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종이의 전래와 고려 인쇄술의 발전

이강기 2015. 9. 17. 18:16

종이의 전래와 고려 인쇄술의 발전

임재완 -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1. 머리말

2. 문자와 인쇄의 기원

3. 종이의 기원과 전래

4. 고려의 금속활자

5. 고려의 목판인쇄

6. 맺음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 머리말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적 유산을 손꼽는다면 단연코 고려청자와 금속활자의 발명,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4세기를 전후로 문자로 쓰여진 역사서가 있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는 것이 없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로 751년(新羅 景德王10) 간행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754·755년에 조성된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있다. 신라의 인쇄술이 고려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받는‘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만들어 진다. 이렇게 우수한 인쇄술이 이루어진 근저에는 품질 좋은 종이와 먹이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본 논고는 고려의 뛰어난 인쇄술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함에 주안점을 둔다. 먼저 문자와 종이의 기원을 다루고 다음으로 금속활자와 대장경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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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자와 인쇄의 기원




인류가 문자를 가지고서 표현을 시작한 것은 아득히 먼 옛 시대의 일이다. 초기의 문자는 상형문자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형체를 간략한 그림의 형태로 모사하여 만든 문자를 말한다. 상형문자가 나타난 지역은 모두 문명의 발생지인 지역과 연관이 깊다. 서기전 31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자, 서기전 3000년경에 이집트의 신성문자(神聖文字), 서기전 1500년경에 만들어진 시리아의 히타이트 문자, 서기전 1800년경에 만들어진 중국의 한자(漢字)가 그것이다. 무엇인가 표현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구는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양하게 표시를 하였는데 동굴의 벽면에 새기기도 하고 동물의 뼈에도 새겼다. 이러한 초기의 문자가 점점 진보하여 오늘날의 문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와 옛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국에서는 최근에 은(殷, B.C. 18세기∼B.C. 12세기)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 : 현재의 河南省 安陽懸 小屯村)라는 지역에서 대량의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문자로서 현재 일부는 해독되었으며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금 쓰이고 있는 한자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글자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갑골문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문자란 어느 한 개인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여러 시대를 거쳐서 차츰차츰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후한(後漢) 초기에 허신(許愼, 58∼147)이『설문해자(說文解字)』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한자 사전으로 오늘날 우리가 한자의 뜻을 정확히 알수 있는 것도 모두가 『설문해자』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많이 읽고 있는 중국의 고전들 이를테면 중국 최고의 역사서인 『상서(尙書)』,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詩經)』, 공자(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 등은 춘추전국시대의 저작들이다. 당시에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을까? 현재의 기록에 근거 한다면 대나무·비단 등에 글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시경(詩經)』출거(出車)편에“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으리요마는 이 간서가 두렵다 (豈不懷歸 畏此簡書).”라고 했는데‘간서’는 대쪽에 글을 쓴 것으로 사람을 부역에 종사시키기 위해서 보내는 징집영장 같은 것이다.『묵자(墨子)』 명귀편하(明鬼篇下)에“옛날에 성왕은 반드시 귀신이 있다고 하였으며 귀신을 섬기는데 힘썼다. 후세 자손이 알지 못할까 걱정하여 대쪽과 비단에 적어서 전하여 주었다 (古者聖王必以鬼神爲有 其務鬼厚矣 又恐後世子孫不能知也 故書之竹帛傳遺後世子孫).”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근거한다면 주로 대나무와 비단에다 글을 썼으며 최초의 서사(書寫)의 기본 도구는 대나무·비단이다. 그리고 이 위에다 글을 쓰기 위한 먹·붓 등의 도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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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이의 기원과 전래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로 대쪽과 비단에 글을 썼으며 지금과 같은 종이에 쓴 것은 아니다. 종이의 발명은 일반적으로 A.D.105년 환관인 채륜(蔡倫)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관련된 기록을 알아본다.

