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박정희 시대의 역사성(5) - 박정희 시대의 군대와 군사문화

이강기 2015. 9. 17. 17:55

박정희 시대의 역사성(5)

 

박정희 시대의 군대와 군사문화


노영기(조선대)


 

1. 머리말

2. 군사문화 형성의 배경

   1) 군대의 변화와 군부의 사회진출

   2) 병무행정의 강화와 ‘비국민화’

   3) 정훈교육과 ‘군의 정치적 중립’

3. 박정희 시대의 군사문화

   1) 박정희 정권과 군사문화

   2) 총력전체제와 군사문화 - 향토예비군과 교련

4. 맺음말



1. 머리말


‘병역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적의 18세 이상의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징병검사를 받고 ‘병역 대상자’들은 군대를 다녀온다. 제대한 뒤에도 이들은 향토예비군에 얽매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인이기를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병역의 의무’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병역 기피자’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회적 배척을 당하고 있다. 군대에서의 경험은 무용담처럼 포장되어 이야기된다. 그런 가운데 군대문화는 자연스럽게 사회로 옮겨진다. 군사문화의 형성은 이같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난다.

이렇게 형성된 군사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을 숭상하는 ‘군사주의’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또 ‘명령을 따르는 복종의 강요’를 수반한다. 그런데, 이 가치들은 합리적 판단과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비시킨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임을 강조하며 ‘국가주의’를 과도하게 강요한다. 개인의 판단이나 의사는 배제된 채 집단성과 충성만을 요구한다. 박정희 시대는 군대의 가치와 원리가 병영을 벗어나 민간사회에 침투한 시기였다.

이 같은 일이 발생한 배경, 실제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민군관계의 측면에서 이 주제에 접근했다.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관점의 차이만큼이나 대비를 이루었다. 긍정적인 입장의 연구들은 군대가 국가발전의 주역, 즉 근대화(경제개발)의 주역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 부정적인 입장의 연구들은 군대가 독재정권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2) 대부분의 연구는 민군관계에 주목하지만 군사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3) 이 글은 박정희 시대에 군사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전제 조건으로 군대의 변화 및 군부의 사회진출과, 군대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주었던 병무행정의 변화 및 정훈교육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기에 군사문화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2. 군사문화 형성의 배경


1) 군대의 변화와 군부의 사회진출

5?16쿠데타는 한국사회에서 군대문화가 사회로 옮겨져 군사문화가 형성되는 계기였다. 군사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대가 장면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군사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군대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우선, 쿠데타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제거되었고, 또 박정희의 집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은 군대에서 배제되었다. 1963년도에는 군부의 민정참여에 반대했던 인물이나 세력들이 제거되었다.4) 

군대를 안정시키기 위한 또 다른 조치로써 군인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었다. 1961년 8월 21일 국방부 내에 ‘군인사행정관리제도연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제1연구부는 군인사법과 부속법령을, 제2연구부에서 병역법과 군속법의 제정이나 개정을 연구했다.5) 이 위원회에서는 1962년 1월 20일 ‘군인사법’을 제정했고, 2월 6일부터 공포 시행되었다. 이 법에서는 계급별 정년과 현역 정년제도를 채택했다. 이것은 쿠데타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던 직급 적체를 해소하려는 목적에서였다.6)

군인 및 제대(상이)군인들에 대한 보상 법률들이 처음 제정되었다. ‘군인연금법’이 제정되었고, 국방부?보건사회부?군경원호회 등에 분산되었던 원호사업체를 통합, 기구를 단일화해 내각 수반 직속의 ‘군사원호청’이 신설되고 지방에는 지청을 두기로 했다. 동시에 임용법과 고용법을 제정하여 원호대상자를 공직 및 국영기업체에 우선 임용토록 했으며, 피원호자의 정착사업을 조성하여 자활 방도를 마련하기 위한 ‘군사원호대상자정착대부법’이 7월 5일자로 공포되었다.7) 쿠데타 이전까지 상이군인들은 문전걸식을 하거나 상품강매 등으로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이 법안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선 장병들 및 앞으로 입대할 장정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쳐 군대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8)

군사문화가 민간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군인들이 병영을 벗어나 사회로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군정 기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삼권을 장악해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서는 최고회의를 ‘군사혁명의 이념에 투철한 국군 현역장교 중에서 선출된 최고위원으로 조직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군인들의 사회진출을 법률로 인정했다.9) 최고회의의 최고위원직을 비롯해 정부 부처의 핵심에는 현역이나 예비역 군인 출신들이 임명되었고, 지방의 행정 및 치안권은 군인 출신들이 장악했다. 국영기업체의 사장 등에는 현역이나 예비역 장교들이 임명되었고, 군부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로 장성급 예비역들이 대사로 임명되었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총 110명의 당선자를 냈는데, 15명의 쿠데타 주체세력들을 포함해 총 31명이 군인 출신이었다. 12월 5일 열린 민주공화당 의원 총회에서는 국회의장을 포함한 상임위원장을 선임했는데, 총 18명(1개는 미정)의 상임위원장 중에서 쿠데타 주체세력들이 1/3인 6개의 상임위원장을 맡았다.10)

