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흥남 철수와 이경필

이강기 2015. 9. 16. 11:26

흥남 철수와 이경필

  •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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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5.4.10


    중공군 6㎞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1만4000명 빽빽하게 '기적의 승선'
    사흘 항해 뒤 1만4005명으로 늘어 '최다 인원 구출 선박' 기네스북에

    평화사진관·평화상회 연 부모
    "외국인이 목숨 걸고 데려다준 곳… 무일푼 우리를 받아준 섬이다"
    거제도서 봉사하는 삶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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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장 라루와 수사 마리누스

    프랑스계 미국인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는 수사(修士)였다. '라루'는 프랑스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마흔 살 되던 1954년 라루는 수도원에 들어간 이래 딱 하루를 제외하고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례명은 마리누스(Marinus)였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성바오로수도원은 노동과 기도를 삶의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베네딕트회 소속이다. 마리누스 수사는 독서와 기도를 일관하며 평화롭게 살다가 여든일곱 살에 선종했다. 2001년 10월 14일이었다. 수사가 되기 전 그는 선장이었다.

     

    그가 이끌던 배 이름은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였다. 1950년 12월 23일 새벽 길이 196m, 폭 20m에 불과한 이 7600t급 화물선은 화물 대신 자그마치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 부두를 떠났다. 라루 선장 표현대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같았다. 침몰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배는 12월 25일 아침 800km 바닷길을 지나 경남 거제도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다친 사람 한명 없었다. 오히려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 의무실에서 태어난 첫 아기를 선원들은 김치라고 불렀다.

    장승포 하선 직전 스물여덟 된 여자 김재남이 화물칸에서 아들을 낳았다. 여자들이 둘러서서 쳐준 장막 한가운데에서 서정숙이라는 할머니가 앞니로 탯줄을 끊었다. 다섯 번째로 태어난 생명이었다. 선원들은 아이를 김치 파이브라 불렀다. 서른일곱 살 된 아버지 이석초는 아들 이름을 경필이라고 지었다. 예순다섯이 된 이경필은 지금, 수의사다. 단 한 번도 장승포를 떠난 적이 없다.

    장진호전투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이어 서울이 수복됐다. 한국군 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20일 미8군이 평양에 입성했고 이어 미 10군단이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토막 난 북한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북한 임시 수도인 강계시를 목표로 진군하던 미군은 장진호에서 중공군 제9병단과 맞닥뜨렸다. 7개 사단 12만명. 아군은 미 해병대 1사단 1만2000명. 한국군 카투사 875명, 미 육군 7사단 일부와 영국 해병대 일부도 함께였다. 영하 30도의 개마고원 강추위가 닥쳤다. 서방 언론은 '사상 최악의 동계 작전'이라고 불렀다. 1만2000명 가운데 4779명이 행방불명, 705명이 전사, 그리고 부상자는 3251명이었다. 도쿄에 있는 총사령부는 해상 철수를 결정했다. 철수 작전지는 흥남이었고 목적지는 최후방 부산이었다. 장진호 주변에 살던 북한 주민 수만 명도 피란길에 올랐다. 한국인에게야 동포였지만 미군의 군사적 시각으로는 적국민(敵國民)이었다. 하지만 젖먹이를 둘러업고 혹한 속 눈밭 위를 걷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현봉학, 김백일 그리고 에드워드 포니

    흥남 부두에 모인 사람은 20만명이 넘었다. 군 병력 10만명에 피란민 10만명, 차량은 1만7000대가 넘었고 군수물자도 35만t이나 있었다. 바다에선 유엔군사령부가 한국과 일본에서 보낸 군용선과 민간 선박 193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철수 대상은 군인과 한국인 군무원, 그리고 북한 정권에 처형당할 우려가 있는 민간인에 한정됐다. 국군 1군단장 김백일은 "유엔군이 거부하면 우리가 육로로라도 민간인을 후퇴시키겠다"고 했다.

    
	1950년 겨울 흥남부두는 무척 추웠다. 피란민들은 두렵고 초조한 표정으로 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렸다. 12월 23일 멀리 보이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날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을 탈출했다.
    1950년 겨울 흥남부두는 무척 추웠다. 피란민들은 두렵고 초조한 표정으로 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렸다. 12월 23일 멀리 보이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날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을 탈출했다.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11월 30일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함흥에서 민간 보좌관인 의사 현봉학, 철수 작전 실무 책임자인 부참모장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과 면담했다. 현봉학은 "민간인 동행 철수 불가 결정을 철회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포니 대령 또한 인도주의를 주장하는 현봉학에게 공감했다. 12월 15일 알몬드 장군은 흥남행 열차 문을 개방했다. 새벽 2시 피란민 5000명을 태운 열차가 출발했다. 13km 거리 흥남역까지 세 시간이 걸렸다.