“채륜의 자는 경중(敬中), 계양(桂陽)사람이다. 영원(永元) 9년(A.D. 97)에 칼과 여러 기계를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다. 이것은 모두 정밀·우수·견고·치밀하여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옛부터 문자는 죽간을 엮은 것이 많았으며 겸백을 사용하는 것을 지(紙)라고 하였다. 겸은 귀하고 대는 무거워 사람이 사용하기는 불편하였다. 채륜이 궁리하여 나무껍질·마·헝겊·어망 등을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원흥(元興) 원년(A.D. 105)에 황제에게 올려 바치니 황제가 그의 능력을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종이를 사용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채후지’라 불렀다.”

그러나 사실은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오는 조지법(造紙法)을 대폭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즉 새로운 재료의 선택과 제조방법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채륜 이후 제지기술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후한의 좌백(左伯)이다. 그는 채륜보다 조금 후의 사람으로 제지기술에 뛰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문헌상 최초로 먹을 만들었다는 위탄(韋誕, A.D. 179∼253)은 청룡(靑籠, A.D. 233∼236) 연간에 왕명으로 당시 건립한 삼도궁(三都宮)이란 궁궐의 현판을 쓰도록 명을 받았으나 장지(張芝)의 붓과 좌백의 종이, 자신이 만든 먹이 구비된 후에야 글을 쓰겠다고 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종이와 제지기술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나라로 전파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A.D. 105년에서 3세기로 추정하기도 하고 2세기경 중국에서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 먼저 들어오고 610년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먹 만드는 법과 종이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일본에 전파했다고 한다. 제지술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애석하게도 우리 나라의 문헌에는 실려있지 않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18년(610) 춘 3월, 고구려에서 승려 담징과 법정을 보내왔다. 담징은 오경을 알았으며 또 채색과 지·묵을 만들었고 아울러 맷돌도 만들었다. 맷돌을 만드는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의 기록에 근거한다면 610년경에 담징이 제지술을 일본에 전파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맷돌도 종이제조에 필요한 용구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경전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연대가 120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인이 응신천황(應神天皇) 16년(285)에 일본에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가 스승으로 섬겼으며 왕인에게 여러 전적을 익혔다. 왕인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라는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이다. 이 해(405)에 백제 아화왕[阿莘王을 말함]이 죽었다.”

일본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될는지 모르지만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 관계는 빈번하였으며, 백제의 고급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실린 기사를 알아보자.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여름 6월,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오자 왕은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알리고 토산물을 조공하였으며,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백제 근초고왕 30년(375)의 기사를 살펴보면, “백제는 나라를 세운 이래 문자로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없었다.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서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었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서적에 소개한 것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최소한 4세기 말경에 접어들어서는 고구려·백제에 문자로 쓰여진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종이에 쓴 것이다. 우리 나라 제지기술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신라·백제·일본과의 관계에서 문화 전파와 관련된 자료와 중국의 기록에 근거해서 문헌적으로 고찰한 다음 종이의 원료로 쓰인 닥나무[楮]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생산되었으며 종이의 원료로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냐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현재 고구려·백제의 것으로 나타난 실물은 없고 신라시대의 것이 몇 종류 있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서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126호)은 간행연도를 751년을 하한기로 잡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국보 196호)은 754·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는 신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민정문서(民正文書)가 있다. 이것은 9세기경 만들어진 것이다.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권10· 50의 사성기에는 닥나무[楮]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종이를 만든 사람의 출신지와 이름이 적혀 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8세기경 닥나무가 널리 퍼졌으며 이후 종이의 원료로 널리 쓰인 것을 알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옛 조상이 남긴 전적(典籍)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저지(楮紙)가 갖는 특수성에 이유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규경(李圭景)은 「지품변증설(紙品辨證說)」에서 저지의 특성을 견(堅)·후(厚)·윤(潤)·활(滑)로 말한다. 즉 질기고, 두껍고, 윤택있고, 보드랍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지품은 옛날에 견지(繭紙)라 하였는데 명성이 천하에 자자했다. 옛부터 다른 재료는 쓰지 않고 다만 저곡(楮穀)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견지라 이름 붙이는 것은 저지의 질기고, 두껍고, 윤택있고, 보드라운 것이 누에실과 비슷하기 때문에 견지라 한 것이다.”