군부의 사회진출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어 온 것은 ‘유신 사무관’ 이다. 1976년 3월 26일 박정희의 지시로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을 소정의 특채시험을 거쳐 국가공무원 사무관으로 임용하는 방안이 연구되어 대통령의 재가(1976. 8. 31)를 얻어 사무관 특채제도가 시행되었다. ‘유신사무관’을 통해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1개기 총 784명의 사무관이 특채되었다.11)

군부의 사회진출은 민간사회에 군대의 제도와 문화가 도입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한 가지 예로 공직사회에서 군대식 제도가 정착되었다. 공직 사회에 군대의 조직 관리 기법이 공직 사회에 도입되었고, 군대의 참모조직과 흡사한 기획조정관제도가 정착된 것은 5?16쿠데타 이후의 일이었다.12)

군부는 사회에 진출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악 제거와 창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며 민간사회를 통제했다. 폭력불량배의 근절로 사회의 명랑화를 기한다며 총 87,487명을 검거하여 총 1,243명을 검찰과 사법기관에 송치하고, 18,055명을 즉심에, 3,246명을 국토건설사업장에 취역시켰다.13) 1961년 5월 22일 최고회의 포고 6호를 발포하여 구호?학술?종교단체와 기타 최고회의에서 허가하는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5월 31일부로 해산시켰고, 1962년 3월 16일 군정은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법률인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대통령 윤보선은 3월 22일 하야 성명 발표와 고별회견을 가졌다. 쿠데타 직후 사퇴했을 때 쿠데타 주체세력들이 만류했던 1년 전과는 달리 그의 하야는 3월 24일 최고회의에서 통과되었고, 이날부터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4,374명이 이 법에 의거하여 정치활동을 제한받았다. 이들 중 2,598명이 심판을 청구하여 1,336명이 적격 판정을 받았으며, 1963년 2월 27일까지 3,000명이 해금되었다.14)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군정은 ‘구정권하에서의 언론의 공기성을 망각한 방종과 난맥상을 숙정(肅正)한’다며 총 1,170개의 언론기관을 대폭 정비했고, 1961년 9월 12일 언론기관의 자율적 정화와 숙적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창립했다.15) 이외에도 ‘반공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제정했다. 또 군대 외에도 치안권을 가진 경찰과 사법부(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가 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중앙정보부와 수도경비사령부가 신설되어 민간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혁명공약’ 제6장에서 약속했던 민정이양은 ‘공염불’이 돼버렸다.16)


2) 병무행정의 강화와 ‘비국민화’

1962년 10월 1일 ‘병역법’이 개정되었다. 새 병역법에서는 이전까지 없었던 ‘병무조항’이 새로 들어갔다. 그에 따라 병역과 관련된 각종 기구와 제도가 새로 만들어졌고, ‘징병 대상자’들을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육군 예비사단의 병사참모부를 지방행정기구인 시도의 병무청으로 개편했으며, 구?시?군 및 동?읍?면의 행정기구에 병무행정 전담요원이 배치되었다. 쿠데타 전까지 내무부와 국방부로 이원화되었던 병무행정체계도 국방부로 일원화 되었다.17)

가장 중요한 변화는 ‘병적(兵籍)’의 정리와 관리였다. 병역불확실자-8240부대 등 종군자, 장교후보생으로 교육 중 중퇴자, 노무사단 근무장교와 하사관, 파면된 무관 및 불명예제대한 하사관 및 군복무이탈자 등-의 병적을 정리했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3개년 계속사업으로 병역의무자들의 ‘병적(兵籍)’을 본적지별로 구분하여 파악했다.18) 이러한 조치들을 통하여 국가는 징병 대상자들을 일원적이며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듯 병무행정이 강화되면서 국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 직접적으로는 병역 대상자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가능해졌다. 이것은 동시에 ‘병역기피자’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국가적 배제인 ‘비국민화’의 시작을 의미했다.

병역기피자들에 대한 ‘비국민화’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이루어졌다. 최초의 처벌은 쿠데타 직후 공직 사회에서부터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20일 ‘병역의무미필자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제 627호)’을 발표했다. 이 법은 현역 미필 공직자들을 현직에서 해면(解免)시킬 목적에서 제정되었으며, 1929년 12월 31일 이후 출생한 자로서 국가공무원 지방공무원 및 국영 또는 정부관리기업체의 임원 직위에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1961년 6월 11일까지 총 9,291명이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뒤로도 추가 숙청이 이루어졌다.19) 또 쿠데타 직후 내각공고 제1호로 ‘병역기피자자수기간’을 설정했다. 2차례에 걸친 자수기간에 총 452, 565명이 자수했다. 이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령자들의 경우 국토개발사업의 현장에 투입되었다.

1967년부터는 시도병무청이 창설된 10월 기념하여 ‘병역의무의 달’로 선정했다. 이때부터 매년 10월이 되면 가두에 프랑카드나 선전 포스터 등을 게양하고 병역의무자에게는 준법정신과 병역의무이행을 촉구하며, 병역행정유공자를 표창하는 등의 행사를 치렀다.20) 그러나 병무행정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역기피와 병무비리는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병무파동’으로 불리는 대규모의 병역비리가 터져 나왔고, 대학가에서는 '교련교육‘에 대한 반대투쟁이 발생했다.

