다 복잡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옳으냐 식의 손들어 주기가 아니다. 필자의 관심은 경험 주체인 민중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참전자들은 왜, 어떤 생각(논리)으로 의용군 모집에 응했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 자체가 분단체제 속에서 조작, 은폐되는 논리이다.
다른 한편 이데올로기화된 제한된 자료 역시 의용군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험의 광범위성과 다양성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도 대부분 반공적인 시각에서 정리된 증언류와 회고록이다. 따라서 기존의 공간 자료를 이용할 때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2. 동원의 논리
북한은 1950년 7월 1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전시동원령을 발동하여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전투자원의 확보에 나섰다.7) 남한점령지역에서의 의용군 조직문제는 7월 1일 군사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결정된 ?인민의용군을 조직할데 대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무장대오를 강화하여 남한민중을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조직동원하고, 미국과 이승만정권을 더욱 고립 약화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로 의용군을 조직한다”고 의용군 조직의 목표를 밝혔다. 이에 따라 의용군 모집사업을 위한 상설기구로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직위원회는 의용군입대자들의 단기군사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서울을 비롯한 주요도시에 훈련소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켜서 인민군에 편입할 것을 결정하였다.8)
의용군 모집정책은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후 가장 먼저 구체화되었으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정책이었다. 그것은 도시와 농촌의 구분없이 징집대상인 모든 청년의 사고를 지배한 생명과 관련된 핵심적인 문제였다.
크게 보아 의용군 모집은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전쟁의 당위성과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상징적 효과이다. 점령지역에서의 의용군 동원은 ‘의용군조직운동’9)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잘 짜여진 하나의 거대한 정치캠페인이었다. 기존연구에서는 의용군 모집은 7월 6일 ?의용군 초모사업에 대하여?라는 당의 방침이 내려지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했으나,10) 의용군 모집을 위한 대중적인 캠페인은 7월 2일부터 본격화되었다. 북한은 서울에서 노동자, 학생, 시민, 청년 등 각 단체와 직역별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면서 의용군모집의 대중적 동원을 본격화하였다. 7월 2일 민주학련주최 ‘미제완전구축 애국학생궐기대회’를 시작으로 7월 3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울시중구인민위원회 주최 남산 궐기대회(7만여 명),11) 민애청 주최 궐기대회(1만 4천여 명),12) 서울 시내 85개교 연합 궐기대회와 시가행진(1만 6천명)이 잇달아 개최되었다.13) 이후 노동자, 학생, 부녀자, 시민을 중심으로 한 각종 궐기대회와 시가행진 등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전투자원의 충원문제이다.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되자 남한점령지역에서도 전투자원의 보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의용군 모집에는 다양한 논리가 동원되었다. 가장 먼저 의용군 징집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좌익활동가들과 전향자들이다. 특히 많은 수의 전향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과거에 대한 사죄를 위한 자발적인 지원을 요청했다.14) 김수영은 자전적 소설 ?의용군?에서 “월북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남에 남아 그 동안에 혁혁한 투쟁도 한 것이 없는 자신이 의용군에 나옴으로써 자기의 미약한 과거를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15)
일반인들의 동원방식에는 ‘궐기대회’를 통한 집단주의적 군중심리를 적극 활용했다. 각 직장, 학교, 지역 인민위원회, 단체별로 대규모 공개집회를 개최하여 지원의 정당성과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때 북한은 북쪽에서 지도위원을 파견하여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해방해야 하는 이유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도위원들의 강의는 “액면대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해야만 인민공화국 체제하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할만큼 설득력이 있었다.16) 이와 같은 동원방식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무이념적인 일반인들의 동원과 지원에 효과를 발휘했다.
대학생과 지식층의 동원에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공명심을 부추기는 논리적 설득이 중심이 되었다. 의용군 지원은 “적어도 묵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나라의 지도층이 되기 위한 필수의 길”이라고 선전했다.17) 대학생 세포위원들의 선전을 추동하여 학생들의 불안한 심리를 채찍질하면서 공명심과 이기심을 자극했다.