적어도 8세기부터 생산이 시작된 신라의 저지는 고려로 이어지며 고려에서는 종이가 대량 생산되어 중국에 수출하기도 한다. 현전하는 고려 최초의 것은 총지사(摠持寺) 주지(住持) 홍철(弘哲)이 1007년에 간행한『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이다. 이 경의 지질은 저지가 아니고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마지(麻紙) 고문서와 비슷하다. 전해지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11·12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지질을 보면 대부분 저지로서 이규경이 「지품변증설」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질기고 두껍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렇게 우수한 종이가 1000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다른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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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의 금속활자




고려 인쇄의 우수성을 논한다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이라 하겠다.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청주(淸州) 흥덕사(興德寺)에서 1377년(禑王 3)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중국의 활자판 발명은 필승(畢昇)이란 사람이 경력(慶歷, 1041∼1048)연간에 교니(膠泥 : 찰기있는 점토, 차진 흙) 를 이용하여서 활자를 만든데 기원을 둔다.

“경력(慶歷, 1041∼1048) 연간에 민간인 필승이 또 활판(活板)을 만들었다. 그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차진 흙에 글자를 새겼는데 얇기가 동전 가장자리만 하다. 매 글자마다 하나의 활자를 만들고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하였다. 먼저 하나의 철판(鐵板)을 설치하고 그 위에다 송진과 종이재를 혼합한 것을 덮는다. 인쇄하고자 할 때는 하나의 철범(鐵範)을 철판 위에 둔다. 그리고는 촘촘이 활자를 배열하여 철범에 가득 채워서 인쇄를 위한 하나의 활자판을 만든다. 화양지약(火煬之藥)이 조금 녹기를 기다려 평판(平板)으로 표면을 누른다. 그러면 활자판은 숫돌처럼 된다. 만약 2∼3부를 인쇄하는데 그친다면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만약 많은 부수를 인쇄한다면 매우 신속하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송대에 이미 실험적으로 진흙으로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 나왔으나 흙을 구워만들어서 자주 부스러지고 내구성(耐久性)이 없었기 때문에 실용화되지 못했다. 필승 이후에 석(錫)을 사용한 인쇄 방법이 연구 되어왔으나 실용화 되지는 못한 듯하다. 중국에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의 성공은 명대(明代)의 홍치·정덕(弘治·正德, 1488∼1521)연간에 강남(江南)의 무석(無錫)·상주(常州)·소주(蘇州) 지역에서 간행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활자인쇄를 주도한 사람으로는 화씨(華氏)·안씨(安氏)의 두 집안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1440년 대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세계심판(世界審判)』,『천문력(天文曆)』,『사십이행성서(四十二行聖書)』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활자인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의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13세기부터 금속활자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임시로 옮긴 다음 당시의 실력자 최이(崔怡, ?∼1249)를 대신하여 지은『신인상정예문(新印詳定禮文)』발문(跋文)에 의하면 1230년대경에 활자로 책을 간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본조[高麗]는 개국한 이래로 예(禮)에 관련된 제도를 덜기도하고 더하기도 하면서 고쳤다. 시대에 따라서 여러번 했으므로 잘못으로 여긴지가 오래다. 인종(仁宗,재위: 1122∼1146)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의 신하에게 명령을내렸다. 이들은 고금의 서로 다른 예에 관한 글을모아서 참작하고 절충하여 50권의 책을 만들었으니『상정예문』이라 불렀다. 이 책이 세상에 퍼진 후에야 예가 통일되었고 사람들은 의혹됨이 없었다. 이 책이 여러 해를 지나자 일부가 떨어지고 글자가 이지러져 보기가 어려웠다. 나의 선공[최충헌]이 보수하여 두 본을 만들어서 한 본은 예관(禮官)에게 주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했으니 그 뜻이 깊은 것이다. 그런데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때(1232) 예관이 급한 나머지 가져가지 못했다. 아마도 이미 없었졌을 것이지만 집안에 보관되어온 한 부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연후에야 선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없어지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마침내 주자(鑄字)를 사용하여 28부를 인쇄하여서 각 관청에나누어서 보관케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1230년대에 주자로서 『상정예문』을 간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전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된 인쇄본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서 1377년(禑王3)에 청주(淸州) 흥덕사(興德寺)에서 간행한 것이다. 책의 끝에 “선광칠년 정사(1377) 7월 일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 丁巳 七月 日 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4년 청주시 운천동에서 택지를 조성하다가 그 절터가 발견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을 간행한 절 터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청주에 고인쇄박물관이 세워졌다. 고려 말 지방의 한 사찰에도 금속활자로 책을 간행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높은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바로 조선에 이어져 간다. 조선은 여대(麗代)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계미(癸未)년인 1403(朝鮮 太宗3)년에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말기까지 20여 차례나 금속활자로서 책을 간행한 세계 인쇄사상 유례없는 인쇄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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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목판인쇄




