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讀者手記] 어느 학도병의 6·25

이강기 2015. 9. 16. 11:05

[讀者手記] 어느 학도병의 6·25

 

 

글 : 최상필 前 강원도의회 의장·수필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월간조선 2014년 6월호

 

⊙ 강릉상고 재학 중 피란길 올라, 美2사단 정찰중대로 포항전투 등 치르고 묘향산까지 北進
⊙ 미군, “너는 한국 사람이니, 敵軍에 붙잡히면 ‘끌려왔다’고 말하라”
⊙ 중공군 개입 후 신안주에서부터 후퇴, 철원에서 적의 기습받은 후 중대병력 중 23명만 살아남아

최상필
⊙ 80세.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 창영운수 대표이사, 평통 자문위원, 강원도의회 의장, 농협중앙회 이사 역임.
⊙ 《월간 창조문예》 시 부문 등단, 《월간 수필문학》 수필 부문 등단.
  나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태생으로 지금의 옥계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릉상업중학교(강릉 제일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강릉상고에 재학 중 6·25가 터졌다. 정동진 해상을 통해 강릉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경에, 현재 무장 잠수함이 전시되어 있는 강동면 안인 해변에 상륙하여 국군과 교전(交戰)했다.
 
  당시 강릉 교동 임영고개 일대에는 8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적의 공격으로 38선 전선(前線)에 배치되어 있다가 밤중에 시내에 있는 사단 연병장으로 옮겨온 8사단 포병대는 북(北)을 향해 계속 포를 쏘았다. 나를 포함한 10여 명의 학생들은 종일토록 힘겨움을 잊고 포탄을 날랐다. 그런 와중에도 북으로부터 피란민들이 계속 밀려왔다.
 
  해질 무렵, 학생들에게 귀가(歸家)하라는 통보가 왔다. 그러나 강릉과 옥계 사이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있어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구정면 어단리에 사는 같은 반 친구 김진몽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피란길에 올랐다.
 
  임계와 영월을 거처 제천까지 이틀을 걸어서야 중앙선 화물열차 지붕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열차는 수없이 정차(停車)를 반복하다 대구역에 도착했다. 한밤중이었다. 대합실에서 새우잠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역 밖으로 나가보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갔으나 그곳도 같은 상황이었다. 부산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시 기차를 타고 삼랑진역에 이르니 “종착역이니 모두 하차(下車)하라”고 했다. 졸지에 삼랑진 시내를 전전하면서 거지 행각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당시 삼랑진읍에 있는 학교에 피란민 임시수용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친구 권오명, 권혁민 등 서너 명과 함께 자루를 들고 농촌의 기와집을 찾아다니며 보리쌀이든 된장이든 주는 대로 얻어 연명했다. 때로는 다리 밑에서 지내기도 했다.
 
 
  삼랑진에서 美2사단 입대
 
  2~3주일 지나자 유엔군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는 역전(驛前) 부근에 몰려나가 하릴없이 서성거렸다. 총과 큰 짐을 어깨에 멘, 키 크고 노란 머리에다 코 큰 군인들이 수없이 기차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었다. 포 사격 소리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역전을 다시 찾았더니 학도병을 소집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나는 학도병에 합류하고자 동분서주했다. 모두 12명이 미군에 차출됐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미 2사단 첩보정찰 중대에 배속됐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나는 부대원들과 함께 전선(戰線)으로 달리고 있었다.
 
  포항전투와 낙동강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캄캄한 밤중에 논두렁에서 긴장한 상태로 총을 들고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미군은 내게 “너는 한국 사람이니, 만일 적군(敵軍)에 붙잡히면 ‘미군에 끌려왔다’고 말하라”고 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에 비로소 나는 인민군에 포위된 상황을 알게 되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떨었지만, 다행히 그날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도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우리 부대는 이동 명령을 받고 거창, 김천을 지나 서부전선인 전주로 이동했다. 서해 바다를 끼고 충청도 어느 초등학교에 주둔했을 때, 화폐개혁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까지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허리에 차고 다니던 나는 실망감에 빠졌다. 고민 끝에 다음날 아침 땅을 파고 만든 쓰레기장 구덩이에 돈을 버렸다. 최전선에서 전투 중이라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른 아침 정찰 나가는 탱크 소리를 듣고 구경나온 마을 어린아이가 학교 정문 기둥을 넘어뜨리며 나오는 탱크에 치여 즉사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다시 홍성을 거처 북진(北進) 중 며칠 뒤 충주 이류면 달래강 부근 어느 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우리 부대는 사방 100여km의 전선을 정찰하면서 전진, 마침내 서울 근교 영등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재(再)무장한 후 다시 북진, 황해도 사리원 어느 과수원에 주둔했다. 이곳에서 2~3일을 지낸 후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특이하게도 울타리와 돌기와집 기둥 전체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던 집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부대는 4개 소대 120여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개 소대에 각각 소대장 지프 1대, 무선 연락 지프 1대, 탱크 1대, 장갑차 2대가 있었다. 본부 소대를 제외한 3개 소대는 매일같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며 진격하였다. 저녁이면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몰골로 귀대하면서 안도의 마음으로 “서부전선 이상 무(無)!”를 소리 높이 외치곤 했다.
 
