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비하의 역사로부터의 탈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판을 반기며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풍토 정착되길
[ 홍진표 / 2006-02-07 15:41 ]
해방 정국에서 통일국가 수립은 남한 주도와 북한 주도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종류가 가능했으며, 실제 한국전쟁에서 시도됐다. 만약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없었다면 북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졌을 것이며, 반대로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한 주도의 통일이 실현됐을 것이다.
강정구 교수가 김일성 남침을 ‘통일전쟁’이라고 하자 어떻게 감히 ‘통일’이라는 신성한 표현을 쓸 수 있느냐는 분노의 비판이 나오듯이 “모든 통일은 선이다”라는 장준하의 말은 역사의 현장에서는 낭만이거나 위선에 불과하다.
분단의 고착으로 끝난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을 해방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북한 주도의 끔찍한 통일을 피하고 남한만이라도 지켜낸 것은 천만다행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직한 한국적 사고이다. 반면, 북한 정권이 자신의 통일 야망을 깨뜨린 미국을 이른바 반통일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거대한 외부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해방 정국에 대해 27년 전 ‘자주적 선택’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있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광복·미군정·분단·반민특위·농지개혁·북한 등 각 분야의 논문들을 모아 모두 6권으로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이 그것이다.
“‘해전사’는 80년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공동 작업 또는 성과이며, 그 독자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심 세력이 되고 있다”는 출판사 대표의 말처럼 ‘해전사’는 현재 진보로 자처하는 세력의 역사관을 형성했으며 386세대에 미친 영향력은 전교조와 일부 언론을 통해 다음 세대로 계속 복제되고 있다.
‘해전사’는 레닌이 ‘쓸모있는 바보들’이라고 조롱했던 서구의 좌파적 리버럴들과 유사한 명분론에 빠진 민족주의자와 중도파들을 복권시키며, 현실주의에 입각한 지도자들을 비판대에 세운다. ‘해전사’의 일부 논문들은 마르크스의 계급사관에 입각하여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민주개혁으로 평가하고, 당시 인구의 다수였던 남한의 농민들을 반체제 세력으로 묘사한다.
예컨대 ‘해전사’는 남한의 단독정부를 추진한 이승만을 비판하고 김구, 여운형 등의 남북합작노선을 통일의 노력으로 평가하지만, 이미 소련이 북한을 자신의 위성국으로 만들 결심을 굳힌 상황에서 결정권이 전혀 없는 김일성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추진한 것은 현실적 선택을 회피한 위험한 이상주의 이상은 아니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계급이론이라는 미리 짜인 필터로 걸러진 재료만을 선택적으로 이용하여 쓴 ‘해전사’는 결국 대한민국의 선택을 반민족으로 단죄하고, 민족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한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넘어 정당성까지 부여한다.
‘해전사’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자학 풍조의 원천이 된 것은 친북 좌파로 귀결된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확산과 그들의 주류화가 결정적이지만, 반공에만 안주한 산업화 세력의 책임도 있다. ‘좌는 원천적으로 나쁘다’는 선악 개념만으로 역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군사정권을 혐오하고 불신한 80년대 대학생들에게 그 반대편에 진실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키워주었고, 이 시대에 속하는 필자도 ‘해전사’의 충격은 생생하다.
소련·동유럽이 무너지고, 북한 체제의 반인륜성이 알려져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라는 세계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지금 해방 정국의 평가는 무척 쉬워졌다. 더구나 옛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한 정권 탄생을 기획한 스탈린의 역할도 증명됐다.
마침 ‘해전사’의 일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성과가 나왔다. 20여 명의 학자가 공동 집필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논문 28편을 선보인다. 실증주의와 탈민족주의를 내건 이 책으로 인해 유토피아주의와 정파적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를 역사 그 자체로 보는 풍토의 정착을 기대한다.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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