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

도올 논어 I - 김용옥

이강기 2015. 9. 18. 08:21

도올 논어 I - 김용옥




공자의 생애와 사상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olism)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인식론적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논어에 대한 모든 논어들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논어를 달통했다 하는 박학지사들의 고론이 이러한 인식론저거 반성을 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다.

노자(도덕경)를 읽을 때 우리는 노자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산물임으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 속에는 노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논어는 논이요 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논과 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 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 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논하고 어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는 이러한 사람들간의 논어다. 그 사람들간의 사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황성(Situationality)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상황 상황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파편인 것이다. 노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지만 논어는 시공의 구체적 맥락속에서만 일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는 반드시 이러한 시공 속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발현하는 것읻. 논어는 분명히 어느 한 사람이 밥먹고 똥 싸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논어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공자(콩쯔)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느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와 공통의 기반을 가진 생물학적 '몸'을 소유한 일상적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사실(crude fact)은 예수의 경우에도, 불타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전혀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초월하는 모든 주장도 반드시 이러한 명백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술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존재했는가? 공자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상징작용의 착각에 의하여 날조된 픽션의 인물은 아닐까? 사이버 공간의 인조인간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역사속에서 실존성을 획득한 것은 아닐까? 맹자가 공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상(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이웃 동네에서 100여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직접경험으로 공자의 실존성을 확인하지 못한 이상, 맹자의 공자에 대한 생각도 이미 이러한 소문에 의한 픽션이었다고 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과연 공자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지금의 나 도올과 같이 웃고 울고 고민하고 글쓰고 앉아있는 동시대의 어느 한 인간의 유형이었을까? 공자는 과연 있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이 책의 모두에서 '과거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 이상, 나는 확답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 아무도 영원히 확답을 제시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공자는 과연 실존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공자는 과연 실존한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존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최선의 방도는 단 한 마디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정직이라는 한마디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정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적인 정직함(intellectual integrity)이란 논리적 방법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했는가?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나는 올 봄에 중요한 결단을 하나 감행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죽었다는 그의 고향 곡부(취후우)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청도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와 태산앞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새벽의 여명을 깨뜨리고 연주(옌저우) 화차역에 도착한 것이 이천년 유월 삼일 아침의 일이었다. 곡부에 공자가 있었는가? 곡부의 웅대한 대성전의 위용속에 공자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간결하다. 곡부의 유적 어느 곳에도 공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곡부의 유적 그 모두가 후대에 건조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송, 원대 그리고 청대에 크게 개축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찌는 태양 아래 고호의 밀밭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곡부의 산하를 공자의 망령을 쫓아, 하염없이 헤매면서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유당전서를 읽고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약용이라는 사람의 실존성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퇴계전서를 읽고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그 숨결을 느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황이라는 사람이 나의 몇 대조 할아버지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회의감을 느끼지 않는다. 곡부에서 내린 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의 웅혼한 울분을 느끼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고매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느낌만큼의 공자의 실존성은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역사적 실존태라는 것이었다. 공자는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최종적 결론은 매우 독단적이다. 독단이란 검증을 요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 공자는 곡부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었던 어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의 기나긴 지적 방황에 이러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이번 여행의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역사적 판단, 즉 과거에 대한 판단은 사실 궁극적으로 그 모두가 예술적 직관인 것이다. 그러한 직관적 판단을 내리기까지 반세기의 삶의 방황을 거치고, 또 그 사실을 탄생시킨 산하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만 했던 기나긴 여정의 과정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자가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는 존재의 유무의 확인은 우리가 추구하는 문제의식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확신이 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안젤므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신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 이래 제기되어온 서양철학 2천년의 존재의 문제가 럿셀의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에 의해 면박당하는 것과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공자가 존재한다는 나의 확신은 나의 내면에서 기술되는 여러가지 의식의 맥락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묻고자 하는 공자라는 의미체와 무관한 헛질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자라는 고유명사가 기술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라는 역사적 자기동일적 실체(Substance)에 관한 논의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공자는 존재한다 와 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결국 다같이 무의미한 명제들이다. 이 명제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보다 본질적 질문은,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냐? 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최초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나는 공자는 살아있었다. 라는 매우 막연한 믿음을 독단적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직관적으로 전제할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요번 여행을 통해서.....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사람이었다는 명제는, 인식론적으로 공자의 행위로서 기술되고 있는 많은 문헌적 사실들이 시공속에 존재했던 어떤 주체의 실제적 행위에 대한 해석의 체계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적 사실들이 완전한 인간의 상상력의 날조가 아닌, 시공속의 어떤 인격체의 리얼한 행위의 해석체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쓰마 치엔)의 사기 속의 공자세가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의 잡설보다 공자세가 한 편의 문장을 꿰뚫는 것이 공자의 삶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첩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사마천의 공자세가(사기권사십칠, 세가제십칠)의 일독을 권할지언정, 그 내용을 번잡스럽게 여기 부연할 하등의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기는 위대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 말엽에나 기본(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가 달성한 히스토리오그라피의 수준을 사마천은 그보다 무려 18세기를 앞선 기원전 1세기 초엽 정화 연간(BC 92~89)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이라는 다섯개의 다른 기술형식을 빌어 기전체(본기와 열전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의 전형을 수립한 사마천의 히스토리오그라피는 방대한 사료의 정밀한 편집이 과시하는 놀라운 실증사학의 정신과 함께 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 자유롭고 비판적인가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포폄을 가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객관적 사료의 제시를 선행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의 혀를 차게 만든다.

본기는 제왕의 역사다. 세가는 제왕이라는 축을 둘러싸고 굴러가는 제후라는 바퀴살(복)들의 전개사다. 세가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의 모델을 가정케 한다. 노자 11장의 삼십복공일축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최근 진시황 무덤에서 나온 동거마가 정확하게 30복의 바퀴모양을 과시하고 있듯이, 사마천의 세가가 정확히 30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노자와 21세기 2~118 참고)

그러나 공자는 제후가 아니다. 국군의 위치는 커녕 대부의 지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일개 포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인 세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당대 이미 공자의 위치가. 황고조 유방이 공자 묘소에 참배한 이래 제왕들이 자기들의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키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존숭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황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로 파출백가하고 독존유술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마천 자신이 공자를 지성으로 존숭하고 공자가 전개한 역사가 결코 일개 제후가 전개한 역사에 조금도 뒤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확고한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공자를 열전에 집어넣지 않고 세가에 집어 넣은 그의 과감한 역사인식은 바로 한낱 원한에 사무친 품팔이 농사꾼(용경)에 지나지 않았던 진섭(진승. 섭은 자),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개인적인 재능이나 인물들을 모을 수 있는 덕망이나 가문의 배경이 전무한 그야말로 일개 무지랭이 새끼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을 사마천 자신이 그 찬란한 위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신흥 진제국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그 붕괴의 기폭제가 된 농민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세가에 올려놓은 사실에서 다시 한 번 숙연하게 확인하게 된다. 사마천은 귀천을 막론하고, 역사적 개인(historic person)의 역사적 의미(historical significance)를 물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라고 하는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내가 올 유월에 갔던 곡부의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하였다. 내가 가 본 곡부의 모습보다는 보다 원형에 가까운 공자의 체취가 서린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생생한 구전 자료들을 채록하였을 것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보았었다. 그래서 중니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 입던 옷, 그리고 예에 썼던 그릇들을 다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머뭇거리며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적고, 관중니요당차복예기, 제생이시습예기가, 여지형유지불능거원

공자세가야말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불알발린 사마천이 분세의 그 마음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권력을 흠모하고 권력을 부정했던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경애감으로 집필한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센티멘탈한 사실의 공감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심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협서 하양의 사람이 400년 전의 산동 곡부의 어느 대한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집필한다고 하자! 어떠한 사료에 어떻게 근거하든지 간에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 그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불과 몇 십년 전에 저승의 사람이 된 박정희대통령의 전기 문학도 집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주어진 사료들은 이미 해석되어진 사료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되어진 사료들을 사마천이 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이 해석한 사료들을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 것이다. 공자세가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최술(1740~1816)의 수사고신록이 낱낱이 밝힌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베들레헴(Bethlehem)의 어느 말구유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방박사 세사람이 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 설화의 주요테마로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 갈릴리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요셉도 분명 갈릴리의 나자렛(Nazareth)사람이고, 예수도 나자렛에서 성장하여 갈릴리바다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활동을 개시한 사람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왜 북방 갈릴리 사람인 예수가 저 남방 유대아 광야의 베들레헹에서 나야만 했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메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누가 2:1~5)

누가 기자에 의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에 바로 모라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아구스도)에 의하여 로마제국 전역에 걸친 총호구 조사(general census)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구조사를 현주소가 아닌 본적지에서 받기 위해 요셉이 애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천리길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매우 정확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지역사적인 사실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다. 이 총호구조사는 퀴리니우스(Quirinius, 구레뇨)가 시리아(Syria,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실시한 것이며, 바로 헤롯이 유대아의 왕이었을때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누가의 기자는 이러한 사건이 매우 역사적 배경위에서 진행된 사실인 것처럼, 마치 역사가가 당대의 역사를 기술하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사는 우리에게 매우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시이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 전역의 총호구 조사명령이라면 그것은 정확한 연대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로마제국의 총호구조사는 세금의 부과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인인 요셉이 애기밴 마리아를 데리고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단지 본적지에서 호구등록을 해야한다는 이유때문에 걸어갔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더욱 명백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의 총호구 조사명령은 AD 6년에 한 번 있었으나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전후로는 그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와 같은 당대의 사가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왕의 치세기간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에 걸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이 헤롯왕 치세기간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BC 4년 이전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의 치세기간 동안에 퀴리니우스(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기자의 이 모든 기술은 날조된 것인가? 물론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날조된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는 그것을 태연하게 마치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듯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나자렛에서 태어나도 마리아의 처녀잉태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하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을까?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서술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제 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7:41~42). 그렇다고 우리는 요한읭 기자가 누가나 마태의 기자보다 더 사실적인 실증적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해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때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읽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누가나 마태의 기작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건을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내면적 논리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내면적 논리와 목적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단지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땅에 보내여졌고.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신념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선포의 논리로써 기술된 것이 바로 복음서인 것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유는 이러한 케리그마적 사건 속에서 명백해진다. 베들레헴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왕의 고향인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을 선지자 미카(미가)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 2:6, 미가 5:2)

이러한 성서의 케리그마적 기술과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기술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공자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할 아무런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천의 공자 기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편년체적 기술처럼 보인다. 공자의 삶에는 케리그마를 매개로 비신화시켜야만 할만큼 신화적 요소가 염색되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화를 우리의 상식적 인과적 틀에서 벗어나는 사태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처녀잉태(parthenogenesis)라든가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이라든가 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상식적 인과속에서 가능한 사태가 아니다. 전혀 확률적 예외일 가능성조차 없다. 그러나 신화는 불가능한 것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있을 수 있는 것, 즉 현실이 아닌 가능한 사태 속에서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존재의 행위는 항상 수없이 가능한 사태속의 한 실현이다. 그러나 이 실현이 그 수많은 가능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한 사태 속에 무한히 신화적 기술이 가능한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미 그것이 세가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이라는 하나의 선포를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모두 공자사후의 초기 교단(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평범한, 가능한 사실적 기술이 오히려 신화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자의 삶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상식의 전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환경의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삶의 형식(Lebensform)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선진중국인들의 삶의 형식은 격렬한 사막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초자연적 사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케리그마처럼 괴력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기술도 예수의 기술과 똑같이 비신화되어야 할 신화적 기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명실공히 공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최초로 쓰인 가장 포관적인 복음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 이전에는 공자 그 인간에 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가? 선진문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라는 인간에 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세가는 그 이전의 공재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묵자, 맹자, 장자, 순자, 열자, 예기, 한비자, 여씨춘추, 관자 등 거의 모든 문헌에 공자의 그림자가 비추이고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가를 이룬 제자백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떠날 수 없는 어떤 심상을 제공한 강력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춘추말에서 진한지제에 이르는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스타였다. 공자는 결코 은학이 아닌 현학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에 나오고 있는 공자얘기를 다 살펴볼 적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모든 문헌에 공자에 관한 기사가 지금 현존하는 논어라는 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논어는 서한말 원제(BC 49~33)때 안창후 장우가 노론을 주로 하고 제론을 참조하여 오늘날의 20장 체제로 확정한 장후론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안의 집해나 형황의 이류가 모두 이 장후론에 의거한 것이다. 장후론 이전의 전국시대상황을 말하자면 논어 텍스트의 부분적 파편들이 전승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늘 보듯이 볼 수 있는 논어라는 서물은 전국시대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없이도 이미 공자와 그의 집단의 행적과 언론은 전국시대때 제자백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후에 크게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역사를 움직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배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제자백가의 흥기는 기실 이 공자집단이라는 이 에너지를 분쇄해버리든가 혹은 철저히 옹호하든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어의 많은 주제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제에 따라 제멋대로 평가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묵맹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소설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다.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설 아닌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과 넌픽션읭 구분이 없는 것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너무도 소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설인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공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장편 소설이다. 그 이전의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선포)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 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장편 소설이며 최초의 장편 소설인 것이다.