이 문제들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단호했다. 1973년 1월 10일 ‘병역법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병역기피자나 이와 관련된 부정행위를 한 자를 병역법이나 형법에 정한 처벌보다 무겁게 처벌하려는 목적에서 제정되었다. 즉 기존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이 보다 더 강력하며 구체적인 대응은 같은 해 2월 26일 작성되어 3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대통령령 제34호 ‘병무행정 쇄신지침’이었다.21)

이 시행령은 근절되지 않는 병무비리와 병역기피를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유신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강조되었다. 이 지침에서는 ‘병무비리자’와 ‘병역기피자’를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하여 ‘일체의 사회활동을 제한하고 단호히 색출 엄단하여 국가의 법질서와 사회기강을 확립한다’고 표방했다. 관련자 국외여행 제한, 국가공무원 채용시 병역필한 자 우선 들에 대해서는 국민으로써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다.임용, 국가나 공공단체의 인허가 업종 종사자는 인허가 취소 등을 규정했다. 또 행정부 각 부서별 조치사항을 지시하여 병역기피나 병무비리에 관련된 규제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22)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포하여 대학가를 점령한 뒤 학생운동의 핵심세력들을 대거 군대로 입대시켰다. 이들 중에는 입영 대상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예외 없이 징집 당하여 전방으로 차출되었다. 정권 차원에서 이들은 모두 최전방 전선에 배치하고 방첩대에서 직접 감시했다. 1965년에 제정된 국군교육이념에서 군인의 양성 목적이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으로 교육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제징집’의 목표는 분명해진다. 즉 반국가사범인 이들을 군대에 입영시켜 체제에 동화하는 국민으로 재교육시키겠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80년대에 진행되었던 ‘녹화사업’은 이미 70년대에 그 원형이 형성, 적용되었다.

박정희는 1974년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병무행정의 발전을 독려하며 “병역의무는 우리나라 남자로서 오히려 영예스러운 일인데도 이를 기피하는 사람은 국가장래를 위해 단연코 우리 사회에서 제거해야한다”며 “당사자와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하라고23) 지시했다.

‘국민의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일체의 예외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곧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며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양심에 반하는 직무로부터의 해방’ 혹은 ‘양심에 반하는 행위의 강제금지’라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헌법 제19호)는24) 하위법인 병역법과 대통령령에 의해 규제 받는 현실이 연출되었다.


3) 정훈교육과 ‘군의 정치적 중립’

‘병역법’에 따르면, 징병검사를 받은 현역 대상자가 입대하여 군인이 되는, 즉 계급장을 달기 전부터 군인으로 규정되어 군대의 통제 아래 놓였다. 장교 및 하사관과 같은 직업군인들은 각종 사관학교나 군사교육기관에서부터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사병들은 신병으로 훈련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군인으로 규정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 ‘병역법’에는 제대군인을 35세까지 동원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제대 뒤에도 군인이기를 강요했다. 군대에서의 경험은 제대 후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군사문화 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군대 내에서 행해지는 군사훈련을 비롯한 각종 교육, 특히 정훈교육은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까닭에 군사문화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25)

정훈교육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며 실시되었다.26) 쿠데타 직후부터 1968년까지는 ‘군인의 사생관 확립, 건국이념 체득, 전쟁 목적 주지, 멸공사상 배양’ 등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69년도이다. 이 해의 정훈교육의 중점사항은 ‘국군의 이념과 사명 주지, 민주승공이념 체득, 국가시책 및 국내외 정세주지, 자질향상’ 등이었다. 군인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군인복무규율’과 ‘군인의 길’ 및 ‘군진 수칙’ 등이 강조되었다. 또 사상을 선도한다며 ‘민주주의의 원리와 공산주의 비판’이 행해졌다. 국가관의 기초로는 ‘건국이념’과 ‘국가시책’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세 번째 시기는 1970~1972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군인의 정신적 지주, 국가관 확립, 사상무장, 군인정신 함양’ 등이 강조되었다. 특히 다른 과목들이 2주간 실시되었던 반면에 사상무장과 군인정신 과목은 각각 16주 교육이 실시되었다. 사상무장은 반공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군인정신은 ‘명예심, 책임감(인용자 주 - 원래는 관념으로 적혀 있다.), 희생정신, 감투정신, 사생관’ 등이었다. 다음 시기로는 1973~1979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는 ‘국가관 확립, 멸공 민주의식 고취, 군인정신 함양’에 중점이 두어졌다. 과목은 ‘공산당의 죄악상, 참된 민주주의, 조국의 발전상, 조상의 빛난 얼, 우리의 각오’ 등이며, 특히 유신과 주체적 민족사관 교육에 역점을 두었다.27)

정훈교육이 실시되면서 그 원칙들이 점차 정비되어 갔다. 1965년 국방부에서는 군대의 각급 교육기관의 통합 운영안을 검토하며 다음과 같은 ‘국군교육이념 및 교육령’을 제정했다.


