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근대화 전략의 비교: 박정희 모델의 북한 적용 가능성
김연철(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
1. 박정희식 개발 모델과 북한
2. 냉전의 유산과 북한의 발전 전략 변화
1) 냉전의 유산
2) 북한의 발전 전략 변화에서 냉전이라는 변수
3. 수출지향 산업화: 마산수출자유지역과 북한의 경제특구
1) 마산 수출 자유지역의 경험
2) 북한의 경제특구
4. 북한에서 새마을 운동의 부활
1) 북한에서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
2) 북한의 농촌 현실과 개발 프로그램의 필요
5. 탈냉전 시대 협력적 분업의 과제
1. 박정희식 개발 모델과 북한
북한에서 박정희 모델이 부활하고 있다. 두 가지 차원이다. 첫째는 김정일 위원장의 박정희 시대 남한 경제발전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다. 1999년 김정일은 정주영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새마을 운동을 높게 평가한 바 있으며, 2002년 5월 박근혜 의원과의 면담에서는 1970년대 남한의 경제 발전 전략을 긍정적 으로 평가했다. 둘째는 이른바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 방향을 박정희 모델로 규정하는 경향이다. ‘개발 독재’라는 용어는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개념이다. 정치적 권위주의 체제는 유지하면서, 경제 개혁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개혁은 ‘개발독재’이며,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물론 ‘개발 독재’라는 개념이 포괄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특수형태들의 내용적 차이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권위주의적 정치라고 하지만, 북한의 수령제적 정치와 박정희 시대의 독재정치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정당정치와 여론형성, 관료제의 성격 등 모든 면에서 형태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내용적 차이가 있다. 귄위주의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 발전 전략에서 박정희식 모델1)의 몇 가지 특징은 앞으로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변화에서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다. 특히 농촌 복구사업으로서의 새마을 운동과 수출지향 산업화 지향 등은 북한 경제 변화의 중요한 내용을 차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발전 전략의 경쟁과 수용의 측면에서 북한의 박정희 모델 적용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남북한은 한국 전쟁이후 각각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경험했다. 냉전체제에서의 두 가지 다른 선택이다. 발전 전략의 측면에서 저발전 국가는 추격발전 전략을 채택한다. 추격발전은 후발 산업화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저발전 국가에서는 보다 급진적으로 장기적으로 추진되었다. 박정희식 근대화가 냉전형 국제분업구조에 편승한 수출지향 산업화를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다면, 북한은 그동안 또 다른 냉전의 한편에서 자립적이며 수입대체산업화를 특징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바 있다. 특히 북한과 같은 후발 사회주의 국가에서 채택된 강행적 산업화는 보다 급진적이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축적을 위해 소비를 희생해야 하고, 동원을 위해 억압 장치들이 강화되었다. 자원 제약 상황에서 추격발전은 소비재 부분의 낙후를 가져오기 때문에 국가는 대중들의 희생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개인숭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담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북한이 걸어 왔던 반자본주의 산업화(anti??capitalism industrialization)의 지향은 결과적으로 반근대적 산업화(anti??modern industrialization)로 귀결되었다.2)
북한의 사회주의적 산업화는 실패했다. 2002년 7.1조치를 통해 가시화되고 있는 북한의 경제개혁은 사회주의 산업화의 대안적 길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산업화’라고 부를 수 있다. 특히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전환과 농촌 복구형 개발 전략은 박정희 시대의 주요한 경제발전 전략이라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논문은 1960~70년대 남한의 발전 전략과 2000년대 북한의 발전 전략 비교에서 국제환경과 산업구조, 역내 분업구조의 차이로 고려하면서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2. 냉전의 유산과 북한의 발전 전략 변화
1) 냉전의 유산
남북한이 선택했던 두 개의 발전 전략은 공통의 조건속의 상이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공통의 조건으로 한반도의 냉전 환경을 들 수 있다. 대외적으로 남북한의 산업화는 냉전적 동북아 질서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졌다. 남한의 수출주도형 발전전략의 배경에는 한미일 남방삼각체제의 분업 구조가 있다. 냉전 상황에서 남한은 ‘반공의 보루’로 충실한 역할을 했다. 이에 비해 북한의 자력갱생 모델은 북중소 북방삼각체제의 불안정한 환경에서 형성되었다.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자립적 발전 전략은 중소분쟁이라는 사회주의권의 분열속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국내적으로도 분단과 냉전 질서는 남북한에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전체주의적 가치관, 권위주의적 문화를 확산시켰다. 북한의 노동 동원과정에서 이른바 동원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소극분자들을 ‘적과의 내통자’로 비판한 것이나, 박정희 시대 노동운동에 대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노동집약 산업화 과정에서 냉전의 논리가 노동력 동원에서 활용된 공통의 경험이었다.