3. 모집방식과 지원 동기
의용군 문제는 시기별, 지역별,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도시와 농촌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도시지역에서는 초기부터 노동자, 청년, 학생, 여성, 일반 시민 등 광범한 계층을 모집대상으로 삼았다.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하고 청년과 학생의 모집에 주력했다.18) 점령지역에서 발행된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의 기사를 살펴 보더라도 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궐기대회는 지속적으로 개최되지만 실제 의용군에 지원하는 기사는 직장별 노동자들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도시지역의 경우에는 ① 개인적인 생계와 가족 부양 ② 출세의 기회와 공명심 ③ 전쟁의 승패와 관련된 현실적인 이해판단 ④ 시대적 분위기와 군중심리 ⑤ 신념에 의한 자원 등 다양한 동기로 의용군모집에 응했다. 이 경우 신념에 의한 자원은 소수의 경우이고 대부분은 가족부양문제와 생존의 문제로 징집에 응했다.
초기의 의용군 지원대상은 점령과 동시에 석방된 좌익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7월 1일 동원령 이전부터 의용군에 편입되었다.19) 좌익활동가들은 정규군으로 편성되지 않고 별도의 유격대로 편성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빨치산 활동이나 일제시기 학병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20)
개인의 생계문제와 가족애가 중요한 지원 동기였음은 박찬웅21)과 김성칠 일기22)에 잘 드러나 있다. 의용군에 나간 사람들은 그들의 위험보다 가족의 안전을 더 걱정했다. 김수영은 자전적 소설에서 북행 도중 비행 공습을 받았을 때에 자기 몸이 죽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집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23)
그러나 모집 대상인 청년층의 판단은 좀더 현실적이었다. 전쟁은 전쟁 나름대로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자극하면서 이해관계를 촉구한다. 우선 청년층은 누가 옳고 그르냐하는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 하는 현실적인 승패를 더 중요하게 고려했다. 그것은 “어느 쪽이 이길 것이냐, 그럼 어느 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냐, 그보다도 당장 어느 쪽인 척 해두는 것이 우선 위험도 모면하고 나중에 가서도 말썽이 없을 것이냐"24) 라는 것이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었다. 전쟁 초기만 해도 전세가 북한에 유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북한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청년들의 의용군 지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청년층의 지원 동기는 김병걸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 7월 중순께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 우리는 창대같이 마구 내리꽂히는 빗발 속에서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엿사! 엿사!”하며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서울을 향해 달렸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를 형성하기 위한 혁신의 장도였다. 따라서 구보는 조금도 힘겹지 않았고 게다가 공화국의 승리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 생각했던 시점이라서 더더욱 그러했다.25)
김병걸의 사례는 회색분자로서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고 인민공화국 주민으로 살아남기 위한 ‘자기교화’의 과정으로 의용군 모집에 응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의용군에 징집된 적이 있었던 김수영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전적 소설 ?의용군?에서 “오늘 새벽은 또 어디를 해방시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자기가 의용군에 나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자기가 장한 생각이 들었다”고 징집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26)
농촌은 도시와 다른 형태로 의용군 모집이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에서는 도시 중심적으로 서술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으나 도시와 농촌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농촌은 도시와 같이 정치적 효용성이 크게 주목되지는 않았다. 남한점령지에서 발행된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에는 도시지역 의용군 지원 기사는 연일 크게 보도된 반면 농촌지역에 관해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농촌의 경우 우선 보도연맹관련자들이 초기의 의용군 모집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노획문서??자료에 따르면 시흥군의 경우 의용군조직사업은 보도연맹 관련자가 주도했다.27) 신동면의 경우 보도연맹원 약 100명 가운데 70명 정도가 의용군에 나갔을 정도로 보도연맹원들의 의용군 지원비율이 높았다.28)
