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슬람 역사
한국의 이슬람 역사 라 하면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는 한민족이고 우리는 다른 민족이 섞이지 않은 순순한 99.999% 의 한민족이라는 것을 자부해 왔다. 본인은 21세기에 와서 국제 결혼, 국제 무역의 증대 등으로 국제화 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중 한 부분을 담당한 이슬람 과의 연관성을 발췌함을 통해 우리 나라가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된 닫힌 문화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도 역사 속에서 함께 역동적으로 살아온 민족임을 살피려 한다. 이슬람교가 불교,유교 그리고 기독교의 장벽을 넘어 어떻게 한국에 전해졌을까?
I.아랍
무슬림들이 한반도와 접촉한 최초의 시기는 기록상 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이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 7세기 중엽부터 이미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중국대륙과 접촉해왔고 그들의 활동영역이
9세기경에는 남방해로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한반도에까지 확정되었다. 무역교류를 보면 이슬람 지역이 신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은 11가지 인데, 비단,검(은장도),초피(모피),도기(질그릇),범포(배의 돛),키민카우, 쿠란잔 등이다. 반대로 서역(중앙아시아)으로부터 신라가 수입하는 물품은 유향,안식향(이란향수),침향(알로에),각종 유리기구, 슬슬(타쉬켄트의 보석),옥,계(고급모직),목숙(말의 사료로 쓰는 풀) 등이었다. 이것들은 여러 유물에서 발견된 것인데, 쾌능(8세기 후반) 과 흥덕왕능(9세기 전반)의 무인석상,계림로단검, 사마르칸트에 있는 고구려 사절도(7세기 중엽),
발해의 노브고르데예프성 에서 출토된 소그드 은화(8세기) 등이 있다. 악기와 춤과 같은 놀이도 전해 졌는데 요고,당비파,공후,피리,소,횡적,박판
등의 악기와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사자춤) 등의 놀이가 전해졌음을
II.인물내왕 처용을 볼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 5년(879년)에 당시 최대 무역항인 개운포(울산)에 용모와 의상이 궤이한 4인이 나타나니 사람들은 산해정령(山海精靈) 이라 했다. 당시 아랍 무슬림들의 신라 내왕에 관한 기술 등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 이방인들은 그들일 가능성이 높다. 초견의 이방인들을 접한 신라인들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사실을 설화로 윤색해 오던 나머지 고려 때에는 신비로운 동해의 용자(龍 子)들 로 승화되어 삼국유사에 마침내 신라설화(춤,노래)의 주인공으로 전승되기도 했다. 또한 혜초 고승을 들 수 있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랍 이슬람 세계(지금의 이란지역)를 방문하고 서역여행기(723-727년 여행) 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아랍 이슬람 세계에 관한 기술을 남겼다.
III.쌍화점의 로맨스 ? 고려,조선과 이슬람의 만남 이제 고려 시대에 와서 이들의 만남은 더욱 활발해 진다. 11세기 초인 고려시대에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이슬람 제국의 아랍상인들이 1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와서 간헐적으로 고려조정과 교역을 시도했다. 이어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인 13~14세기이다. 당시 몽골 원(元)제국의 간섭
하에 있던 고려조정에는 몽골관리들뿐만 아니라, 원제국의 행정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했는데, 이들은 고려사 등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되어 있는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은 고려에 정착해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를 이식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의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내에는 이슬람 성원이 있었으며 그들 특유의 고유한 의상을 입고 자신들의 언어인
위구르어를 사용하는 등,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또한 경주 설치의 시조가 된 설손이 있다. 공민왕 때 고려에 와 부원후로 서봉하고 고려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여말선초의 명문가이고 장자인 장수는 8회나 명에 출사를 했다. 1985년 현재 442 가구가 서울 일원과 전라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리고 충선왕 때 고려에 와 평양부윤을 지낸 민보가 시조인 임천이씨가 있다. 고려에 온 이들은 개경에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슬람교 활동에 나라의 공식적 허가도 있었다. 신전에서 왕을 위해 이슬람식 향연을 베풀만큼 권력향유를 했는데 피륙 장사 허가의 대가로 매일 충혜왕에게 소고기 15근을 상납했다. 또 사냥매 관리기구인 응방을 관리 하기도 했다. 종교활동은 사원인 예궁에서 예배를 근행했고 조정에서 회회 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을 거행했다. 문물교류도 있었는데 상화떡(이슬람식 떡)과 설적(송도 설씨가 시작했다는 꼬치구이)가 있다. 속요(俗謠,민요)에서도 <쌍화점> 즉 이슬람 식 떡 가게에 대해 얘기가 되는데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소문이 상점 밖으로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광대인 네가 퍼뜨린 줄 알리라.” 이 문장은 서로 이질적인 두 문명의 극적 만남의 상징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악무 즉 비파,나팔, 소 등 호악과 호가,호무; 우왕(禑王)은 대동가 부벽루에서 호적(태평소)을 불고 화원에서 호가를 부르며 호무를 추었다고 하는데 이 악기들이 바로 서역의 물건들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술인 소주의 기원도 재미 있는 것은 기원전3000년경 수메르에서 시작했다고 보는데 몽공 원정군에 의해 이라크의 아락주 제조법이 개성,안동,제주도 등지에 전해지게 되었다. 아락은 몽골어로 아라킬, 만주어로 알키,힌두어로 알락, 중국어로 아랄길주(阿剌吉酒),투르크어로 아럭 이라고 변해왔다. 또한 최초로 고려의 명칭이 Kao-li 라고 붙혀 졌고 이 단어는 라시둣 딘의 세계사 <집사>集史 에서도 언급된다. 그리고 오스만의 알리 아크바르가 중국 여행기 <키타이서>(1516년) 에서 고려를 중국 행정구역의 하나,상인들이 부유함, 아마포 질의 우수성 등에 대해 썼다.