나는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내용을 축자적으로 신봉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품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공자세가라는 소설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는가 하는 것이 결국 세가 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상황인 것이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가장 정확한 실상에 도달하려는 끊임 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은 결국 정론이 있을 수 없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 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 맹자, 장자, 예기 이 네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고나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 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희화 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위에 올려진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으로, 한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된다. 그러나 나는 장자 속에 그려지고 있는 공자의 소설 속에서 매우 진실한 공자의 상을 본다. 이것은 좀 범인들이 생각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서향속에 좀 머리를 묵힌 자의 독백이다. 공자는 공자는 디펜드하려는 자들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는 공자의 비판자들 속에서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안회 속에는 공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모습은 오히려 자로속에 있다. 자공이나 재후 속에 공자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묵자는 공자를 극렬하게 비판하지만 그 연설을 뒤짚고 보면 묵자야말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진다. 묵자는 공자의 충실한 신도였다. 공자의 집단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어 일어난 어떤 패시피스트적인 용병집단이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공자의 세계에서 멀리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묵자가 말하는 겸애나 절용은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기고 보면 이미 공자의 핵심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묵자는 공자의 핵심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공자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는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서 희화된 공자의 외피들이다.

이러한 묵자의 확고한 안티네제로서, 양묵에 대한 유가의 적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맹자야말로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감언한다. 맹자가 유교의 적통일지는 모르지만, 맹자야말로 공자의 최대 이단이다 라고.

맹자에게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공자가 없다. 인의라는 도덕주의적 사상의 주체로서 추상화 되어있고 논리화 되어있고 형해화 되어있다. 공자는 삶의 예지덩어리가 아닌, 맹자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념일 뿐이다. 맹자의 이러한 추상적 공자상은 증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14년 유랑장정의 고난길에 참여한 적이 없는 후기의 어린 제자이다. 증자는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증자가 공자를 만났을 때는, 공자는 이미 한 면만 쳐다볼 수 밖에 없도록 높이 솟아있는,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는 거목이었다. 증자는 공자의 추상적 한 측면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맹자는 증자를 이어받아 공자의 대설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대설은 본래의 소설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백천정)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공자전, 동경:중공업서. p.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 편은 분명 논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 학파의 사람들에 의하여 날조된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나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어의 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무지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을지언정, 공자는 죽을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여학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러한 사상적 비상의 한 차원을 미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아성 맹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논어 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있는 것이다. 논어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니다.

장자가 희화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공자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맹순 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공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주나라의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하는 이야기도, 그 노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자 사상에는 이미 도가적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공구가 말하는 인이나 장주가 말하는 좌망이나 현해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곽점초요죽간의 출현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다. 이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의 치의와 거의 일치하는 고본형태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고문 기 이백사편류에 속하는 문장일 것이라고 비정되고 있다. 즉 곽점초간의 출현으로 예기가 한대에 성립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어버렸다. 예기의 원본들이 이미 BC 4세기에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곽점죽간에서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논어의 몇구절들이 있는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논어의 파편의 부분적 존재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논과 어의 성문화 작업이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상당히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추측케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1973년) 발굴된 정주한간 논어 만 해도 명백하게 장후론 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고본임으로 논어의 원형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된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다?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 속에도 살아있는 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세가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의 공자가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나라의 병관씨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뿨위)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이었던 노나라 소공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리어) 한마리를 담어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리)라고 이름지었다. 백어는 리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곡부에 가면 공부가의 연석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공씨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홍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공자 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공자의 지위가 국군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중용의 저자 자사의 아버지의 이름이 현실적으로 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해 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계씨의 일개 가신인 양호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사에도 못미치는 천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 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오소야천. 자회 6). 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공자빈차천)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국군인 소공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마리를 선사했겠는가?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마리 구해다가 포고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마리 고아 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천민 공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읻.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리)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 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우리 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는데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언덕)이다. 그 아비 숙량흘과 어미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구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공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니구산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 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라 했다는 것이다(생이수상우정, 고인명왈구운. 세가).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구)다. 아버지의 이름은 공짱구, 아들의 이름은 공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국군 소공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가어의 표현을 빌리면 영군지항(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의 천박한 신화적 양식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기술양식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짱구와 잉어라는 부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군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공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신화적 인식의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가 35세 때, 계평자와 후소백이 닭싸움(투계)을 벌렸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맹손씨, 숙손씨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제나라로 간 사건과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공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때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시점의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소공이 제나라로 패주한 사실과, 공자가 젊었을 때 한 때 제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병치시켰다. 그래서 마치 공자가 패주한 국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국군을 보좌하기 위하여 제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공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제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공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제나라의 경공과 통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태사에게 소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노나라 소공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년전에 아들 낳았을때 잉어를 보내 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가?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세가의 공자 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될 수 없고 필연적 인과 관계를 갖기 어려운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공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병관씨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출모,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넘도 슬피 울었다(기이유곡).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리)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 이혼한 부인은 위나라로 가서 서씨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위나라에 가서 재가한 그 잉어의부인, 그러니까 중용을 지은 자사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자사가 그 소식을 듣고 곡부 공씨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 그러니까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찌하여 서씨의 엄마가 죽었는데 공시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서씨지모사, 하위곡공씨지묘호?) 그러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면서 딴 집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자사도 또 이혼했다. 그 자사의 이혼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인 자상(이름은 백)이 복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사의 문인들이 와서 선대에는 출모라도 상을 입었는데 왜 선생의 아들인 자상으로 하여금 상을 못입게 하냐고 물으니까, 자사가 골이 나서, 그년은 내 마누라가 아니니까 자상의 엄마도 아니다. 복상할 필요없다고 잘라 말하는 광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공씨 가문에서 출모에게는 상을 입지 않는 전통이 자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고공씨지불상출모, 자자사시야.)

짱구와 잉어, 이따위 이름을 소지한 신분의 사람들인데다가, 잉어의 아들 자사까지 삼대에 걸쳐 모두 이혼한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가정중심의 도덕원리를 표방한 유교의 패라곤들의 실상이 과연 무엇일가? 짱구에 의하여 논어가 나왔고 짱구의 손자 자사에 의하여 의대의 위대한 철학서 중용이 나왔고, 이것들이 모노가미(일부일처제) 가족윤리의 규범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 규범의 주인공들의 사생활이 이와 같이 개차반이라는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자를 위대한 예악의 완성자로서 기리고자 하는 예기가 왜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사실의 투영인가? 상상의 날조인가? 사실이라면 무당동네 판자촌에서 개차반으로 산 천민들의 이그러진 삶의 실상의 고발인가? 날조라면 과연 왜, 어떠한 목적으로 날조한 것일까? 이혼한 부인이지만 행모이기에 구슬피 흐느끼는 자식의 울음마저 그치게 만드는 이 졸렬한 인간상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경외감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공자의 얘기들을 위대한 경전 속에서 읽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 덮었어야만 했을 과거 조선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세가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궁의 상기의 기록은 상례를 둘러싼 어떤 양식적 논의 속에서 공패미리의 인물들이 하나의 극단적 구현체로서 설정된 것일 뿐이다. 진위의 논변 그 체가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나는 세칭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 반드시 그 정체를 폭로하고 그 가면을 벗겨내리고 그 신화적 의미를 깍아내리는 짓을 통해서만 그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실증사학의 정신이 성취된다는 그러한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의 목적이 저속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파헤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공자라는 인가, 그 인간의 삶과의 만남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상상속에 날조된 인물일 수 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시몬 베드로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을 뒤엎어 버리고, 가롯 유다의 오해 속에 로마 병정에 팔려 넘김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형벌 속에서 죽고, 다시 돌무덤을 열고 부활의 영광을 보인 그 예수, 벤허와 같은 수없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을 그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거부하는 사태를 용인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성령스러운 빛의 화현이었던 죽어도 죽지 않고 부활하는 로고스였던지 간에, 그 예수가 역사 속에 실존한 한 역사적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동시에 분명하게 나의 질문에 대답하여야 한다. 예수는 방귀를 뀌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아무도 던지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 공자를 말하려는 나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방귀를 뀌었냐는 이러한 질문처럼 심각한 철학적 질문은 없다. 예수가 사람이라면 분명 똥도 누었을 것이고, 방귀도 뀌었을 것이다. 그가 방귀를 뀌었다면 어떤 냄새가 났을까? 지금 중동 사람들이 올리브 기름을 잔뜩 먹고 뀌는 어떤 퀴퀴한 내음새나는 종류의 방귀를 뀌었을까? 예수는 하루에 몇 끼의 음식을 먹었을까? 술(포도주)은 많이 먹었을까? 그는 취한 적이 있을까? 그는 막달라 마리아와 동침한 적이 있을까? 그의 일상적 삶의 행위 방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는 완벽한 금욕주의자였을까?

아주 끝없이 하찮은 질문같지만 최소한 내가 말하는 인간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인간이다. 바로 우리와 같은 동일한 일상성 속에서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일상적 삶에 관한 기록을 전달하는 모든 문헌이 그 일상적 현실감각을 결하는 어떤 양식이나 케리그마의 소산이라는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 그 삶의 과정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공자세가가 결코 이러한 문제에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의 다음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사기 외에 다른 문헌이 있는가?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문헌인 것이다.

공자는 세가 속에도 예기 속에도 여타의 어느 문헌 속에도 없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의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세가도 결국 논어의 논과 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배열했을 뿐이다. 논어를 역사적으로 배열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역사적 사태들을 구성해낸 것이다. 논어 속에는 공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논어 속에만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세가의 기록대로 노양공이십이년(BC 551)에 탄생했는가? 춘추공양전이나 곡량전의 기록대로 노양공이십일년(BC 552)에 탄생했는가? 이러한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끊임 없는 고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BC551에 태어났든, BC 552에 태어났든, 공자의 이해나 공자를 둘러싼 역사의 이해와 무관한 사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가능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어의 기록과 무관한 사태라는 것이다. 논어가 말하는 공자의 사실만이 궁극적으로 공자의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공자를 말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논어 그 하나만은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주장은 또 다시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노정시킨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또 다시 논어라는 문헌 그 자체의 문제로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논어 그 자체가 공자의 삶의 직접적 전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가 직접 슨 것도 아니고, 공자의 직전 제자들이 편찬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 사후에 오랜 세원레 걸쳐 공자문인들의 다양한 류파에 의하여 성립한 단편들이 집적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가 세가나 여타 문헌에 비해 그 오리지날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해진다. 어찌 논어만이 공자의 진실한 모습을 전달한다고 호언할 수 있단 말인가? 논어도 공자가 죽은 후 삼사백년 후에 날조된 것이라고 한다면?

논어는 유교의 최대의 이단서일 수도 있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일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가 성인 공자의 걸림돌이라 함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 속의 너무도 인간적이고 변화무쌍한 희노애락의 공자상은 성인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 있어서처럼 인간 공자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문헌은 그 유례가 없다. 논어는 인류문명사의 한 축복이다.

논어는 분명 공자 사후에 제자들의 활약으로 분기되어나간 여러 학파들의 전승, 또 공자를 흉내내는 유사집단들에게 화제가 된 전승등을 통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집적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논어 텍스트는, 공관 복음서의 원마가자료(Ur-Markus, 마태 누가에 공통되는 마가자료)나 Q자료(Quelle, 마태 누가에 공통되면서 마가에는 없는 자료)와 같이, 어떤 공자의 생상한 모습을 전달하는 초기 자료, 즉 이미 공자의 생전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르는 원자료들이 상당부분 그 기저에 남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공자는 천민 출신의 개비적 인간이었지만, 그의 최대의 강점은 문자를 활용하는 능력과 문헌을 다루는 실력에 있었다. 그의 제자집단(교단)이 강력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자적 표현의 학습과정에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아한 측면을 가장 잘 계승한 제자는 안회였다. 그러나 안회는 불행히도 장년의 나이에(나는 안회의 죽음의 나이를 30세 전후로 보지 않고 40세 전후로 본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안회가 공자 사후에 장시간 살아 남았더라면 오늘 논어의 모습은 보다 전일하고 체계적인 성격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안회의 요절은 공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안회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논어는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회의 요절은 공자를 안회의 인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논어에는 분명 안회의 오리지날한 기록의 파편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공자와 자로와의 대화는 그 생생한 캐릭터의 모습고 내면적 심성에서 북받쳐 우러나오는 거짓 없는 진실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공자와 자로의 대화의 대부분은 안회에 의하여 기록된 매우 초기의 파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경우 정확하게 공관복음서 문제(Synoptic Problem)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일 뿐이다. 복음서 또한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어록이지만, 논어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말을 의미있게 만드는 확고한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전제로 예수의 삶의 일정한 시간적 서열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원자료라고 생각되는 마가복음은 매우 단순한 서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이야기, 2)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3) 예수의 갈릴리 선교, 4) 유대아로의 여행, 5) 예루살렘에서의 클라이막스, 6) 수난의 내러티브, 7) 빈 무덤의 발견. 마가에는 예수 처녀 탄생 설화나 예수의 부활 이야기가 없다.