국군교육이념 - (가) 자유와 민주 그리고 반공을 국시로 삼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 되게 한다. (나) 모든 침략으로부터 국토와 국민을 보호하는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 (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민족과 인류 앞에 봉사의 책임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게 한다. 

국군교육훈련의 방침 - (가) 독립자주의 기운과 역사적 전통을 이해시키며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 되게 한다. (나) 민주주의의 사상을 고취하고 투철한 승공이념을 함양케 한다. (다) 침략방위와 국토수호의 정신을 가지게 한다. (라) 백전필승을 기할 수 있는 강력한 전투력의 유지 및 배양을 위하여 개인을 교육하고 부대를 훈련한다. (마) 자유세계의 기본정신과 평화의 큰 사상을 알려준다. (바)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봉사의 책임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게 한다.28)


1966년 3월 15일에는 ‘국군이념’과 ‘군인복무규율(대통령령 제2465호)’이 제정되었다. 총 10장 182개조로 구성된 이 규율은 아직 현역 군인이 아닌 사관생도?간부후보생 및 하사관 후보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 시기 정훈교육의 특징은 과도한 ‘국가주의’의 강조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를 방위하기 위하여 국민의 자제로써 이루어진 국민의 군대”라고 하였다.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국가의 안정과 발전 없이는 결국 개인의 행복은 헛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나를 다소 희생하고…내가 발전하려면 공동체의식, 특히 국가의식을 굳게 지니고 살아가게 될 때에 국가도 발전하고 결국 개인의 행복, 즉 나의 행복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다.29) 그에 따라 군인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보고 그를 위해서 전 생애를 통하여 지성을 다하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데까지 나가’며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여 욕된 삶을 살기보다는 영광의 죽음을 택’해야하는30) 사생관이 강조되었다.

‘군인복무규율’에서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 국민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얼핏 보기에 ‘국민의 군대’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고 국가를 대표하며 국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그로부터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상급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다.31) 그럴 경우, 잘못된 정책이 시행될지라도 상관-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명령이면 절대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군기’라는 이름으로 강조되었고, 그렇기에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이나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과 같이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들이 국민의 군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한편,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주체세력들은 쿠데타 직후부터 ‘군부의 정치참여’ 정당성을 역설했다.32) 이 주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무너뜨리며 사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었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역을 기피했고,33) 군대 내의 부정부패는 쿠데타 주체세력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만연되어 있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이후 ??한국군사혁명사?????혁명재판사?? 등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박정희는 1962년 12월 14일 육군 제1군 창설 9주년 기념치사에서 ‘군은 정치에 관여함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원칙’이라고 했고,35) 전역사에서는 쿠데타의 불가피성과 함께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훈교육’ 실시원칙에서도 ‘정치문제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견지에서 취급’하라며 ‘정치에 관한 문제취급에 있어서는 자기 주관으로 처리하여 언급한다면 이것은 불편부당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동적 정치선전을 의미하게 됨으로써 중립을 견지하여야 할 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은 1966년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군인복무규율’에서 재확인되었다. ‘군인복무규율’에서는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맡은 바 임수를 완수하라’며, 복무태도에서도 ‘자기의 선거권을 행사하는 이외의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박정희 정권기의 군대는 정권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거나 선거 과정에서 군인들이나 군대의 장비가 동원되었다.36) 박정희 정권은 군대에게 형식상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지만 정권의 필요에 따라 군대를 동원했다.



3. 박정희 시대의 군사문화

1) 박정희 정권과 군사문화

군대문화는 군대를 유지하는 문화이며, 군대문화가 사회로 전파된 것이 군사문화이다. 군대는 국토방위를 위해 전쟁도 수행하며, 항상 무장과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기구이다. 군대는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는 임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무장력’을 주요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한 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타협보다는 승리를 우선시하며, ‘적아(敵我)’를 구분짓는 ‘흑백논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군대가 유지되기 위해 군인이 지켜야 할 규율은 ‘군기’이다. ‘군인복무규율’에서는 군기를 ‘군대의 규율과 질서이며 생명과도 같다’고 정의하며, 군기를 세우는 으뜸은 ‘명령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며, 군인은 정성을 다하여 상관에게 복종하고 명령은 절대로 지키는 것을 습성화할 것’을 제시했다.37) 이렇듯 군대는 ‘명령을 따르는 복종의 강요’를 원리로 하여 전투를 치르는 조직이다. 그런데 이 군대의 조직 원리는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로 진출한 뒤 병영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적용되었다.

박정희는 군대식 원리를 통치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당 총재였던 박정희의 지시(명령)에 따르는(복종하는) 또 다른 군대였다. 당 총재인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원내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게 집권 여당의 초라한 단상이었다. 간혹 문교부 장관과 내무부장관 해임안 통과 등과 같은 반발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군대에서의 ‘항명’과 같이 취급했다. 여당의원일지라도 중앙정보부에 의해 불법 납치되어 고문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명령을 따르는 복종의 강요’ 뒤따르는 물리적 억압은 야당과 국민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거나 여당보다 강도 높게 적용되었다. “정부 정책에 비판을 하고 반대를 하면 이것을 적대시 하고 증오하고 그리하여 국회를 무력화 시키고 정보정치로 국민을 협박하고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학원에 침입하고 이러한 군사통치 방식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처럼38)은 박정희는 군대식 통솔방식을 그대로 민간사회에서 똑같이 재현했다. 사상계의 폐간 및 장준하 암살사건과, 김대중과 최종길에 대한 납치 및 살해, 그리고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 등 각종 조직사건의 조작이 대표적인 예였다.