     

     

    1950년 겨울, 흥남 부두

    "보름 있다가 올라오너라." 어미가 며느리에게 말했다. 함흥에서 흥남 구룡리 부잣집 3대 독자 이석초에게 시집온 김재남은 갓 걸음마를 배운 세 살배기 군필을 둘러업고 걸음을 옮겼다. 만삭이었다. 남편 석초는 사진가였다. 구룡리에 있는 배둔사진관은 장사도 잘됐다. '보름만' 이라고 어미와 아들은 생각했다. 카메라를 짊어진 남편과 배 속과 등에 두 아이가 달린 아내가 부두에 도착했다. 1950년 12월 21일이었다. 바닷바람이 엄청나게 추웠다.

    부두는 사람과 군수품이 가득했다. 바이올린만 들고 온 사내,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 온 여자, 퍼덕대는 닭 한 마리를 끌어안은 계집아이…. 사람들은 차가운 바닷물로 뛰어들어 배를 향해 걸어갔다. 부두 한쪽에서는 병사들이 군수물자에 폭약을 설치하고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비행기에서 이 광경을 본 알몬드 장군이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에게 말했다. "반드시 전원 구출하라." 사람들과 물자를 집어삼킨 미군 상륙함들은 속속 바다를 향해 돌진해갔다. 작은 목선들은 사람들을 서 있는 채로 태우고서 떠나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그즈음 10군단 부참모장 5명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전날 긴급 지시를 받고 부산에서 올라와 앞바다에 정박 중이었다. 화물칸에는 비행기 연료 300t이 실려 있었다.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이 배가 마지막 배다. 부탁한다. 민간인들을 태울 수 있는가?" 라루 선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날 입항할 때 쌍안경 너머 보이던 병아리 같은 아이들 눈동자가 떠올랐다. "알겠다." "몇 명이나?" "태울 수 있는 데까지." 선장은 옆에 있는 일등항해사 디노 사바스티오에게 지시했다. "승선 인원이 1만명이 되면 보고하라."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승선 인원은 12명이었다. 경승용차에 미식축구 선수 열두 명을 넣는 마술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포대기 끈으로 아이를 끌어올렸다. 그만큼 절박했다.
    사람들은 포대기 끈으로 아이를 끌어올렸다. 그만큼 절박했다.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흥남 해상에는 소련과 북한이 뿌려 놓은 기뢰 4000개가 깔려 있었고 민간 선박인 배에는 탐지 장치가 없었다. 비상시 교신도 불가능했다. 호위함도 없었다. 화물칸에는 기름 300t이 언제라도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이타닉호의 몇 배를 넘는 역사적인 재난이 터질 수 있었지만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마술, 아니 기적을 택했다. 2차대전 때 사이판에서 한인 징용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 사무장 로버트 러니(Robert Lunney)를 비롯해 모든 선원이 지시를 따랐다. 러니는 훗날 "촌스럽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피란민들은 침묵 속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병사, 선원들 안내를 따라 배에 올랐다. 작은 배들을 묶어서 만들어놓은 다리를 넘어 속속 화물칸으로 들어갔다. 화물칸은 다섯 칸이었다. 기름 300t을 실은 맨 아래 칸 빈 공간을 시작으로 다섯 칸이 가득 찼다. 갑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2일 오후 9시 30분에 시작된 승선 작업은 23일 오전 11시 10분에 끝났다. 하늘은 흐렸고 바다는 고요했다. 대형 조명등이 불을 밝혔다. 중공군 보병부대는 6km 앞까지 다가왔다. 선원들은 인류사에 남을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라루 선장이 일지를 썼다. '있을 수 없던 공간이 생겨났음.'

    배가 출항하고 미군은 부두에 모아놓은 군수품을 폭파했다. 지독하게 추웠다. 화물칸은 숨 막혀 죽을 지경이었고 갑판은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 밤 일등항해사 사바스티오가 선장에게 보고했다. "1만4000명을 태웠는데, 지금 한 명이 늘었다." 의무실을 찾은 사무장 러니는 아기에게 '메러디스 빅토리 김치'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24일 부산항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 네 아기가 태어났다. 각각 김치 2, 3, 4로 명명됐다.

     

     

    정체불명의 화물

    이미 피란민 100만명을 수용한 부산은 하선이 불가능했다. 라루 선장은 80km 떨어져 있는 거제도로 배를 돌렸다. 미 해군 수송선 서전트 트루먼 킴부로호 선장 레이먼드 포세는 장승포로 접근하는 정체불명의 화물선을 목격했다. "갑판에 까맣고 넓은 고체 덩어리가 실려 있었다. 배가 다가오는데, 다시 보니 사람들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항구를 바라보는 거대한 군중!"