두 번째 특징은 토지분배에 대한 반대급부로 많은 의용군 모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경기도의 사례를 보면 8월 6일에서 10일 사이에 토지분배가 완료된 후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광주군에서 2천 5백 명, 김포군 2천 4백여 명, 고양군 독도면 7백여 명이 지원했다.29) 그러나 계량적인 수치는 확인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동기에 의해서 의용군 모집에 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세 번째로는 농촌지역은 지역적인 특성과 마을의 성격에 따라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일방적 동원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할 민중의 힘은 약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의용군모집에 응했다.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단위의 논의구조를 통한 지원대상자 선정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자발적인 지원 이외에도 ① 제비뽑기식 선출 ② 문중회의를 통한 논의(동족마을) ③ 마을회의를 통한 집단적 논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용군 모집 대상자를 선정했다. 이 경우 모집대상자를 비교적 공평하게 선정하기 위해서 무기명의 투표를 실시하거나 마을의 여론을 반영하여 선정하기도 했다. 특히 가족관계, 경제적 형편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러 마을에서 소외되고 경제력이 약한 사람이 밀려서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0) 이 점에서 일제시기 징병, 징용문제 논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기존의 반공적 시각처럼 “응하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살벌한 경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1) 강원도 농촌 마을에서 전쟁을 경험한 김진계는 “적어도 내가 보고 겪은 바로는 강제모병의 경우라도 끝까지 지원을 거부하면 인민군 치하에서 지내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전쟁터에 안 나갈 수는 있었다”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32)
의용군 모집과정에서 강요와 동원은 있었으나 가족부양, 기타 다른 핑계로 빠질 수 있었고, 심한 강요는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서울대 국문과 2학년생으로 학도호국단 간부 출신으로 6월 27일 충남 온양의 고향으로 낙향한 강신항과 역시 서울대생으로 서울에 있다가 경기도 농촌마을로 소개되어서 피신했던 박찬웅의 일기33)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강신항은 할아버지가 독촉국민회 지부장을 할 정도의 지주집안이었으나 삼촌이 의용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배급 혜택을 받으면서 끝까지 가택수색이나 강요는 당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34) 또한 필자가 최근에 조사한 경기도 지역 마을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입증되고 있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노인들은 의용군 모집 집회는 있었으나 가족부양, 기타 다른 핑계로 빠질 수 있었다고 하였다.
4. 민중의 전쟁인식
집권자들과 학자들의 공식적인 명분이나 해석이 무엇이든 전쟁을 체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쟁은 큰 수난의 경험이다.35) 이념과 체제의 우월성에 관계없이 전쟁이 강요하는 인적, 물적 동원과 수탈은 민중에게 큰 고통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의 인민군 징집에 대한 노동당 선전부의 다음과 같은 민심 동향의 파악은 민중의 전쟁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지금 야단낫소. 청년들이 이왕 인민군대에 나가게 된다고 하며 술만 먹고 있으니 이제는 세상이 다 되지 않았오.(재령군 북율면과 은율군 은율면의 일부 낙후한 군중들)
4년동안 쉬였다가 또 나가게 된다고 하면서(덴니가 와리떼 후기오우츠)라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은율군 은율면 홍문리 2명의 청년이 술먹고 말함)
지금 평양에서는 밤만 되면 인민군대들이 청년들을 찾어다니며 인민군대에 가라고 야단한다. 낮에는 청년들이 도망해서 밤에 다닌다.(송화군 풍해면 성하리 리승호 모친)36)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준비를 위한 징집은 청년들에게 곧장 일제시대의 징병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 들여졌다. 비록 국가의 입장에서는 ‘일부 낙후한 군중들’로 표현되었으나 그들의 생각은 민중의 절망과 공포, 국가동원에 대한 불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전쟁 직전까지 북한은 아직도 민중의 자발적 동원에 고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기도 한다.
