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박정희 시대의 역사성(4) - 박정희 체제와 두 가지 문학의 부활

이강기 2015. 9. 17. 18:03

박정희 시대의 역사성(4)

 

박정희 체제와 두 가지 문학의 부활

-국민과 민족의 대립-


김재용(원광대학교)


 

1.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하나의 시각

2. 김정한과 민주주의적 민족문학

3. 박영준과 식민주의적 국민문학

4. 국민과 민족의 분화와 문학적 부활의 역사적 의미



1.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하나의 시각


박정희의 해방 전 경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으나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연구의 진전이 없다. 박정희 체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대한 연구가 핵심이지만 이와 더불어  청년 무렵부터 갖고 있는 내면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 전 박정희의 사고의 형성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에 대해서 박정희 스스로도 정직한 회고를 남기지 않고 있고 또한 당시의 글도 달리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비슷한 세대로서 동일한 역사적 시대를 체험한 문학인들의 지향은 참조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특히 박정희와 비슷하게 일제말을 체험하면서 문학활동을 하였고 이후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도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한 작가의 경우 박정희 시대에 순응을 했든 저항했든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식민주의적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중일전쟁 이후의 현실 속에서 젊은 날을 보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의 선택에 직면하였다. 하나는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공주의적 국가주의가 갖고 있는 효율성이 근대 자유주의의 무정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이에 협력을 하였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협력의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전자의 길에 섰던 사람이다.

일제말 문학인 중에서 협력한 경우에도 거기에 이르는 경로에 따라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국민주의의 입장이다. 이광수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근대세계체제에 편입된 이후 나아갈 길은 국가주의적 근대화의 기획밖에 없다고 보고 이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으로 중일전쟁 이후 이것은 급격하게 식민주의의 파시즘에 협력하게 된다. 둘째는 사회주의적 입장이다. 채만식으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과거 소비에트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 국가가 개입하여 근대 자유주의의 무정부성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믿는 것으로 이 역시 1940년 신체제 확립 이후에 급속하게 식민주의 파시즘에 경도하게 된다. 셋째는 세계주의적 입장이다. 최재서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근대 세계체제에 편입된 이후 그것과 더불어 호흡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파리의 함락으로 시작되는 근대의 붕괴 속에서 서구의 근대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식민주의 파시즘으로 빠져드는 경우이다 . 그런데 이 세 가지 경우 그 경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것은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공주의적 국가주의를 새로운 전망으로 삼고 있고 이를 기꺼이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역시 이러한 내면적 지향을 갖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박정희가 1939년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간 이후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군의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과연 어떤 생각과 전망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오늘날 재구성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학인의 경우를 참작해서 볼 때 그가 당시 식민주의의 파시즘에 충실하게 협력하였다는 것은 그 역시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공주의적 국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그가 갖고 있는 이러한  태도가 한 개인의 의식으로 남지 않고 한 사회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영향력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5.16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는 바로 일제말 식민주의 파시즘에 협력할 때 가졌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의 태도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근대세계체제에 편입된 이후 비서구의 주변부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진로와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서는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정희 체제가 성립되면서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가 되살아나면서 문학계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과거 일제말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았느냐에 따라 반응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비협력의 길을 걸었던 이들은 이 새로운 체제의 부활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이러한 억압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박정희 체제 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 일제말의 현실이 갖는 유사성을 주목하여 이를 드러내어 그 폭력성과 억압성에 항의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해 식민주의에 입각한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에 대해 협력하였던 이들은 박정희 체제가 보여주는 이러한 부활을 보면서 해방 후 그 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오해를 벗어날 수 있는 호기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친일이라는 이름 속에서 묻혀졌던 자신의 지향들을 이제 새롭게 조명할 수 있고 부활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들 상이한 두 경향 중 대표적인 경우에 속하는 이가 김정한과 박영준이다. 이들 두 상반된 작가의 궤적에 대한 탐구는 박정희와 그 체제가 가진 역사적 성격을 한층 극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다. 저항을 한 김정한의 경우에는 박정희 체제의 부정적 측면이 갖는 역사적 뿌리를 명백하게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고, 순응을 한 박영준의 경우는 박정희 체제가 갖는 내적 동인의 역사적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낼 줄 것이다.