    봄이면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지심도와 장승포 등대 사이 정박한 배에서 그 거대한 군중 1만4004명이 내리는 사이 여자들의 장막 속에 또 한 생명이 태어났다. 그가 김치 파이브다. 사망자, 실종자, 부상자 한 명 없고 새 생명 다섯을 얻으며 피란민 1만4000명을 전시(戰時)에 구출해낸 기적의 항해가 끝났다. 미국 정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했다. 군인, 민간인 20만명과 차량 1만7500대, 군수물자 35만t을 수송한 흥남 철수 작전도 종료됐다.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김치 파이브 이경필

    이석초 부부는 경필을 안고서 장승포 언덕 위에 움막을 지었다. 보름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전쟁이 끝났다. 고향은 가지 못했다. 남편은 항구에 사진관을 차렸다. 이름은 평화사진관이다. 아내는 항구에 상점을 열었다. 평화상회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더 태어났다. 다른 피란민들이 하나 둘 육지로 떠났지만 이석초는 섬을 지켰다. 아내 김재남은 가난한 지심도 사람들이 오면 양초와 고무신을 헐값에 주고 1년 넘은 재고는 그냥 줬다.

    아들 경필은 그게 이상했다. 피란민이 주축이 된 혜성고를 나와 경상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수의사가 됐을 때 "섬으로 돌아오라"던 아버지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씨, 옥씨, 신씨 이렇게 3대 성이 모여 사는 섬나라에서 피란민이라고 음양으로 괄시도 받지 않았는가.

    1975년 ROTC로 제대하고 장승포에 병원을 열었을 때 '평화가축병원'이라 지으라는 말씀에 마침내 물었다. "도대체 왜 이리 집착하시느냐"고. 늙어버린 아비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받아준 섬이니라. 핏방울 하나 나눈 것 없는 우리를 외국인들이 목숨을 걸고 데려다준 곳이니라. 그 뜻을 갚고, 다시는 전쟁 없이 살라." 그제야 경필은 왜 아버지와 어머니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지 않고, 지심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내주고, 왜 평화라는 상호를 고집했는지 알게 되었다.

    장승포 거리는 이제 초라한 골목으로 변했지만 이경필이 만든 가축병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새벽이고 늦은 밤이고 전화가 오면 찾아가 송아지를 받고 주사를 놓는다. 장남 정영은 공군 소령이다. 함께 월남했던 형 군필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치 파이브' 이경필씨 사진
    '김치 파이브' 이경필. /박종인 기자

     

    [이경필이 말합니다]

     

    나는 화물칸에서 태어나 거제도 소들 병을 고치며 살고 있습니다. 국적, 이념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때 갈 곳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 가족은 물론 이 나라도 없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라루 선장에게 감사하고, 포니 대령에게 감사하고, 현봉학 박사에게 감사하고, 김백일 장군에게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그렇게 평화와 감사에 매달리신 이유, 섬을 떠나지 말라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바람은, 제가 태어난 배가 정박한 항구에 작은 기념공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적과 고마움이 잊히기 전에요.

     

     

    "신의 손이 키를 잡고 있었다" 화물선 선장 라루, 수도사 변신

     

    
	라루 수도사 사진

     

    라루〈사진〉 선장은 1954년 수사로 변신했다. "신의 손길이 키를 잡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성바오로수도원에 은둔한 지 47년이 지난 2001년, 수도원이 재정난으로 폐쇄 위기에 놓였다. 경북 왜관에 있는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지원을 결정했다. 1949년 공산 박해를 피해 원산에서 월남한 수도사들이 만든 수도원이다. 마리누스 수사는 결정 소식 이틀 뒤 선종했다. 장례 미사에 참석해 흥남 철수와 마리누스 수사 이야기를 알게 된 재미 사업가 안재철은 사업을 닫고 사단법인 월드피스자유연합을 설립해 사무장 러니과 함께 잊힌 기록을 되살렸다. 그 결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기네스북에 '단일 선박으로 최다 인원을 구출한 선박'으로 등재됐다. 2005년 김치 파이브 이경필과 러니는 극적으로 재회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선원은 1960년 6월 24일 미국 정부로부터 '용감한 배(Gallant Ship)' 훈장을 받았다. 마리누스 수사는 그날 딱 하루 외출해 상을 받았다. 중공군으로부터 생명 1만4000명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93년 고철로 영국 회사에 매각됐다. 선박 분해는 중국에서 이뤄졌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