산업화 전략에서 냉전은 자원배분의 왜곡으로 나타난다. 물론 남한은 한미 군사 동맹 체제를 활용하여 국방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불안정한 중소분쟁의 패권구도에서 자립적 국방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북한의 군사비 지출은 통상 GNP의 30%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군수 부문인 2경제위원회 중심의 자원 배분 구조가 정착되어 있다.
북한의 새로운 발전 전략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걸릴돌은 한반도에서의 냉전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 10월부터 가시화되고 있는 2차 핵 위기 과정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만, 북한을 둘러싼 적대적 군사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남한이 산업화 초기에 ‘냉전의 특혜’를 누렸던 상황과 크게 차이가 난다. 1960년대 초반 당시 미국의 대남한 경제?군사원조는 남한 국방예산의 75%, 일반예산의 50%, 가용 외환 총액의 거의 8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2) 1970년대 남한의 수출지향 산업화는 남방삼각체제가 부여한 ‘국제적 생산주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대만과 더불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사양 섬유산업과 소비용 전자산업을 이전 받아 초기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어떤가? 자립적 국방정책 체계에서 냉전의 지속은 산업구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여전히 국방공업 우선론을 지속하고 있다. 한반도의 위기 상황에서 국방 공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2) 북한의 발전 전략 변화에서 냉전이라는 변수
국방공업 우선론은 경제전략 변화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첫째, 군수경제 위주의 중공업 발전전략은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로 막는다. 북한이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중공업이 아니라, 경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당분간 저기술 노동집약 산업에서 비교우위를 가져야 하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부품 산업의 육성 등이 필요하다. 공정분업의 경우 북한 내 관련부품 산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투자기업들은 부품조달에 애로를 겪게 되고, 원부자재 일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물류비 부담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한반도의 냉전 환경은 수출지향산업화 및 개방경제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북한산 제품의 수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가 완화되어야 한다. 미국은 정상교역관계(NTR)나 GSP대우를 받는 국가들에 ??Column 1??관세율을 적용하고 있으나, 북한 등의 국가에는 ??Column 2??관세율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Column 1??관세율보다 최소 2배에서 10배 이상까지 높은 수준이다.3)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전략물자 반출제도 역시 제조업의 외자유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제어계측 기기의 발전수준을 고려할 때, 486급 컴퓨터를 비롯한 이중용도 제품에 대한 대북 반출 제한은 위탁가공이나 직접투자의 설비반입을 제한함으로써 신발, 의류 등 초보적인 노동집약산업을 제외한 산업 협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북한의 국방공업 우선론은 과도기적 담론이며, 향후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라 변화해 갈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무기의 수준을 고려할 때, 군비경쟁 구도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미 양국의 첨단 군사 무기 수준을 고려할 때, 북한의 재래식 무기경쟁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4)
북한이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수출지향산업화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대외환경의 개선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현재의 북한 경제가 선순환 구조(개방-외화 확보-원자재 및 투자재 수입-생산 가동율 상승-수출 확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대외경제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북한에서 국제분업구조에 참여할 수 있는 대외 지향적 산업화는 한반도 냉전 환경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남한의 1960~70년대와 질적인 차이가 있다.