2. 김정한과 민주주의적 민족문학


박정희 시대에서 이루어진 문학적 부활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김정한의 재집필이다. 김정한은 1930년대 후반에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해방 후 잠깐 재개했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절필하다시피 하였다. 김정한은 초기에는 강한 사회주의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일제하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의 사회적 원인을 해부하면서 작품을 썼던 그는 강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자칫 잘못하면 일제말에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기 쉬운데 김정한은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일제말 일본의 국가주의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였 것을 고려하면 김정한의 이러한 선택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채만식을 비롯한 사회주의적 지향의 작가들 중에서 일부가 반자본주의적 대안으로서 국가주의적 지향을 강하게 노출하게 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김정한의 이러한 선택은 분명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가 일제말에 식민주의에 협력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신의 이념에 나름대로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문단에 등장한 젊은 작가들이 식민주의에 열렬하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김정한의 이러한 행적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정한은 그런 점에서 당시 일제가 선전하였던 근대초극으로서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에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단 이후 거의 글을 발표하지 않았던 그가  박정희 체제가 한참 무르익어 가기 시작하던 1966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모래톱 이야기?라는 작품을 통하여  침묵을 깨고 글쓰기를 시작한 데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억압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정희 체제가 행하는 제반 일들을 일제말 식민주의 파시즘이 극에 도달했을 때 이루어졌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의 부활로 파악하였다. 김정한은 이승만 체제하였던 1950년대의 현실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농촌에서의 삶이 과거 일제하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그의 지적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해방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에 대해 실망감을 크게 느꼈던 것이다.  미국 종속의 자본주의하에서 하층 농민들이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제말에 쓴 농촌 배경의 소설들을 묶은 ??낙일홍??이란 제목의 소설집을  출판하는 것으로 그 시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행했던 것이다. 1)하지만  반공주의 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였지만 형식상으로 반일을 내세웠던 이승만 체제에 대해서는 과거가 고스란히 되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모순이 채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과거가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체제의  기본틀이 형성되던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제말의 억압적 양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현실 판단을 한 것이다. 굴욕적인 한일회담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 외에도 과거의 억압적인 제도가 부활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하의 억압적 삶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태를 그냥 지켜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강조하였던 것은 역사적 망각이었다. 일제 파시즘에 의해서 저질러졌던 것들이 잊혀져 가고  다시 과거가 목전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탄식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이다.

이 작품은 해방 후를 직접 다룬 것으로 과거 일제하에서 저질러졌던 온갖 억압성이 잊혀진 채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을 직접 다루고 있다. 오끼나와에서 일하는 딸의 편지를 통하여 과거 일본군 성노예와는 다른 차원에서 한국의 여성들이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의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가 보기에 과거 일제하의 억압적 현실이 약간 모습만 달리한 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위험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둔감하게 살아가는 역사 인식의 부재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  박정희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김정한의 문학적 글쓰기가 억압적 역사의 되풀이와 이에 대한 역사 인식의 부재에 대한 강한 비판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식민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 자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원리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게 된다. 그것은 곧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이다. 반자유주의적 반공 국가주의는 일제말 식민주의적 파시즘이 가졌던 논리로 해방 이후 미국식 추종에 의해 잠시 주춤하였다가 박정희 체제에 이르러 부활하는 것이다.

  국가 주도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사회를 억압하는 국가주의적 행태에 대한 김정한의 비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위치?이다. 일제말 동아일보가 폐간되는 것을 다룬 이 작품은 국가에 의한 언론의 탄압을 다룬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말이지만 사실은 이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 박정희 체제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탄압하고 이에 맞서 투쟁이 거대하게 일어났던 것을 의식하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나 독재정권들의 언론에 대한 음성 양성 탄압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라고 하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은 그가 일제하의 언론 탄압과 박정희 체제의 언론탄압을 연속적으로 보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국가주의적 언론 탄압을 비롯한 제반 형태들이 과거 식민주의의 유산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갖는 분방함을 무질서와 비효율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반자유주의적 사고에 기초한 이러한 국가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한층 강해진다.