마태와 누가는 이러한 마가의 틀을 기본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가의 자료에다가, 앞을 서로 다른 예수 탄생 설화로 장식하였고, 후미를 또 서로 다른, 부활한 예수의 현혀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마가에 없는 자기들의 자료를 첨가시켰다. 그러나 논어는 이러한 공자의 삶의 시간 서열적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록의 상황은 그 상황을 만들고 있는 캐릭터나 사건들에 의하여만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복음서에 가가운 것은 논어가 아니라 세가다. 만약 사마천의 세가와 같은 것이 동시대의 여러 사가들에 의하여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다면 공자도 예수처럼 공관복음서 문제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어의 편 사이에 있어서도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춘추 전국시대의 여러 문헌에 동일한 주제가 달리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공관복음서와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텍스트를 접근할 수도 있다. 성서의 경우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자료를 희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이미 다른 버젼의 문제가 생겨났겠지만, 논어의 경우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제국간에 말은 달라도 문자는 어느 정도 공통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구문이 여러 텍스트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동일한 초기 파편의 유통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떤 프로토 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논어의 20편은 그 편제가 이미 매우 일찍 확정된 것이므로, 각 편마다 어떤 주제적 통일성이나 시공적 균일성이나 전승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편의 각 내용이 이러한 독자적 성격을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각 편들의 전승의 편집시기는 각기 한 시점으로 규정할 수 있어도, 한 편의 전승의 내용의 성격은 도저히 균일한 것으로 묶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미 학이니 술어니 하는 식으로 의미론적 구조와 관계없이 첫 두 글자만을 따서 편명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관된 주제를 내걸기에는 너무도 그 내용이 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의 모든 편의 편집시기를 세밀하게 재구성한 최근의 브룩스(E. Bruce Broks and A. Taeko Brooks)의 역작, 논어변(The Original Analect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이 있다. 이 책은 매우 광범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치밀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퍽으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키에 이 책은 그 노력의 정교한의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대한 최대의 왜곡일 수도 있는 것이다. 논어 각 편의 편집시기의 구성은 논어의 경우 큰 의미가 없다. 어느 시점에 편집되었든지 간에 그 편집된 내용이 곧 그 편집 시점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 편을 구성하는 어록의 파편이 공자의 삶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체험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근원적으로 정확한 논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의 삶의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에니그마에 속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불가지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정밀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지만, 고전 텍스트의 경우, 정밀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왜곡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는 파라독스를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의 삶은 정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공자의 삶은 어차피 소설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마가복음과도 같은 어떤 케리그마의 구조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잡설일 뿐이다.

우리의 어뜻 보는 인상으로, 그러니까 아주 인상론적으로 이인 편이나 술이 편과 같은 것은 공자의 어록으로서는 매우 초기 자료일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인 이 두 개의 파편(15,26)을 빼놓고는 모두 간결한 자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든가, 술이 편의 내용 또한 이인 보다는 잡하지만 순결한 공자의 원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자왈의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논의는 정밀한 과학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거점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정직하게 말해서 논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육감이다.

상론(1~10편)과 하론(11~20편)의 구분도 결코 엄밀한 구분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상론에도 후대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고 하론에도 초기의 파편이 편입되어 있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론이 그 정편이며 하론이 그 속편이라고 하는 진사이(이등인재)의 항,하론 논의는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상론의 마지막 편인 향당 편이 그 내용이 매우 특수한 성격임에 비추어 상론을 마감하는 의도로 말미에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황간소에 의하면 한 시대에 전승되고 있던 고문학파 텍스트 고론의 체제 속에선 향당편이 학이 편 다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 편제의 실상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론과 하론의 구분은 방편상 유용한 논의로서 수용될 수도 있다. 상론과 하론에서 대체적으로 각각 일관되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상,하로 구분짓기에는 역시 어려운 문제가 많다. 내 느낌으로 상론 맨 앞에 나오고 있는 학이, 위정, 팔일 편은 오히려 하론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의 형태를 취할 것을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BC 300년 이전의 문헌이 확실한 관점죽간에 나타난 논어 구절도 그러한 간결한 추상적 내용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 편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공자를 시좌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실은 증석의 답변이 제일 나중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우풍영의 답변내용만을 공자가 허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로, 염유, 공서화 3인이 나가고 난 후에 증석 혼자만이 공자 곁에 남아, 공자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며, 나간 3인의 답변 내용을 분석 검토하는 공자의 멘트를 듣는다. 이것은 명백히 공자 교단 내의 증석의 위치가, 자로, 염유, 공서화에 비해 한 레벨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증석에 대한 허여의 차원이 타 3인과는 질적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로를 내보내놓고 자로 등뒤에서 공자가 증석과 멘트를 나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불성설의 상황이다.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감지된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니다. 맹자는 바로 증자 계열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이 드라마의 구성 의도는 명백해진다. 이 파편은 증자-맹자 계열에서 증석-증자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꾸민 드라마임이 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증자가 들은 공자의 말로서 기록되고 있는 파편들은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다. 증자는 공자 최만년에 입학한 제자였으며 공자와 직접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기회가 없었다. 이인 편의 그 유명한 일이관지에 대한 증자의 충노 운운한 따위의 파편도 그 실제상황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그라나 이런 식으로 논어를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은, 끊임없이 재미있는 텍스트의 비평(textual criticism)의 묘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또 텍스트의 무한히 가능한 새로운 배열이나, 텍스트 자체의 교정이나 변형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을 가능케 해 줄 수도 있지만, 최종적인 문제는 이러한 문헌 비평의 궁극적 성과가 과연 논어의 오리지날리티를 변할 수 있으며 더 나은 공자의 이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회의적 답변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논어 그 텍스트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어를 아무리 재배열해도 논어를 아무리 변형시켜도 우리의 결론은 매우 간결하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변형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에 비해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 것이다. 황하의 물결과 함께 흘러가는 무수한 고종 석학들의 땀방울이 도도히 흐르기만 하는 논어의 탁류 속에 족적없이 명멸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속에 실체화되어버린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Return to the Analects!

논어 그 자체로의 회귀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Pre-Understanding)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시험적인 모델들을 요구한다. 논어는 분명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조속에 던져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공자의 삶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전제할 것인가?

앞서 누누이 말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자의 삶의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나 그 사실성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전혀 무의미하다. 그러한 사관들을 거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가능한 인각 공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만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 도올 자신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나 도올은 과연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선 그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 이해의 실마리를 추적해보자!

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숙량흘을 아비로, 안시녀를 어미로 태어났다. 이 두개의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비는 성이 없고 그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숙량은 자요, 흘은 명이라 한다. 그런데 그 아비를 부를때 공흘이라 아니 부르고, 숙량흘이라 부르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중니구니 자로유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춘추이전에 이렇게 자와 명을 합쳐 부르거나, 관직명과 명을 합쳐 부르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컨대 그 숙량흘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는 모든 논의가 후대의 날조라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공자의 증조부가 노나라 장손끼의 채읍인 방읍의 읍재를 함으로써, 송나라에서 몰락한 귀족으로 노나라에 망명하여 와서 평민화된 지위를 떨쳐버리고 귀족신분을 회복했고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방숙이라 부르고, 그 앞에 공이라는 애칭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공으로써 성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공으로써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공이라는 성은 실제로 공자가 유명해짐으로써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아버지대에 까지도 성이 없었던 어떤 평민 족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아버지 이름이 성이 없는 숙량흘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가 유명해져서 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어떤 진실을 전하는 이름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여기서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숙량흘이 추읍의 대부였다는 등등의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공자의 족보를 귀족화시키기 위한 설화적 이야기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안씨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승되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 의하면, 곡부성내 글쓸 줄을 알고 예에 통달한 안양이라는 훌륭한 노인이 있었다. 그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그 막내의 이름이 안징재였다. 이 현숙한 세째 딸이 바로 안씨녀다. 숙량흘은 원래 부인 시씨가 있었는데 이 첫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들 모두가 딸이었다. 팔공주가 아닌 구공주였던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어김없는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앗뿔사, 불행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라 했는데 선천성 기형의 절름발이(가자, 가어에는 병족이라 표현)였다. 공야장 제 1장에 보면 공자가 자기의 제자 남용에게 형의 딸을 시집 보낸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자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논어의 문맥상 입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공자의 자가 중니인데 중이란 두째 아들이란 뜻이다. 중니란 곧 니구산에서 빌어 얻은 두째 아들이란 뜻이다. 맹은 맏맹자이고 맏 아들의 뜻이다. 피(가죽)라는 이름은 간접적으로 병신의 뜻을 시사한다.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맏가죽(맹피)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겠는가?

그래서 술량흘은 셋째 부인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곡부의 안양 노인에게서 가서 딸 하나를 달라고 간구한다. 그 때 이미 숙량흘은 70세에 가까웠다. 첫째딸은 청혼을 거절한다. 두째 딸도 거절한다. 무엇보다 나이가 많아 골골하게 보이는 숙량흘에게 시집갈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세째딸은 육감이 달랐다. 무엇인가 신의 뜻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안징재는 기꺼이 숙량흘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종부명위혼) 그 때 안징재의 나이는 곷다운 16세의 청춘이었다. 복사꽃 만발하는 봄날의 향기가 흐드러지는 니구산에서 70노인과 16세의 새악씨가 아들 낳아 달라고 빌러가는 뒷모습을 연상하는 우리의 가슴속엔 태고의 낭만이 서린다.

사마천은 이 두사람의 결합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흘여안씨녀야합이생공자, 도어니구득공자

이 표현에서 역대 주석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야합이라는 한마디였다. 색은은 야합이라 함은 숙량흘이 늙었고 안징재가 어려서 머리얹고 비녀꽂는 예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야합이라 했다고 했다. 곧 정식의 예의에 합당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보다 관념적인 해석을 내렸다. 소문 상고천진론의 의학적 상식을 인용하여 남자는 팔십 육십사세면 양도가 절하는 법인데 숙량흘의 나이 64세를 넘어 정식 혼인이 성립할 수 없음으로 야합(억지 결합)이라 한 것이다 라고 주석을 달았다. 결국 우리는 야합이라는 말이 통례적인 예의에 합당치 않은 결혼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나라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해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을 단순한 사실 그대로, 단순한 표현을 단순한 표현 그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전기를 연구하는 사계의 대부분의 석학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안씨녀는 무녀였다. 안씨 집안은 무속과 관계된 집안이었다. 안씨녀의 부친도 아마 큰 만신이었을 것이다. 안씨녀가 죽었을 때 그녀를 장한 오부치가라는 곳이 바로 노성내에 상례를 전담하는 당골네 님들의 집성촌락이었다는 것이다.

숙량흘에 관해서도 많은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우리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덩치다. 지금도 산동 사람들이 체구가 크기로 유명하다. 일메타 팔구십되는 대한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똥따한(산동대한)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의 공자기술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장구척유육촌, 인개위지장인이이지.

공자는 키가 아홉척하고도 여섯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9척 6촌을 정확히 주제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주제의 1척은 약 22.5cm이다. 그렇다면 9 척만 해도 공자의 신장은 2m 2cm가 된다. 그러니까 공자의 신장은 정확하게 2m 10cm 가 넘는다.

위지장인이이지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칫수가 결코 과장되었거나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농구선수 서장훈과 같은 덩치를 정확히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염달린 목동, 아담한 예수의 이미지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거한을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공자라는 인간의 인간됨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공자의 덩치는 공자의 행적의 모든 사실에 깊게 스미어 있다. 공자의 엄청난 정열과 기나긴 방황과, 세간적 결단과 초세간적 승화의 모든 사실이 바로 이 체구의 체력과 관력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공자의 체구는 바로 그의 부친 숙량흘에서 유전되어 받은 것이다. 노양공 10년(BC 563) 봄의 일이다. 진국이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 조, 주 삼국과 연합하여 지금의 산증성 조장시에 자리잡고 있었던 핍양이라는 작은 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숙량흘은 맹헌자 막하의 진근부(혹은 진동부), 적사미 두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핍양성의 북문을 공타한다. 핍양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핍양군은 술책을 쓴다. 성의 북문이 위로 들어올리는 갑문이었는데, 이 문을 들어올려 적장과 부하들을 성내로 유인시킨 후에 성내에서 몰살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갑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고 진, 적 휘하의 부대는 성내로 돌격한다. 이들이 성내로 진입했을 때 갑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술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때였다. 이것이 계책이라는 것을 깨덜은 숙량흘은 성문 아래 정가운데 우뚝 서서 두 손으로 하늘을 쳐받치는 아틀라스처럼 내려오는 갑문을 치켜올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퇴각을 호령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노군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나기 12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7년후, 노양공 17년(BC 556), 이웃 강대국인 제국은 노나라의 북부변경을 침략한다. 제국의 장수 고후는 막강한 세력으로 노국의 대장인 장흘(장무중)과 숙량흘을 방읍에서 포위한다. 보급이 차단되고 위기에 몰린 노군은 원군을 요청했다. 원군은 양관(진안의 동쪽)으로부터 진공을 시도했지만 제군의 엄중한 포진을 뚫을 수 없었다. 이 때 숙량흘은 대장 장흘의 두 형제인 장주와 장고와 더불어 300여명의 용사를 데리고 제국의 포위망을 뚫는 작업을 감행한다. 숙량흘의 무용 앞에 막강하던 제군의 포위망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얘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숙량흘이 힘이 막강하고 용맹스러운 거대한 체구의 군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떠한 족보와 혈통의 사람이든지 간에 매우 명백한 사실은 숙량흘은 거대한 체구의 무인이었고, 그 체격을 공자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탄생에 관하여 아주 단순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야합이란 아주 단순하게 새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들판에서 씹한다. 는 뜻이다. 세가의 기술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최종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무명의 늙은 무사 한 사람과 무명의 젊은 무녀 한 사람이 들판에서 씹하여 남자아기 하나 얻었다. 그것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다.

