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6·25전쟁 발발 64주년…단돈 3만원에 딘 소장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한국인

이강기 2015. 9. 16. 11:03
  • 6·25전쟁 발발 64주년…단돈 3만원에 딘 소장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한국인

  • 조화유
    재미(在美)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mail : johbooks@yahoo.com
    경남 거창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
입력 : 2014.07.03 15:05, 조선일보 
6·25전쟁 발발 64주년…단돈 3만원에 딘 소장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한국인
“밥을 지은 후 솥 씻은 물을 마심으로써 한국인들은 식사를 끝낸다.”
숭늉을 ‘밥솥 씻은 물’이라고 재미있게 묘사한 이 사람은 한국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후 석방된 미국 육군 24사단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Dean) 소장이다.

딘 소장은 6·25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침해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을 대전에서 일단 저지, 미군 추가병력이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권총을 빼들고 선두에 서서 인민군 탱크와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부하들에게 후퇴명령을 내린다. 그 자신도 후퇴 도중 대전 외곽에서 길을 잃고 36일을 산과 들을 헤매다가 1950년 8월 25일 전북 진안에서 인민군에게 잡힌다. 인민군에게 바로 잡힌 게 아니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속인 두 진안 주민이 그를 인민군에게 넘긴 것이다.
전쟁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Bill Shin(신화봉) 기자의 특종기사를 실은 한 미국신문 지면.
전쟁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Bill Shin(신화봉) 기자의 특종기사를 실은 한 미국신문 지면. "딘 장군을 배반한 '가롯 유다'가 공산군으로부터 5달러를 받았다고 자백했다"는 제목이 붙어있다. (당시 원화로는 3만원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딘 소장이 밝힌 당시 환율 860대 1을 적용하면 35달러 정도 되는 돈이다. 그런데 미국신문이 5달러로 보도한것은 잘못인 것 같다.)
그들은 당시 진안에 살던 한모(40세)와 최모(24세). 두 사람은 휴전 후 AP통신 한국인 기자 신화봉(Bill Shin)과의 인터뷰에서, 딘 장군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다가 인민군과 마주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군으로부터 각각 3만원씩(당시 미화 5달러 가치)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64년이 지난 오늘 이들을 새삼스레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북한군이 전라도까지 쳐내려오니까 ‘이제 공산당 세상이 되나 보다, 미군을 잡아주면 무슨 혜택이 돌아오겠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포로가 된 딘 장군을 통역한 사람 중에는 이규현이란 분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남한에서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해방을 맞아 귀국, 김일성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전쟁이 나자 통역으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한다. 딘 장군의 회고록 General Dean's Story에 의하면, 미군이 1950년 10월에 평양을 점령했을 때 이규현씨는 미군에게 투항했다.

포로 신문 과정에서 이씨는 “딘 장군은 모진 협박에도 불구하고 미군 군사정보를 북한군에 발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딘 장군에게 “미국 언론은 당신이 전사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을 죽여도 아무도 모른다. 이틀간 시간을 줄테니 군사기밀을 털어놓으라”고 협박했으나 딘 장군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이규현씨는 전했다.
6·25전쟁 발발 64주년…단돈 3만원에 딘 소장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한국인
위 지도에서 꼬불꼬불한 선으로 표시된 것은 딘 장군이 대전에서 후퇴하다 길을 잃고 36일간 헤맨 길이다. 주민의 신고로 체포된 장군은 대전으로 호송되어 계속 북쪽으로 끌려가 함경도 강계(전쟁 중 한때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곳)까지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53년 휴전과 동시에 판문점에서 석방되었다.

