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단상
2001년 10월 17일
안병직 /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
내가 학문에 뜻을 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60년 4월
혁명이었다. 4월 혁명은 나로 하여금 평범한 시민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한국의 정치와 장래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4월 혁명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자연히 나도 휩쓸려 들어가게 됐는데, 상급생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기게 됐다. 이러한 필요성이 학문에 뜻을 두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하게끔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의
학문생활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뿐만 아니라 강렬한 정치적 志向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전공분야를 한국근대사로 잡기로 하였다. 1960년대
전반기에는, 대학에서조차도 아직 전공이란 것이 뚜렷이 정착되지 못했다. 학문의 형편이 그러하였으니, 한국근대경제사의 전공자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그것을 전공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한국의 정치와 장래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때 학생운동권의
현실인식은 대개 한국의 정치는 외세의존적인 것이고, 경제는 先進資本主義諸國에 종속적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자주독립과 자립경제는,
현실속에서는 달성될 수 없고, 선진자본주의제국과의 紐帶關係를 단절시키는 변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한국사에서
자립경제적 흐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러한 硏究關心이 나의 학문활동을 조선후기의 資本主義萌芽論과 식민기의 民族資本論으로
傾倒케했던것이다. 일본제국주의침략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도 그러한 연구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연구는 1970년대 말에 破綻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70년대 말 한국경제가 외자의 중입하에 붕괴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80년대 전반기의 軍事的 暴壓속에서도
붕괴되기는커녕 소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식상의 중대한 轉換局面을 맞이하여 현실을 糊塗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자기의 安逸을 위하여 동료와 국민을 고통속으로 몰아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근대사의 흐름을 재점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우선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사회주의권이나 제3세계국은 停滯하거나 沒落하고, 세계자본주의시장권에 포섭된 NICs는 繁榮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리고, NICs나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이전의 저개발제국이 취하고 있는 기본 경제정책이 輸出志向工業化政策이거나 改革 開放政策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遍歷을 통하여, 내가 도달한 한국근대경제사의 기본흐름에 대한 최근의 인식은, 開放體制下의 經濟成長이다. 이
경제성장은, 조선후기에 성립한 小農社會를 전제로, 개방체제하에서 선진자본주의제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나의 연구는 경제성장사로 一貫돼 있다. 위와 같은 연구방향 제시가 아직도 한국근대사에 대한 전통적 인식속에서 헤매고 있는 수
많은 연구자들을 開眼케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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