예수가 왜 하필 그 더러운 말 구유깐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한 사실이 없었다면, 인간 예수의 탄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AD 178년경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Celsus)가 예수는 마리아와 식민지 주둔의 로마보병(a Roman legionary)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당시의 초대교회에 퍼져있던 소문을 들추어내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외경 야고보서가 예수의 엄마 마리아를 성전의 창녀로서 기술하고 있는 것... 우리는 이러한 많은 이야기들의 진위나 불경을 논하기 전에 인류 역사에 실존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탄생에는 이미 그 탄생부터 신의 저주가 숨어 있다는 그 고난의 역사를 간파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탄생이나 공자의 탄생이나 모두 순탄한 시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합이란 표현은 내가 생각키로 요즈음의 인류학 용어를 빌리면, 아마도 비지팅 허스밴드 매리지(visiting husband marriage)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량흘은 첫부인, 두째부인과 일가를 이루고 있고, 세째부인인 안징재는 그와는 별도로 이구산 산자락에 일가를 이루고 있어 숙량흘이 안징재가 있었던 그 곳으로 가끔 통근을 했을 것이다(방혼 혹은 통혼). 안징재라는 무녀가 애ㅗ 이구산 산자락에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무녀들이 삼각산과 같은 성산 밑 바위자락에 촛불키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어떤 가옥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씨녀의 본가는 곡부 성내에 있었다.

방혼의 의미는 공자의 탄생이 전혀 숙량흘 본가에서는 인정이 안 된 문자 그대로의 야합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공구와 안씨녀 모자는 완전히 부계에서는 버림 받은 모자였다.

이산 산자락 무녀 오두막집에서 쌔큰거리는 아기 공자의 울음은 태산 대원의 정적을 깨트리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 아기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는 늙은 장수 숙량흘, 자손을 잇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에 흐뭇한 얼굴을 지엇을 숙량흘, 그 옆의 꽃다운 여인 안징재는 늠름하고 비범한 기상의 짱구 대가기 아기 보고 곱게곱게 자라나라고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이산 자락의 이들 삼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스럽게 화평한 정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행복을 산신은 더 받아주지를 않았다. 삼년후에 숙량흘은 이승을 떴다.

공자가 17세 때 엄마도 세상을 떴다. 사마천은 공자가 엄마를 아버지 묘에 합장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묘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해 합장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엄마가 생전에 공자에게 아비의 묘를 아르켜 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숙량흘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사연이 있어, 안씨녀가 숙량흘의 묘지를 아르켜주기를 꺼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방혼의 의미와 관련지어 안씨녀는 남편의 상례로부터 완별하게 차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안징재 자신이 남편의 상례에 참여할 수 없었고 따라서 남편의 묘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엄마를 우선 오부지구에 빈소를 차렸다가, 만부(만보)의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의 묘소가 방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합장한다. 만보의 엄마는 아마도 숙량흘의 상례에 직접 참여했던 숙량흘 본가계열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숙량흘과 안씨녀의 사별은 그렇게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어린이 공자의 운명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슬하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모삼천이라는 맹자 어머니의 고사는 후대의 열녀전과 같은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써 실제상황이라기 보다는 후대에 어떤 현녀상의 패턴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공자의 엄마 안씨녀의 보살핌이야말로 극진하고 또 극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공자는 안씨 가통 속에서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사마천의 사기 세가에 공자가 17세 때, 노나라의 대부인 맹리자(맹희자와 동일인임)가 병으로 죽게 되어, 그의 후계자인 맹의자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공자 17세 때라면 소공 7년인데 그때는 맹의자(의자)는 태어나 있지도 않았다. 맹이자(리자)가 죽은 것은 소공 24년, 공자 34세 때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세가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벤트를 이 시공을 초월하여 꼴라쥬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 훈계의 내용이다. 이 훈계의 내용은 내가 죽은 후에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후계자인 맹의자에게17세의 공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마천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누가복음의 기자식으로 어떻게 조립하였든지간에, 이 멧세지의 내용은 17세의 공자의 모습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 첫마디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구성인지후. 멸이송.

구라는 아이는 성인의 후예다.
그 가계는 송나라에서 망하여
노나라로 옮긴 집안이다.

구는 애명이다. 따라서 맹이자(희자)가 구라 부른 것은 친근하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성인지후라는 말은 도무지 우리의 범상한 의미론의 맥락으로는 이해되기가 어려운 표현이다. 우선 성인이라는 표현의 대상이 된 사람은, 공자의 7대조인 정고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공자는 나이 17세,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공자는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의미에서의 성인(Sage)이라는 의미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공짱구(구)는 성인이라고 지칭되기에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7대조를 가리켜 성인이라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관직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자 시대에 성인이라는 말이 과연 우리가 쓰는 의미에서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한 지고의 문화인이라는 말로서 통용되고 있었고 그러함 맥락에서 성인의 자손이라고 말함으로서 공자를 성인과 같은 위치로 높이려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성인이라는 말은 공구라는 청년의 할아버지의 단순한 직업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공구, 성인지후라는 표현은 공구 걔말야, 성인 집 자손이야! 라는 친근한 표현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발달된 문자학의 연구는 성이라는 글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귀이라는 요소에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발굴된 노자 백서에 의하면, 보다 고본인 갑본은 성인을 성인으로 표기하고 있고, 을본은 이인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성자는 청자와도 통한다. 이 모두 소리(성)을 귀(이)로 듣는다(청)는 뜻이다. 여기서 소리란 곧 신의 소리다. 성이란 곧 신의 소리를 들음이다. 성인이란 곧 신탁의 소리를 듣는 무당이란 뜻인 것이다. 옛날 무당 중에는 장님의 악사가 많았다. 청각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씨전 양공 십팔년조에 진과 초가 서로 싸우는데 진나라의 눈먼 악사인 사광이 바람 소리를 듣고 전쟁의 승패를 점치는 장면이 나온다: 남쪽의 바람(노래)은 흥이 나질 않고, 죽은 소리가 많습니다. 초나라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남풍불경, 다사성, 초필무공.) 바람타고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곧 신의 소리였다. 이 소리를 듣는 자들을 예로부터 성인(성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공자가 성인의 후예라는 말은 곧 무당집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나의 논증은 사마천이 기록하고 있는 맹이자의 훈계의 자체의 논리에서 명료해진다. 맹이자는 다시 이 성인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문성인지후, 수부당세, 필요달자. 금공구년소호예, 기달자여? 요즉불, 약필사지.

내가 듣기고, 성인 집안 자식들은 비록 세상에서 대접은 못 받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라는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예를 좋아한다. 예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곧 통달한 자의 증표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으면 곧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여기 의미맥락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들은 도출해낼 수 있다.

1) 성인의 자식들은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부당세).
2) 성인의 자식들은 통달한 자들이 많다.
3) 호예가 바로 그 통달함의 증표이다.

여기서 성인의 의미맥락은 매우 명백해진다. 성인이란 예의 달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가?

공자의 부계를 성인으로 간주한다면 무인 숙량흘 계보 속에도 이미 무속의 핏줄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맹이자의 언명은 곧 안씨 가풍에 대한 인상을 전이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공자는 안씨녀 당골 슬하에서 컸다. 사마천은 안씨녀 슬하에서 성장하는 소년 공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자위아희희, 당진조두, 설예용.

공자는 어릴 때 소꼽장난하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도마와 목기 등의 제사그릇을 벌려놓고, 예에 맞는 복장을 입고 놀았다.

이것은 우리가 당골네집 자식들의 소꼽장난을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간다. 여기서 말하는 예라는 것은 바로 시킴굿과도 같은 굿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어려서부터 굿(=예)의 달인으로 컸다는 것이다. 이구 산자락의 당골네의 아들로서 이런 굿의 환경 속에서 컸던 것이다.

우리 국악계에 통용되는 말로서 개비라는 말이 있다. 개비란 그 태생으로부터 국악인의 집안에서 큰 달인들을말한다. 그런데 개비의 백프로가 무속집안이다. 즉 개비는 모두 성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상 모두 사마천의 기술대로 빈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이 개비들의 큰 특징으로서 우리는 두 측면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그들의 상례(시킴굿)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째가 곧 그들은 가무의 달인이며, 또 탁월한 악사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시나위의 명인들이다. 시나위란 당골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하여 고안된 계면길의 즉흥기악곡이다. 서로 다른 가락들이 동시에 연주되어 이루어가는 앙상블(ensamble)의 개념이 존재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보이지 않는 본청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변주음악이다. 시나위는 곧 째즈다. 공자는 곧 째즈의 명인이요 달인이었다. 나의 이런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뜰 많은 학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산동의 고속이 우리나라 백제문화권인 남도음악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비근한 사례를 들어 공자와 논어를 이해할 때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남도 당골네를 따라다니는 악사들을 우리가 삼현융각이라고 부르는데, 이 삼현융각이란 세개의 현악기와 여섯개의 뿔관악기(three string and six horns)란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삼현육각은 실제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그려져 있듯이, 지금까지도 향피리 두 개, 젓대(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육각이란 연주자의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섯명의 총각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삼현이란 새면이라는 토속어의 와전으로 시나위와 같은 어원의 말일것이다. 공자는 실제로 새면육각잽이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 새면육각잽이야말로 시나위의 명수들이며 째즈의 달인이며 상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예식의 달인이었다. 성인의 일차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죽음의 세계(the World of Death)와의 관련속에서 그 구체적 맥락을 잡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주되는 것도 바로 공자가 이러한 째즈의 명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탁월한 상황적인 감성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논어가 말하는 예의 핵심이 관혼상제 중에서도 바로 신종추월하는 상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해서 재언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린 공자는 이구산 자락에서 조두(제기)를 진하고 예용을 설하며 가무와 악기와 굿의 달인으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속에서 늠름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공자가 자라난 니구산 자락에서 노성까지는 약 22km, 한 육십리 되는 거리다. 소년 공자가 죽으라고 열심히 걸으면 한나절(6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외로운 소년 공자가 가끔 곡부의 벌판을 열심히 횡단하는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다. 외로운 소년 공자는 곡부 노성내에 있는 외조부의 집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외조부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많은 시골 당골후보생인 소년 공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내 지위 높은 자들의 상례를 치루는 장엄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본격적인 상례 시킴굿을 보고 공자는 끓어오르는 어떤 예술적 충동, 그리고 무한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엄한 예식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이러한 예식들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제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소년 공자는 엄마에게 졸랐을 것이다. 더 이상 촌구석 산자락에서 살기 싫다고..... 아들의 강렬한 배움의 욕구를 감지한 엄마 안징재는 소년 공자의 시절 어는 시점에 용단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성대 한복판 곡부 궐리에서 컸다. 그는 비록 천한 신분으로 컸지만 끊임 없는 물음(다문)의 인간이었고, 박학다능의 귀재였다.

나는 이 시점에서 공자에 관한 더 이상의 소설을 써내려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논어라는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독백해야만 할 부분이다. 공자의 삶의 이야기를 내가 지금 여기서 다 꾸며내야 할 하등의 필요성을 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에 관한 가능한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개념적인 틀은 비록 나의 좁은 사견이나마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감지한다.

우선 공자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일관된 거시적 축은 바로 공자의 족보에 관련된 송과 노라는 두 문화의 패러다임이다. 송과 노는 곧 중국고문명의 쌍벽인 은과 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리는 폭군 신제 주의 이야기나, 주지육림의 탕년 달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항상 한 왕조의 끝에는 음탕한 폭군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주를 평가하여, 타고난 자질이 사리를 명료히 분변하며 판단력이 매우 빠를뿐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이 매우 민첩했고 힘이 보통사람보다 출중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자변첩질, 문견심민; 촌력과인, 수격맹수.) 사실 주에 대한 실상은 후대의 왜곡된 자료에 의해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왜 백이, 숙제가 그토록 주를 정벌하러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 흘리며 불인하다 간했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그 실상을 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하튼 주는 실정을 거듭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을 것이고, 그래서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정벌되었을 것이다. 주는 바로 상왕조(주나라 사람들이 정벌후에 수도 이름을 따서 은나라로 격하시켜 불렀다. 원래의 이름은 상이다.)의 마지막 임금이고, 무왕은 주나라의 첫 임금이다. 오늘날 은허에서 발굴되는 갑골문이나, 여기저기 상조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는 정교하고 찬란한, 방대한 수량의 거대한 청동기 제기들은 은나라 문명이 얼마나 높고 섬세한 문화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겍 보여준다. 은문명이 비록 시대를 앞서있다고 해서, 후대에 성립한 주문명에 비해 초극되어야만 할 유치하고 난폭한 문명이었다는 식의 선입견을 우리는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양태의 고문명들이었다.

상왕조는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좌절이었다. 그러나 상왕조의 문화와 전통은 멸망될 수 없어ㄸ다. 은말의 삼정(세명의 충직한 신하)으로 우리는 미자, 기자, 비간을 꼽는다. 비간이 바른 간언을 많이 하나, 주는성인의 마음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고, 그 심장을 갈라 죽였다. 미자와 기자는 모두 주 임금들의 서형들이다. 미자의 모친은 상조 30대 국왕인 제을의 첩이었다. 미자와 기자를 낳았을 때는 정비가 아니었다. 정비가 죽고 첩이었던 미자의 모친이 정실이 되어 낳은 아이가 바로 수 즉, 주다. 그래서 정비로서 낳은 아들이 주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적자로 간주되었고, 주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자와 기자는 실상 주임금의 친형들이었던 것이다. 기자는 주의 황음과 방종을 간곡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노예가 되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혔다. 미자는 부자간에는 골육의 정이 있어 간해서 안 들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울고불고라도 할 수 있지만, 군신 사이에는 의로서 맺은 것이라 불의하면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무왕은 주를 벌하고 왕위에 즉하면서 기자를 석방하였다. 무왕은 그에게 천지의 대법을 묻자, 기자는 흥범의 대도를 술하였다. 이에 무왕은 그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였고,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어이무왕내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송미자세가). 그리고 무왕이 주를 벌하자, 미자는 종묘안의 제기를 가지고 무왕의 군문에 이르러 상의를 벗고 손을 등뒤로 묶게 한 수,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하였다. 무왕은 현인 미자의 작위를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주었다.

