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백화점 가던 이순재, 외박 나온 박태준도 "그날이 悲劇 시작일 줄은…"

이강기 2015. 9. 16. 11:25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백화점 가던 이순재, 외박 나온 박태준도 "그날이 悲劇 시작일 줄은…"

  • 김성현 기자
    • 조선일보

    입력 : 2015.03.26 03:00 | 수정 : 2015.03.26 07:02

    [12] 회고록으로 본 6·25

    高1 학생이던 배우 이순재 "시내엔 요란한 사이렌 소리"
    예배 준비하던 강원룡 목사 "가장 먼저 라디오부터 사"
    '육군 대위' 박태준 前총리 "아침부터 왠지 가슴 먹먹"
    이승만 대통령, 남침 보고에 "탱크 못 막을텐데" 혼잣말도

    기억은 불완전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의 날씨를 두고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그날 약간 부슬비가 내렸다"고 회상했지만, 당시 서울 갈월동에 살던 12세 소년 김경엽(전 삼신올스테이트생명 대표)은 "유난히 햇빛이 눈부시고 청명한 날"로 기억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평균 기온은 20.6도. 시간당 최다 강수는 4㎜로 관측됐다. 오전에 비가 잠시 내렸다는 뜻이다.

    헌병사령부 소령이었던 김씨의 아버지는 식구들과 오붓하게 아침 식사를 하던 중에 전군(全軍) 비상소집 전화를 받고 출동했다. 그 뒤 김씨의 가족은 700리를 피란한 끝에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서 아버지와 재회했다.

    주일 예배를 준비하던 강원룡(1917~2006) 목사는 "그날 아침은 유난히 안개가 끼었다"고 기억했다. 강 목사는 "고향 개성에 갔다가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간신히 도망쳤다"는 대학생의 말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강 목사는 보리쌀을 팔아서 라디오부터 장만했다. "무엇보다 보도를 듣는 일이 긴요하다는 판단"이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명동 거리(위)를 걷고있는 피란민과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소총으로 무장하고 남하하는 북한 인민군.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명동 거리(위)를 걷고있는 피란민과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소총으로 무장하고 남하하는 북한 인민군. /조선일보 DB
    그날 아침 서울고 1학년이었던 이순재(탤런트)는 두 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동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으로 향했다. 여름방학 때 대천해수욕장에 물놀이를 갈 계획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복을 사러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백화점 앞에 도착하니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휴가 중인 군인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는 가두 방송이 시내를 뒤덮었다. 다음 날인 26일 평소처럼 등교했지만,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하교했다. 27일 이씨의 가족은 피란길에 올랐다.

    연세대 학도대장이던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은 25일 오후 2시 종로 YMCA에서 열리는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듣기 위해 시내로 나섰다. 성서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영시와 한시(漢詩)까지 아우르는 함석헌의 강의에 당시 대학생들은 매혹됐다.

    다음 날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도 함석헌의 신앙강좌가 열렸다. 서울 상공에 출현한 북한 공군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자 일제히 학생들은 하늘을 쳐다봤다. 함석헌은 "날아가는 비행기에 관심을 가져서 뭘 할 거냐"라고 학생들을 꾸짖었다. 함석헌의 강좌는 3차례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날 강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인민군의 진입 소식에 김동길은 학교 창고에서 목총(木銃)을 꺼내 학생회관을 지켰다. 하지만 "한강을 건너가 있다가 오라"는 교수의 당부에 피란길에 나섰다.

    당시 대학생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은 행정고시 3부(외무고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만 19세에 외교관 시험 최연소 합격'이라는 목표를 세운 그는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4~5시간을 빼고는 온종일 공부만 했다. 하지만 시험 원서 제출 닷새 만에 전쟁이 터졌다. 그는 "외교관 시험은커녕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게 됐다"고 했다.

    
	6·25에 대한 발언들.
    경기도 포천의 육군 대위 박태준(전 국무총리·1927~2011)은 석 달간 계속됐던 비상경계 명령이 24일 0시에 해제되자, 서울 시내로 외박을 나왔다. 일본 와세다 대학 선배와 술잔을 기울인 뒤 잠들었던 그는 25일 아침 눈을 뜨자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고 했다. 전쟁 소식을 듣고 군용트럭을 잡아탄 그는 몇 차례나 갈아탄 끝에 간신히 부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박태준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쳐내려 오는 인민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 4월 1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3개월 일정으로 경기도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고급 간부 훈련' 교육을 받고 있었다. 작전참모의 전화를 받고 용산 육군본부로 향하던 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평소 일요일과 조금도 다름 없이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교회 종소리도 평화롭게 들려왔다"고 회고했다.

    참모총장실에 들어간 그가 1사단으로 복귀해도 좋은지 묻자, 거구의 채병덕 참모총장은 "무슨 그따위 소리를 하는가. 빨리 사단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1950년 10월 미 1기병사단에 앞서 평양에 입성하고, 1953년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신화(神話)'의 시작이었다. 대장 진급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오전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를 하러 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금니 치료를 받기 위해 치과에 갔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온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이 개성을 점령하고 춘천 근교에 이르렀다'는 장관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고 입속말을 했다.

    밤새 잠 못 이루던 이 대통령은 새벽 3시,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 전속부관이 맥아더를 깨울 수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테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그 소리가 커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통화가 끝나자 이 대통령은 곧바로 장면 주미(駐美)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미 의회가 승인한 무기 지원안(案) 추진 상황을 알아보라고 닦달했다. 6·25 전쟁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날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남북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300만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