남한 민중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노획문서?? 자료인 시흥군당 정치공작원의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민중들은 한결같이 빨리 전쟁이 종결되기를 바랬다. 시흥군 동면당부의 여론조사 결과는 전황의 변화와 관련한 민중의 전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호를 파는데, 어찌하여 부산까지 인민군이 진격하였다고 하는데 왜 전호는 파는가, 아마도 이상하다.(시흥리 4구, 이전 구장, 8월 25일)
과거 이승만통치시대에도 고관대작들만 식량배급들 타더니 지금도 역시 면기관에 다니는 사람만 배급을 탄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같이 논아먹었으면 어떤가.(안양리 이원규의 처, 자유노동자, 8월 27일)
부산까지 인민군대가 나려갔다고 하는데 이천 등 방면에서 방어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마음 놓고 살 수 없다.(안양터에서)37)
위의 자료는 전쟁승리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 그리고 이승만정권 시기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민중은 소련이 북한을 원조해주면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을 대상으로 한 세계전쟁으로 전환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였다. “미국비행기는 공중에 많이 다니는데 왜 우리 비행기나 소련비행기는 다니지 않나” 라는 의구심은 전쟁에 대한 민중의 공포심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38)
또한 ?서면당부 정치정세보고?에 따르면 토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빈농, 고용농민들의 지지와 동원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주층, 소재산층, 상인들은 어느 편이 승리하든지 전쟁이 빨리 종결될 것을 바라면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39)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북한의 각종 동원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의용군모집정책도 민중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초기에 활발한 선전활동으로 만들어 놓은 민중의 열정을 제대로 조직화하지 못함으로써 의용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고, 심지어 도피하기도 했다. 또한 맹목적인 사업전개와 말단조직 운영이 위계질서 있게 계통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40) 8월 23일자 서면당부 정치공작원의 보고는 이와 같은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선전사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도 군중 속에 뿌리깊이 침투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민들이 오늘 전쟁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민들이 의용군 또는 노력동원 등에 기뻐하지 않는 경향들이 있는 것이다.
의용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민중의 비협조와 도망으로 나타났다. 시흥군에서는 8월 초순부터 의용군 모집을 회피하고, 청년들은 의용군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에 숨거나 피난하기도 하였다.41)
이처럼 농촌의 청년들이 의용군모집을 꺼린 이유는 당시의 농촌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일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에 시작된 전쟁으로 농촌의 핵심적인 노동력인 청년층이 대거 유출되었다. 이 때문에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서 농민들은 고심해야만 했다. 농민의 체제 이탈과 이기적인 본능을 자극했다. 남한의 의용군 기피자는 공장노동자로 위장하여 북한으로 친척을 찾아서 도피하거나 농촌의 추수기를 이용하여 농업 고용자로 위장하여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손이 부족한 농민들은 의용군 기피자를 숨겨두었다가 낮에는 논에서 일을 시키고 밤에는 집에 은신시켜 주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각 분주소별로 각 리마다 과업을 주어 감시를 강화하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42)
제한적이나마 북한정보기관이 조사한 북한지역 주민의 전쟁 인식도 남한 민중의 인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장기화와 총력적인 소모전은 민중의 체제이탈을 촉진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지역에서는 군대가 민가에 들어가는 것을 내쫓거나 더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면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43) 또한 의용군 도주자와 군대 기피자가 증가하면서44) 북한 내부의 중대한 치안문제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50년 8?15 해방 5주년을 맞이하여 내무상 명령으로 산 속에 잠입한 인민군대 기피자와 반동결사 등을 적발하기 위한 특별경비투쟁 강화령을 지시하기도 하였다.45)
다른 한편 전황과 관련된 각종 반정부적인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46) 그런데 문제는 후방 민중의 심리적 동요가 북한군에게 비교적 전황이 유리한 전쟁초기부터 사회문제화 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 때문에 1950년 7월 11일에 강원도당은 인민군대 기피자, 피난자, 직장기피자, 유언비어 유포자에 대한 처리 지침을 하달하기도 하였다.47)
이러한 지침과 함께 38선 접경지역인 강원도에서는 인민군 기피자 수색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내무서원의 부주의로 인민군 기피자를 놓치거나, 인민군 기피자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집단으로 숙직하면서 무기를 탈취하여 항거하기도 하였다.48)
이와 같은 인민군기피자로 인한 치안불안은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었으며 민중의 심리적 동요를 유발하였다. 이에 따라 계속적인 수색과 체포지침이 하달되었다. 차량 및 행인단속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 분주소마다 설치해둔 차단기를 이용하여 인민군도주자를 적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으로 단속하여 자동차 구경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향이 많다고 보고할 정도로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49) 이러한 상황하에서 점차 전황이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전쟁의 승패와 관련된 불리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유언비어가 현실도피적인 정감론의 예언과 연결되면서 불안한 민중의 심리를 더욱 가속화시킨 점에 있다.50) 그것은 국가동원의 한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 역사의 경험화 - 조작과 은폐