역대 정권 중에서 박정희 정권만큼 군대를 ‘치안확보’를 위해 자주 동원한 경우도 드물다.39) ‘5?16쿠데타’와 ‘6?3사태’, ‘10월 유신’과 1979년 10월 18일 부산 일대 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외에도 1965년 4월 19일과 8월 26일, 1971년 10월 15일에는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특히, 학생들의 저항이 강력해 질 때마다 발동했던 ‘위수령’은 모법(母法)조차 없었던 ‘유령법’이었다. 헌법에는 ‘위수령’ 관련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위수령’을 발동하여 학원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여 민간사회를 통제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을 물론이고 위수령의 불법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형식적으로나마 법에 의거했던 계엄령과 달리 군대의 폭력을 앞세운 각종 정치 테러가 빈번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군대식 통치방식은 국가정책의 결정과 실행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른 합리적 토론의 부재와 민주주의의 실종을 낳게 되었다.

군사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규범과 형식에 따른 획일화의 강요이다. 군대는 똑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 같은 군대의 규범과 형식은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발과 복장에 대한 단속이다. 1973년 2월 8일 개정된 ‘경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다. 다음날 치안국에서는 전국 경찰에 총 11개항의 단속 규정을 내렸다. 이 규정들 중에는 장발과 과다노출 및 미풍양속을 해치는 복장 등이 포함되었다.40) 국가가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방식은 규범과 형식에 따른 획일화의 전형일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도 군대식으로 추진했다. 우선, 경제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했다. 국토개발사업의 공사현장에 군대의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군대는 이미 1950년대부터 장비와 역량을 축적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군대가 민간 건설 업체 보다 3배의 건설장비와 5배의 기술인력을 보유했다. 1960년대 군대는 국토개발사업에 집중 투입되었다. 특히 국토개발사업 등에 병역기피자들을 동원하거나 도로건설의 어려운 구간에는 군대가 동원되었다. 또 군대에서 배운 기술력은 제대 후의 사회활동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개발의 방식에서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중반까지 ‘조국근대화와 경제 자립’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전투를 치르는 군대처럼 물러섬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만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는 ‘전태일 분신’, ‘와우아파트 붕괴’ 및 ‘광주대단지사건’과 같이 국민들에게 죽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일하며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군인이 되기를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박정희 정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군대가 민간사회를 직접 통제하는 법률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군대의 대표적인 통솔방식이었던 ‘명령에 따르는 복종의 강요’가 법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 법제화의 최정점에는 ‘유신헌법’이 있었다. 1963년 제3공화국 헌법개정심의가 열렸을 때 ‘군인 아닌 사람은 군법회의에서 재판하지 말라’는 국민권리가 제안되어41) ‘군사에 관한 간첩죄와 법률이 정한 경우 및 비상계엄을 제외하고는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지 않는다’고 조항이 포함되었다.42) 그러나 유신헌법에서는 이 같은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유신헌법의 조항도 앞의 헌법과 같았지만 무제한으로 확대된 대통령의 권한 중 ‘긴급조치권’은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운동을 탄압하는 ‘긴급조치 1호(1974. 1. 8)’를 발동하면서43) 비상군법회의에서 위반자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토록 했다. 그 뒤 총 9 차례의 긴급조치 중에서 제1호와 제4호(1974. 4. 3)에서는 비상군법회의를 구성하여 민간인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제1호에 의해 장준하, 백기완 등 유신헌법에 반대했던 재야인사 3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았다. 긴급조치 제4호에 의해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기 군사문화의 가장 큰 유산은 폭력을 숭상하는 ‘군사주의’였다. ‘군사주의’는 박정희 정권이 1960년대 후반 비상시국을 강조하며 만들었던 ‘향토예비군’과 ‘교련’을 통하여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이 과정에서 군대는 이러한 준군사조직을 지휘 훈련시켰고, 자연 군대의 교리가 민간 사회의 영역에 전파되었다.  이외에도 박정희 정권은 민간사회에 ‘멸공’과 ‘국가주의’ 및 맹목적인 ‘애국애족’, 국가(원수)에 대한 충성 등을 강요했다.