무와은 그의 동생 단을 또 노나라에 봉하였다. 그러나 단은 무왕의 역성혁명이 아직은 위태로운 상황임으로 그를 보좌하는 일이 시급하다 판단되어 그의 아들 백금을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계속 남아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태자송이 대를 이었는데 그가 곧 성왕이다. 무왕의 동생, 단은 실상 우리나라의 세조처럼 조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어린 조카 성에게 깎듯한 신하의 예를 다하면서 섭정을 베풀어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단이라는 인물이 바로 항상 공자가 꿈에서조차, 오매불망 그리는 주공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그 마지막 임금 주의 아들 무경륵부를 후에 책봉하였고, 그에게 은나라의 유민을 종속시켰다. 정복당한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며, 혁명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두 동생 관숙선과 채숙도으로 하여금 무경의 사부가 되게하여 보좌하게 하였고,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이속은사). 그런데 이렇게 후하게 대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왕이 죽자 무경이 관숙과 채숙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 일어난 주왕조를 배반했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벌을 감행하고, 무경을 주살하고 친동생인 관숙을 죽였으며, 또 채숙을 멀리 추방시켜 버렸다. 주공은 이에 은나라의 유민을 모아 주의 형인 미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혀녀 부근인 송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자 계(개)는 송의 시조가 되었고, 송은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하난의 상구에 자리잡은 송과 산동의 곡부에 자리잡은 노는 지도를 놓고 보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곡부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km 정도의 거리에 상구가 자리잡고 있다.

공자는 송나라의 후예다. 공자는 분명 송나라 사람이다. 아무리 남한에 오래 살았어도 이북 사람이 이북사람인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공자는 은나라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노나라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공자의 삶의 압각처 자체가 이미 태생부터 매우 미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유태인이 아닌가 한다. 송나라는 이미 은유민들의 다이애스포라다. 그런데 공자의 선조는 송에서 또 다시 실패하여 노나라로 이주하였다. 공자의 선조이자 송나라의 대사마였던 공부가의 부인이 아주 미녀였는데, 송나라의 수상에 해당되는 태재 화독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 결국 공부가를 독살하고 그 부인을 차지한다. 공부가의 아들인 목금부까지 암살하려고 하니까, 목금부는 송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노나라로 도망온 것이다. 이 목금부의 손자가 바로 공방숙인 것이다.(이상의 이야기도 다분히 설화적 각색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가계는 이중의 다이애스포라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다. 송나라의 다이애스포라에서 또 다시 노나라의 다이애스포라로 이주한 사람들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제자백가서에서 송인들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의 질이 악질적인 것이 아니라, 좀 코믹하다. 코믹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다는 것은 순진하지만 상식의 궤를 일탈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조장 이야기의 주인공도 송인이다. 한비자의 수주대토의 주인공도 송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종류의 아둔함이나 어리석음이란 천재의 특질이다. 영어로 말해서 속이 빈 사람들 성격(Absentmindedness)이야말로 천재들의 속성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화는 주나라 문화권에서 자기들이 멸망시킨 왕조의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정언약반이라, 우리는 그 말의 반면을 읽어내어야 한다. 경상도 왕국이 되면, 전라도 사람들을 모멸하는 온갖 설화들이 꾸며지게 마련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 잘하고, 교활하고, 이중성이 강하여, ..... 그래서 하와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창출하는 온갖 이야기들이 항담을 차지한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열려있으며 머리가 좋으며, 판소리나 남도민요가 입증하듯이 예술적이다. 아마도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은인의 후예 송인들은 이러한 정면과 반면이 교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 있어서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도 이와 다름이 없다. 유대인들은 폐쇄적이며 깊게 종교적이며 독선적이며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일반적 이미지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외없이 천재적이며, 예술, 과학, 인문 각 분야에 인류사회를 리드하는 눈부신 업적들을 쏟아내어 놓았다. 왜 그다지도 유대인들은 천재적인가? 예수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맑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춈스키나 아인슈타인,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왜 이들 민족에서만 집약적으로 천재들이 쏟아지는가? 나는 그 이유는 실로 간단히 설명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이애스포라에서 사는 과정을 통하여 어떤 내면적 갈등을 축적해왔으며, 그것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면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유대인치고 바이링규알(bilingual, 2개 모국어화자) 아닌 사람이 없다. 유대인치고 박해의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항상 자신이 지켜야할 내면적 규범과 삶의 외부적 환경이 극심한 콘트라스트와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려서부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술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노나라 라는 다이애스포라에서 살던 송인 공자의 유년시절의 삶 자체가 이러한 갈등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다이애스포라에서 배출되는 유대인 천재들이라 해서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과 인습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맑스에게 있어서나 프로이드에 있어서나 유대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숭배나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궁극적으로 해방의 대상이다. 위대한 천재들은 항상 인간을 아토믹한 개인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이나 이기적 권익에 의하여 꽁꽁 묶여있는 그런 절대적 자유의 개인을 그들의 배움의 전제로 삼을 수 없다. 맑스는 묻는다: 자유(Liberty)란 기껏해야 불간섭(Non-interference)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보편적 콤뮤니티의 한 멤버로서, 즉 공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정치적 해방(political emancipation)은 시민사회(burgerliche Gesellschaft, Civil Society)의 원자적 구조를 하나도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은 정치적 해방을 넘어서는 인간해방(human emancipation)이다. 유대인 전통이야말로 이러한 인간해방에 부정적인 모든 인습의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드가 유대인이면서 종교적인 폐습에 갇혀 있는 유대인을 비판하는 문제의식과 매우 유사한 의식구조를 우리는 공자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공자는 송의 후예로서 송의 모든 종교적, 문화적 인습체계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가장 강렬하게 송의 전통을 거부하고, 은의 문화에 반발한다.

욱욱호문재! 오종주.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오종주! 이 한마디에는 공자의 삶을 지배하는 줄기찬 긴장, 공자의 이데아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갈등구조가 숨어 있다.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곧 송(은)의 거부다. 공자가 비록 하를 같이 이야기하지만 그에게 하는 실제로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관념화 되어 있는 것은 송과 노, 은과 주의 긴장감이다.

공자는 송인으로서 노나라에 살았다. 노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그것은 바로 은을 정복한 왕조 주나라의 문물을 완성한 주공, 무왕의 정복으로부터 성왕의 치세까지의 주문화 초기정착의 모든 측면을 완성한 이상적인 패라곤, 그 주공이 분봉된 곳이었다. 성왕은 주공을 신하로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공의 사후에도 성왕은 주공에게 천자의 모든 예우를 다했다. 그리고 노나라에 있는 주공의 사당, 즉 태묘에는 전자의 예악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 왕실의 교제를 노나라에서 올렸다. 따라서 노나라에는 오의 종교문화에 대한 주의 인문전통이 가장 정통적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송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이덴티티를 철저히 노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장성한 이후의 의식구조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식 속에서 송이 노에 대해 대자적으로 분열을 일으킨 이후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곧 자기가 송인이라는 바로 그 자신의 속성을 거부하는 안티테제에로의 귀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부정(Self-negation)은 성인의 길의 출발이다. 공자는 분명 성인의 후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무속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인은 곧 개비다. 그가 17세때까지 자모 안씨녀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외가의 훈도속에서 성장하였다면, 그것은 곧 그가 송의 적통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삶이란 곧 송의 개비적 성격으로부터 노의 비개비적 성격으로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공자의 삶에서 최초로 우리가 의미론적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성인이 구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삶은 곧 종교적 성인(개비)으로부터 도덕적, 문화적 성인(비개비)에로의 전화(transformation)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샤만적 충동(shamanic impulse)으로부터 도덕적 인격의 구현(moral incarnation)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송에서 노로의 전화, 은문화에서 주문화로의 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의 상징적 구현체는 곧 주공(Duke of Zhou)이었다.

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고.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었도다!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함이여.

공자가 과연 은나라 역사나 주나라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명료하게 알 길이 없다. 공자는 사가로서 하(기)나 은(송)의 역사를 캘려고 할 때 그 문헌이 부족하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느아(팔일 9), 그에게는 이러한 문명의 실제적 정황이 중요했다기 보다는 어떤 관념적 규정성이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은과 주는 직접적으로 대비된 언명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논어에 기술된 공자의 논과 어 전반에 걸쳐 어떤 관념적 틀로서 깔려있는 것이다.

흥어시, 입어예, 성어악.

시란 공자에게 있어서는 언어를 의미한다. 공자의 언어는 곧 노래였다. 여기서의 노래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곧 무당의 가사다. 우리의 문화화되 삶은 곧 노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노래는 흥이요 바람이요. 언어다. 그것은 개비의 신적 중얼거림이다. 예의 핵심은 무당의 상례였다. 그것은 죽음의 제식이었다. 악은 단순한 음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곡이요 창작이요 창조다. 그것은 삶의 영감의 완성이다. 공자의 삶은 시, 예, 악 이 세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어떻게 은적인 시례악을 주적인 시례악으로 전화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공자의 개비적 삶, 안시녀의 슬하의 가풍, 그것은 전통적 성인(무당)의 삶이었다. 부계, 모계를 막록하고 어떤 송문화의 전통 속에 젖어 있었다.

무당의 삶은 죽음의 삶이다. 죽음의 사제로서 죽음을 영위하는 삶이다. 은은 죽음의 문화요, 주는 삶의 문화다. 은 문명의 순장묘나 방대한 청동기 문화가 실증하듯이 그것은 술의 문화요, 제식의 문화요, 죽음의 문화인 것이다. 은문화는 바카스 축제와도 같은 취함의 문화다. 그러나 주문화는 깨임의 문화다. 주왕실은 바로 은문화의 취함을 깨우게 함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은나라가 그 얼마나 술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는가 하는 것은 주공의 작으로 전하는 서경 주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공의 문제의식은 무분별한 종교적 광기에 빠져있는 은문화의 상태로부터 탈피하여, 어떻게 합리적 문아의 덕성으로 인간을 살려내느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아사노 유우이찌(천야유일)씨가 공자의 삶을 니이체가 말하는 르쌍디망(ressentimant, 영어로는 resentment)으로 가득찬 종교적 신비주의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공자의 삶의 지극히 초기적 일면만을 추상한 것이며, 또 후대의 효경 류의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서 도식화된 공자상의 너울을 덮어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발상의 참신함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공자에 대한 너무 협애한 규정이다. 오히려 공자의 삶은 소유적인 르쌍띠망(약자의 원망. 우리말의 한에 해당)에서, 진정한 강자인 대유적인 가치에로의 초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후대의 죄악의 탓을 그 남상에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공자는 그러한 후대적 드라마로부터 다시 초탈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송) : 죽음의 문화,      주(노) : 삶의 문화
은(송) : 종교의 문화,      주(노) : 사문의 문화
은(송) : 주의 문화,         주(노) : 논의 문화
은(송) : 정의 문화,         주(노) : 이의 문화
은(송) : 신기의 문화,      주(노) : 인문의 문화
은(송) : 천의 문화,         주(노) : 인의 문화
은(송) : 소인의 문화,      주(노) : 군자의 문화
은(송) : 소인유의 문화,   주(노) : 군자유의 문화

공자의 삶의 출발은 죽음이었다. 비천한 삶의 환경속에서 죽음의 제식과 그 제식에 동반된 시례악을 익혔다. 그러나 공자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탈출하느냐에 있었다.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전환하느냐?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공자는 철저히 이 현세 속에서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고 싶어했다. 공자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죽음의 세계를 철저히 삶의 세계로 이전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은 곧 자기뿌리와의 결별이었다.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그 열쇠는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학(배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서물의 첫글자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학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열음이다. 끊임 없는 삶을 향한 도전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수용이다. 공자는 그의 삶을 자서전적으로 고백함에 그 첫구절은 다음과 같이 발한다.

오십유오이지간학.