반공주의의 억압성에 대한 비판이 잘 드러나는 것으로는 ?지옥변?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징용간 화자의 아버지는 해방 후 비참한 말로를 겪고, 일제 식민주의에 협력하면서 징용을 비롯한 각종 억압을 동원하였던 이들은 반공주의의 우산 속에서 더욱 번창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일제시대 이 마을에서 식민주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세 사람 즉 면장, 국민학교 교장, 그리고 순사는 일제 식민주의 파시즘의 최말단 영역에서 주민들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은 당시 주민들에게 ‘삼바 가라스’라는 별명을 듣게 된다. 총칼을 앞장 세웠던 순사로 대표되는 물리적 폭력과 학교로 대표되는 정신적 식민화의 억압 그리고 온갖 동원의 주체였던 면장으로 대표되는 일제 식민지 권력의 최말단들이 해방 후 청산되기는커녕 오히려 등세하면서 다시 세도를 누리게 된다. 이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공주의이다. 반공의 기치 하에서 이들이 다시 등장하게 되고 과거 식민주의에의 협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모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민족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 때의 민족이란 식민주의가 행하는 억압으로 인하여 느끼는 강한  위기의식을 일컫는 것이다. 식민주의가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하면서 재생되어 신식민주의화 되는 것을 위기로 느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에 대한 강한 의식이 솟아나고 이는 국가주의에 대한 강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국민과도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한의 문학적 부활은 곧바로 민족의식의 부활이 되며 동시에 민주주의적 지향을 갖는 것이다.



3.박영준과 식민주의적 국민문학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이루어진 ‘문학적 부활’ 중에서 김정한의 경우와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 발표2)이다.  일제하 만주 시절에 발표하여3) 이후 식민주의에의 협력의 근거가 되었던 이 작품을 새롭게 손을 대어 다시 작품 발표를 하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 과거 친일하였던 이들이 과거 일제하의 작품을 개작하여 둔갑시키는 경우는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과거 친일의 작품을 후에 개작하면서 반일의 작품으로 둔갑시키는 경우였기 때문에 작가적 성실성과 양심의 차원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노정하지만 그렇다고 엉뚱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박영준의 경우 과거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두면서 작품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상황이 매우 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단순히 재단할 수 없는 퍽 복잡한 내면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는 것은 일제말과 박정희 시대의 연관에 대해 많은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밝혀지면 그 연관이 실제로 피상적인 관찰을 허락하지 않는 심층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준은 1938년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당시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 작품들은 당시 그의 지향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밀림의 여인?은 당시 그가 갖고 있던 내면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만주 산악 지대에서 항일 운동을 하던 빨치산 여인을 귀순케 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작중 화자는 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여인이 사회에 내려와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가며 순응시키게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비적의 정체이다. 당시 일제 관헌에서 이야기하던 ‘비적’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공비’로서 항일 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들이다.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에 적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과 중국인 모두를 가리킨다. 이들은 단순히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제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일반 민중들에게는 절대로 해악을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호한다. 물론 일제 당국은 이들 공비들이 민중들을 괴롭히고 약탈을 한다고 선전하였지만 실제로 이들은 철저하게 민중들을 보호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바로 농촌의 민중들에게 있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는 않는 규율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이들의 생명선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발표된 강경애의 ?소금?은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납치해 간 것이 공비라고 생각하였던 어머니가 혼자서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서 소금을 사와서 파는 일을 하다가 산중에서 ‘공비’를 만난다. 평소 일제 관헌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어머니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은 자기의 것을 뺏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해주는 것을 보면서 ‘공비’들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일제 관헌의 선전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 일제 관헌이 얼마나 ‘공비’에 대해서 악선전을 하였으며 또한 ‘비적’이란 이름을 이들을 모함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적’에는 ‘공비’ 이외에 ‘토비’가 있다. 이들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 군벌의 휘하에서 훈련받아 오다가 만주 사변 이후 뿔뿔이 흩어져 명분도 없이 노략질을 하면서 살아가는 무리들이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로로 통하여 도적이 되어버린 무리들이 있다.

‘비적’에는 ‘공비’와 ‘토비’ 이외에 ‘반만항일비’도 있다. 이들은 ‘토비’들처럼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냥 노략질을 하는 패들이 결코 아니다. 이들은 민중들에게 해방과 행복을 약속하면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강령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여전히 ‘토비’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그 구분이 무색해지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는 분명 ‘반만항일’을 내걸고 싸우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이들조차도 인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어 정확한 규율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분명 ‘공비’와 다른 것이다.