딘 소장이 포로가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딘 소장은 한국전쟁 초기 20일 동안만 전투에 참가했을 뿐이지만 그가 지휘한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이 북한군의 남하를 오산, 평택, 천안, 조치원, 공주, 그리고 대전에서 단 며칠이라도 지연시키지 않았더라면 북한침략군은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대구와 부산을 포함한 남한 전역을 다 점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포로가 된 이후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무공훈장 Medal of Honor을 받았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 점령군 사령관 핫지 중장 바로 밑에서 군정장관으로 남한을 3년간 통치했고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건국한 다음에는 일본 큐슈의 고쿠라로 이동하여 제24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바로 전날인 1950년 6월24일 토요일 밤 사단본부에서는 costume party(의상파티)가 있었는데, 그때 딘 소장은 한복차림에 갓을 쓰고 나왔고 부인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 인기를 모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밤 한국 서울에서는 육군본부 장교클럽 개장 축하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몇 시간 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고 3일 후 서울이 점령된다. 다행히 북한군은 서울서 3일을 푹 쉬고 7월1일 한강을 건너 남하를 시작한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다. 딘 소장은 6월30일 토오쿄의 일본점령군 사령관 매카앗서(맥아더는 정확한 발음이 아님) 장군으로부터 한국으로 건너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여 시간을 벌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24사단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일본 고쿠라에서 부산까지 바닷길로 64km)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딘 소장에게 떨어진 명령은 2개 소총소대와 약간의 바주카 포병을 포함해 406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즉시 한국으로 파견하라는 것이었다. 딘 소장은 이 특공대 지휘를 찰스 스미스 중령에게 맡기고 부산으로 공수했다. 그리고 다른 24사단 병력은 배편으로 부산항으로 떠났다.

문제는 한국으로 맨 먼저 파견된 미군 중 실전 경험이 있는 병력은 15%에 불과했다고 딘 소장 자신이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러므로 스미스 특공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처음 만난 북한군에게 참패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배편으로 도착한 24사단 나머지 병력도 즉각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의기양양하게 남하하는 북한군을 도중에 막지 못하고 대전까지 밀렸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24사단은 적의 남하 속도를 어느 정도 줄이는 데는 성공했다.

교통요지로서 전략상 중요 거점인 대전을 사수해야 할 임무를 띤 딘 소장은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7월20일 적은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서 대전을 포위해 들어왔다. 미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7월21일 동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권총을 빼들고 적의 탱크와 싸우던 딘 소장은 위관급 장교 두 명, 부상당해 걷지 못하는 사병 한 명을 포함한 장병 몇 명과 함께 맨 마지막으로 대전을 빠져나가 동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미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을 피해 주로 밤에 걸었다. 부상병은 사병 둘이서 부축해서 걸었다. 그들이 힘들어 할 때 51세인 딘 소장이 부상병을 혼자 업고 걷기도 했다. 부상병은 피를 많이 흘려 물을 자주 마셨다. 곧 물이 떨어졌다. 밤에 다른 장병들이 잠을 자는 동안 딘 소장이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대전 외곽의 작은 시냇물 정도로 짐작한 그는 물소리 나는 쪽으로 계속 걸었다. 그러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는 약간의 부상을 당했을 뿐 견딜 만했다. 그러나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부하들은 그를 무한정 기다릴 수가 없어 먼저 후퇴했다.

나침판 없는 딘 소장은 해와 별을 보고 위치를 대충 짐작하고 동남 방향으로 산을 타고 갔다. 도중에 역시 낙오된 중위 한 명을 만나서 같이 산속을 헤맸다. 중위는 카빈 소총, 딘 소장은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 걸었다. 산에서는 산딸기 같은 것을, 밭에서 수박이나 토마토 같은 것을 따먹고 농민들이 감자밭에서 버린 작은 감자알들을 주워먹기도 했다.

물은 산속 계곡물을 마시거나 비가 올 때 빗물을 손바닥으로 받아 먹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밥을 얻어먹은 것은 대전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서 피난민 가족(10대 아들 두 명을 거느린 중년부인)을 만났을 때였다. 딘 소장은 금산, 진안을 거쳐 대구로 가기로 하고 동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딘 소장이 대전 시가전에서 파괴시킨 것으로 알려진 탱크.
딘 소장이 대전 시가전에서 파괴시킨 것으로 알려진 탱크. "1950년 7월20일 딘소장 지휘하에 파괴되었다"는 글이 적혀있다.
 
딘 장군, 100만원 주겠다고 제의

7월24일 쯤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날 저녁에 두 사람은 어느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곧 동네 사람들이 나와 두 미군 장교를 둘러쌌다. 다행히 북한군은 보이지 않았다. 한 마을 사람이 미숫가루를 찬물에 타서 갖다 주었다. 딘 소장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고 나중에 자서전에 썼다. 마을사람들은 날계란도 2개씩 갖다 주었다.

