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고종시대- 이태진교수의 반론을 읽고 - 김재호교수

이강기 2015. 9. 17. 22:26
 

재반론 : 이태진 교수의 반론을 읽고

국민 없는 근대국가는 없다, 사실의 부재와 해석의 과잉

2004년 08월 30일 김재호 전남대

김재호 / 전남대 경제사

이태진 교수의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하 ‘재조명’)과 故 김대준 교수의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이하 ‘연구’)에 대한 본인의 서평에 대해 이태진 교수가 반론했기 때문에 이에 답하고자 한다. 서평에서 본인은 18세기 ‘탕평군주’(영조와 정조)의 ‘民國政治’를 계승한 대한제국의 國制가 근대적이었다는 ‘재조명’의 주장은 왕정의 극복에 대한 문제의식을 결여한 것이며, ‘연구’의 논의는 황실재정의 팽창과 정부재정에 대한 황실의 지배로 인해 갑오개혁의 성과가 전도된 것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신문사에서는 본인의 서평을 “고종 업적 과잉 강조, 王政 극복 문제의식 不在”라고 요약해줬다.

조선왕조는 근대화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교수의 반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의 ‘민국정치’와 대한제국의 ‘국제’가 동학과 서학으로 표현된 민중의 비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특히 동학은 조선왕조에 대해서 적대적이지 않았다. 둘째, 대한제국의 ‘국제’는 외견상 전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의회를 갖춘 明治일본의 입헌군주제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평가할 때 갑오개혁의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의 분리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왕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일제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본인은 동학과 서학이 반드시 근대지향적인 것이었으며 조선왕조가 그 비전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학이 조선왕조체제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조선왕조라는 하나의 문명을 근대성이라는 단일한 차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교수가 무리하게 근대화의 차원에서 조선왕조를 해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본인의 주장은 동학과 서학과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존재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균열시키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체제적인 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탕평군주의 민국정치 이념이 그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근대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첫째 민국정치의 이념을 혁신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18세기의 민국정치 이념이 국왕을 양반의 우두머리에서 백성(국민) 전체에 대한 통치자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지향)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이러한 기준을 중국에 적용하면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을까?), 조선왕조의 국왕은 왕조개창부터 “赤子”로 표현되는 백성의 어버이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본인은 조선조 어느 국왕이 자신을 양반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정치이념이 근대적이려면, 국왕의 권력을 우주의 질서로부터 도출하는 것을 그만두고 현실정치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극도를 재해석하는 방식의 권력이론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대비시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18세기의 사회구조가 근대적 국민국가가 상정하는 ‘民’의 동질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와 노비제도가 완화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는 있지만,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해서 신분제도가 혁파될 때까지 조선왕조는 제도적으로 良賤?班常차별이 엄존하던 신분제사회였으며 사람을 팔고 사는 인신매매가 관행되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동질적인 국민(또는 민족)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황실재정 팽창=전제적 권력구조의 재정적 표현”

한편 이 교수는 대한제국의 ‘국제’가 전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의 입헌군주제로 규정해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중추원, 그것도 권한이 축소된 대한제국기의 중추원을 의회제도로 인식하고 있다(이 기준을 중추원이 존속한 일제시대에도 적용해주기 바란다). 의회와 자문기구는 전혀 다른 제도다. 서양에서 의회제도가 발생한 것은 중세유럽의 봉건제하에서 국왕이 전쟁 등으로 인해서 생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권력을 분점하고 있었던 영주, 도시, 교회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소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국왕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이었다. 동의를 필요로 했던 것은 봉건제하에서는 국왕도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서 생활해야 한다는 ‘國王自活의 원칙’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세의 신분회의를 계승한 근대의 의회 역시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가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과 통치자의 재정운영에 대한 감시기능이었다. 주지하듯이 조선왕조는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서 작동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 국가였다. 독자적 권력을 분점한 영주나 국왕의 지배를 벗어난 토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鄭道傳이 “人君無私藏”(?朝鮮經國典?)이라고 표현하였듯이 국왕은 국가재정과 별도로 자신의 재산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는 이념하에서 인민과 토지에 대해서 수취했다. 조선왕조의 국왕은 동의를 구할 대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이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대한제국의 ‘국제’를 “봉건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논단하고 있는데 이상에서 그러한 우려는 기우였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중추원이 국왕의 과세에 대해서 국민을 대표해, 적어도 어느 한 신분이라도 대표해, 동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대한제국은 그 이전 조선왕조의 국왕이 그러했듯 아무런 동의가 필요없이 과세를 할 수 있었다. 사법, 행정, 군사, 재정, 외교 등 국가의 모든 업무에 대해서 분할되지 않는 권력이 국왕 일신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대한제국의 ‘국제’를 전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 조선왕조와 크게 달라진 점은 그렇게 전제적임을 명문으로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황실재정의 팽창은 이러한 대한제국 ‘국제’의 전제적 권력구조의 재정적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황실재정을 문제로 삼는 것은 근대국가의 초보적 조건이 통치자의 재정과 국가재정의 경계를 명확히 해 통치자의 자의적인 재정운영을 방지함으로써 통치자의 전제를 방지하고 납세자인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근대국가인 것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지만, 청와대가 한국은행을 지배해 화폐를 남발하고 재정경제부 관할의 국가재원을 집중해 “국토개발계획”을 시행할 수 없도록 제도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기준은 갑오개혁시에 일제가 강요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데, 대한제국의 많은 제도들이 갑오개혁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으로서 이 교수가 높이 평가하는 회계법이나 예산제도도 갑오개혁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다. 신분제도의 혁파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기준을 갑오개혁에 의해서 시행된 모든 개혁정책에 적용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객관적 사실인식에서의 오류 많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의 주장이 고종황제가 무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위한 정책에 주어진 조건하에서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정도였다면, 본인은 굳이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교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종황제가 외세의존적인 개화파들에 맞서 근대화정책을 자주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망국과 식민지화에 대한 고종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한편,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개화기 선각자들의 고투를 단지 일본이라는 외세에 부화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권력투쟁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이 전개됐던 한국근대사를 親日이라는 현재의 잣대 하나로 재단해서는 다 잘려나가 남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재정의 난맥상과 악화(백동화) 남발에 의한 인플레이션마저도 일제의 ‘국제선전전’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고 사고하는 이 교수에게 객관적 사실인식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주장하듯이 국왕만 홀로 남은 역사에서 우리는 과연 ‘자학자조’를 씻어내고 자긍심을 되찾게 될 것인가. 역사 연구가 어느 개인을 지목해 책임을 지우고 淸算하는 것으로 전락해서는 앞날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면 대한제국 ‘국제’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일한 주권자 고종황제에게 물어야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甲午改革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관한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업의 발흥과 관료, 1876-1910’, ‘한국 전통사회의 기근과 그 대응:1392-1910’ 등의 논문이, ‘맛질의 농민들 - 한국근세촌락생활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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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4-08-30 1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