이처럼 ‘비적’의 경우 그 속에는 ‘공비’, ‘토비’ 그리고 ‘반만항일비’라는 성격이 매우 다른 세 가지의 집단이 있는데 일제 관헌은 항상 이들을 ‘비적’이란 이름을 같이 묶어서 파악하고 악선전을 하였던 것이다.4)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이 ‘비적’ 중에서 ‘토비’나 ‘반만항일비’가  아닌 ‘공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 한다. 만약 이 작품이 ‘공비’를 다룬 것이 아니고 ‘토비’나 ‘반만항일비’를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런데 ‘공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달라지는 것이다. 일제와 만주국에 대항하여 식민지 해방을 얻고자 노력하였던 이들을 고무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무모한 짓으로 규정하고 이들은 귀순시키는 것이야 말로 일제 식민주의에 그대로 협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준의 이러한 의식은 이 무렵에 우연하게 나온 것은 아니다. 그가 이 작품을 창작하기 이전에 쓴 글을 살펴보면 이러한 지향이 내면적으로 무르익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940년 2월 20일자 만선일보에 쓴 ?‘김동한’ 독후감?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만선일보 신춘문예 1등에 당선된 희곡 ??김동한??에 대해 비평을 하고 있는 이 글을 온전하게 읽기 위해서는  김동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김동한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러시아 이루크츠크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러시아 혁명에 투신하였다. 1925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전향하여  1934년 관동군의 후원 하에 간도 협조회를 창설하였고 그 해 11월에 동변도 특별 공작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비’를 색출하고 이들을 귀순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1937년 12월 삼강성 의란현에서 선무공작을 하다가  동북항일연군 독립사 정치부주임 김정국 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가 죽자  이 지역에 있던 이들이 그를 추모하여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는데 이 희곡 역시 바로 이러한 추모 사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5)

박영준은 김동한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어조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는 김동한과 같은 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함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내면의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게 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는다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또한 김동한이 귀순을 시키고 있는 대상 인물들의 내면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오히려 이러한 인물들을 귀순시키는 김동한의 저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복잡한 내면과 갈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공비’를 그려야 이들을 귀순시키는 김동한의 역량과 사명감 또한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단순화시킴으로써 김동한 역시 앙상한 인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영준은 만주의 조선문학을 위해서 자신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의 귀순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밀림의 여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정신적 과정에서 필연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이 시기에 협화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동한’의 독후감?이 발표되기 전에 그가 만선일보에 쓴 ?현단계의 진실한 비평과 발표기관의 기대?라는 1940년 1월 24일자의 글 말미에 ‘협화회 盤石현 본부 근무’라는 주가 달려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박영준이 1938년 만주에 이주한 후 협화회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여기서 얼마나 근무하였고 어떤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나와야 하겠지만 그가 협화회에 관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밀림의 여인?이 재수록된 ??싹트는 대지??가 발행될 무렵인 1941년 11월에는 협화회 교하가 분회에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협화회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협화회에 관여하였다고 곧 바로 식민주의에 협력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치외법권이 철폐되면서 조선인 민회가 협화회 산하로 편입되었던  1938년 이후를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쓴 글들을 감안할 때 협화회에 관여하였던 것은 식민주의에의 협력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동한을 이렇게 추모하고 나아가 ‘공비’들의 귀순 공작에 바치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만주의 작가 중에서 식민주의에 협력하였다는 것은 이로써 아주 분명해지는 것이다. 당시 그 곳에서 활동하던 작가 중에서 강경애와 가장 대척적인 지점에 그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이 시기에 가졌던 국가주의적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협화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박영준 역시 근대 자유주의  무정부성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하였다. 반자유주의와 반공산주의 속에서 그가 주장했던 것은 바로 국가 주도의 관민일체였던 것이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근대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당시 반자유주의와 반공산주의의 파시즘적 사고는 만주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안에서도 일부 작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6) 그런데 만주에서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현장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한층 더 피부에 다가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계관을 키웠던 그였기에  해방 직후에 좌파 문학 쪽에 기울었던 것도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해방 후 문단이 임화를 중심으로 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한효를 중심으로 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으로 나누어졌을 때 박영준은 후자에 서서 활동하였다. 일제하 만주에서 협화회에 관여하였고 ?밀림의 여인?을 썼던 그가 해방후에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참여한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협회회의 성격을 이해할 때 그것이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반자유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좌파 문단에 어렵지 않게 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과거에 자신이 가졌던 일본 중심의 국가주의적 사고를 잠시 유보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 박영준의 이러한 의식을 엿보는 데 있어 좋은 작품이 ?환향?7)이다. 과거 국내에서 식민주의에 협력하였던 인물이 고향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서울로 올라와 겪는 것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마지막에 고향의 친구들이 인민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받고 이에 응함으로써 협력의 멍에를 벗어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배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에서 박영준의 삶과 차이가 나지만 당시 식민주의에 협력하였던 인물이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건국의 과정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 여실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좌우의 대립과 분단 속에서 그는 반공산주의의 지향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반공적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반자본주의적 성향과 반공산주의적 성향이란 만주국 협화회 시절에 가졌던 세계관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향은 이승만 시절에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승만은 실제적으로 일본에 종속적이었지만 명분상에 있어서는 강한 반일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박영준이 자신의 지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반자유주의의 반공 국가주의적 지향 자체도 반공이란 점을 빼고는 쉽게 융화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과거 일제의 협력이야말로 숨겨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밀림의 여인?을 다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용납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가 되면서 상황은 현저하게 달라졌다. 박정희가 다분히 반자유주의적  반공산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조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박정희 역시 만주국에서의 국가체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의 하수인으로 협력한 바 있기 때문에 이승만 시대와는 여건이 달라진 것이다. 아마 박영준은 과거 자신이 가졌던 그러한 지향이 개발도상국이었던 당시 한국에서 다시 구현되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가졌을 것이고 이는 과거 일제말의 만주국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번졌을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박영준은 과거 주위의 눈총 때문에 숨겨야 했던 작품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밀림의 여인?을 다시 개작하여 발표하게 된 사정일 것이며 자기 나름대로는 복권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부활한 것은  국가주의와  국민이다. 국가는 매우 굴절된 방식으로 전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4. 국민과 민족의 분화와 문학적 부활의 역사적 의미


