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 서울대·한국사
김재호 교수의 세 번째 글 접수 소식에 접해 나는 내심 반가웠다. 내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김 교수와 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각각 대변하는 것으로 소개됐다. 내
주장이 이렇게 소개되는 데 불만은 없지만, 내발론도 연구자에 따라 그 주체인식에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의 내발론에는 민중 중심적 역사관에 선
연구들이 많았다. 고종황제의 치적을 재평가하려는 내 주장은 이쪽으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민중도 중요하지만 정부나
군주를 도외시 한 발전론은 반쪽 역사가 될 위험성이 크다고 보고 고종황제와 그의 정부에 의한 개혁 노력에 대한 재조명을
촉구해왔다.
민중적 시각이라고 해서 모두 정부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민적 근대화 코스론으로 이 분야에 가장 주목할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은 김용섭도 정부의 개혁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광무 양전사업에 관한 그의
연구는 광무정권이 결세(농지세) 현금납을 안정시키기 위해 행한 서구식 양전사업의 결과를 대상으로 입론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농민적 의지와
정부의 노력이 만나는 접점을 최초로 구체화시킨 성과로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내 주장은 이런 관점을 상공업, 금융, 국토개발 사업 등에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번 글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됐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논의를 효과적으로 이끌 발언이다. ‘근대경제성장’은 지속적인 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인당 소득이
계속 증가하는 경제 추이를 뜻한다고 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그에 따른 인구 감소 등이 반복하는 전근대적 농업조건이 기본적으로 해소된
경제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런 상태는 통계적 증거로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강조한다. 옳고
그름도 推計에 오류가 있는가 여부로 판가름이 난다고 했다. 나의 이번 글은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김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근대화론 측 연구자들은 그 동안 통계적
방법의 연구성과를 적지 않게 내놓았다. 위 언급도 이에 대한 자신감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방법도 전능한 것이 아니다. 이
방법은 우선 분석할 대상 자료가 부면별로 고르게 갖춰질 때 전폭적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종시대의 공식 통계 자료들에 대한
발굴과 분석이 더 가해질 필요가 있다. 현재의 분석 성과로는 아직 어떤 확단도 내리기 어렵다. 추계에 대한 해석에 주관이 작용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일찍이 김용섭의 광무 양전사업을 통한 근대적 소유권 생성론에 대해 이 쪽 연구자들은 이를 주의깊게 살피기보다 그 불완전성 비판에
급급한 느낌을 줬다. 옆에서 보기에는 내발론이 우세한 연구 터전에 식민지 근대화론를 심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자리 만들기 같은 인상이었다.
김대준의 연구에 대한 김재호 교수의 응대도 그렇다. 그렇게 추계를 중요시한다면, 대한제국의 연도별 예산서를 면밀히 분석한 김대준의 연구 성과는
진지한 논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도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연구라는 식으로 냉대한 것은 옳지않은 논평 자세다. 대한제국=가산제국가설의
전제아래 같은 문제를 다룬 김 교수의 연구방식이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광무개혁처럼 일본의 침략으로 단명에 그친 경우, ‘근대경제성장’의
지표가 실제로 생겼더라도 여간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서는 놓치기 쉬운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 시기는 근대의 시발기로 일제 강점기에 비해 자료
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곧 발전부재론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김 교수는 내발론이 수십년간 고투해도 객관적 증거를 제대로
대지 못하지 않느냐고 꼬집지만, 자료조건상 그 작업 자체가 쉽지 않은 것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근래,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입증해주는 지표들이 통계적 연구들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연구자들이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수치가 그렇게 진실을 내비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 측의 연구에서도 그런 지표가 발견된다.
이영훈 편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에 실린 두개 씨성의 족보를 이용한 인구변동에 관한 연구는 19세기말부터 인구동향이
전통사회의 인구증가율 상한선 0.5%를 크게 초과(0.79∼1.57%)하고, 이런 빠른 증가율은 19세기말부터 사망률이 떨어진 결과라고
했다(p.17). 그리고 '맛질의 농민들'(2001)의 농업임금 추이 파악에서도 1905년 이후 家作畓에서의 수획량의 반전(상승)이
지적됐다(p. 200). 1905년은 통감부가 설립되기 전이므로 이 변화는 광무개혁의 성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지표는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에서도 찾아진다. 영광 辛씨가의
작인층에 관한 정승진의 분석은 두락당 지대량이 1896년부터 “드라스틱하게 반전” 된 것을 지적했다('경제사학25', p.27, 1998).