나는 열 다섯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15세 즈음, 그의 어머니가 죽을 즈음, 그가 양호라는 필생의 숙저거 사나이와 첫대면을 할 즈음 비천하게 살아온 자기 삶은 반추하기 시작할 즈음, 그는 학이라는 삶의 행위로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열가호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있을거야.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

이처럼 공자의 젊은 삶을 자신있고 정직하고 소박하게 그려낸 명구절은 없을 것이다. 공자가 낙양엘 가서 노자를 만났다든가, 청년 공자가 또 제나라에 가서 장중한 소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충격을 받는다든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공자의 삶이 얼마나 강렬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충격으로 가득찬 것이었나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의 대상은 물론 예였다. 그러나 공자의 학은 이 죽음의 예를 어떻게 삶의 예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학이었다. 이 학은 곧 요새말로는 정치(politics)와 교육(education)을 의미한다. 공자에게서 정치는 곧 삶의 예의 정치였다. 공자에게서 교육이란 곧 이 삶의 예를 제자들의 삶에 구현시키는 것이었다. 예는 곧 삶의 질서(Order of Life)의 총칭이었다. 그가 바로 주공의 태묘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다(시예야)라고 말했을 때의 예가 곧 고착된 의례로서가 아닌 삶의 상황적 질서를 의미했던 것이다. 공자는 이제 개비적인 삶을 탈피하여 철저히 정치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정치적 권력만이 그에게 예악의 실현의 기회를 허용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세가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대로, 공자가 50세 전후로 대사구라는 벼슬을 했다고 해서 아무 의식없이 그를 대부라고 이야기한다. 요시카와 코오지로오(길천행차랑)화 같은 사계의 대가도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공자를 노나라의 대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언은 크게 잘못된 통념의 귀절이다. 공자는 대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사실의 핵심이다. 공자 시대의 대부라는 것은 후대 특히 송대에 형성된 사대부라는 막연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경대부를 의미한다. 공자 시대는 진시황에 의하여 시작된 군현제도 이전의 인류문명사상 서구의 중세와 일본의 강호막부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봉건제도라는 매우 특이한 정치제도의 규율속에 있었다. 그것은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독립된 단위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의미하는 특이한 분권적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자(왕) - 제후(공) - 대부(경) - 사 - 서민(민)

은대에만 해도 천자를 제라 불렀으나 주대에 내려오면서 무왕을 비롯하여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주대의 왕은 천자를 의미한다. (기후세폄제호, 호위왕. 은본기) 제후는 천자로부터 국을 봉토로 받는다. 그리고 대부는 반드시 제후로부터 식읍을 분봉받는다. 대부는 단순한 관리(officer)의 직위가 아닌 봉토를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이다. 그 유명한 맹손, 숙손, 계손 의 삼환이 바로 대부들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는 나라 안의 작은 나라를 방불케 하는 조그만 성읍을 보유하는 군사, 경제, 정치의 독립단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란 그러한 식읍을 보유하지 않는다. 사는 단지 녹(월급이나 연봉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관리직책인 것이다. 그리고 매우 유동적인 직책이다. 요새 말로는 쉽게 임용되고 쉽게 해고되는 직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적인 경제적 하부토대가 없는 것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 위리, 직리(승전), 사공 벼슬을 했다는 것은 계씨, 즉 대부의 사적 조직내의 관리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56세(정공 14년)때 대사구 노릇을 했다는 것은 제후, 그러니까 국공의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둘 다 사라는 직분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만 계씨의 가신 노릇을 한다는 것은, 요새로 치면 사기업의 임원노릇을 하는 것이고, 정공 밑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중앙청의 국가공무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그룹의 국장이나 중앙청의 국장이나 다 같은 사이지만 격이 다르고, 세력의 범위가 다르다. 공자와 그의 제자집단은 공자와 사가의 관료조직을 들락거린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자는 꾸준히 대부의 직책을 탐내었다. 그가 제나라에서 경공에게 등용된다 함은 곧 제나라의 대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법가 계열의 재상인 안영이 그를 니계의 땅에 봉하려는 경공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사실 안영은 공자의 은인이다. 공자가 만약 경공에 의하여 대부로 등용되었다면, 공자는 오늘날 정자산이나 제안영 이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나라 영공과의 관계도 동일한 것이었다. 공자는 대부의 직책이 그에게 어떤 정치적 음모나 사회적 이상의 꿈을 실현시키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양호의 꼬임에도, 공산불뉴의 유혹에도 공자는 항상 쉽게 넘어갔다. 공자는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공자의 설레임은 항상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에 의하여 좌절당했던 것이다. 자로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공자는 사로 살고 사로 죽었다. 공자의 삶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코 이 사라는 성격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그의 제자중에 나중에 대부가 된 자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자의 교단은 사의 집단이엇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라는 개념의 모든 속성을 최초로 구현한 자가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으로써 사를 규정해야지, 사로써 공자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에게서 최초로 성의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났다면 마찬가지로 사도 공자에게 이르러서 새로운 의미맥락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전통적으로 공, 경, 대부의 계층과 민의 계층사이에 존재하는 관리계층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의 외연과 내연이 다르다. 시경에 흔히 나오는 사여라는 표현에서의 사는 거의 통속적 의미에서 계집(여)과 짝을 짓는 사내(사)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즉 어떤 계급적이나 신분적 의미로 한정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의 원초적 의미는 그 자형이 도끼나 도끼를 상징하는 의기로 상정되듯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사(선비)적 의미보다는 단순한 전사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즉 왕이나 제후의 공민으로서 전투에 참가할 자격을 지니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공자 이전의 사의 일차적 의미는 문적인 의미보다는 무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관학교라 할 때의 사관의 총체적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연상이 쉬울 것이다. 더욱이 춘추와 전국시대를 통틀어, 특히 공자의 시대에는 문, 무의 구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우 확고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중앙청 고장이 따로 있고, 소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업무 인력이 곧 전투수행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공자시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전차전 중심이며, 보병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국시대로 내려가면서 전투의 양상은 보병전 중심이 되면서 대규호화되고 장기화되는 양상을 띤다. 공자 시대의 사의 기본기는 육예 중 사, 경 였다. 그것은 전차전의 특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전차수레에 타서 말을 모는 것을 어라 했고, 그 수레에 타서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사라 한 것이다.

자한 편에 달항망인이 공자를 비판하여 박학이무소성명 이라 한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이 구문에서 이를 전, 후로 하여 어떤 문, 무의 대립적 맥락이 감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박학은 공자가 추구한 문적인 세계지만, 그것은 사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무소성명(이름을 이룬 바가 없다)이란 곧 사의 본질인 무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공자의 대답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된다.

자문지, 위문제자왈: 오하집? 집어호? 집하호? 오집어의.

공자가 이러한 비판을 듣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뭘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활을 잡을까? 난 역시 말고삐를 잡아 이름을 내야지

여기서 공자는 자신도 전차몰이의 명수라고 하는 자신의 사로서의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육예의 커리큐럼이 예, 악, 사, 어, 서, 수 라고 하는 사실은 곧 공문의 사의 집단이 기본적으로 문, 무 통합적 인격체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악은 문적이다. 사어는 무적이다. 서수는 문무에 공통적인 기본 교양이다. 육예는 실제적으로 공문에서 그 구체적 커리큐럼이 완성된 것이다. 요새처럼 젊은이들이 군대에 나가기를 기피하는 그런 가치관 속에서는 육예가 이해되기 힘들다. 전차를 몬다든가(어) 활을 쏜다든가(사)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예낙의 인문적 교양과 완전히 동일한 교육적 가치였고, 그러한 교육을 받아 사가 되고, 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리고 군공에 의하여 작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군인과 학자가 요즈음처럼 직업적으로 분리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학의 문제의식 속으로 깊게 진입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실 이 사라는 개념은 도무지 명료한 계급적, 신분적 규정이 불가능하다. 계급(Class)이다, 신분(Status)이다 하는 말들이 모두 서양사학에서 명료히 규정하고 있는 말들이며 그러한 개념이 도무지 공자시대의 사의 정확한 외연이나 내연을 그려내기에 적합하질 않기 때문이다. 계급이란 부르죠아 혁명 이후에나 쓸 수 있는 개념이며, 신분이란 부르조아 혁명 이전의 중세기적 체제안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는 계급도 아니요, 신분도 아닌 것이다. 맹자 양혜왕 첫 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맹자와 양혜왕의 하필왈리의 대화속에서 왕이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대부가 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분명하게 사서인이 하나의 통합된 계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사와 서인 사이에 뚜렷한 신분적, 계급적 차별이 없는, 상하 이동(upward and downward mobility)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사는 분명히 서인 위에 가장 직접적으로 군림하는 지배계층임이 분명하다.

혹자는 사의 존재를 지역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는 씨족 중심적인 성읍 국가에 있어서 국성안에 사는 국인이며, 이는 밖의 야에 사는 야인 즉 서인들과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도 절대적인 준거를 찾을 수 없다. 사가 현실적으로 국인 중에서 공경대부를 제외한 말단의 관료층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문제는 사가 정확히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현실적 관료)가 될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의 범위는 어떻게 설정하냐는 것이다. 삼예중 의예라는 책 중에는 사관예 니, 사혼예 니, 사상견예니, 향음주예, 향사예, 사상예, 사우예, 증 사를 규정하는데 매우 까다로운 예식들이 질서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다. 의예의 정확한 성립시기와 맞물리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예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의 신분의 성립은 결코 공자 시대로 올라갈 수는 없다. 공문의 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까다로운 삶의 절차 속에서 규정되는 사의 신분을 획득한 그런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제반 논의와 관련하여 사의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계층의 공간적, 시간적 구조를 퍽 소상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룬 좋은 논문이 있다. 일독을 권한다. 이성구,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와 사회, 강좌중국사 1.. 지식산업사, 1998)

사뿐만 아니라 민(서인)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우선 논어에서 말하는 민은 절대적인 다수의 대중을 종국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등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폴리스의 시민(상민[the common people], 군인[soldiers], 수호인[the guardians])과도 같이 광범위한 노예계층으르 전제로 한 제한된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희랍의 민주제의 개념은 결코 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민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 우리 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맥락에 따라서는 경대부까지를 포함해서 군앞에서는 모두 무차별적으로 민의 개념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서 사민이나 사졸이니 하는 표현은 결국 장교와 졸병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는 특수한 기술을 보유한 지도적인 전사들이며, 민(서인)에서 차출된 저력은 대개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을 제공하는 천역의 사람들이었다.

세가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 청년시절의 일화, 즉 계씨의 문전에서 양호를 최초로 만나는 대화는 지극히 시사적이다.

계시향사, 비감향사야.

계씨는 사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히 너같은 놈을 대접하려는 것이 아니다. 끼웃거리지 말고 썩 꺼져라!

이것은 공자가 모상중에 상복을 입고 계씨집 잔치에 나타났을 때 당한 봉변이다. 공자는 아무말 없이 굴욕을 참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공자유시퇴.)

이 양호의 말에서 우리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양호는 공자보다 약간 연배의 사람이며, 즉흥적으로 시소을 밟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문사의 교양인이었다), 17세 전후의 공자는 도저히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수준의 천민이었다는 것이다. 계씨는 사를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같은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같은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 아니다. 라는 표현에 깔려있는 정조는, 곧 공자는 어렸을 때 사라는 신분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로서 조차 간주될 수 없었던 천민, 송의 후예며 성인(무당)의 후예인 공자는 과연 어떻게 사의 최고지위인 대사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대부분의 선진 전적에는 사구로만 되어 있다. 대사구란 표현은 세가의 창작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이 논어요, 논어 속에 담긴 공자의 삶의 향기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공자의 삶에서 비로소 최초의 사의 의미가 구현되어 나가는 것이며, 공자를 통하여 사의 의미가 새로 창출된 것이다. 공자는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이 미천한 소년이 사의 지도적 인물로 변화되어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공자의 호학이다. 공자의 학의 대상은 예였다. 공자가 사를 지향한 배움으로서의 예는 곧 죽음의 예가 아닌 삶의 예였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예였던 것이다. 공자가 예를 배웠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내가 멕시코 유카탄반도(Yucatan)의 치첸잇차(Chichen Itaza)등지에 널려있는 석판의 판화를 보고 9세기경의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의례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도 유사하다. 공자가 재현하려 했던 것은 주공의 주예였다. 그러나 사실 소년 공자는 전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로칼한 당골네의 상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고례의 담지자로서 공자의 자부감은 그의 호학의 행위로부터 얻어진 결과였다. 공자는 일찍 문자를 터득하였고 문헌을 연구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구전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끊임없이 물었다. 그는 물어서 배웠다(문이학). 그것이 공자의 사문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자부감은 당대의 지배계급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엇다. 그것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실상 그것은 공자의 허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허풍은 진실한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정치적 권력의 기회를 허용하는 찬스였다. 그는 고례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도덕적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꿈이 구 한사람의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행위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자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공자는 도덕을 정치화(politicization of 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zation of politics)하려 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공자의 집단의 성격은 애초에는 무와 무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무와 무의 성격속에서 새로운 문의 요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문의 요소야말로 향후의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사는 신분적, 계급적 고정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문의 획득자가 된 것이다. 공자가 새롭게 규정한 사문을 공부에 의하여 획득하는 자는 누그든지 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교단이야말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의 전문적 집단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사 : 무+문 = 문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사의 집단이야말로 구체적으로 제자백가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가들이 사실 공자의 교단을 모방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병집단인 묵가였다. 묵자 또한 송인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집단이야말로 제민지배체제를 위한 변법의 배후주체세력이었다는(구체적 사례로서 진묵을 논증) 이성규의 논의는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다.(중국고대제국성립사연구. [일조각. 1997] 중에서 제3편 제민지배체제형성의 담당집단을 보라.) 법가 사상가들은 사실 어느 기존집단으로부터 이단적인 개인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민적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사상적 기저는 실제로 묵가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공자집단에게 내재하는 보편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집단 속에 이미 영토국가적 제국 출현의 맹아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의 사의 집단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에게 의하여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여기에 해답을 주는 한마디가 나는 도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무리는 도였다.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결론에 독자들은 의아심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말이 아닌 장자의 말이다. 공자는 공자집단을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는데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고전의 언어를 우리의 현재 언어의 맥락속에서 왜곡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된다. 논어에서 말하는 광의 의미를 오늘날의 정신병자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논구하는 맥락과 동일한 것이다.

도의 의미의 본질에 관하여 역시 이성규의 논의가매우 시사적이다.(동상, 제 1편 제 1장 제 3절, 춘추시대의 도와 신취낙)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는 성읍 국가의 기반이 흔들려가는 시대에 국과 국 사이에, 즉 봉강의 사이에 어느 국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공백지대에서 새로운 취락을 형성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읍의 지배체제의 가혹한 수탈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도적질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확고한 존재 이유를 갖는 집단이었다. 성읍 국가의 붕괴과정에서 이러한 군도의 출렿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도는 균분을 지향하며, 본질적으로 유객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기존의 어떤 체제적 가치와도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들일 수 있다. 제자백가의 모태가 바로 이 도에 있었다고 해도 망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니, 협이니, 유니 하는 말들이 공자시대에는 모두 상통하는 말들이었다. 논어에 계강자가 도를 걱정하여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안연 18), 이를 둘러싼 문답의 배경에는 공자 자신이 도로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체험과 동정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는 곡부시내에 영어학원이나 태권도 도장을 차렸던 사람이 아니다. 공자라는 천민 무당의 아들 밑에 와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사로의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개비에서 비개비로의 전환의 길은 참으로 요원한 것이다.
  