서울 수복 직후에 북한점령지역에서 인민공화국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른바 부역자 처리문제이다.51)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전선에 배치된 의용군 경험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누구나 갈 수밖에 없었다는 불가피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52) 이처럼 정작 수복 직후에는 적어도 민중 사이에서는 의용군 경험이 죄가 되거나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휴전과 함께 남북분단체제가 공고해 지면서 남한에서의 의용군 경험은 두 가지 형태로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남한 국가권력에 의한 민중경험의 이데올로기적 조작현상이다. 전쟁에 대한 조작된 기억은 이미 전쟁이 종결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53)
전쟁경험의 왜곡된 일반화는 북한의 서울점령 3개월의 경험을 형상화한 염상섭의 ??취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취우??가 “남북민중의 시각에서 전쟁을 해석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54) ??취우??는 부르주아적 입장과 지식인의 전쟁경험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전쟁 중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 1954년에 출간된 이 소설에는 빨갱이와 괴뢰군이라는 용어가 서슴없이 등장하고 있다. 의용군에 징집되었던 경험이 있는 주인공 영식이 “난 원체 빨갱이라면 송충이보다 더 소름이 끼치구 생리적으로 싫으니까”55) 라고 구절은 작가의 반공적인 전쟁인식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전쟁기에 해군종군작가로 활동했던 염상섭이 서울점령 직후 무장해제 당한 국군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거나 탈진이 되어 퍼더버리고 앉은 자세는 하나도 없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서는 움쑥 들어간 등잔만한 눈이 부리부리 불을 내뿜고, 숨은 가빠서 어깨와 가슴만 벌렁거린다”56) 라고 묘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1972년에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족의 증언??은 유신정권의 전쟁인식을 대변한다. 의용군에 대해서 “북한이 남한 점령지역에서 실시한 정책 중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이 ‘의용군’이란 미명하에 강행한 강제모병이었다.”57) 라고 의용군의 성격을 규정했다.
다른 하나는 의용군 경험 당사자들이 남한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은폐할 수 없어서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던 사람들은 남아 있던 사람들의 “쌀쌀한 시선”을 감수해야만 했다.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김병걸은 “나는 스스로를 국적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아. 나의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지금 찾아온 대한민국인가, 아니면 도망쳐온 인민공화국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할 만큼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이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비극이라고 했다.58)
이처럼 국적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의용군 경험은 자랑해야할 무용담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은폐해야할 끔찍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의용군 경험이 알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는 경우에는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것”이라는 자기변명의 논리로만 공개되었다. 극우반공체제 하에서 살아야 하는 민중에게는 의용군 경험은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이 되었다. 1972년 중앙일보사에서 자신의 의용군 경험을 증언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자랑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다”고 했다.59) 그런데 그는 강제로 끌려간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금 생각해도 왜 자발적으로 지원했는지 동기가 뚜렷하지 않아요”라고 하여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6. 맺음말에 대신하여
일찍이 김경동은 한국전쟁이 준 충격으로 가치관의 혼란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는 가치체계의 충격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인 회의 즉 생명, 인생의 가치 그 자체에 관한 회의와 절망이라고 말했다.60)
민중의 입장에서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어느 편에서건 민중은 희생자일 뿐이다. 특히 같은 동족과 이웃, 형제가 총부리를 들이댄 한국전쟁은 경험당사자의 내면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에서 전쟁 중 생리가 여러 번 멎어 버리는 극심한 ‘심리적 중성화 현상’을 겪었다고 했다. 개전 초기에 설레었던 기대감은 온데 간데 없고 의용군 가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심리적 압박감은 ‘황폐의 극치’라고 표현할 만큼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61)
그러나 의용군문제는 지나간 전쟁의 상처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의 희생과 경험은 분단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이용되었을 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숨긴 채, 때로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국군에 다시 지원하기도 했다. 설혹 나중에 자신의 전쟁 경험을 술회할 때에 의용군 문제를 언급하게 되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끌려갔노라고 변명했다. 결국 그들의 경험은 여전히 전쟁과 분단체제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다.
그러나 북한체제에 편입된 의용군 경험자들은 남한과 전혀 다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8월의 이산가족 상봉 때의 북측 참가자들 중의 상당수가 의용군 출신이었다. 북한체제를 선택한 의용군 경험이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측의 가족에게는 그것은 부인하고 싶은, 그리고 부인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이는 아직도 남한에서는 의용군 경험이 금기의 대상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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