두락당 지대량이 2∼3두에서 4∼5두로 상승하고 지대수취율도 50%로 회복기운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1743∼1927년 간 영암 남평문씨
문중의 농업경영을 다룬 김건태의 연구도 문씨 契畓의 1두락당 租 수취액이 1890년대 중반 이전까지 큰 폭으로 등락을 거듭하던 것이 중반 이후로
상대적으로 안정돼 간 점을 큰 변화로 지적했다('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2004, p. 378). 나주 박씨가의 농업경영을 분석한 그의
다른 한 연구는 박씨가의 지주지 규모가 1897년 목포 개항(자율개항이었다) 이후 대일본 수출의 증가로 1901년 이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지대 수입도 따라서 증가한 것을 분석했다(같은 책, p.415, 451). 최원규의 경상도 수리시설 상황에 대한 검증도 비슷한 결과를 내놓았다.
즉 1832∼1895년간에 폐기 342개, 신설 156개와 같은 불안정 상태가 1895∼1900년간에는 폐기 4개, 신설 36개로 크게 개선된
상태가 파악됐다('국사관논총39', 1993, pp. 221∼222).
이상에 적시한 경제지표들은 1896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의 농업경제가
‘근대경제성장’의 기본조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은 타율에 의한 것이지만 1895년의 결세의 代錢納 조치를 수용 계승해
국가예산에서 조세 수입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김대준의 연구는, 1897∼1904년간 예산의 조세수입이 지속적인 증가를 보인 것을
논증했다. 위 지표들은 흥미롭게도 이 연구 결과와 그대로 일치한다.
19세기 한발과 농업경영에 관한 한 연구에 의하면, 악성적으로
반복되던 한발의 피해는 1888년의 대한발에서 이미 극복되기 시작한다(김민수, '19세기 농업의 한발로 인한 한계상황 극복과 지대수취체제의
안정화', 2004, 서울대석사논문). 장성 지방의 변씨 父子의 농업일기를 활용한 이 연구는 1876년, 1888년의 대한발이 수반한 피해상황을
비교한 결과, 전자는 여전히 인구감소까지 가져온 반면, 후자는 타 지역 또는 외국미 수입에 따른 기근으로 인한 생존위협의 극한상황을 극복하는
차이를 보인다. 1901년의 대흉년 때는 내장원이 안남미 수입으로 쌀값의 안정을 유지해 민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으며, 종두법 실시 등
근대의술의 보급으로 인구도 증가의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내장원 수륜과의 황무지 개간과 제언정비 사업도 안정성 확보에 기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1896년 이후의 경제지표상의 새로운 동향은 곧 대한제국 정부의 근대적 농정 추진의 결과였다. 김 교수가 황제의 사금고로 혹평한 내장원은 근대적
농정 수행의 중심 관서로 역할하는 모습이다. 김 교수가 말하는 ‘근대경제성장’은 일제시대가 아니라 대한제국기에 이미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금융분야에서도 새로운 성과가 나왔다. 광무정권이 일시 부족한
재원 조달을 위해 백동화를 남발하는 역행적 모습도 보였지만, 1898년 외자를 도입해 금융근대화 정책을 본격화 하는 한편, 1899년
大韓天一銀行을 출범시켜 백동화 유통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의 폐단을 극복한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이승렬, '한말·일제초기 대한천일은행
연구', 2004, 연세대박사논문). 대한천일은행은 이렇게 백동화 유통을 담임해 조세 代錢納의 실현에 기여하는 한편 금융자본 형성으로
한국상인들의 상업경쟁력 제고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의 ‘화폐정리사업’으로 대한제국의 금융시장이 붕괴하면서 함께
좌초했다. 김대준의 연구에서 국가예산제도가 파행을 맞이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김재호 교수는 내발론자들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을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근대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한국경제에 대한 성찰을 위해 더 유익하다고
충고한다.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라 “이미 들어선 길”에서 일본의 戰時 무력으로 밀려난 우리였기에 대한제국의 근대화 모습 탐구는 비장한
연구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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