영어를 좀 하는 청년 두 명이 있었다. 딘 소장은 그들에게 "우리를 대구까지 데려다주면 100만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환율이 860대 1이었다니까 1,150달러 정도 되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청년들은 "오케이, 오케이.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대구 쪽으로 가자"고 했다. 딘 소장과 중위는 그들을 일단 믿기로 하고 어느 초가집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을 잤을까, 두 사람은 요란한 총소리에 잠을 깼다. 옆에 있던 영어를 서툴게 하는 청년이 후닥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영어를 더 잘하던 다른 청년은 초저녁부터 보이지 않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이 북한군에게 연락하러 가고 영어를 서툴게 하는 청년이 딘 소장과 중위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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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out, Americans! Come out! We will not kill you. We are members of the People's Army. Come out, Americans!" (미국인들 나와라! 당신들 죽이지 않겠다. 우리는 인민군이다. 어서 나와라!)라는 큰 소리가 들렸다. 딘 소장은 자서전에서 "그때까지 이렇게 영어 잘하는 한국사람 처음 보았다"고 썼다.

두 사람은 항복하지 않고 초가집 뒷문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 두 사람은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했다. 딘 소장은 "나중에 들으니 중위는 결혼 3개월 만에 한국 전선에 파견되었으며 결국 잡혀 북한군 포로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더라"고 자서전에 썼다. 딘 소장은 중위와 헤어진 후 한 달 정도 더 대전 남쪽 산과 들을 헤매다가 전북 진안에서 두 진안 군민한테 속아 역시 북한군 포로가 된다. 진안에서 잡히는 과정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35일 산야 헤매다 결혼기념일 날 잡혀

8월20일 그는 진안군 어느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을 발견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마침 중년 남자가 어린 딸을 업고 나오기에 딘 소장은 손으로 자기 배를 만지며 배고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 남자는 친절하게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자기 식구들을 소개하고 먹을 것도 주었다. 그런데 보리밥과 김치 그리고 돼지비계 삶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거의 한달 만에 처음 얻어먹는 밥이라 맛있게 먹었다. 돼지비계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러나 그날 밤 배탈이 나 다 토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그 집 마당에 닭이 있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닭을 가리켰다. 계란 있으면 좀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농부는 그것을 계란이 아니라 닭고기 달라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날 그는 닭곰탕에 삶은 감자로 포식을 했다. "그것은 내가 겪은 가장 운 좋은 오해였다. 이렇게 맛있는 치킨숩은 일찍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그는 자서전에 썼다.

그 친절한 농부 집에서 이틀을 신세지고 나와 걷다가 키 작은 중년남자를 길에서 만났다. 딘 소장은 그에게 대구로 가는 길을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안내해주면 100만원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나중에 한XX라고 이름이 밝혀진 남자는 영어라고는 “오케이, 오케이" 밖에 할 줄 몰랐으나, 손짓발짓으로 딘 소장을 대구로 안내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딘 장군은 그를 따라가다 이번엔 20대 청년 하나를 만났는데 나중에 "최XX으로 밝혀진 사람이었다. 청년 역시 영어를 못했다. 이들을 따라가던 딘 소장은 구식 소총을 든 10여명의 청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장군의 두 팔을 등 뒤로 묶었다. 그는 권총을 써볼 겨를도 없이 당했다. 그는 마을 파출소로 끌고 갔고 결국 나중에 북한 인민군에게 넘겨졌다. 그날이 1950년 8월 25일, 공교롭게도 그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9월 한 아무개(40세)와 최 아무개(24세)는 체포되었다. 경찰은 이 두 사람이 딘 소장을 인민군에게 넘겨주고 3만원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해를 넘겨 1954년 1월 12일 최는 사형, 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사는 두 피고인에게 모두 징역 5년을 구형했으나 판사가 구형량보다 훨씬 높은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딘 소장은 두 피고인에게 관대한 처벌을 부탁하는 편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으나 법원에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썼다. 최의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한이 종신형을 살다 늙어 죽었는지는 아니면 둘 다 감형·석방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