2) 총력전체제와 군사문화 - 향토예비군과 교련

국민들은 군대를 다녀온 직접 경험에서부터 그 외 군대와 관련된 간접경험을 통하여 군대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입한다. 여기에 더하여 박정희 정권 출발 때부터 추구했던 군대를 매개로 한 지배와 군대식 통제방식은 국민들의 생활에 유형 무형의 영향을 미쳤다. 시시때때로 강요되는 국가안보의 위급함은 사람들에게 군인이 되기를 강요했다. 한국사회는 군대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으며 그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커다란 ‘군대’, 하나의 ‘병영’으로 변모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부터 안보위협의 상황을 강조하며 전 사회를 동원체제로 몰아갔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박정희 정권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과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공세 등은 박정희 정권에게 위기감을 주었다. 김창봉 ? 허봉학에 의해 추진되었던 일련의 대남무력도발- 1?21청와대기습사건이나 울진?삼척사건-이나 푸에블로 사건 등은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키우는 기능을 했다.44) 또 1967년 6?8선거의 부정과 69년의 ‘삼선개헌’은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운동권에서는 강경하게 부정선거규탄과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 같은 정세에서 박정희 정권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총력전’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동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6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아래에 ‘국가동원연구위원회’가 설치하여 동원에 관한 전반적인 자료 수집과 기본계획을 수립했다.45) 1967년 7월 1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장에서 박정희는 국민 동원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가안전보장에 있어서 … 단순히 군사면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유기적으로 … 정부 각 부처의 협조나 조정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친 인적 물적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보장하는 새로운 국가안전보장체제를 재정비 강화시켜 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46) 그리고 1년 뒤인 1968년 7월 23일 국방대학원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총력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현대는 군사?정치?경제?과학?문화 등의 총체적인 국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총력전의 시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군사전과 경제전과 사상전과 심리전, 그리고 과학전이 하나로 융합된 새로운 형태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새로운 국방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문무의 구별도 없고, 전선과 후방의 구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선전 포고나 휴전의 의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전쟁에 대비해야 한다.47)


군에서도 박정희의 유시에 따라 ‘전력(戰力)’이란 ‘전쟁형태에서 수행되는 전투행위를 위하여 조직화된 전 국력을 뜻한다’며, ‘전쟁수행을 위하여 조직된 사회적 에너지로서 정치, 경제, 사상 등 제요소와 무력, 군사력 등과 같은 종래의 병력개념을 포함한 힘, 즉 총력적 개념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48)

이 ‘총력전’의 개념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참모장이었던 루덴돌프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에서의 독일의 실패(패전)를 교훈 삼아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을 주창했다.49) 이 시기 박정희도 루덴돌프와 비슷한 맥락에서 국가가 비상사태임을 강조하고, 그에 따라 국민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즉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루덴돌프로부터 ‘총력전’을 직접 차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유사성에서 볼 때, 일제의 동원논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국가총력전’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즉 ‘각 개인의 정신력, 경제력을 모두 종합하여 … 그것을 황국의 대아(大我)에 바치는 것이 병참기지인 조선반도의 특수사명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0)

일제 말기 총력전은 천항제 파시즘과 연동하여 작동했는데, 박정희 정권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총력전이 천황제로 귀일되었다면, 박정희의 총력전은 대통령인 박정희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그 완결편은 1972년 10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이었다. 일제 식민정책의 최첨단 교육기관이었던 대구사범학교와 만주신경군관학교 그리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어느 누구보다 일제 말기 천황제 파시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박정희가 일제의 동원논리를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51)

‘총력전’에 바탕을 두고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선택한 것은 군대의 전 사회적 확대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향토예비군과 교련이었다. 그 기초에는 전후방의 구분이 없으며 정신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총력전’이 존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를 내세우며 국민들을 동원했다.

‘향토예비군설치법’은 1961년 12월 27일 이미 통과되었고, 1967년 11월 24일 육군본부에 ‘예비군제도연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68년 2월 7일 박정희는 경전선 개통식 축사에서 ‘250만명의 향토예비군 무장’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북한 공산당의 전쟁준비와 무장 공비의 침입을 예상하며, 이에 맞서 재향군인 250만의 무장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적(인용자-무장공비)이 들어오면 1차로 재향군인, 2차로 경찰, 3차로 군대가 막는 향토방위의 방법을 제시했다.52) 다음날 박정희의 주재 아래 ‘자주국방 태세 확립을 위한 대책’ 마련을 위한 국방수뇌 회의가 열렸다. 국방부에서는 2월 12일 국방부 실무자 회의를 열었고, 2월 19일 당정연석회의에서 향토예비군 무장에 관한 사항을 검토했다. 2월 20일 각의에서 ‘향토예비군 설치법 시행령’을 의결한 뒤 2월 27일 제정 공포했다.

2월 28일 박정희는 재향군인회 총회에서 3월중으로 예비군 편성을 완료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3월 1일 국방부에는 ‘예비군국’이 설치되었고, 다음날 제2군사령관이 예비군 편성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3월 15일 중령 52명과 소령 139명에 대해 예비군 대대장 임명장이 수여되었고, 3월 17일 제2군사령부에서는 대대본부 요원을 배치했다. 이어 3월 19일 각 구청이나 경찰서에 대대본부가 설치된 뒤 3월 31일까지 예비군 편성 및 조직이 완료되어 4월 1일 북한의 도발로부터 우리의 향토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지킨다는 목적에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향토예비군이 1968년 4월 1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창설되었다.53) 3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간 총 1,703,301명이 총 191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편성 당시 업무는 해당 지역 관할 사단장의 책임 아래 현역 대대장이 수행했으나 1968년 5월 25일 이후 현역 대대장은 원대 복귀했고 그 대신 관할 병무청장이 담당했다. 1971년 이후에는 관할 지방 병무청장의 감독 아래 해당 구, 시, 읍, 면장이 임무를 수행했다. 예비군은 그 임무에 따라 갑호부대(동원예비군)와 일반부대(일반예비군)로 지역과 직장부대를 편성했고, 1971년에 선박예비군을, 1974년에 어민예비군, 1975년 이후에는 전력화 부대를 편성했다.

