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 한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개혁’과 ‘과거사 청산’이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과거사 청산의 목표는 분명하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논의된 4대 과거사 특별법 중에서 가장 세인의
관심을 끈 주제는 ‘친일파 진상규명법’이었다. 과연 누가 친일파로 규정되고 철저하게 민족반역자로 단죄를 받을 것인가. 해방 후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이들 집단에 대한 ‘과거 캐기’, 곧 역사 바로세우기는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그런데 최근 갑자기 지상논쟁으로 대두된 논제가 있다. 고종과
대한제국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내년이면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1백주년을 맞이한다. 러일전쟁 이후 국권이 피탈됐던 그
때 그 순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최근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치열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은 상당히 시의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7월 중순부터 교수신문에 연재된 경제사학자인 김재호 교수와
역사학자인 이태진교수의 반론과 재반론은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있다. ‘고종 업적 과잉 강조, 왕정 극복 문제의식 부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대한제국 매장이 식민사관의 출발점’이라는 것인가. 다름 아닌 ‘고종의 리더십과 대한제국의 근대성’ 여부를 둘러싼 논전이다.
두 사람의 논점을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영조?정조라는 ‘탕평군주’의 계승자로서 고종의 ‘民國’개념은 전제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에 불과한가 아닌가, 둘째 대한제국의 재정규모에
비추어 과대하게 지출된 궁내부와 내장원의 재정팽창이 근대화의 걸림돌인가 아닌가, 셋째 1899년에 제정된 ‘國制’를 전제군주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추원의 의회적 개편을 들어 입헌군주제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민국’개념은 전통적인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에 연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 문호개방이후 그 개념은 결국 근대적 잣대로 재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교수 자신도 아직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실제 고종의 정조계승론은 親政 초기에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될 뿐이었으므로 이를 이후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대한제국의 재정운영과
근대화정책에 대해 갑오개혁의 제도개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조세수탈을 단지 수구세력의 봉건수탈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대한제국의 근대개혁을 통칭하는 ‘광무개혁’의 성공여부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 논쟁에서는 아직 유보적이다. 제산업정책의 실체규명과
더불어 양전?지계사업의 객관적 평가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중 ‘국제’와 중추원 개편은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중추원이 의회와는 다르며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이었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서구의
보편적인 정의에 의한 것일 뿐 구체적인 한국근대사의 맥락과는 크게 동떨어져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1898년 중추원개편논의는 일제하 자문기구로서
중추원과 달리 의회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이 제도화되었다면 입헌논의는 탄력을 받아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종은 이를 허용할
것처럼 하다가 결국 좌절시키고 이듬해 ‘국제’를 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1899년 이후에도 종전 중추원관제개정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는 이 교수의 설명은 실제 중추원이 무력화되었던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국제는 당시 광범위한 입헌논의와 제반
정치세력의 입지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대한제국은 흠정의 법전 제정이후 더 이상의 근대법을 마련하지 않았다. 따라서
1899년 이후 헌법적인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채, 황제권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 논쟁의 원인으로 되었던 고종시대의 재조명에 대해 필자가 전에
지적한 것처럼, 주인공인 고종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주체적으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과연 고종은 1876년 개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한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 어떻게 타개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대한제국기 근대화 개혁정책을 어디까지 끌고 나가려고
했는지. 고종의 주체적인 판단과 지향점이 구체적으로 찾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역사적 상황에 대비된 고종의 영웅적인 역할만 부각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고종의 절대화만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역사적 구조변화의 동인과 주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지상논쟁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애써 피해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근대개혁운동의 전개에서 일본제국주의가 끼친 영향과 평가 문제다. 과연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개화파의 개혁운동을 일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친일파로 매도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민족주의적 판단여부와 관계없이 근대개혁의 과제에 비추어 일제와 친일정치세력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것인가. 이는 앞서 과거사청산의 과제와 맞물려있다.
최근 한국경제사학계에서는 19세기 생산력이 정체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의 근대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신에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제식민지근대화를 긍정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다보니 1960년대 이래 한국역사학계의 화두였던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관점은 이제 용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국사해체론’에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근대화지상주의는 결국 자민족의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대한제국시기 근대로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흐름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연 내발론의 시각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는 우리세대의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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