3. 수출지향 산업화: 마산수출자유지역과 북한의 경제특구
1) 마산 수출 자유지역의 경험
북한의 경제개방은 몇 가지 점에서 남한의 개방 초기와 유사하다. 내부적으로 성장동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국제사회로부터 자본과 기술의 도입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을 유치할 수 있는 경제특구와 수출 산업의 육성이 필요하다. 남한은 1960년대 들어 미국의 대한 원조가 격감하자 남한은 수출제일주의를 당면 시책으로 하여 무역, 재정, 금융, 관세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수출신장을 위한 지원을 시행한 바 있다. 특히 마산수출 자유지역은 북한의 경제특구에 주는 시사점이 있다. 마산수출 자유지역의 역사적 경험은 2002년 8월 북한의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가장 관심을 갖고 주목한 부분이다.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목적은 제조업 부문의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공업 및 수출의 진흥, 고용확대, 선진 외국 기술의 습득 등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기계, 설비, 원자재 등에 대한 수입관세의 면제, 통관절차의 간소화, 관련 행정 서비스의 지원 등을 일괄적으로 제공한다.5)
경제특구의 효과는 고용효과, 자본형성효과, 외환획득효과, 기술습득 효과로 나눌 수 있다. 마산수출 자유지역은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산업화 초기 개방거점으로서의 경제적 성과를 가져 왔다.
마산수출 자유지역은 1975년 총 수출에서 3.4%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6) 외국인 투자액은 제조업 시설이 간단하고 노동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주로 소액투자 중심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경우 1977년 입주기업의 평균 투자액은 88만 달러였고, 1979년에 이르러 120만 달러로 증가했다. 외환 획득과 관련해서 국내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국내 경제에서 구입하는 원자재 및 부품에 대한 지불액을 포함할 경우, 마산지역은 1971-93년 동안 총 95억 4천 3백만 달러의 외환획득 효과를 가져 왔다. 동시에 기술이전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기술 이전 효과는 후방연관효과와 전방연관효과로 나눌 수 있는 데, 후방연관효과의 경우 경제특구내의 입주기업과 이들에게 원자재, 기계류 및 부품을 공급하는 국내기업과의 연계에서 얻어지는 효과를 들 수 있다. 초기에는 부품산업의 미발달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전방연관효과는 경제특구 기업들이 생산한 상품의 국내소비 및 유통활동에서 얻어지는 기술 이전 효과를 일컫는다. 농기계 생산으로 농업부문의 생산성이 오르거나, 자동차 생산으로 국내 운송산업이 향상되는 경우에 여기에 해당된다.
2) 북한의 경제특구
북한은 국내경제개혁을 확대하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개방에 나서고 있다. 북한의 개방전략은 현재 4개의 개방 거점 지역의 선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부축에서는 신의주, 남부축에서는 개성, 동부축에서는 금강산, 북부축에서는 나진선봉이 그것이다.
신의주 특구는 장관으로 임명된 양빈 문제로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북한 당국의 의도는 주목할 만 하다. 북한이 신의주의 개발과 운영권을 화교자본에 위임하려고 했다는 점은 개방의지를 확인시켜준 것으로 볼 수 있다.7) 북한의 제한된 사회간접자본 투자능력과 상대적으로 비교우위가 불확실한 신의주 개발여건을 고려하여, 아예 투자자에게 직접 운영을 맡긴 것이다. 신의주를 북한 영토내의 또 다른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신의주는 초기에는 상업?유통 및 관광 서비스 산업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와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중국횡단철도(TCR)의 연결이 되면, 북방 진출의 중계거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경제협력과 관련해서는 개성공단이 중요하다. 공단입지로서 개성지역은 남한과의 지리적 인접성과 철도교통상의 요충지로서의 중계거점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해 단점으로 산업 기반 기설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의 낙후, 배후 인구의 부족, 열악한 국내외적 투자환경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남한의 1970년대 개방경험과 비교해 볼 때, 북한의 국제분업 구조 참여 기회는 불리하다. 당분간 북한은 동아시아의 경제분업구조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과거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이나, 중국의 부상이 가능했던 국면의 성격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은 국제적 생산주기를 활용하여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동아시아 NICs가 통화절상, 임금상승, 선진공업국간의 무역 마찰문제로 산업구조의 재편국면을 맞이했을 때, 중국이 경제개방 정책을 본격화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중국은 저임금 생산기지로서의 비교우위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시점에 국제분업구조에 참여한 것이다.