흔히 국민과 민족이 영어의 네이션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미분화된 채로 생긴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분명 국민과 민족이라는 말은 한반도가 자본주의 근대 세계 체제에 편입되기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네이션-스테이트로 무장된  낯선 근대와의 조우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낱말은 제대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식민지라는 형태로 편입되면서 국민과 민족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민의 경우 영어의 네이션과 마찬가지로 왕의 신민이 아닌 주권의 주체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주권재민의 개념이 그 핵심인 것이다.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하면서 빈번히 말하였던 독립과 그것이 상정한 것이 바로 이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독립이란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의 소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권이 왕에게 있는 체제인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참여하였던 만민공동회 역시 바로 이 국민 만들기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국민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배외주의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충성으로 인하여 다른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둘째는 내부의 배제이다. 국민이란 공동체 내부에 있는 계급적 성적 차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은  인민들을 동원하는 기제로서 활용되고 나아가 억압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반자유주의와 반공주의와 결합할 때 심각한 억압의 양상으로 이어진다.

민족은 사정이 매우 다르다. 민족은 근대적 네이션-스테이트의 확장으로서의 제국주의의 압도적 파고  속에서 발생한 위기의식의 소산이다.8) 한반도의 경우 제국주의 열강 특히 일제가  주민들의 정체성을 파괴하려고 하였을 때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와 위기가 생기고 연이어 이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민족이란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신채호가 일제 식민지를 앞두고 국민 대신에 민족 이야기를 자주 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필자가 판단컨대 그는 국민과 민족의 이러한 차이를 의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1920년대 들어  그가  사회주의자로 나아갔을 때 국민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민족이란 말은 부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민과 사회주의는 결합할 수 없지만 민족과 사회주의는 비서구 주변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이 국민과는 공존할 수 없지만 민족과는 공존 가능한 것이다.

박정희 체제 하에서 김정한과 박영준이 부활시킨 민족과 국민 역시 이러한 상이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박정희 체제의 국가주의가 보여주는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한 위기의식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의식이 김정한의 것이라면,  국가주의가 보여주는 통합성과 효율성에 대한 매료로서의 국민의식이 박영준의 것이다. 전자가 민주주의적 지향을 보여주었다면 후자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등장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하였지만 그 지향이 달랐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라는 같은 시대에 대해서 매우 다른 시각을 갖고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이 시기에 이르러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일제말에 내면화하였던 세계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