예비군의 교육훈련은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이 병행되었다. 군사훈련은 개인별 소화기 훈련과 부대별 전술 훈련이 병행되었다. 예비군 훈련 중에서 정신교육은 군대의 정훈교육과 비슷한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교육의 목표는 시기별로 변화했는데, 창설 당시는 주로 예비군의 성격과 관련된 ‘향토애호정신 선양, 향토 방위능력배양, 사격 능력 향상’ 등이었다. 1969년의 교육훈련 목표에는 ‘반공’과 ‘대유격전의 강화’가 추가되어 1972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유신헌법이 통과되는 것과 함께 향토예비군의 교육내용도 바뀌었다. 1973년과 1974년의 교육훈련의 목표는 ‘유신과업 수행의 선도적 역할을 위한 정신전력의 배양과 작전동원 체제 확립’이 새로 들어갔다. 그 이후의 교육목표는 ‘정신전력의 강화’와 ‘멸공정신의 확립’ 등이 강조되었다.

‘예비군 훈련 합력 수준표(개인)’의 과목은 정신무장(6과목), 제식훈련(체력훈련 포함, 9과목), 사격술 및 사격(8과목)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정신무장의 평가에서는 멸공과 유신과업 완수, 새마을 운동의 강조, 동원체제의 숙지 등이 있다. 즉 향토예비군이 기본적으로 향토를 방위하는 기구였지만, 동시에 반공과 정부의 시책(유신과 새마을 운동)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는 동원 조직이었던 것이다.54)

박정희 정권은 향토예비군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출범 때부터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거나 과도한 훈련 등의 이유 때문에 20% 정도는 훈련을 기피했다. 박정희 정권은 향토예비군 훈련 기피자에 대해서도 병역기피자와 비슷하게 처리를 했다. 일정 기간 자수기간을 준 다음, 그 이후부터는 경찰관을 대동한 특별호구조사를 실시하여 훈련기피자들을 적발, 처벌했다.

하지만, 출범 당시부터 향토예비군제는 1달 2회(4시간씩 년간 80시간)의 과도한 훈련과 빈번한 사고, 부족한 예산 등의 문제로 인하여 많은 원성을 샀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는 김영삼의원이 폐지안을 발의했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향토예비군제의 폐지와 전투경찰제의 운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향토예비군 폐지주장’은 향토방위를 힘겹게 생각하는 인간심리를 악용, 환심이나 사려는 것이라고 공박했다. 많은 비판과 논란이 있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이 남긴 향토예비군제도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교류와 협력의 시대가 나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학원을 병영화’하려는 정권의 시도는 교련교육의 실시로 표출되었다. 그 목적은 유사시 구국 대열의 선봉에서 조국을 수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북한에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며, ‘총력안보체제’의 확립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련의 본질적인 목적은 정권의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학생운동은 박정희 정권에 가장 큰 반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교련을 실시했다. 즉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1968년 부정선거 규탄투쟁, 그리고 삼선개헌에 대한 반대투쟁 등에서 학생운동은 다른 어느 세력보다 강력하게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교련은 이 같은 학생들의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78년 일반 대학생용으로 육군본부에서 제작한 ??군사학요약집??에는 군사교육의 이념을 ‘멸공 민주정신, 투철한 애국심, 자주 국방사상, 국토방위사명’으로 명시했으며, 그 목표로 ‘국가관 확립, 안보의식 고취, 기초 군사지식, 전투원의 적응성’을 제시했다. 군사교육의 목적은 국가관의 확립이며, 그 기초에는 반공과 안보의식이 강조되었다.55) 이것은 1965년에 제정된 국방부의 군인교육이념과 일맥상통하며 강제 징집을 시행했던 목적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군사교육을 통하여 군인을 양성하는 것과 함께 정부의 시책을 따르는 온순한 학생을 양성해 학원을 순화시키겠다는 목적이었다.

교련교육의 대상자는 대학 1, 2, 3학년(의대는 본과 1학년까지) 남학생, 즉 미래의 입영 대상자였다. 교련교육의 내용은 준 군사교육으로, 군인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 주요 과목은 기초 군사지식, 각개 전투의 기본 동작, 개인 화기 조작 능력, 전술 훈련과 사격술 예비 훈련 등이었다. 교련교육은 문교부와 국방부의 협의 아래 대학 총(학)장이 주관했으며, 교관은 국방부에서 파견된 학생군사 교육 요원이 담당했다. 교련교육의 특전은 병역단축의 혜택(1학년 2개월, 2학년 4개월, 3학년 6개월)이 주어졌고, 교련교육 거부자56)는 군사교육 기피자로 평가되어 병역 단축 혜택을 박탈했고 4학년에서의 재수강 기회를 없앴다. 이들은 14일 이내 학적변동을 신고하며 병역연기대상에서 제외되어 입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권의 의도에 대해 학생운동권에서는 반독재투쟁의 일환으로 교련 교육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학원의 병영화‘ 반대. ‘교련 교육 철폐‘를 내걸며 학생들은 교련 수강신청 거부와 반대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 선포와 강제징집으로 응답했다.