현재의 국면은 북한이 저임금 생산기지로 비교우위를 발휘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중국의 지역별 불균등 발전을 고려할 때, 첨단산업과 전통산업의 공존은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동부연안 도시들의 첨단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중부 내륙지역의 저임금 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렇지만 개성공단은 ‘분단체제형 특구’라는 점에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개성공단은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 수준과 국제환경 개선 수준에 따라 점차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당분간 개성공단이 대규모 산업 공단으로 개발되기 어려운 이유는 첫째,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로 수출 기지로서의 효과가 당분간 발휘되기 어렵고 둘째, 북한의 개혁확대에도 불구하고 직접투자 환경(특히 노동시장)이 어느 수준까지 제시될지 분명치 않고 셋째, 공단의 경제효과를 명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인프라 투자의 경제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경의선 연결이후 개성지역에 관광인프라 확충을 위한 지원(문화재 개보수를 위한 공동조사 및 개선) 및 관광 편의사업(숙박 등)을 중심으로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환경 친화적 산업을 중심으로 소규모 공동연구단지 및 위탁가공 협력을 추진하며 북한의 IT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단지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4. 북한에서 새마을 운동의 부활
1) 북한에서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
대중동원 운동은 남북한 발전 모델의 중요한 공통성 가운데 하나다. 특히 남북한의 대표적인 대중동원 모델인 새마을 운동과 천리마 운동은 남북한 역사에서 경쟁과 반면교사의 상징이었다. 천리마 운동이 먼저 시작되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천리마 운동은 북한 경제역사에서 가장 비약적인 도약시기인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1950년대 북한의 비약적 발전은 남한에 발전 경쟁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천리마 운동은 그런 측면에서 새마을 운동의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 후반이후 북한의 경제위기가 심각해지고,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새마을 운동이 북한의 농촌복구 모델이 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 현대 회장에게 새마을 운동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국제농업기구 전문가들은 새마을 운동 사례를 북한의 농촌개발 및 농가소득 제고의 기본 틀로 인식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1990년대 중반이후 위기를 겪은 북한의 농촌 상황에서 중요한 발전 모델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월간 화보집 ‘조선’은 1999년 12월호에 ‘낭림의 새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자강도 낭림군 및 협동농장의 기사와 사진을 곁들여 실었다. 특히 지붕 및 부엌개량, 마을길 및 담장 정리 상하수도 조성 등 북한이 규정한 ‘새마을’은 남한의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연상케 한다.8)
2) 북한의 농촌 현실과 개발 프로그램의 필요
북한에서 새마을 운동의 부활은 현재 FAO와 UNDP가 추진하고 있는 농업복구 및 환경보호(AREP: Agricultural Recovery and Environmental Protection, 1998~)프로그램의 적용을 통해서이다. 1998년부터 입안하여 추진하고 있는 ‘농업복구 및 환경보호(AREP)계획’은 투입재 프로그램을 통한 이모작 및 감자재배 확대사업, 농업기반 복구 프로그램, 산림과 환경보호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차관사업에 포함되어 있는 신용대부사업(micro credit)은 대단히 초보적이지만 주민 자력형 농촌복구 개발사업 형태로 새마을 운동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정부가 농촌복구개발사업의 개요와 지원물자의 범위를 작성하여 전국 농촌에 전달하고 지도자를 교육하며, 마을주민들은 정부의 계획범주 내에서 자기 마을의 농촌복구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소요기자재를 요청하고, 정부가 소요기자재를 공급하면 지도자의 지도하에 마을주민들이 복구 및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신용대부 사업은 염소나 돼지 등 가축 사육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농가가 이를 통해 부업생산을 확대하는 방법이다.9)
그렇지만 북한의 농촌복구 사 업은 국제 사회에 제한적인 지원을 전제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미약한 수준이다. 또한 북한은 전반적인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농업정책의 개혁에는 소극적이다.
사실 경제개혁과정에서 농촌 정책은 단순히 식량수급을 비롯한 농업정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가격과 시장제도, 그리고 기업 경쟁제도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2년 북한의 가격 현실화 조치에서도 쌀 가격이 기준가격으로 설정되었다. 부족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교환품목이 식량이기 때문에, 식량가격 체계는 전반적인 파급효과를 갖는다. 또한 농촌 공업은 국영기업과 경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재산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산업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정책변화의 파급효과가 다를 수 있지만, 점진적 변화과정에서 농업정책 변화가 가져올 수 있는 완충효과는 공통적이다.