공자라는 성인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 곡부에 사는 안씨 자제들 같은 읍내 똘만이들도 있었겠지만, 뿌리 없이 부랑하는 갈 곳 없는 유사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을 희구하는 성실한 도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그 구심점에 공자라는 거인이 있었다. 짱구 대가리에, 거구의 몸체, 뛰어난 음악의 장인, 고례의 담지자, 잡기에 능한 달인, 엄청난 정열의 호학지사, 사, 어의 강력한 무장, 이러한 퍼스낼리티의 구현체로서의 구가 곡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유협들의 세계에 널리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를 가장 유니크하고 위대하게 만든 것을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첫째가 그가 섬세한 음악의 명인이라는 사실이고, 그 둘째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자의 세계의 달통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그를 찾아오는 도들에게 음악을 통해 새로운 감수성(esthetic sensitivity)을, 문자를 통해 새로운 역사성(historicity)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공자교단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공자의 평생의 반려가 된 자로라는 인물과의 만남이었다. 자로는 도였다. 문자 그대로의 도였다. 공자는 자로를 만나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였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공자는 자로의 시체가 토막이 나서 소금에 절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공자는 친구를 대하는 예로써 가운데 뜨락(중정)에 내려와서 어쩔 줄 모르며 서성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자는 소리쳤다: 우리집안에 있는 짠지독(절임독)을 몽땅 엎어버려라!(수명부해). 그리고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공자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태산기퇴호
양목기회호
철인기위호

태산이 드디어 무너지도다!
대들보가 마친내 쓰러지도다!
아~ 철인이 소리없이 사라지누나!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상면하는 장면과, 자로의 최후를 기록한 두 장면은 공자의 일생의 드라마를 가장 생생한 콘트라스트 속에서 전달해 주는 감동의 씬들이다. 첫 장면은 공자가어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은 사기의 중니제자열전과 위강숙세가에 자세하다.

자로와 공자가 첫대면하는 장면을 중니제자열전은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스켓치하고 있다.

자로성비, 호용력, 지항직, 관웅계, 패가돈, 릉폭공자.
공자설예초유자로, 자로후유복위질, 인문인청위제자.

자로는 본성이 야인 기질이 있어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심지가 강직하고 직설적으로 뒤받기를 좋아했다. 숫탉의 꼬리를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리곤 공자를 업신여기며 공자를 때릴려고까지 하였다. 공자는 자로를 예로써 대하며 살살 달래어 인도하였다. 후에 자로는 유복을 입고, 폐백을 드려 죽음의 충절을 맹세하고,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자로는 변땅의 사람이었다. 변땅은 노와 위 사이에 있는 새로운 개간지였다. 집해에 자로는 변의 야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야인이란 곧 사의 신분이 아닌, 국밖의 야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제에 예속됨이 없는 방외인이었고, 도였고 깡패였다. 그의 외관의 형용이 무척 재미있다. 머리에 숫탉의 깃털을 꼽았고, 허리엔 산돼지 가죽주머니를 찼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had a leather girdle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가 1:6)

세례요한의 모습이나 변땅의 자로의 모습은 같은 야인으로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만나 물의 세례를 주려했지만 자로는 공자를 만나자마자 주어 팰려고 하였다. 자로는 무지막지한 깡패였다. 이러한 야인 자로를 공자는 같은 무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예를 설하였다. 그리고 인격으로 감화시켰다. 강직한 자로는 공자의 인격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제자기 되기를 청했다. 자로는 평생, 공자곁을 지켰다. 한 번 굳게 맺은 맹서를 자로는 평생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강직한 사람이었다. 사실 공자는 자로 덕분에 그의 정치적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가 대사구가 되어 삼환의 읍성을 무너뜨리고 무장 해제를 시키는 혁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자로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각하자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첫망명지로 삼은 것도 자로의 처형 안탁추가 위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로는 위나라에 대소가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평생을 자로의 보호 속에 살았다. 공자는 고백하였다.

자오득유, 악언불문어이.

내가 자로를 얻게 된 후로부터는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가어는 두 사람의 만남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시작하고 있다.

자로초견공자. 자왈: 여하호약? 대왈: 호장검. 공자왈: 오비차지문야, 종위이자지소능, 이가지이학문, 기가급호? 자로왈: 학기익야재? 공자왈: 부인군이 무간신즉실정, 사이무교유즉실청; 이광마불석책,, 조궁불반경; 목수승즉직, 인수간즉성. 수학중문, 숙불순재? 훼인악사, 필근간형. 군자불가불학. 자로왈: 남산유죽 불유자식; 참이용지, 달간서혁. 이차언지, 하학지유? 공자왈: 괄이우지, 촉이려지, 기입지불역심호? 자로재배왈: 경수교.

자로가 처음 공자를 만났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바에다가 학문을 얹히기만 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따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될 것이 있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되어서 간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인을 어지럽히고 사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츠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남산에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휘어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짤라 화살로 쓰면 가죽과녁을 뚫어버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뭘 또 배울 것이 있겠는가? 공자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 대나무 밑둥아리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그 앞머리는 쇠촉을 달아 날카롭게 연마한다면, 그 가죽을 뚫는 것이 더 깊지 않겠는가? 이에 자로가 무릎 꿇고 두 번 절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칼(장검)에 배움(학문)을! 이것이 곧 공자교단의 출발이었다. 자로는 공자보다 아홉살 연하였고 제자 중에서는 가장 연상의 한 사람이었다. 사실 자로는 공자의 막역한 친구였다. 자로의 비장한 최후는 공자 72, 3 세 고령 때의 사건이었다. 14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노로 돌아온 후 자로는 공자 곁을 떠나 위나라에 가서 당시의 재상이자 대부였던 공회의 읍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위나라에는 본시 불민한 임금 영공이 있었다. 영공에게는 총애하는 부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본시 송나라의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녀가 위나라에 시집온 것은 이미 송의 공자인 조(송조)라는 색골의 미남자와 염문을 뿌린 후였다. 남자는 보기 드문 음녀였다. 나중에 희화되고 각색된 이야기이겠지만 공자와도 살랑거리는 침실의 옥구슬 바알에 가린 염문을 뿌린 음녀였다. 이 남자가 영공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괴외였다. 괴외가 과연 영공의 자식인지, 송조의 자식인지도 알 바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소문이었다. 그런데 영공 39년, 괴외는 음녀인 엄마 남자의 횡포를 보다 못해 엄마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전에 발각되어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뒤에 진나라로 갔다. 그 후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도망친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출공이다. 출공이 즉위한 후 12년이 되도록 괴외는 귀국하지 못했다. 출공은 막강한 신하들을 동원하여 괴외의 입국을 막았다. 그러나 괴외는 집요하게 복위를 꾀하였다. 기나긴 부자간의 싸움이었다.

괴외는 마침내 출공 막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잡았다. 괴외의 누나, 그러니까 위령공의 큰 딸, 백희는 위대부 공어문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 공문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자로가 섬기고 있는 대부, 공회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문자(공회의 아버지)가 죽고 나자 공회의 엄마 백희는 그 공씨 집에 있었던 젊고 잘생긴 노비(수) 혼양부와 정을 통하였다. 혼양부는 공회의 엄마 백희와 괴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괴외의 복귀를 도왔던 것이다. 괴외는 혼양부에게 성사만 시켜주면 모든 죄를 감면해 주고 대부의 높은 지위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누이 즉 공회의 엄마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부추켰다.

드디어 백희는 괴외를 공회의 집으로 끌어들여 공회를 협박한여 외삼촌, 괴외를 도와 출공을 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출공은 드디어 노나라로 도망을 갔고 출공의 뒤를 이어 괴외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장공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스토리들에는 공회와 자로의 관계가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질 않다. 공회는 자기 엄마가 종놈인 혼량부와 밀통하여 외삼촌 괴외를 즉위시키려는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리 없다. 그러나 공회는 엄마의 엄명 때문에 할 수 없이 반란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공회가 괴외에 의하여 높은 누각위에 붙잡혀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우직한 자로는 공회의 집으로 뛰어갔다. 공시집에 들어가려는 참에 같은 동문의 제자로서 공회의 가신을 지내고 있었던 자고(고지의 자)를 만났다. 자고는 공씨집을 나와 피신하려던 참이었다.

자고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자로에게 충고하였다. 공연히 개입하여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그러나 자로는 개의치 않고 공씨 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집의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공씨 문안으로 단신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자로는 괴외가 공회를 붙잡고 있는 누각 밑에 떡 버티고 서서 소리를 지른다. 공회를 풀러 놓아다! 괴외가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러자 자로는 그 누각에 불을 지르려 한다. 그러나 괴외는 날샌 검객 두명, 석걸과 호염(우염)을 파견한다. 자로는 이미 늙었다. 젊은 검객들의 날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날쌘 장검이 얼굴을 스치며 갓끈이 끊어지고 갓이 땅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로는 이미 자기의 최후를 감지한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가운데 자로는 유유히 손을 들어 외친다.

군자사, 관불면!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자로는 정좌하고 땅에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맨다. 순간 두 검객의 시퍼런 칼날들이 엄숙하게 정좌한 자로의 등을 갈랐을 것이다. 자로는 태연하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스러져 갔다. 서늘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에는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이와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구 형님!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한치도 어김없이 살았소. 이제 나는 당당한 군자가 되었소. 군자로서 갓끈을 매는 순간에 형님 곁으로 갈 수 있어 나는 행복하오.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사로서 살고 사로서 작별하오...... 굿바이.

자로의 인생의 출발은 숫탉 꽁지깃털과 산돼지 불알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마감은 죽음 앞에 태연히 정좌하고 앉아 갓끈을 매는 모습이다. 숫탉꽁지털에서 갓끈으로의 트란스포메이션, 바로 이것이 공자의 삶의 본질이며, 자로의 삶의 도약이며, 향후 모든 사의 의미를 규정하는 인류사의 교양(studia humanitatis)의 전범을 이루는 것이다. 자로의 삶의 도약이 곧 사를 규정하였고 공자의 교단의 성격을 규정하였고, 제자백가의 인문학을 규정하였고, 제민의 통일 제국에로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무와 무에서 사문을 창출해낸 공자의 위대성이다. 장자의 도척편에는 도척이 공자를 힐난하면서 자로를 꾀어낸 죄를 크게 꾸짖는 장면이 있다.

천하하고불위자도구, 이내위아위도척. 자이감사설자 로이사종지. 사자로거기위관, 해기장검, 이수교어자. 천하개왈, 공구능지폭초비. 기졸지야, 자로욕살위군, 이사불성, 신저어위동문지상. 시자교지불지야.

천하사람들이 왜 널 도둑놈 짱구(도구)라 아니 부르고, 하필 날 도둑놈 척(도척)이라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설복시켜 너를 따르게 했다. 자로로 하여금 높은 무사의 관을 벗게 하고, 긴 칼을 풀게 하고, 너의 가르침만을 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공구는 폭력을 그치게 하고 비리를 금지시키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뭐냐? 자로는 위군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몸은 동간나 소금에 절여져 위나라 동문 꼭대기에 걸리고 말았다. 이것은 곧 너의 가르침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자에 대한 힐난의 반면에 깔려있는 역설적인 공자의 힘과, 당대에 무에서 문으로 화한 자로의 모습, 공자의 도를 지키기 위해 억울하고 또 평화롭게 죽어간 자로에 대한 깊은 애정의 통념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의 문제에 관하여 재미있는 외물편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유와 직접 연결되는지를 한 번 살펴보자!

유이시례발총. 대유려전왈: 동방작의, 사지하약. 소유왈: 미해군유, 구중유주. 시고유지왈: 청청지맥, 생어륵피. 생불시시, 사하함주위? 접기발, 엽기훼. 유이금추공기이, 서별기협, 무상구중구.