1) 목판인쇄의 기원

목판인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의 여부도 일치하지 않지만 대체로 당대(唐代)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송(宋)의 심괄(沈括,1030∼1094)은 “서적을 판(板)에다 인쇄하는 것은 당대(唐代)의 사람들은 여전히 뛰어나게 하지 못했다. 풍영왕(馮瀛王, 881∼954)#23) 이 비로소 오경(五經)을 인쇄한 이후에야 전적은 모두 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고 하였다.

풍영왕을 이어서 중국 인쇄에 선구적인 역활을 한 사람은 원대(元代)의 왕정(王楨)으로 목활자를 만들어서 자신의 저작인『농서(農書)』을 간행하였다. 그는 목판인쇄의 시작은 풍영왕에 의해서 931년에 구경(九經)을 간행한 것이라고 하였다. 송대(宋代) 사람 주익(朱翼)은 “문자를 새겨서 인쇄하는 것은 당 이전에는 없었다. 당·송 간에 익주(益州)에서 비로소 묵판(墨板)이 있었으며 후당(後唐, 923∼936) 연간에 비로소 구경(九經)을 새겼고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는 경전· 역사책을 모두 거두어 판에다 새겨서 정본으로 하였다.”고한다.

이상의 기록에 의거한다면 풍영왕에 의해서 유가경전에 대한 목판인쇄가 시작됨을 알 수 있으며 공통점은 모두가 구경을 간행하였다는 것이다. 구경은『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을 말한다. 구경은 당(唐) 개성(開成, 836∼840) 연간에 정담(鄭覃)의 요청으로 새겨진 것으로써 세칭‘개성석경(開成石經)’ 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오대사(舊五代史)』「풍도열전(馮道列傳)」에 의하면 장흥(長興, 930∼933) 연간에 여러 경서에 잘못이 많아서 이우(李愚)와 함께 학관 전민(田敏) 등에게 명령하여 서경(西京)에 있는 정담(鄭覃)이 새긴 석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을 근거로 인쇄할 판목(板木)을 새기고 책을 간행하여 천하에 유포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원 석각에 마모가 많아서 원각이 아닌 보각한 것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명대(明代)의 호응린(胡應麟, 1551∼1602)은“인쇄본은 수대(隋代)에 시작 하여 당대(唐代)에 행해지고 오대(五代)에 널리 퍼졌으며 송대(宋代) 사람에의해 정밀해졌다. 이것은 내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참작한 것으로써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이다” 라고 하여 그 기원을 수대까지 올려 잡았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수대 기원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카터(Cater)는 중국의 국력이 번성하고, 중국문화의 업적이 절정에 달한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에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천혜봉은 8세기 전후로 보았다. 풍영왕은 이전에 사용되던 인쇄술을 종합적으로 발전시켜 유가 경전을 간행한 공로가 있으며 이전에 이미 불서가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여러문헌에 보인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목판인쇄물이다. 이것은 영국의 스타인(Stein) 박사가 1907년 돈황석실(敦煌石室)에서 발견한 것으로 868년에 간행된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목판인쇄술이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래되었지만 중국보다 목판인쇄로 간행된 서적이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일본만 하더라도 770년경에『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1966년 경주 석가탑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나오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이제는 그 자리를 751년 신라에서 간행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그리고 사경(寫經)이지만 754·755년에 만들어진『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도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인쇄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규경은「간서원시변증설(刊書原始辨證說)」에서 당(唐)에서 인쇄가 시작되었으며 신라는 당과의 사신이 끊이지 않았으니 인쇄법을 알았다고 하였다.

