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시야 넓힌것… 이념적 재해석 아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기획한 박지향 서울대 교수
盧대통령이 ‘해전사’ 읽고 피 거꾸로 흘렀다니
그런 역사인식 놔두는건 사학자들 직무유기…
‘해전사’도 의미있는 책이지만 고정된 시각 강요
‘좌(左)편향적 한국현대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전2권·이하 ‘재인식’)의 산파는 박지향(朴枝香·53)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다. 박 교수는 이 책을 처음 발의했고, 김철(金哲) 연세대 교수(국문학)·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교수(정치학)·이영훈(李榮薰) 서울대 교수(한국경제사)와 함께 편집위원으로 수록 논문 선정과 제작 과정을 1년 반 동안 주관했다. “정말 긴 터널을 통과한 느낌”이라는 박지향 교수에게서 ‘재인식’ 간행의 배경과 의의,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영국사를 전공한 서양사학자가 한국현대사 정리 작업을 자임한 동기가 궁금하다.
“2004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동안 한국현대사에 대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는데도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철 지난 주장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주변 학자들에게 최신 연구성과를 한데 모으는 작업을 제의했고,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일을 시작했다.”
―책이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두 권의 책에 담긴 28편의 논문을 고르고 정리·번역·감수 과정이 끝난 것은 2005년 봄이었고, 2권 끝에 실린 편집위원 대담까지 마쳤다. 그러나 출간 작업을 진행하던 출판사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중단을 통보해 오는 일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출간을 교섭했던 다른 두 출판사도 난색을 나타내는 바람에 출간이 예정보다 훨씬 늦어졌다. 아마도 이 책의 출간이 출판사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염려한 것 같았다.”
―‘재인식’은 제목에서부터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전 6권·이하 ‘인식’)에 대한 대항 의식이 두드러진다. ‘인식’의 어떤 점이 문제라는 것인가.
“‘인식’에는 많은 필자들이 여러 논문을 실었지만 핵심 관점은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론이다. 즉 민중혁명을 통한 민족통일과 분단극복을 현재의 민족사적 과제로 보고 이를 위한 역사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민족이 모든 사람에게 지고(至高)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민족은 여러 개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객관성을 추구해야 할 학문까지 민족이 지배하게 되면 곤란하다. 또 ‘민중(인민)’을 누구보다 내세우는 북한은 실제로는 스탈린주의적인 전체주의 체제일 뿐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이었다. 이제 그 효용이 끝났다는 것인가.
“민족주의는 이전보다는 많이 약화됐지만 최근 황우석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아직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Nationalism)는 18~19세기 서양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었다. 자기 민족이 올라서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눌러야 하는 ‘제로 섬(Zero Sum) 게임’인 것이다. 물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은 본능적이지만 이제 상대방도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하는 건전한 애국주의(Patriotism)를 지향해야 한다.”
―‘재인식’은 특히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을 비판하고 비교사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만 보는 일국사적 관점을 벗어나야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이 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만 우수하고, 또 비극적 역사를 경험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민족도 우리 못지않게 우수하고, 또 고난의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좋지만 그러려면 우리의 장단점과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 망국(亡國)의 경우도 남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자성(自省)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된다.”
―‘재인식’은 시종 ‘균형 잡힌 시각’ ‘정파적 이해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편집위원들의 면면 때문에 ‘우파적 해석’ ‘뉴라이트적 역사 인식’이라는 평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목표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성과를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편집위원들 사이에도 정치적 입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수록된 논문들은 다양한 성향과 주제를 드러낸다. 따라서 정치적인 선입견을 갖고 평가하지 말고 먼저 책을 읽어보고 판단하기 바란다. ‘재인식’을 좌·우의 구분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고, 한국현대사 인식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자부한다. 또 ‘인식’이 독자에게 자신의 시각을 강요한다면, ‘재인식’은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인식’을 낸 출판사와 필자들이 상당히 반발하고 있다.
“1980년 전반 ‘인식’이 한 역할을 평가한다. 당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우파적 해석만 일방적으로 통용되던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를 갖고 작업을 했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연구를 촉발한 것은 큰 공헌이다. 그러나 그 결과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도식적 인식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더구나 그 후 25년 동안 상당한 연구의 축적과 발전이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지난 2004년 ‘인식’을 그대로 재출간한 것은 문제다. 우리는 앞 세대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수정하려는 것이다. 이번 ‘재인식’ 출간을 한국현대사 연구를 도약시키는 새로운 계기로 삼자.”
―한국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데도 편집위원은 물론 수록 논문의 필자에도 국사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국사학자를 참여시키려 했지만 국사학계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국사학계의 현대사 전공자, 특히 젊은 학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서평 등을 통해 짚어주면 발전적인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재인식’ 필진과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학술회의도 계획하고 있다.”
―후속작업을 구상하고 있나.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다룬 ‘재인식’에 이어 1960~70년대에 관한 논문을 수록하는 책을 펴낼 예정이다. 그 분야를 전공한 학자들로 편집위원을 구성할 것이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6.02.09 18:42 25' / 수정 : 2006.02.10 03:4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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