유란 본시 시경을 읊으며 예를 운운하며 도굴을 일삼는 놈들이다. 오야붕인 대유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간 꼬붕 소유들에 말을 전한다: 이놀들아!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 무덥속의 소유들은 말한다: 아이쿠 아직 시체 속 바지 저고리를 못벗겼다우. 아! 아가리 속엔 찬란한 구슬이 보이는구만. 왜 시경에 이런 노래 있지 않수: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무성쿠나. 살아 베풀지 못한 이들이 어찌하여 죽어 구슬을 머금고 있는고! 그리곤 시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턱밑을 세게 누르자, 무덤 속 유들이 쇠망치로 톡톡 아랫턱을 친다. 서서히 아가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입속의 구슬에는 흠집 하나 내지 않고 솜씨좋게 훔쳐 달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장자의 기술을 단순히 꾸며낸 창작 설화로 볼 수가 없다. 엄연한 당시의 유들의 실상을 전하는 역사적 장면을 희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어려서 종사하고 목격한 세계는 이러한 세계였다. 즉 낮에는 상례를 주관하는 사제자로서의 좌의 집단이지만, 그들이야말로 묘혈의 내부구조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밤이면 음험한 도굴꾼으로 변하여 왕후장상들의 보물은 훔쳐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의 세계요, 도의 세계요, 협의 세계요, 객의 세계였다. 전통적으로 유란 주유(난장이)를 의미했으며 소지소언의 편협한 인간들이라는 매우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당계열의 사람들에는 실제로 꼽추가 많았다. 꼽추였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사색에 깊게 빠지거나 천문이나 수리에 밝거나 보통 사람들이 못가지는 통찰력을 소유하여 결국 영적인 무당의 길로 들어갔고, 이들이 말하는 시례가 기껏해야 도굴을 위한 양념격이라고 하는 유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장자의 통렬한 비판은 비단 유가의 도덕주의에 대한 도가의 준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공자라는 인간의 자기 부정과 자기도약의 핵심적 시각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소인과 군자의 준엄한 분별, 그리고 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라고 하는(성야 11) 간곡한 당부는, 어떤의미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의 잔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떤 경우에도 서인에게 소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소인은 곧 유에 대한 비판이요, 사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적(좌) 질곡에 빠져 보물이나 탐내고 있는 자들. 이러한 집단으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문화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연보돈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하고, 목사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의 세계였던 것이다. 공자의 사문에 대한 갈망은 바로 이러한 은대적 종교주의로부터 주대적 인문주의로 문명의 축을 바꾸려는 노력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화=탈주술의 도식을 외치기 양천년 전에 이미 공자는 그러한 근대적 문명의 도식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사기 골계열전에 서문표가 업의 령이 되어 하백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속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그 신화와 관련된 모든 무당들과 동네의 장로들을 그들의 논리에 의하여 물속에 수장시키는 장쾌한 모습,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각성시켜 관개시설을 하게하는 그런 모습이, 모두 공자의 사상적 기저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씨족 공동체의 선조신앙의 신화적 편협성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더 이상 현실적 삶의 질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부조리의 인식을 공자는 과감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축에서 일상적 삶의 질서의 축으로의 전환이었다. 공자에게서 윤리란 곧 민의 삶의 재발견이었다.

공자가 계씨의 팔일무를 놓고 통탄하는 모습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입장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했다. 천자의 예일지라도, 일개 소국의 대부가 사정에서 춤추어 무방하다면, 그런 예를 충분히 해할 수 있는 패권의 시대로 이미 진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계씨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가는 진보세력이고, 그것을 한하는 공자야말로 수구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비판이 비공비림 시대의 일반적 논리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오늘의 관념을 과거에 덮어씌우는 억지 춘향의 놀리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노국의 현실에서 삼환의 세력은 당시 역사의 진행을 봉쇄하는 가장 보수적인 봉건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읍국가적 사유방식으로 인민 대중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봉건제적 구습의 타락형태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인민에 대한 보편주의적 지향점이 전무했고, 팔일무를 춘다고 하는 것도 타락한 인간들의 쾌락적 행태의 과시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자는 팔일무가 천자에게만 전유되어야 한다고 하는 좁은 명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 공자는 아사노(천야유일)씨의 통찰대로, 그 자신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동키호테식의 꿈을 꾸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관심은 그러한 명분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타락한 삼환 세력을 어떻게 근원적으로 분쇄시키고 무기력화 시키느냐에 있었다. 공자는 봉건적 구질서의 옹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 위계 질서를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횡적 민의 질서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정치 제도적 사유의 틀 속에는 오늘날의 의회민주제도나, 선거 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군권의 강화를 통한 보편적 민의 질서를 구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민의 질서의 담당자는 개방적 외연을 갖는 사일 수 밖에 없었다. 공자 집단의 정치적 성격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가 실제로 소정묘를 죽였다고 한다면 도지이정 하고 제지이형하면 민면이부치라고 하는 그의 입장과는 다른 매우 법가적 엄형주의적 행위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공자에게는 이러한 법가적, 변법적 보편성과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한 무단적 측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삼가 무장해제나 소정묘 주살이나 하는 일련의 조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단순히 맹자류의 도덕주의적 왕도주의자로 해석하기 어려운 복합적 측면을 내포한다. 공문 그룹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춘추시대의 폐습에 종언을 고하고 제국의 제민지배체제를 향한 새로운 질서의 태동에 근원적인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매우 유동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정치적 입장만으로는 공자를 해석할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제도의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성의 회복에 그 궁극적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곧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인간 해방이요, 그것이 곧 인의 길이었다. 삼년상을 둘러싼 재아와의 논쟁에서도(양화 21) 공리주의적인 재아의 합리론에 끝까지 양보할 수 없었던 공자의 고집이 엿보인다. 공자는 매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러한 진보적 입장을 묶을 수 있는 인간학의 상위질서가 항상 그에게는 예락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이러한 공자의 고집이 우리 동양사회의 깊이와 보수성 그리고 진보성의 다면적 심층을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공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 박탁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편견의 선리해(Pre-Understanding)를 밝혀 놓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편견을 제공하지 않는 첩경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논의는 문자 그대로 한우충동이다. 공자의 거노(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길을 밟게 됨)에 대한 의견도 한없이 분분하다. 나는 이러한 사견들을 여기 조정하여 다시 나의 사견을 밝힐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거노를 계기로 이루어진 14년간(이것도 정확한 루트와 연수는 학자들에 따라 분분하다)의 유랑의 길이 그에게 어떤 중요한 삶의 각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14년간의 망명의 길은 모택동의 장정에 비유할 수도 있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 고난의 길을 처음부터 끈까지 동반한 사람은 단지 자로와 안회, 두사람이었다. 자공과 염유도 동반했지만 그들은 들락거렸다. 14년간의 망명의 삶은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도전이었고, 궁극적인 비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인식을 크게 전환시켰다.

예수에게 있어서 40일간의 광야의 고난과 굶주림은 돌을 모두 떡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모두 떡덩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돌을 떡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현실적 욕구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첩경이었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아에 대한 예수의 독백은 모든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명쾌한 해답이자, 그것은 긴박한 현실주의를 거부하는 명료한 자기신념의 관철이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14년간의 망명의 최종적 의미는 공자에게 있어서 삶의 좌절이었다. 공자는 결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 줄 수 있는 현세적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논어의 첫머리에 인불지이불온이라는 자부감의 반면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회한과 통탄이 숨어있다. 14년간의 유랑을 점철하는 기대와 좌절의 숨가쁜 연속은 공자에게 하나의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자기 이상의 긴박한 현실적 실현의 꿈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타협이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상의 환영의 거품, 그 자체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의 포기가 아닌 이상의 비약이었다. 그 비상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죽음의 체험이었다ㅏ. 광에서의 구류, 송에서의 박해, 진, 채에서의 두절과 굶주림......... 이모두가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공자의 삶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죽음의 세계를 탈출하여 삶의 세계로 진입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기존재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난 후부터 공자는 철저히 삶의 의미를 물었다. 자기가 오늘 여기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그 현실적 의미를 확실히 알고 싶어했다. 그 현실적 의미의 전부를 그는 한때 정치적 실현(political realization)에 두었다. 그러나 14년간의 유랑을 통해 그는 다시 죽음의 세계를 체험한다. 그가 다시 체험한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송인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소인유의 세계가 아니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을 죽음을 포괄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새로운 자각이었다. 삶과 죽음이 새로운 하나의 지평으로 융합되는 사문의 세계였다. 그것은 그윽히 넓고 깊은 무한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정치적 실현이 아닌 인간정신의 내면적 고양의 새로운 계기들을 발견한 것이다.

14년간의 유랑이란 결국 계씨에 대한 반항에서 계씨에 대한 굴복으로 끝난 매우 평범한 정치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랑의 세월을 통해 공자는 진정한 성인으로서 종심소욕불유구의 자유인으로 비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다시 노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꿈을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만인에게 국부 이상의 외경의 대상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것처럼 14년 유랑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의 틀의 대부분은 망명생활이 끝난후, 대강 68세부터 73세까지 4, 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그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과 명, 인간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감관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관용이 깃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은 논어 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공자는 죽을 때, 자신이 은나라 후예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죽었다.

관을 안치할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안치한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는 양쪽 기둥에 않아 사람들이 분향을 하고 제삿밥을 올리는 것을 받았다. 나는 역시 은나라 사람이다.(구야은인야)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단궁 상)

귀노 후 얼마 안 있어 아들 백어가 죽었다. 그리고 또 가장 총애하던 수제자 안회가 죽었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 자로가 죽었다. 공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현묘한 세계로 떠나보냈다. 안회는 초기제자 안로의 아들이었다. 안로는 자로보다도 나이가 세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자로는 바로 곡부성내 공자 모친이 살았던 동네의 사람이었다. 공자의 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안회는 어린 시절부터 공자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안회는 공자의 그늘 속에서 태어났고 공자의 훈도 속에서 성장했고, 어린 나이에 공자 슬하에 입문하여 삼천 제자 중에서 학덕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는 매우 무능하고 지더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회는 빈천한 환경속에서 컸다. 안회는 체직적으로빈천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안회는 평생을 빈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성장기가 빈천했고, 문하생이 된 후로는 고난의 장정을 줄곧 갚이 했고, 그리고는 곧 죽었기 때문이다. 안회가 요절한 것도(공자의 관념속에서 요절한 것이지 실제로 그다지 요절도 아니다), 14년의 유랑기간 동안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로가 한 사발을 먹을 때, 안회는 주먹밥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진, 채에 갇혀 모두 굶주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진재지액). 매우 구슬픈 정경이 하나 논형 지실 편에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공자를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먼지가 한웅큼 폭 떨어졌다. 다시 지을 수도 없는 일, 안회는 안절부절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지은 귀한 밥을 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회는 생각타 못해 먼지떨어진 부분의 밥을 더서 자신이 먹어버렸다. 이때 공자는 멀리서 바라보고는 내심 안회가 배가 고파서 남몰래 밥은 먼저 훔쳐먹는 것으로 생각했다.(공자망견이위절식) 안연이 밥을 다 지어 공자에게 정성스럽게 들고 왔을 때, 공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먹는 것은 청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공자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자기가 먼지떨어진 부분을 먹어치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자는 오해임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 정경인가? 공자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사랑하는 제자가 밥을 훔쳐먹는다고 고깔스럽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안회는 영양실조에, 요즈음 말로는 암 같은 것으로 죽었을 것이다. 자로는 공자말을 뒤받기가 일쑤였다. 안회는 단 한번도 공자의 말씀대로 실천 안 한 바가 없고, 공자에게 단 한 번도 거역의 언행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공자도 안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러니 안회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암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를 편애했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총애의 도수는 지나치다. 그리고 안회가 죽은 후 공자가 몇 년을 못 살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논어 전편을 통해 죽은 안회에 대한 공자의 회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논어가 공자의 지극한 말년의 언행의 모음집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편애에는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니산의 꽃동산에서 공자를 키웠던 엄마 안씨녀의 진상이 겹쳐있을지도 모른다. 공자 17세때 상여가마를 어께에 매어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안회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고요한 인품 속에 잔잔히 비쳐있었을 것이다. 안회는 두말할 나위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안회의 죽음은 곧 공자의 인의 사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은 안회와 더불어 죽고, 공자라는 인간은 자로와 더불어 죽은것이다. 결국 공자는 현세에 세속적으로 남긴 바가 없다. 공자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다. 향후의 모든 출발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이 곧 공자의 축복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논어를 보다 잡하고 보다 생생하고 보다 여백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는 말한다. 공자의 삶은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나는 논어를 선이라고 생각한다. 유생들은 또 이게 뭔 망발이냐고 다꾸칠지 모르겠으나 선이란 본시 언어가 단절되는 곳에서 피어나는 모든 깨달음의 통칭이다. 인과적 고리가 단절되는 절대적 경지에로의 도약인 것이다. 대승불학이 당초로부터 중국언어의 외투를 빌렸기 때문에 격의불교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격의의 종국이 선이었다고 한다면, 그 선의 원형, 그 조형은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 문명에 내재하는 것이요, 중국언어에 심재하는 것이요, 중국마음(Chinese Mind)에 고유한 것이다. 그 중국마음의 조형이 곧 논어라는 서물이다. 논어는 맹자와 같이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논어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경귀일 뿐이다. 그것은 계발의 단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노년의 공자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현실에 대한 긴박한 기대감이 없이, 긴박한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환상이 없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타인의 계발(Enlightenment)을 위하여 툭 툭 던졌다. 논어는 논쟁이 아니요, 계발이다. 그것은 무한한 논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논어는 선사들의 말장난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더 일상적으로 인간을 대각으로 인도하는 선어인 것이다. 나는 말한다. 논어는 선이다. 정자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금인불회독서. 여독논어, 미독시, 시차등인. 독료후, 우지시차등인, 편시불증독.

요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을 모른다. 논어을 읽으매, 읽기 전에 이런 놈이었는데, 읽은 후에는 이런 놈일 뿐이라면, 그 놈은 전혀 논어를 읽은 사람이 아니다.

논어는 선이다. 논어는 그냥 읽으면 아니된다. 사도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항상 마음이 새로와지는(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로마서 12:2) 깨달음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논어는 트란스포메이션인 것이다. 읽기 전에도 이놈이고 읽은 후에도 이놈이라면 전혀 트란스포메이션이 없는 것이다. 논어는 선적인 대각인 것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정자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독논어, 유독료전연무사자; 유독료후, 기중득일양구희자; 유독료후, 지호지자; 유독료후, 직유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자.

논어를 읽으매,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수지무지족지도지(출전은 예기 악기) 이것은 선의 엑스타시요, 깨달음의 환희다. 이제 우리는 지적 희열에로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보자!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동동 구르자!.