신라의 인쇄술은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 최초의 목판인쇄물은 총지사(摠持寺) 주지(住持) 홍철(弘哲)이 1007년에 간행한『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 다라니경』이다. 그리고 곧이어 두차례에 걸쳐서 대장경이 만들어 진다.


2)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대장경’이란 불교경전과 불교 관계 책들을 집대성하여 묶은 불교총서를 의미한다. 송나라는 건국과 함께 많은 책을 간행하여 문화 진작에 크게 힘썼다. 대장경을 만들기 이전에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907∼959) 사이에 대량의 유교 경전이 풍영왕·무소예(毋昭裔)에 의해서 간행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적 축적이 대장경으로 이어진 것이다. 송나라 태조의명으로 971년(開寶4년, 光宗 22)에 대장경 인쇄에 들어가 983년(成宗 2)까지 13년에 걸쳐 촉(蜀)의 성도(成都)에서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일반적으로‘개보칙판대장경 (開寶勅板大藏經)’ 또는‘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이라고 부른다. 이 대장경은 992년(成宗 11)에 사신 한언공(韓彦恭, 940∼1004)을 통해서 고려로 들어온다. 『송사(宋史)』권487의 고려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2년(991)에 사신 한언공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인쇄한 불경을 요구하였다. 『장경』『어제비장전』『소요영』『연화심론』을 하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권93의 한언공에 관련된 기사에는 송의 태종에게 요청하여 경 481함 2500권을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송본을 저본으로 해서 고려는 당시 거란족의 외침을 불력으로 막고자 대장경 조판에 들어간다. 1011년(顯宗 2)에 시작되어 1087년(宣宗 4)에 완성되는 총 571함 60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중국 개보칙판대장경에 의거해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서 개발한 고려의 독자적인 판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판화(版畵)는 크게 차이가 난다. 송본의 판화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운데서 정적인 감을 느끼게 한다면 고려 초조본은 선이 굵고 소박하면서도 동적인 약동감과 대담성을 보이는 것 으로써 당시 목판화의 최고 수준이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보다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제지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대장경 간행에 충분한 종이를 공급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며 아울러 품질이 뛰어난 먹도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종이 생산과 먹에 관련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초조대장경이 조성되기 이전의 인쇄상황에 대해서는 중국 오대(五代)에 간행된 유교경전이 고려에 수입되었는가의 경로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송대에 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촉(蜀)의 성도(成都)에서 대규모의 유가 경전이 간행되어 대장경을 간행하는 기술적 밑거름이 되었으며 대장경 역시 촉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초조대장경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 되어 있다가 1232년(高宗 19)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서 경판전체가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인 초조대장경이 언제 일본으로 흘러 갔는지는 모르지만 일본경도(京都) 남선사(南禪寺)에 많이 남아 있으며 일부는 국내에서 전해지고 있다.