4. 맺음말


박정희 시대의 군대는 이전에 비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군부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고, 군대의 안정을 위한 각종 장치가 마련되었다. ‘병역법’의 개정과 ‘군인사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의 마련과 기구의 신설은 군대의 안정을 위한 전제였다. 그 과정에서 ‘병역기피자’들, 그 중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국가적 배제인 ‘비국민화’가 진행되었다. 군대 내에서는 정훈교육이 정비되었으며,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기는 하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했다. ‘국가주의’가 과도하게 강조되었고, 때로는 군대의 잘못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군대에서와 마찬가지의 통솔방식을 민간사회에 적용했다. 그 기저에는 ‘명령에 따르는 복종의 강요’라는 군대식 운영의 원리가 작용했다. 여당에서부터 야당 및 전체 국민들을 대상으로 군대식 복종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에 반대하는 것은 ‘항명’으로 규정되었고, 이의 진압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즉 정권의 필요에 따라 군대는 정치에 개입했고,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닌 ‘정권의 군대’로 전락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조성된 국내외적인 정세의 변화는 박정희 정권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총력전’을 외치며 전 국민에게 군인이 되기를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향토예비군’과 ‘교련’은 준군사조직으로 군대에 의해 직접 통제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 두 조직을 정권안보를 위한 목적에서 운영했다.

박정희 정권기 군대의 변화는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통하여 국민들을 통제했고, 군대식 운영 원리를 사회에 적용시켰다. 그리고 그 유산은 아직도 많은 부분 우리 사회의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은 ‘군사주의’이다. 폭력을 숭상하며 평화보다는 전쟁을 지향하는 태도이다. 우리 주변에서 쉅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은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 총을 쥐어주는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사회를 군대식으로 통치하고, 전 국민에게 군인이 되기를 강요했던 박정희 시대가 서 있었다.

<3,4공화국시기 역대 문교부장관>


시기

이름

61. 5.20. - 62. 1. 8.

문희석

62. 1. 9. - 62.10.14.

김상협

62.10.15. - 63. 3.15.

박일경

63. 3.16. - 63.12.16.

이종우

63.12.17. - 64. 5.10.

고광만

64. 5.11. - 65. 8.26.

윤천주

65. 8.27. - 66. 9.25.

권오병

66. 9.26. - 68. 5.20.

문홍주

68. 5.21. - 69. 4.10.

권오병

69. 4.11. - 71. 6. 3.

홍종철

71. 6. 4. - 74. 9.17.

민관식

74. 9.18. - 76.12. 3.

유기춘

76.12. 4. - 77.12.19.

황산덕

77.12.20. - 79.12.13.

박찬현

 

박정희 시대 교육관련 연표 및 자료

<연표>

61

1.반공 및 국방교육의 철저 2.생산교육의 강화 3.향토교육의 건설 4.대학교육의 정비강화 5.과학 진흥 6.국민문화의 창달 7.체위향상(문희석)

 

 

 

 

610516

군사정변 발생. 비상계엄 선포로 대학 휴교.

 

 

 

 

610526

문교 정책 4개 항목 발표.

610601

대학생 교복 착용, 중고생 삭발령.

 

 

 

 

 

 

610901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정 공포. 학원 분규 해결과 기업화 방지. 사학의 공공성 확보 천명. 사학에 대한 통제 강화.

 

 

 

 

611212

국민의 예리한 비판이 없고 감시가 없음으로 해서 악정은 유지되고, 자동적으로 구악과 부정 부패가 키워져 갔읍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의 소산이므로, 국민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알 권리를 찾아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참다운 민주주의 터전을 구축토록 하여야 하겠읍니다. 이렇게 하여 국민이 다같이 국정을 바로잡고, 책임을 부하함으로써만 국가의 장래는 찬란한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문맹자 교육의 달’ 설정에 즈음한 담화?, 1961.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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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학교건설에 전력을 다한다> 1.향토학교의 건설 2.실업교육진흥(김상협?박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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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기에 적합하도록 교육제도를 쇄신하고 문교정책을 조절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할 것이며 생산기술 교육을 강화할 것입니다. 의무교육에 있어서는 적령아의 완전취학을 기할 것이며, 중?고?대학생의 정원을 가급적 국가 수요계획에 따라 책정할 것입니다. 혁명과업 수행대열에 민족의 총력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국민조직과 국민훈련을 강화하여 승공민주이념을 확립할 것이고,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앙양하여 국민정신을 진작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국민의 지식수준의 향상과 민주사상의 고취를 위해 전국적인 문맹해소와 계몽운동을 촉진할 것이고, 이에 따라 근로 정신을 위시한 도의진작에 치중할 것입니다.(?1962년도 시정방침 연설?, 196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