 
  죽음의 후퇴길
 
  어느 날 정찰하던 중 비행기 공습으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현장을 발견했다. 그날 밤, 팔다리를 부르르 떨고 있던 목 없는 시신이 떠올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찰을 나가 빈집을 수색하다가, 적군이 따뜻한 밥을 먹다가 방망이수류탄까지 버려두고 황급히 도망간 흔적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우리 부대는 평양을 거쳐 개천, 덕천, 맹산을 지나 폐허가 된 원산 시내로 들어갔다. 평양 시가지에 전철(電鐵)이 단선(單線)으로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우리는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와 개천, 구장을 거쳐 서부전선으로 이동, 철교가 있는 청천강을 끼고 신안주 외곽지대에 주둔하게 됐다. 묘향산 인근이었다.
 
  10월 말 어느 날 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유난히도 정막감이 감돌았다. 갑자기 사방에서 난데없는 날라리 소리, 피리 소리 같은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몸에 힘이 빠지면서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 두려움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얼마쯤 지났을까? 사방에서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와!” 하는 함성소리가 밀려왔다. 중공군(中共軍)이었다.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모두 정신없이 응사(應射)하면서 후퇴했다.
 
  아침나절 동안에 신안주에서부터 50여 리 길을 후퇴했다. 아군 비행기의 공습(空襲)이 시작되면 트럭에 매달려 퇴각했다. 아군 비행기가 돌아가고 적군의 사격이 시작되면 재빨리 차에서 내려 길 가장자리 배수로에 엎드려 응사했다. 옆에 있던 전우(戰友)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으면서 밤 12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사지(死地)를 벗어났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후퇴해 철원 지포리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 이르렀다.
 
  그곳은 아군에 의해 수복된 비교적 안전지대라 한숨 돌리는가 싶었다. 2~3일쯤 지났을 때였을까? 캄캄한 밤중에 우렛소리를 내며 적군이 급습해 왔다.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는 무시무시한 육박전(肉薄戰)이 벌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군이 북진할 때 중부전선을 통해 북으로 후퇴하다가 낙오됐던 인민군 패잔병(敗殘兵)들이 우리 부대를 습격한 것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도망치던 나는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정신이 들었다. 몽롱한 가운데 주위를 살펴보니 적막하기만 하였다. 멀리 군용 트럭들의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동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안전지대로 나오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탄 파편에 부상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집결하여 점호를 했더니 23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사(戰死)했다. 살아남은 이들도 넋이 나가 있었다. 중대장이 전사하고, 중대 무선(無線) 연락차마저 포화(砲火)에 소실되는 바람에 부대가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중대는 홍천 근교에서 보충병을 받아 재편성되었다. 며칠 후 우리는 인제·원통 지역 강변에 진지(陣地)를 구축했다. 다음날 밤 후미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춰 주는 가운데, 전면에 있는 산(山)을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이른 새벽에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헬리콥터 편으로 현지에 도착했다. 장군의 도착을 알고서 그러는지 적의 포격은 더욱 심해졌다. 모두 호(壕)를 찾아 달렸다. 그때 나는 날아온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의무대원이 달려와 붕대를 감아주었다.
 
  다음날 새벽 동틀 무렵 전투가 멈추었다. 전우들과 적의 진지가 있던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호 속에는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아 새카맣게 타 죽은 인민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반(半)세기를 넘어 65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자다가도 그때를 생각하면 뼈마디 가득 전율(戰慄)이 흐른다. 그 치열했던 격전 속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은 것은 실로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이기에 죽도록 감사하는 마음이다. 다만 못다 피고 스러진 전우들, 전상(戰傷)으로 장애를 입고 고통받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그분들의 희생 덕분이다. 오늘을 사는 이들은 그분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도록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이다.
 
  60여 년 전 그날을 반추(反芻)하노라면, 이 밤도 목 놓아 통곡하고 싶은 심사(心事)이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유성(流星)이 긴 꼬리를 달고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