3)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1232년(高宗 19) 몽고군의 침입으로 11세기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자, 국가에서는 불력(佛力)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당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만든 것이‘재조대장경’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옛적 현종 2년(1011)에 거란이 대규모로 군사를동원하여 쳐들어 와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거란군은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자 현종은 여러 신하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큰 소원으로 대장경 판본을 새기자 그 뒤에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났다. 그러면 대장경도 한 가지요, 전후 판각한 것도 한 가지요, 군신이 함께 바라는 것도 한 가지다. 어찌 현종때 거란 군사는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達旦 : 몽고군)은 그렇치 않은가? 다만 하늘에 계시는 여러 부처님들이 살펴주시는데 달려있을 뿐이다. 진실로 바라는 바 우리의 정성이 지난 현종보다 부끄러운 것이 없다. 원하노니 하늘에 계시는 모든 부처들은 우리들이 간곡하게 비는 것을 살펴서 신통한 힘을 빌려주기를 바란다. 사나운 오랑캐 놈들이 종적을 감추고 멀리 달아나게 하여 다시는 우리 땅을 밟지 못하게 하고 전쟁이 그치고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황태후와 황태자가 끝없는 목숨을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영원토록 이어지게 한다면 우리들은 더욱 노력하여서 법문(法門)을 보호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것이다.” 에서 알 수 있듯이 거란군의 침입시에 현종이 대장경을 새겨 거란군이 저절로 물러갔으니 몽고군의 침입도 역시 대장경을 조성하여 물리치고자 한 것이다.

재조대장경은 고려시대에 간행했다고 하여‘고려대장경’또는 경판(經板)의 수가 팔만여개라고 하여‘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6년간(1236∼1251)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러 번 교열을 거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오자(誤字)·탈자(脫字)가 없는 정확한 대장경으로 세계불교문화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장경이 몽고와의 항쟁이라는 어려운 여건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당시의 집권자 최씨 부자(崔瑀·崔沆)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들 최씨 정권은 대장경의 조판을 통해서 불교라는 공통의 기반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단합을 도모하였고 아울러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력이 행사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16년 간이나 걸쳐서 이루어진 사업은 대몽항쟁기에 있어서 대내적인 결속력을 민족의식에서 찾고, 특히 문화적 자존을 의식하여 몽고를 야만시 함으로써 대몽항쟁의 목표를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당시 고려 불교가 갖고있던 높은 수준과 전통력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서 임시로 만든 기관)과 진주(晉州)의 행정 관할인 남해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일을 추진하였으며 작업이 이루어진 장소도 역시 강화도와 남해의 섬이다. 당시 몽고군의 공격을 피하고 해로(海路)로 목재를 운반하기가 용이해서 그런것이다. 판목(板木)은 제주도·거제·남해 등지에서 나는 자작나무·후박나무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바닷물에 담가 나무결을 삭이고 그늘에서 말려 글자를 새긴 것이다. 경판이 완성된 뒤에 강화도(江華島)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다가 1398년(朝鮮 太祖 7)에 해인사로 옮겨졌으며 현재 1,516종에 6,815권, 경판 81,258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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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음말


개략적이나마 인쇄에 필요한 종이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고려에서 발명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받는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한 국가의 문화적 역량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서적 출판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국민 개개인의 독서 수준에 따라서 문화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난 날 책이라고 한다면 일부 양반들의 전유물로서 일반 서민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라·고려·조선으로 면면히 내려온 우수한 인쇄술의 전통은 이제 세계과학사, 특히 인쇄사의 한 부분으로 차지해야 할것이다. 하나 덧붙여 두고 싶은 말은 초조대장경이 이루어진 경위에 대해서이다. 간행되기 이전의 인쇄 상황에 대해서 보다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중국의 개보칙판대장경은 간행되기 이전에 풍영왕·무소예(毋昭裔)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진 유교 경전 간행의 기술적 바탕위에서 완성된 것이다. 양자 똑 같이 촉(蜀 : 地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 초조대장경이 간행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당시의 종이 생산량과 먹의 제조기술 등의 연구는 중요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