IV.
이러한 이슬람적 특성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념으로 출발한 조선 초기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세종 재위기에는 궁중의 공식행사에 무슬림 대표나 종교지도자들이 초청되어 꾸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들 무슬림들이 이시기에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끼친 이슬람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 중
이슬람 역법이나 도자기 기술의 도입이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조선 초기의 다양한 과학기기의 발명과 과학서적의 편찬에도 이슬람 문화가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자기 청색안료인 회청(回靑, 회회청)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세조 때부터 18세기 국내산 안료가 개발 될 때까지 약 300년간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지방에서 수입하여 일본에 재수출까지 했다. 특이한 것은 위구르 문자와 언어가 유행하여 비공식 궁중어로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관의 고시과목에도 위그르 언어가 들어갔다.
V. 그러나 만남의 단절기도 있었으니 한반도에서의 이슬람 영향력은 15세기 중엽 이후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새로운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의 유포와 부흥으로 이질문화가 배척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20세기 초 개화의 물결로 인한 문호개방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조 중,후기에 와서 대외적으로는 이슬람 공급원이었던 원나라의 멸망으로 관문 역할을 했던 중국이 해금(海 禁),관금(關 禁) 이 실시되었고 청조에 와서 무슬림 탄압이 많았으며 서세동점으로 무슬림들의 제해권이 상실 되었다. 또 대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유교문화와 쇄국정책으로 인해 이슬람이 상류층에서만 맴돌고 착는하지 못하여 자생력이 상실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일단의 무슬림들이 다시
한반도에 이주해 정착한 시기는 1920년대이다. 이들 대부분은 소련치하의 소수민족으로 살던 투르크계 무슬림들로서, 볼셰비키혁명 이후 삶의 터전을 잃고 만주를 거쳐, 당시
일제치하에 놓여있던 한반도에 망명해온 무슬림들이었다. 약200명정도로 추산되는 이들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했으며, 서울시내 요지에 그들의 민족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건립했다. 또한 그들은 꾸란을 출판 배포하고 서울 근교에 이슬람 묘지를 확보하는
등, 근데 한국 이슬람의 태동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VI. 현대 한국 무슬림의 형성은 6.25 참전 터키군에 의해 기반이 구축되었고 이맘 압둘가푸르가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45년 한반도의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급변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 대부분 해외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약 30년간 그들이 한반도에 심어놓은 이슬람의 씨앗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들의 동족인 또 다른 터키인 무슬림들에 의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시 발화되었다. 1955년 한국 이슬람협회가 결정되어 공동체를 이루었고 현재 4만여 신도가 되었다. 현대
한국의 이슬람교의 전파는 1955년 9월, 6 ·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종군
이맘(성직자를 가리킴)과 주베르코취 종군 이맘의 지도와 협조 아래
VII. 결론 이 역사의 과정에서 우리 나라가 한민족임을 우리는 언제나 자랑스러워 했으나 실상은 우리민족은 문화인류학적으로 혼혈민족이다. 이 말을 듣는 이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위의 역사 사건의 과정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이주했고 정착을 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275개 성 중 145개 외래성 인데, 그중 137개 중국성, 나머지 8개 중국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의 성이다. 일본(우록김씨(友鹿金氏:뒤에 賜姓하여 김해김씨),몽골(연안인씨延安印氏),여진(청해이씨),위그르(경주설씨),아랍(덕수장씨),베트남 (화산이씨花山李氏)인들이 정치적 망명,표착,종교홍포,투항,구원(救援),상사(商事),전란피란,범법도피,정략결혼,왕실 시종관계 등의 동기로 이주한 것이다. 이들은 신라시대에 30여개,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60여개, 조선 시대 50여개의 이방민족이 들어와 새로운 성씨을 부여받고 시조로서 활동을 하였다.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의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위구르계 귀화성씨로는 경주설씨(慶州乾氏)가 있다. 시조는 설손(乾遜)이다. 《경주설씨세보》에 의하면 그는 위구르 사람으로 원나라에 벼슬하여 단주태수(單州太守)로 있을 때 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가 있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로 들어와 1358년(공민왕 7)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그를 후히 대접하여 부원후(富原侯)로 봉하고 부원의 땅을 주었다. 호를 근사재(近思齋)라 하며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설씨(慶州 氏)는 남한에 총 442가구,1,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랍계 귀화성씨로는 덕수장씨(德水張氏)가 있다. 시조는 장순룡(張舜龍)이다. 《덕수장씨세보》에 의하면 그는 아라비아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제국공주를 시종하여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였다. 장군에 오르고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다. 여진계
귀화성씨로는 청해이씨(淸海李氏)가 있다. 시조는 이지란(李之蘭)이며 원래 여진사람으로 성은 퉁(욉), 이름은 쿠룬투란
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다. 고려 공민왕 때 부하 100호를 이끌고 귀화, 북청(北靑)에 살면서 이씨성과 청해(靑海:北靑)의 본관을 하사
받았다. 일찍이 이와 같이 한국의 성씨 중에 많은 (절반이 넘는) 이방인들의 성씨가 한국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해 왔으나 한국의 강력한 문하 수용 능력에 의해 한국 문화 속으로 용해되어 지금까지 한민족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는 글로벌 시대 즉 한 나라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시대이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인들을 보자. 한국인들이 없는 나라가 있는가? 다른 문화 권에 가서도 한국인들은 다른 문화의 다른 민족들과도 어우러져 살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한국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존력의 탁월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들을 섬겨 주자.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신다. 우리를 통해….
(출처와 글쓴이의 기재를 깜빡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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