북한은 전체 산업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중앙집권적 농업정책을 유지해 왔으며, 만성적인 식량부족 상태에서 농업정책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북한은 농업개혁을 모색하면서 소농체제를 모색하고 있지 않다. 집권적 농업경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의지는 토지정리 사업을 통해 나타난 바 있다. 북한은 1998년 강원도를 시작으로 평안북도(99.10~2000.5)와 황해남도(2000.10~2002.3)의 토지 정리사업을 완료했다.10) 토지정리사업은 식량난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 개인농토(뙈기밭)를 없애고, 경지 면적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이다. 토지정리사업은 집단적 계획영농체계를 유지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농업생산체계에서의 인센티브 단위 역시 개인 농가보다는 분조 혹은 작업반 등을 고려하고 있다. 농산물 유통체계 역시 시장거래를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수매 제도역시 경직적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 농업의 문제는 생산의 인센티브뿐만 아니라, 농자재 산업을 비롯한 전반적인 농업 연관산업의 개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약과 비료의 자체생산능력은 대단히 축소되었으며,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상황이다. 따라서 제한된 투자능력을 고려할 때, 향후 북한의 농업복구 개발 계획은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포괄적인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 운동의 긍정적 측면들은 북한에서 프로그램 운영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5. 탈냉전 시대 협력적 분업의 과제
북한의 경제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의 적용가능성은 냉전시대의 체제 경쟁적 시각이 아니라, 탈냉전 시대의 협력적 분업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국력 격차로 체제 경쟁의 시각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남한이 걸어 왔던 길이 북한에서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환경도 다르고, 북한과 국제사회의 기술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북한이 국제 분업구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새로운 발전 전략 전환에서 남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북한의 경제개혁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동아시아 사회주의형 개혁??모델과 다르다. 분단체제에서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환경이 경제개혁의 속도와 수준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북한이 취했던 7.1조치도 사실 대외관계 개선과 연계된 것이었다. 애초에 북한 당국은 7.1조치를 취하면서, 대외관계 개선을 통해 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생각했다. 하지만 핵문제가 발생하면서 이러한 구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다. 2002년 10월 캘리특사 방북이후 시작된 이른바 북한의 2차 핵위기는 대외협력을 통해 초기 국면에서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 필요했던 재정 확충 구상의 차질을 갖고 왔다. 북한은 북일 관계, 남북협력을 통해 경협자금을 유입하여, 이를 토대로 경제정책 변화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거시 경제적 불안을 최소화 하고자 했다. 소비재 공급의 경우, 인센티브 정책의 효과가 단기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점에서 재정을 통한 소비재를 구입하고자 하는 계획은 재정악화로 지속될 수 없었다. 원자재의 대외 구매도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장 가동률 역시 제고되기 어려워졌다.
외환 부족으로 소비재 수입능력이 한계가 있고, 소비재의 생산이 정상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공급 불안이 가시화되었으며, 도시주민들의 생활난도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가격체계 역시 불안정해졌다. 가격탄력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행정가격은 수요와 공급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7.1조치에서 주요 품목의 가격은 국가 가격 제정국에서 결정하고, 지방공업이나 소비재는 해당 기관이나 기업소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행정가격(고정가격과 한도가격)이 암시장의 가격결정법칙(수요-공급)을 반영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급부족은 또 다시 가격 구조의 왜곡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7.1조치가 실시된 이후 악화된 국제환경은 거시경제의 위기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북한의 대응은 주목할 만 하다. 북한은 대외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 변화를 확대하고, 경제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북한에서 경제개혁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경제정책 변화에 대한 정치?심리적 소극성을 완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 된다. 북한은 지금까지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과 구분되는 ‘우리식 사회주의’의 고수라는 측면에서 거부해 왔다. 물론 대외용으로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향후 국내적으로도 개혁이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정책 변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정치적 금지선을 허물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경제개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경제협력의 의미와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다자회담 국면에서 남북경협은 가장 중요한 분야중 하나다. 동시에 남북한 경제협력은 남북한 공영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동북아 경제협력의 주축이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동북아 각국과의 교통(철도 등)과 에너지(가스 등) 연결을 위해서는 남북한의 연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북한측 철도 노선의 정상화 방안이 핵심 과제이며, 가스관의 북한 통과 역시 중요하다. 투자 전략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사업기회가 될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러시아 시베리아 극동 지역 진출은 북한의 중계거점 역할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을 비롯한 북한의 개방특구에서, 혹은 농촌복구개발 사업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남북협력모델을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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